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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의 유일한 바른미래당 소속 국회의원이자, 역대 세 번째로 당적이 많은 국회의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1952년 전라남도 고흥군에서 태어났다. 광주제일고등학교, 성균관대학교 공과대학 전자공학과, 고려대학교 MBA를 졸업하였다. 이후 개인사업을 하였다.


국민의당에서는 본래 중재파였으나, 김동철, 박주선과 함께 국민의당+바른정당 합당에 찬성하였다. 이로써 전라남도 내에서는 유일한 바른미래당 소속 국회의원이 될 것으로 보인다.




2018/07/13 - [Hot issue/정치] - [문희상 프로필] 제20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2018/07/13 - [Hot issue/정치] - 국회의장에 대해 알아보자 (임기, 선출 방법, 서열...등)


7번의 탈당, 8번의 당선의 전설로 알려져있기도 하다.만렙철새? 여기에 덤으로 도지사 출마를 위한 국회의원 사퇴 번복, 최고위원 사퇴 번복이 있다.


1991년 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전라남도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선 직후 신민주연합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민주당 입당 후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당내 경선 패배 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전라남도의회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 후 새정치국민회의가 창당되자 입당하였다.


1996년 여천군수 재보궐선거에서 당내 경선 패배 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리고 다시 복당하였다.


삼려 통합 후에 치러진 1998년의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여수시장 재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 때도 경선에서 패배하고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러나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여수시장 선거에 출마하였다가 낙선하였다. 그 해 10월 정몽준 당시 16대 대선 후보의 국민통합21을 입당했다가 탈당하였고, 1년 뒤인 2003년 말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전라남도 여수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만 해도 이미 탈당을 4번한 전력으로 시민단체의 낙선운동의 표적이 되었다. 이후 열린우리당 전라남도당 위원장, 원내부대표 등을 역임하였다.


2007년 2월, 김한길계에 속하여 열린우리당을 탈당, 중도개혁통합신당 창당과 중도통합민주당 합당에 함께했다. 하지만 중도통합민주당이 도로 깨지면서 대통합민주신당에 합류하게 되는데, 사실 이 경우는 중도개혁통합신당 계의 분당으로 봐야하긴 하지만 6번째 탈당의 횟수를 추가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1년 말 민주당이 민주통합당으로 당명을 변경하면서 민주통합당 정책위원회 의장에 임명되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에 대한민국 국회 국토해양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가 2013년 박근혜 정부의 정부조직법 개정으로 2014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새정치민주연합 사무총장이자 7.30 재보선 당시 공천관리위원장을 맡았지만 7.30 재보선에서 최악의 공천 실패로 인해 선거에서 참패하자 모든 직책에서 물러났다.


2014년도에 주승용과 이낙연측 관계자들이 당비 대납의혹을 받아 기소된 적이 있다.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2015년 2.8 전당대회 때 최고위원 선거에 출마해 1위로 당선되었으나 2015년 12월 8일 최고위원직을 사퇴하였다.


그리고 2016년 1월 13일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고 국민의당에 입당하였다. 9년만의 7번째 탈당! 


2016년 1월 22일 국민의당 초대 원내대표로 추대되었다.


이렇게 탈당과 복당을 자주 반복함에도 불구하고 지역구에서 지지율이 높은 이유는, 지역 현안에 해박하며 지역구 관리를 잘하기 때문이다. 여천군수 시절에 행정을 잘했던 것은 지금도 회자될 정도. 다만 지역 정치를 잘하는 것과는 별개로 중앙정치 의정활동은 어설픈 편이다. 중앙일보 등에 의해 부동산 투기 의혹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본인이 개설 예산을 끌어온 도로 주변 땅을 가지고 있었다는 설명인데, 당시 국회 국토교통위원장을 맡고 있었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2016년 2월 2일 국민의당 최고위원으로 지명되었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여수 을에서 무난하게 당선되어 4선 의원이 되었다.


2016년 12월 29일 원내대표 경선에서 김성식을 꺾고 당선되었다. 러닝메이트인 조배숙도 정책위원회 의장으로 당선되었다.


2018년 국민의당·바른정당 합당 과정에서는 탈당을 또 하기는 좀 그랬는지 민주평화당 창당에 합류한 다른 전남지역 의원들과 달리 합당에 찬성하여 바른미래당에 잔류하였다. 이에 바른미래당에서 2018년 지선에서 전남지사 후보군으로 거론되고 있었으나 2월 27일에 불출마 선언을 했다. 바른미래당 몫 국회부의장이 되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주승용은 세월호 참사 당시에 세월호 특별법 제정과 관련해 가족들이 정부와 싸우고 있을 당시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유가족들은 가족들은 진상규명과 요구가 들어간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새누리당은 배보상을 앞세운 특별법을 주장했다.


이에 야당은 장외투쟁을 선포하고 가족들과 함께 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문제는 이때 15명의 야당의원들이 장외투쟁을 반대하는 연서명을 하여, 새누리당이 이 야당의원들을 반겼는데, 이들 중에 주승용이 있었다. 당시에 주승용 의원은 장외투쟁을 하는 지도부를 강경하게 비난하며 세월호특별법 협의를 하라고 주장했다.


악마 발언,

주승용은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직 사퇴를 선언하면서 “(야당의)악마[를 막지 못한 것 같다”고 발언해 온라인상에서 비난이 쏟아졌는데. 아에 일부 네티즌들은 “누워서 침뱉기”라는 등 부적절한 발언이라고 꼬집었다.


정권교체 못해도 발언 논란,

2017년 1월 5일 CBS 라디오 인터뷰에서 "문 전 대표는 지금 야당이 분열된 원인 제공자이고 분당의 책임자"라면서 "아직도 민주당에 패권주의가 만연돼 있다면 정권교체보다도 그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권교체를 못하는 한이 있어도 친문과는 손을 못 잡는다(는 말이냐)’는 질문에 “우리가 정권교체를 못해도 (그렇다)”라고 답했다. 


한편 그러면서도 “가칭 개혁보수신당 이름이 ‘개혁보수’이기 때문에 정체성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에 논란이 커지자 페이스북에 “발언이 잘못 전달됐다. 패권주의 타파도 중요하지만 정권교체가 더 중요하다”고 해명 글을 올리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 정청래 의원은 이 발언은 호남의 역린을 건드린 발언이라며 비판을 했다.


2018/07/13 - [Hot issue/정치] - [문희상 프로필] 제20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2018/07/13 - [Hot issue/정치] - 국회의장에 대해 알아보자 (임기, 선출 방법, 서열...등)



[출처 : https://namu.wiki/w/%EC%A3%BC%EC%8A%B9%EC%9A%A9]



제20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동교동계 직계와 친노계에 모두 해당하는 인물. 친노계의 큰형님.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의정부시 행복로 근처에 위치한 숭문당의 창업주. 호는 정흥(正興)인데 사실은 개명 전 이름은 문정흥이었다. 야구인 김영조의 사위이며, 미스코리아 출신 배우 이하늬의 외삼촌이다.




대한민국의 제14대, 16대~20대 국회의원이며 경기도 의정부시에서 깊게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참여정부 시절에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2번이나 민주당의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거물급 인사다.현재 20대 국회의원 기준 더불어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중 최고령 국회의원이다.


1945년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의정부 지역의 대지주였다. 말하자면 금수저. 경복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학생운동에 투신, 여러 번 감옥을 들락날락거렸다. 이 때문에 행정고시를 준비하기도 했으나, 그만두고 1980년대 반독재 투쟁을 벌이던 김대중 휘하에서 민주화운동을 벌인다. 의정부시가 원래 실향민이 많아서 레드 콤플렉스가 심한 지역인데다가, 아버지 역시 열혈 박정희 지지자로서 매우 보수적인 인사였기 때문에, 당시 "빨갱이"로 매도되던 김대중 밑에서 일하는 아들의 행동에 대해 대노했다고 한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이 총재로 있는 평화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의정부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주공화당 김문원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한국당 홍문종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8년 김대중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 등을 역임하였다. 김대중이 당선된 날 아버지 묘소에 가서 "아버지! 제가 간 길이 옳았죠!" 라고 오열했다고.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2003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되자 국회의원직을 사임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경기도 의정부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06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정보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 5선 의원이 되었다. 이어 열린 대선에서 민주당이 패하고 지도부가 사퇴하자 첫번째 비상대책위원장이 되었다.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가 사퇴하자 두번째로 비상대책위원장이 되었다. 정세균 상임고문, 원혜영 의원과 더불어 당내 여러 인사들과 친화력이 높아 당내 대표적인 관리형 정치인으로 꼽힌다. 공교롭게도 셋 다 모두 범 친노계 인사로 꼽힌다.


2014년 말 땅콩회항 사건이 터진 가운데 2004년, 처남의 대한항공 취업 청탁을 했다는 의혹이 불거져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에 대해 문희상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은 대국민 사과를 하였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컷오프됐는데 "도대체 왜 짤린 거지?"가 대체적인 전문가의 의견이다. 취업 청탁 의혹이 있지만 이미 12년이나 지난(...) 문제일 뿐더러, 문희상의 지역구에 딱히 대체할 인물도 없어서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조차도 분개했다고 한다. 결국 문희상은 원래 지역구에 '전략공천'되었다. 결국 6선에 성공했다.


야권의 승리와 더불어서 2016년 4월 현재 20대 국회의 유력한 국회의장 후보로 물망에 오르고 있다. 계파색이 옅고 이제 나이도 많아서 이석현, 정세균 의원보다 정계은퇴에 대한 부담도 크기 때문. 다만 2004년 취업청탁에 대한 구설수가 있다는 것이 약점이다. 그러나, 의장직을 건 당내 경선에서 정세균에게 패배했다.


2017년 문재인 정부에서 일본 특사가 되었다. 사실 일본통까지는 아니여도 일본과 나름 연이 있는 인물이다.



5월 17일날 열린 일본과의 외교회담에서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에 대해 한일 양국, 한미일 삼국의 긴밀한 연계가 중요함을 강조하였고 빠른 시일 내에 정상회담을 하는 것을 제안하였다. 또한 위안부 합의가 국민 대다수가 정서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입장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특사의 성격을 지닌 만큼 재협상 등의 요구는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마찬가지로 논란이 되었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의 경우 회담에서 논의 되지는 않았지만, 추후 유지 여부는 새 정부가 정할 일이라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아베 신조와의 만남에서 아베는 높은 위치의 의자에 앉고 문희상 특사는 낮은 의자에 앉게 해서 일부러 이렇게 무시한 거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 MBN 기사 낮은 의자에 푹 꺼져 앉아서 야쿠자 보스 행세를 하고 있으나, 정작 아베는 높은 의자에 앉아서 내려다보고 있다. 2017년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아베 신조를 만났는데 여기서도 문희상이 앉았던 의자와 똑같은 의자에 앉았고, 이 때도 홀대론이 나왔다.






2017년 국회 본회의 출석율 100%(!)를 기록했다. 다선의원들이 대체로 정당 활동이나 지역구 활동에 전념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놀라운 기록이다. 문 의원을 제외하고 출석율 100%를 기록한 의원들이 모두 20명인데 모두 초선이나 재선, 높아봐야 3선 의원들이다. 괜히 부동명왕이 아닌가 보다.


20대 국회 더불어민주당 후반기 국회의장 후보자 선거에 박병석 의원과 함께 출마했다. 묘하게 민주당은 재수 성공률이 높기 때문에(...) 차기로 유력하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대통령도 재수였고, 원내대표도 재수였다.


2018년 5월 16일 더불어민주당 20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후보자 선거에서 총 116표 가운데 67표를 얻어 박병석 의원(47표)을 넉넉하게 제쳤다. 이후 여야 간 상임위 분배 기싸움으로 의장 선출이 연기 되었으나, 7월 10일 여야 원내대표들이 7월 13일 국회의장 선출을 위한 본회의를 합의하면서 13일 본회의를 통해 후반기 국회의장에 당선됐다.


현역 정치인 중에서 상당히 독보적인 인상파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주류 언론에서 외모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본인도 외모를 이용한 자학 개그를 만들 지경이다. 하지만, 동료 의원들 사이에서는 유순한 성격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취미도 서예이며, 국회의 서예 동호회 회원이라고 한다. 위에 나왔듯이, 정치 자체의 스타일도 자신의 주장을 저돌적으로 밀어붙이기보다는 친화력으로 타협하는 위치에 가깝다.


언론이나 정계에서 불리는 별칭으로 '장비', '포청천' 등이 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부동명왕'이라는 별명이 새로 떠오르고 있다. 그나마 칭찬해 주는 말이 "문희상, 겉은 장비 속은 조조"일 정도로 아무리 칭찬해줘도 외모는 결국 장비다(...).



인상이 강경 보수파 정치인으로 보여서 잘 모르는 젊은 지지자들 사이에선 '자유한국당 의원인 줄 알았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나온다... 얼굴이 자한당 한나라당 의원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게다가 질녀 이하늬는 2015년 12월 23일 방영된 라디오 스타에서 자신이 살 찌면 외숙부 문희상과 닮았다고 자학했다(...) 여담으로 네이버에 문희상 치면 연관 검색어가 '문희상 이하늬'이다. 실제로 이하늬는 외숙부의 선거 유세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하늬의 아버지, 즉 문희상의 매제인 이상업은 문희상이 청와대 비서실장 시절 경찰청장 후보에 이름이 올랐었지만, 정작 이 문희상과의 관계 때문에 당시 민정수석이었던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비서실장의 매제가 경찰청장이 되면 국민들이 어찌 납득하겠냐'라는 논리를 펴서 임명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문희상 본인도 반박할 수 없는 지적이라 받아들였다고.



더불어민주당 인사들의 외모를 나누자면 인상파에 분류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동일한 스타일로는 이해찬 의원이 있다고. 다만 이해찬 의원은 까칠함이 많이 드러난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 일본 특사로 일본에 가게 됐을 때 일본인들에게 '야쿠자 두목, 오야붕, 악당 얼굴 같다'는(...) 인상 평을 들었다. "대화를 하자면서 야쿠자 오야붕을 보내다니..."라는 분위기. 어쩐지 아베가 더 편한 의자에 앉은것 치고는 좌불안석 같더라니 사실 조선통신사 때부터 이어지던 유구한 전통이라고 한다.


18대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활동할때 당시 한나라당국방위 간사가 유승민 의원이였는데, 2009년 당시 제2롯데월드 논란에서 당시 유승민은 여당 간사임에도 매우 신랄한 비판으로 제2롯데월드를 반대했었는데 이것이 꽤 인상적이였던 모양. 당시 국회 속기록에서 "이런 분이 있기에 이명박 정권과 대한민국에 미래가 있다. 존경의 염(念)을 표한다." 라고 하였으며. 훗날 문재인 대선 선대위원장을 맡았을때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유승민 후보는 대통령감이다. 자질과 역량을 모두 갖춘 정치인." 이라며 이례적인 상대후보 평을 한 적이 있을 정도.



[출처 : https://namu.wiki/w/%EB%AC%B8%ED%9D%AC%EC%83%81]




국회의장(國會議長, The Speaker of the National Assembly)은 대한민국 입법부의 장(長)으로 임기는 2년이다. 입법부를 대표하며 입법부의 사무를 집행한다. 본회의에서 사회를 맡는다. 대법원장, 대통령 또는 국무총리와 함께 삼부요인이다.


대통령 중심제 국가의 국회의장은 보통 국가의전서열 2위로 대접받으며, 국회의장 개인의 권한이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국회라는 헌법기관의 대표로서 높은 위상을 갖고 있다. 이에 반해 내각제 국가의 국회의장은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약하며 '의회 진행자'로서의 역할에 치중하는 느낌이다.


국회의장은 국회의원들의 무기명투표, 재적의원의 과반수 득표로 선출되며 일반적으로 원내1당에서 나오며[3] 선출 후 중립성의 이유로 당적보유 및 상임위 활동은 금지된다. 한국 국회법은 국회의장의 당적보유금지를 직접 명시해 놓은 게 특징이다. 


의회정치의 원조라는 영국이나 일본의 경우 의장의 당적포기는 어디까지나 관행이다.


2002년 박관용 국회의장(한나라당)이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그 이전까지는 국회의장도 법적으로는 당적 보유가 가능했지만 박관용 의장이 일본과 영국의 사례를 들어 처음으로 탈당했고, 2004년 김원기 국회의장이 들어서면서 국회의장의 탈당의무를 명시하는 국회법 개정을 단행해서 2005년에 생겼다.


헌법기관장으로 대한민국 공식 국가의전서열 2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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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위인 이유는 삼권분립 체계에서 국민의 대표인 입법부를 존중하는 의미로 국회의장의 의전서열을 대통령 다음으로 예우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의전서열 3위와 4위는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원장과 헌법재판소장이다.) 2위라는 매우 높은 의전서열에 비해 실제 권한은 미약한 편. 


그렇다고 단순 사회직이나 명예직은 결코 아니다. 총리급 인사나 감사원장 등의 임명동의안 통과나 예산안 추가경정 통과와 비록 천재지변, 국가적 비상상황, 교섭단체장들의 합의한 경우 등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쓸 수 없지만, 법률안을 상임위원회를 생략하고 직접 본회의에 상정할 수 있는 직권상정이라는 매우 강력한 특권을 가지고 있다. 이 특권이 가지는 위력 때문에 국회에서 국회 공성전이나 날치기 같은 많은 깽판이 있었다.


한국의 초대 국회의장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고 국회의장 출신 대통령은 이승만이 유일. 아직 여성 국회의장은 없다. 2010년대에 들어서 국회의장은 총리와 더불어 대통령 선거에 출마시키지 않을 사람 위주로 선출한다.


대개 5선 이상급의 다선 의원 중 계파색이 옅고, 온건파로 분류되는 의원이 맡으며, 관례상 임기가 끝나면 '사실상' 정계은퇴를 하기 때문에 출신당의 당론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기 용이하고 원내정당들의 교섭을 맡기 적합해진다. 그래서 정계은퇴에 큰 부담이 없는 만 65세 이상의 고령의 국회의원이 맡는 경우가 많다.


국회의장은 높은 국가의전서열에 비하면 인지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국가의전서열 5위인 국무총리보다도 떨어지는데, 국무총리는 정치적으로 대통령의 방탄 역할을 하고 행정부가 워낙에 주목받는 탓에 사람들이 잘 아는 편이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이라는 선출직 특성상 국회 내에서도 의장보다 대중적 인기도와 국민 지지가 높은 당대표나 잠룡 스타급 의원이 훨씬 언론노출도는 물론이고 실제 파워도 큰 게 사실. 


본회의 때 특정 당을 편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기 때문에 양 당에게 갈굼을 받는 존재이기도 하다. 다만 국회선진화법 시행 이후 국회의장의 존재감이 꽤 커진 감이 있기는 하다. 


의안의 본회의 상정을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여야 합의를 거치게 되었는데, 정국 경색이 잦다 보니 양자 중재를 위해 국회의장이 자주 나서기 때문. 직권상정이라는 특수한 권한이 있어서 이걸 남발하면 존재감은 확실하겠지만, 이는 국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음을 의미한다. 국회의원 과반수의 득표를 얻어 의장에 당선된다. 선거로 뽑힌 사람들이 선거로 뽑는 사람인 셈. 


국가의전서열 2위인 초고위직이고 입법부를 대표하는 직책인만큼 국회 업무 이외의 다양한 일을 하고있다. 특히,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 고위관료를 비롯한 VIP를 맞이하고 회담하는 외교 업무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의장의 일정을 보면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의회를 방문하는 외국 VIP와 회담을 할 정도다. 


외국 관료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필수 코스로 들리는 곳이 국회인 만큼 국회를 대표하는 국회의장은 외교업무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뿐만 아니라, 외국 방문, 국제회의 참석, 회담, 각종 행사 참석 등, 생각보다 많이 바쁜 직책이다.


국회의장은 의원 임기가 끝나면 관례상 차기 총선에 불출마하는데 이는 15대 국회 후반기 의장이었던 박준규 전 의장이 제16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생긴 관례이다. 따라서 국회의원 임기가 끝나면 사실상 정계은퇴수순을 밟게 된다. 이것은 관례일 뿐 의무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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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ㅣ https://namu.wiki/w/%EA%B5%AD%ED%9A%8C%EC%9D%98%EC%9E%A5]



송영길 / 1963년 3월 21일 / 전라남도 고흥군
학력 : 연세대학교 경영학 학사, 조선대학교 정치학 명예
배우자 남영신, 슬하 1남 1녀
더불어민주당 / 인천 계양구 을

전라남도 고흥군 출신의 더불어민주당 소속 정치인.

광주대동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과와 일본학과를 졸업했으며, 36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정계에 뛰어들기 전에는 1984년 연세대 총학생회장이 되는 등 학생운동계에서 활동했고, 이어 인천 지역에서 택시 노조 운동을 하면서 노동 운동에도 참여했던 경험이 있다.

사법시험 합격 후에는 주로 인권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이어 1990년대 후반부의 이른바 젊은 정치인 수혈에 따른 386 정치인들의 등장 무렵에 첫 주자로 나서게 되었다.

바로 1999년 재보궐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의 공천을 받아 인천 강화-계양 갑 지역에 출마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정계에 데뷔한 송영길이었으나 당시 김대중 정부의 옷로비 의혹 등으로 인해 불리하게 선거 과정이 전개되면서 안상수에게 석패했다.

하지만, 16대 총선 이후 강화군이 서구와 합구되면서 이번에는 계양구 지역구로 다시 재도전하여 재보궐선거에서 만났던 안상수 상대로 설욕에 성공하며 국회입성에 성공했고 그 뒤로 17대와 18대 선거에서 모두 승리하면서 3선 의원을 기록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러시아 특사로 파견되었고, 이후 러시아와의 인연을 감안하여 문재인 정부의 북방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북방경제협력위원회는 북방경제 및 한중관계 및 한러관계에 기반한 북방경제에 집중한다. 북방경제는 중국,러시아와의 협력을 뜻하는 것이며, 문재인 정부의 외교정책 중 하나인 신북방정책의 일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남북한관계가 호전되고 있는 가운데 2018년 7월 11일 통일부의 방북 허가를 받고 북방경제협력위원회 인사들과 함께 북한 라선특별시를 13일부터 14일날 동안 방문할 계획이다. 이는 러시아가 주최하는 남북러 국제 세미나 참석 및 라선항 방문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한편...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에서 정치적 공식 발언 이외의 발언을 통해서도 주목받은 흔치 않은 정치인인데, 바로 "박근혜 변기 사건"의 주인공이자 시발점이다.

송영길이 인천시장이던 2013년, 인천에 방문한 박근혜에게 쉬라며 인천시장실을 빌려주었는데, 박근혜가 남이 쓴 변기를 쓸 수 없어서 송영길이 쓰던 사무실 화장실 변기를 없애버리고, 새 변기를 가져와 설치했다고 한다... 하루종일 있는 게 아니라 고작 한두 시간 있기로 한 건데, 그렇게까지 한 것이다.



시장실의 침대 담요 같은 것도 새 것으로 다 바꿔버렸다고 한다. 이 발언은 민주당이 탄핵 가결 직전까지 기획한 논스톱 팟캐스트 방송에서, 송영길이 박근혜에게 겪었던 경험을 지나가는 이야기로 했던 것인데, 인터넷을 통해 이것이 퍼져나가 큰 화제가 되면서 인터넷에 박근혜의 다른 화장실 집착 기벽에 대한 발언이 나오고, 주요 방송과 언론에서도 수차례 언급이 되는 등 후폭풍이 상당히 컸다.

당시 송영길은 그것보다는 대통령과 인천 재정 상황 같은 것을 진지하게 이야기하며 의견을 교환하길 원했단다. 특히 러시아와 인천의 교류에 대해 협조를 요청하고 싶은 게 있었다고 한다.

송영길은 그전에 러시아 방문 후 푸틴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거 했어도 별 도움 안 됐겠지만 그런데 변기 공사가 끝나자 박근혜가 시장실에 혼자 들어간 뒤에 다른 사람들 절대 못 들어가게 경호원들로 문앞을 완전히 막아버려서 서운했다고 한다.

박근혜가 돌아갈 때가 되자 송영길이 '이거 도로 다시 뜯어가면 어떡하지?'하고 생각했는데 그러지 않고 그냥 다 가 버려서, 시장 임기 끝날 때까지 대통령이 남겨놓은 그 변기와 담요를 썼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더 지나고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박근혜의 특이한 습관 및 행적에 대해 의심스러운 정황들이 쏟아지자 그 기억이 떠올라 '그 일은 진짜 좀 정상이 아니고 이상했던 거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럴 기회가 와서 말했던 것이라고 한다.

이 변기 이야기는 대중적 충격을 추며 대히트를 쳐서 신문과 뉴스에까지 나와 회자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박근혜가 탄핵 가결 후 파면이 되고, 감옥에 구속까지 된 이후에도 계속 대중에 회자되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심지어 몇몇 종편 뉴스에서는 박근혜가 검찰 내 어떤 조사실에서 조사받는다는 정보뿐만 아니라, 검찰 건물 내에서 그녀가 사용할 것으로 예측되는 화장실의 위치정보까지 취재하여 보도했다.

그것도 역시 이 변기폭로 사건의 영향을 받은 일이라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역대급 임팩트넷상에서 '검찰 조사 받을 때는 어떤 변기를 쓰냐', '구치소 변기는 뜯고 정든 청와대 변기로 바꿀 수 있겠냐?', '나중에 교도소로 옮기게 되면 구치소에서 쓰던 변기 가져갈 수 있냐?' 등 수많은 변기 드립의 원조가 되었다.



[출처 : https://namu.wiki/w/%EC%86%A1%EC%98%81%EA%B8%B8(%EC%A0%95%EC%B9%98%EC%9D%B8)​]

바른미래당의 유일한 상도동계 국회의원.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가 출신 정치인. 2017년 초반 바른정당의 초대 대표를 맡았으며, 2018년 현재 당적은 바른미래당이다.

대학생 시절인 5공 때 민주화 운동과 학생운동을 했다가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받다가 6.29 선언으로 석방된 사회운동가였으며, 정계 입문 이후 상도동계의 젊은 정치인으로 활동하였고, 2000년대 남원정이라는, 보수정당 내 민주계와 소장파를 대표하던 인물 중 하나였다.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새누리당이 위기를 맞을 때 유승민, 남경필 등과 함께 당내 개혁 및 박근혜의 퇴진을 요구하였으나 친박의 비토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2016년말 김무성, 유승민과 개혁 보수를 가치로 내세워 바른정당을 창당하여 초대 대표를 맡았다.

이후 바른정당이 잇따른 탈당 러쉬가 있을 때 당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맡았으며, 2018년 국민의당·바른정당 합당에 참여하여 바른미래당을 창당하게 되었다.



당내에서는 박주선 공동대표와 함께 민주계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며, "유승민의 조력자"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친유계의 고문 역할을 할 정도로 당내에서 정신적 지주로 꼽히는 인물 중 하나이다.

동안에 미중년이다.

2018년 현재 한국 나이로 61세인데, 그 나이보다 젊어보인다. 전원책 변호사와 고작 3살 차이다심지어 같은 당 내에서 동갑인 유승민 대표보다도 동안으로 보인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참고로 유승민 대표도 나름 동안 소리를 듣는 사람이다...

게다가, 체력이나 체격도 좋다고 한다. 국회 생활을 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의원회관 내에 있는 피트니스 센터에서 운동하는 걸 보면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20대보다 건장한 근육질이라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판했던 연극 환생경제에 출연했던 인물 중 한 명이다. 깍뚜기(5000년 역사 바로 세우기 위원장)역이 바로 정병국이다.

19대 대선 이후 '나는 반성한다-다시 쓰는 개혁보수'라는 책을 냈다. 왜 보수정당과 보수 정치인이 몰락하고 청년층에게 버림받았는지에 대한 설명과 반성, 어떻게 보수가 다시 인정을 받을지에 대한 대안을 적은 참회록이다. 여담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유한국당에서는 이 책을 두고 카오스가 열렸다(...).

김현철의 장남(즉, 김영삼 전 대통령의 손자)이 얼마 전부터 그로부터 정치 수업을 받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과거부터 김현철과는 친분이 있기 때문. 재밌는 건 정작 김현철은 보수정당에서 더불어민주당으로 이적했다는 점(...).

처음 청와대에서 일할 때나 상도동계에서 비서관으로 활동했을 때, 김영삼 전 대통령은 그를 친근하게 뱅국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근데 사실 이 분은 원래 발음이 그랬다. 손명순 여사께도 맹순이라고 불렀으니 다만 정병국이 국회의원이 된 이후로는 "정 의원"이라고 불렀다고.


바른정당에서는 유승민, 남경필, 하태경, 지상욱 등과 함께 자강론자로 꼽힌다.

바른정당 친이계 최측근 라인 중에서 주호영, 김영우가 중재론/자강론에서통합론으로 입장을 바꾸면서, 바른정당 2차 탈당사태때 결국 자유한국당으로 입당하게 되었다는 점을 보면 의외라면 의외겠지만, 애당초 정병국의 경우 친이계 내에서도 상도동계 최측근이었고 개혁보수 성향이 강한 소장파형 인물이었다 보니 딱히 신기할 건 없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도 이상득 관련 예산을 삭감한 한나라당 소장파 중 한 명이었을 정도. 다만 남경필 지사의 경우에는 결국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했다(...).

바른정당의 초대 당 대표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당원대표자회의 의장을 맡을 정도로 당내에서 여러모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물이다.

어떻게 보면 유승민 대표와 함께 바른정당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을 정도. 전국적으로 유명했다면 유승민 대표와 투톱도 되셨을 분이다 다만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너무 빨리 대표직에서 사임하신 것 아니냐는 아쉬움도 많았다고 한다. 그럴 법도 한 것이 정병국 사임 후 유승민 취임 전까지 바른정당의 상황이 그닥 좋지 못했기도 했고(...).

이후 이혜훈 전 바른정당 대표와 함께 2018년 1월 28일 국민의당-바른정당 통합추진위원회의 인재영입위원이 되었다.

본인의 정치관을 들어보면 실제로 故 김영삼 전 대통령과 손명순 여사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 하다. 실제 손명순 여사의 보좌관으로도 활동한 바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YS 정신에 대해 민감한 정치인이기도 하다.

홍준표가 자유한국당 당사에 박정희와 김영삼 사진을 같이 걸어놓은 것에 대해서 "김영삼이 잡으려고 했던 호랑이는 박정희였다. 당신이 YS에 대해서 알긴 아느냐"며 비판했을 정도.

이런 부분 때문에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보수 정치인이기도 하다.

실제 그는 기존 보수 정치인들과는 달리 보수-진보 구분을 이승만, 박정희 시절이 아닌, 김영삼-김대중 등의 민주화의 두 아버지들에 의해 분화되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이러한 관계로 3당 합당에도 군사독재 세력을 합류시킨 점에서 한계점이 명확했다고 밝혔다.

대한민국의 배우. 세종대학교 영화예술학과에 재학 중이다.


1997년 2월 17일 전라북도 군산시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누나와는 3살 터울이라고 한다. 

 ...


직업 군인인 아버지 탓에 학창 시절, 이사를 자주 다녔다. 태어난 곳은 전라북도 군산이지만 3살 때 서울에 올라와 6살까지 살았고 이후 원주, 대전 등 여러 지역으로 이사를 많이하면서 전학도 자주 했다. 중3 때부터 서울에 정착해 고등학교까지 서울에서 졸업했다. 남중, 남고를 다녀 연애 경험은 그리 없다고 한다. 


집안의 큰 반대 없이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3년간 연기학원에 다녔다. 학원에 다니면서 드라마 오디션이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이서원은 원작 웹툰을 워낙 재밌게 봤어서 오디션을 보고 싶은 마음에 지원을 했고 극중 지현우 아역에 합격을 하면서 JTBC 주말 드라마 '송곳'으로 데뷔했다. 본인도 닮았다고 인정할 만큼 싱크로율은 높았다


2016년 여름 이서원은 당시 다니던 학원 측의 추천으로 블러썸 엔터테인먼트로부터 연락을 받아 계약을 하게 되었다. 그전에 오디션에 합격한 드라마 '송곳'에도 나오기 전으로 어느 날 뜬금없이 블러썸의 실장(담당 매니저)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실장 주위에 누군가가 'OO 연기학원에 괜찮은 친구가 있다고 만나봐라'라고 이서원을 추천했다고 한다. 


그런 인연으로 실장이 이서원의 휴대폰 번호를 알게 되었고, 모바일 메신저 프로필 사진 한 장만 보고 전화를 한 거였다. 이서원은 처음 연락받았을 땐 사기인가 생각할 정도로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믿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성추행 및 협박 사건으로 인한 불명예 은퇴, 한순간의 잘못된 행위로 인해 그의 연예계 생명에 종지부를 찍게 만든 사건.


2018년 5월 16일 오후 8시 중앙일보 기사로 공중파 음악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MC 겸 배우 A씨(21)가 동료 여성 연예인을 성추행하고 흉기를 이용해 협박한 혐의(강제 추행 및 특수 협박)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는 기사가 나갔는데, 해당 조건에 맞는 사람이 그 밖에 없어서 사실상 실명이 공개되었다.


경찰에 따르면 그는 동료 연예인 A씨에게 강제로 키스 등 신체 접촉을 시도하다 거부당했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신체 접촉을 시도하다 A씨가 남자친구에게 전화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나 흉기로 협박까지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에 따르면 그는 당시 조사에 나섰던 담당 경찰관에게도 욕설을 퍼부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소속사에서도 공식 입장을 냈고 실명확인도 마쳤으며 사과문을 냈다. 하지만 입건된 지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사실을 숨기고 계속 방송 활동을 해 왔다는 점에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심지어 그동안 SNS 활동도 활발히 하다가[6] 성추행 뉴스가 뜨자 곧바로 계정을 삭제했다.


결국 출연했던 KBS 2TV 뮤직뱅크와 방영 예정인 tvN 월화 드라마 멈추고 싶은 순간 : 어바웃 타임에서 하차했다.



이서원은 드라마 멈추고 싶은 순간 : 어바웃 타임에서 한승연과 러브라인으로 나올 예정으로 예전에 찍은 12회차 촬영분은 전부 폐기되었고 결국 상대역이였던 한승연에게도 촬영 일정이나 작품 활동에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쳐 결국 재촬영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승연은 전작이었던 청춘시대 2에서 상대역으로 나올 예정이었던 온유가 성추행 입건으로 하차하면서 기존 촬영분이 모두 삭제되고 재촬영하는 피해를 본 적이 있다. 결국, 드라마에서 상대역으로 출연하는 남자 배우들이 연이어 성추행으로 입건되어 두 번씩이나 피해를 보게 된 셈.[8]


범행 내용을 본인이 전부 시인했으므로 그는 21세의 젊은 나이, 아니 어쩌면 보통 연예인의 평균 데뷔 연령보다도 어린 나이에 연예계에서 불명예 은퇴하게 되었다. 신인 남자 배우는 좋은 이미지와 여성층의 호감을 얻어야 뜰 수 있는데, 성추행이라는 질 낮은 범죄를 저질렀으니 사실상 연예인 생명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사건이 종결되면 군대로 도망칠 가능성이 높으며, 이후 복귀 가능성 역시 매우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대한민국의 정서상, 성범죄자는 철저하게 매장하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혐의를 인정하느냐, 피해자에게 사과는 했느냐를 묻는 기자를 뭘 잘했다고 꽤 차갑고 살벌한 눈빛으로 쏘아본 모습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임팩트가 너무나 큰 모습이었기에 "우병우인 줄 알았네", "우병우 아들이냐" 등 우병우를 언급하는 리플이 기사마다 달리고 있는 상황. 교도소 일기를 봐도 알 수 있듯 피의자로 확정된 상황에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중요한데, 저러한 행동은 판결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집행유예 나올 것을 실형으로 업그레이드 시켜달라고 조르는 모습이다. 변호사 "이서원 레이저 눈빛, 내 의뢰인이었다면 막았을 것…실형 가능성"



특히 몆몆 극성 팬들은 그래도 얼굴이 잘생겼다면서 그 사건을 크게 개의치 않아하는 모습을 보인다. 심할 경우에는 오히려 그를 쉴드치면서 복귀하길 바라기까지 한다. 제정신인가



참고로 이 사건이 터지고나서 일각에선 블러썸 엔터테인먼트가 욕을 먹고있기도한다. 배우들 관리를 어떻게 했으면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터지고, 이서원이 이러한 좋지 못한 행동을 보인것을 사건이 제대로 터지기 전까지도 몰라서 대처를 못하고 많은 사람들보다도 뒤늦게 알았다는 점에서 크게 비난과 비판을 받고있다.


7월 12일에 이서원의 1심 재판이 열렸다. 이서원 측은 범행사실은 인정했으나 음주로 인한 심신 미약을 주장했다.


https://namu.wiki/w/%EC%9D%B4%EC%84%9C%EC%9B%90#s-5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가권력을 동원해 내란·부정선거·학살·고문 및 조작·각종 인권유린 등 우리 헌법의 가치와 정신을 파괴한 이들의 행적을 기록해 역사에 남긴다는 취지의 사업.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과 취지가 다소 비슷하다.


성공회대 민주자료관(관장 한홍구)과 평화박물관(대표 이해동)이 2015년 7월 15일 제안하여 시작되었으며, 강우일, 고은, 김두식, 김상봉, 박노자, 백기완, 백낙청, 선대인, 유홍준, 이부영, 장영달, 조국, 조세희, 채현국, 최강욱, 홍세화, 한완상 등이 참여하였고, 한홍구가 책임 편집인이다.


2017년 2월 16일 집중검토 대상자 628명(중복제외 405명)의 명단을 발표하였는데, 해당 사건은 아래와 같이 분류하고 있다(다만, 아래 서술에서는 나무위키에 문서가 개설된 경우 편의상 원칙적으로 해당 문서명을 좇았다).


집중검토 대상자 사건


[학살]

제주 4.3 사건

여순사건 진압과정에서의 학살

보도연맹 학살사건

재소자 학살

부역자 처벌 과정에서의 학살

후방 지역에서의 학살

국민방위군 사건

5.18 민주화운동


[내란 및 헌정유린]

여순사건

5.16 군사정변

10월 유신

긴급조치

12.12 군사반란 및 5.17 내란

발췌 개헌

사사오입 개헌

3선 개헌

5공 수립 방조


[고문조작]

국회 프락치사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습격사건

백범 김구 암살사건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진보당 사건

5·16후 각종 반혁명 사건들

무장군인 법원 난입 사건

1차 인민혁명당 사건

한일 국교정상화 전후 내란 조작 사건들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

사법 파동(1차)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

춘천 강간 살인 조작

남산 부활절 예배 내란음모사건

김대중 납치사건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문인 간첩단 조작 사건

민청학련 사건 및 인혁당재건위 사건

수도권 선교자금 횡령 사건

강제전향 및 사회안전법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

부마민주항쟁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삼청교육대

10.27 법난

무림 사건

학림 사건

부림사건

아람회 사건

오송회 사건

녹화사업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서노련 사건

10.28 건국대 항쟁

1989년 방북사건과 공안정국 조성(걸개그림, 서경원 방북) - 임수경 방북 사건 참조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


[간첩조작]

이수근 이중간첩 조작 사건

박노수, 김규남 간첩 조작 사건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

납북귀환어부 조작간첩 사건

월북자 가족 관련 조작간첩 사건


[부정선거]

3.15 부정선거

4.19 발포 - 4.19 혁명 참조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제7대 대통령 선거

초원복집 사건

제18대 대통령 선거


[언론탄압]

경향신문 폐간

민족일보 사건

문화방송·부산문화방송·부산일보 강탈 사건 (5·16장학회 사건) - 정수장학회 참조

경향신문 강제매각 사건

신동아 필화 사건

동아일보 광고탄압사건

언론통폐합

보도지침


[김영삼정권에서의 반헌법사건]

안풍

총풍사건

북풍


[김대중정권에서의 반헌법사건]

조폐공사파업 유도 사건


[이명박정권에서의 반헌법사건]

2008년 촛불집회 진압

용산4구역 철거현장 화재 사건

민간인 사찰

국정원 간첩 조작 사건


[박근혜정권에서의 반헌법사건]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통합진보당 위헌정당해산 사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반헌법행위자열전 집중검토 대상자 405명 


가재환 강신욱 강진규 강창성 강충성 강화봉 경무현 고영주 구자춘 길재호 김교련 김근수 김기완 김기홍 김남옥 김동근 김동운 김동하 김성남 김수현 김영광 김용성 김용순 김용진 김윤근 김재춘 김종오 김중서 김태선 김형영 남궁길영 노덕술 노원욱 문귀동 문재준 박래조 박영길 박원택 박종연 박지원 박찬일 박창암 박처원 박충훈 박치옥 방준모 백남은 백용기 백태하 서 성 서재두 서정각 서주연 성종환 신갑생 신상규 신영주 심상은 안강민 안경상 안응모 양두원 양승태 오정근 유병창 유정방 윤기병 윤재호 윤종원 윤진원 윤태일 이강학 이근직 이낙선 이상귀 이서우 이용택 이우철 이재권 이재준 이종구 이종명 이종원 이철환 이철희 이춘구 이치왕 이학봉 이협우 이희권 임내현 임동구 장경순 전재구 정구영 정형근 조인구 조일제 조한경 진형구 차철권 최규하 최난수 최대현 최문영 최병규 최운하 한경록 한웅진 한종철 한환진 허문도 홍필용 황산덕 황진호  

조원태 / 1976년 1월 25일 / 190cm / 아버지 조양호, 어머니 이명희, 누나 조현아, 여동생 조현민, 처 김미연, 슬하 3남


2018/07/06 - [Hot issue/정치] - 조양호 구속 영장 기각 !! ㅁㅊ... 그가 저지른 각종 범법 행위들.. (탈세, 변칙증여, 브랜드 사용료...)

2018/06/29 - [Hot issue/정치] - 조양호 는 어떤 인생을 살았나?


학력

미국 마리안고등학교

미국 힐리어 칼리지(2년제 대학) 중퇴

인하대학교 경영학 학사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MBA


누나, 여동생과 한화그룹 차남(김동원)과 삼남과 더불어 논란이 많은 재벌 3세. 한진일가의 갑질, 어디까지 가봤니? '땅콩 첫째', '뺑소니 둘째', '물벼락 셋째'..한진家 3세들


대한민국의 기업인.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의 아들이다. 현재 대한항공 대표이사 사장, 한진칼 사장, KOVO 총재 직함을 맡고 있다.



미국에서 마리안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95년 2년제 대학인 힐리어 칼리지를 약 1년간 다니다가 중퇴했다. 조원태는 졸업 자격을 위해 취득해야 할 60학점 중 33학점만 이수한 상태였다. 


힐리어 칼리지에서 조원태의 평균학점(GPA)이 1.67에 불과한 것으로 보아 성적 불량으로 제적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반적으로 학점(GPA)이 1.75 혹은 1.7 미만이면 성적 불량으로 학사경고를 받으며 학사경고가 반복되면 제적된다.


1998년 인하대학교로 편입했다. 그러나 조원태의 인하대 편입은 부정편입학에 의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조원태는 힐리어 칼리지의 졸업 이수 학점인 60학점 가운데 33학점밖에 이수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 때문에 인하대 편입 합격은 둘째치고 편입 지원 자격조차 되지 못했다. 교육부는 1998년 6월 조원태(당시 21살)가 그해 1학기에 부정입학한 사실을 적발하고, 조군과 당시 편입학 심사위원들에 대해서 중징계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인하대 재단 이사장인 아버지 조양호가 교육부의 중징계 지시를 무시하고 조원태 편입을 강행했다. 최근 이 사실이 뒤늦게 재조명되면서 조원태의 학사 자격은 취소되는 게 마땅하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교육부에서는 2018년 7월 11일 조원태의 학위 취소 결정과 조양호의 인하대학교 이사장 퇴임결정을 통보했다.


어쨌거나 인하대학교에서 경영학 학사학위를 받은 후, 부친인 조양호가 재단 이사로 있는 남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MBA를 취득했다. 불법편입학으로 취득한 학사 학위가 취소되었고 MBA 자격도 당연히 취소 절차를 밟게 될 전망이다.



2004년 대한항공에 입사했고, 2009년부터 2010년까지 여객사업본부장을 지냈다. 2011년부터 경영전략본부장을 맡았다. 2014년 1월부터 대한항공 경영전략 및 영업부문 총괄부사장과 그룹경영지원실 실장, 한진칼 대표이사를 겸직했다.


집안의 평균 키가 상당히 크다보니 조원태 역시 키가 190cm로 엄청난 장신이다. 계열사 중에 프로배구단이 있는 연유에서인지 프로배구를 관장하는 KOVO의 총재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배구 잡지 더 스파이크의 2017년 8월호의 표지 모델이 되었다.


2010년대 들어 어마어마한 사고를 친 누나와 그에 버금가는 갑질논란을 불러 일으킨 여동생만큼 큰 화제가 되지 않은 것뿐이지, 이 인간도 누나랑 여동생을 초월한 엄청난 인간 쓰레기로서 구설수에 많이 오른 바 있다.


2000년 6월 차선을 위반하려다 이를 적발하고 단속하려던 교통경찰을 치고 100여m 정도 달아나다가 뒤쫓아온 시민들에 의해 붙잡혀 공무집행 방해혐의로 입건됐다. 경찰은 당시 이 사건이 “과실로 인한 상해가 아니다”라며 뺑소니 혐의를 적용하지 않고 공무집행 방해 혐의만을 적용했다.



2005년 3월 22일 자신의 현대 그랜저 XG 승용차를 몰고 연세대학교 정문 앞을 지나던 중 태모 씨가 운전하던 현대 스타렉스 차량 앞으로 끼어들었다. 놀란 태 씨는 급브레이크를 밟았고 같이 타고 있던 태 씨의 어머니도 크게 놀랐다. 


태 씨는 조원태의 그랜저 차량을 따라가며 멈추라고 신호를 보냈지만, 조원태는 무시하고 계속 앞으로 가다가 200m 정도 떨어진 이화여대 후문 앞에서 차량 정체 때문에 멈췄다. 차에서 내린 태 씨는 조원태의 차 앞에 서서 내리라고 요구했으나 조원태는 차 안에서 욕설을 했고, 태 씨의 112신고로 20여 분 뒤 경찰이 도착하자 그제서야 차에서 내렸다. 



이때 손주를 안은 채 차에서 내린 태 씨의 어머니(77세 할머니)가 조원태에게 다가가 “무슨 운전을 그렇게 하느냐”며 나무라자, 조원태는 오히려 태 씨 어머니의 가슴을 두 손으로 밀어 넘어뜨렸다. 


태 씨의 어머니는 아이를 안은 채 도로 한가운데로 넘어졌고, 이를 본 태 씨가 격분해 조원태 부사장을 밀치는 등 몸싸움을 벌이다가 같이 경찰서로 연행됐다. 땅바닥에 뒷머리를 강하게 부딪친 태 씨의 어머니는 인근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2012년 인하대 운영과 관련해 시위를 벌이는 시민단체 관계자들에게 폭언을 한 일로 언론에서 비난 받았다."내가 조원태다, 어쩔래 개XX야" 조씨一家 과거전력에 "사과는 쇼"


2018년 5월 14일 JTBC 뉴스룸에서는 지난 해 11월부터 대한항공 직원용 안내문에 "기내 1등석과 비즈니스석에는 비행과 관련된 경고방송을 보내지 말고 개별적으로 직접 알려라"고 규정이 바뀌게 되었으며 이는 조원태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는 보도가 나왔는데, 제보한 대한항공 직원이 증언하길 그 이유라는 것이 "게임하는 데 방해되니까"라는 것이었다나... 



2018/07/06 - [Hot issue/정치] - 조양호 구속 영장 기각 !! ㅁㅊ... 그가 저지른 각종 범법 행위들.. (탈세, 변칙증여, 브랜드 사용료...)

2018/06/29 - [Hot issue/정치] - 조양호 는 어떤 인생을 살았나?


[출처 : https://namu.wiki/w/%EC%A1%B0%EC%9B%90%ED%83%9C]

1939년 4월 19일 경상남도 김해시에서 출생. 호는 우당(尤堂)이다. 종교는 가톨릭이다(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1958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진학하였다. 대학에 재학중이던 1960년, 제1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였고, 이듬해인 1961년 제13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 후 대한민국 공인회계사 시험까지 모두 합격하였다.


법무관(해군 대위)으로 병역을 마치고 1971년까지 검사로 근무하다가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의 공천을 받아 부산직할시 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신민당 김영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3년에 열린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민주공화당 후보로 부산직할시 서구-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김영삼 후보와 동반 당선,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9년 10.26 이후 공화당을 혁신하자는 정풍운동을 주도하였다. 정풍운동은 공화당이 야당할 각오로 국민 앞에 사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제명 당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부산직할시 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군사정권의 강압에 의해 강제 사퇴당했다. 이후 그는 유신 정권에 가담했던 과거를 참회하는 저서 "부끄러운 이야기"를 내며 정치적으로 전향하였다. 

민주화추진협의회 인권옹호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김민석, 허인회, 송영길 등 학생운동가들을 변론하였다. 1985년 1월 김영삼과 김대중이 연합한 신한민주당의 창당준비위원이 되었다. 1985년 2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부산직할시 중구-동구-영도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합동연설회장에서 군사정권의 폭압정치시절 "전두환 육군소장 그룹은 광주에서 양민 2,000명 이상을 학살하고 정권을 잡았다." 는 연설로 부산 6개 선거구 중 민주정의당 후보가 과반수 낙선했고, 민주한국당 김정길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7년 김영삼과 김대중이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자 신한민주당을 탈당해 동참한다. 정책심의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제13대 대통령 선거을 앞두고 김영삼, 김대중 양김의 분열로 제1 야당 통일민주당이 양분화 된 상황에서 소수파인 후보단일화 주장자들(이철, 조순형, 홍사덕, 장기욱, 허경구 등)의 대표로 활동했다. 아울러 양김씨의 통합을 촉구하며 삭발시위를 하기도 했다. 갈등이 봉합되지 않자 단일화를 요구하며 통일민주당을 탈당한다. 이 일로 정치적으로 고립되었지만 13~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서초구 갑 선거구에 당선되었다.


1992년 신정치개혁당을 창당하고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7%대의 지지율(4위)로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득표율로는 당선가능성과 거리가 멀었지만 정치인으로서는 상당한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때의 인기 덕분에 그는 남양유업의 신제품 브랜드 우유 '다우'의 TV광고모델로 등장하기까지한다. 이때 남양우유에서 내세운 슬로건 '무균질(無均質) 우유'에 빗대어 '무균질 정치인'으로 자신을 홍보한 것이 꽤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켰다.



1994년 통일국민당 잔류파와 합당하여 신민당(1994년)을 창당하였으나, 각목 전당대회 파문으로 이미지에 상처만 남긴 채 탈당하였다. 1995년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초반에는 압도적으로 높은 인지도를 앞세워 지지율 1위를 달렸으나,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과 자유민주연합의 암묵적인 지원을 얻은 조순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에 전격 입당하여 선대위원장을 맡았다. 이때 통영시 유세에서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처벌하지 않았다면 전라도 데모대들이 국가를 위기로 빠트렸을 것"이라는 지역감정 조장 발언으로 큰 비난을 받았다.


파문이 일자 박찬종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최대 피해자가 전라도 사람들이기 때문에 한 표현이었을 뿐"라고 해명했으나, 지역감정을 조장한 상식 이하의 발언으로 비난을 받았고 당시 5.18 민주화운동시민연합은 대국민 사과를 요구하는등 지탄을 받았다. 신한국당이 예상보다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전국구 21번으로 등록했던 박찬종이 낙선한 것은 덤.


1997년 신한국당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에 참여하였으나, 당내 기반이 취약한 탓에 중도에 경선을 포기하고 탈당했다. 그 후 국민신당에 입당하여 이인제를 지지하였다. 1998년 재보궐선거에서 자신의 지역구였던 서울 서초갑에 출마하였으나 3파전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무색하게 8.7%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4위에 그쳤다.


2000년에는 민주국민당의 창당에 참여하여 부산광역시 중구-동구 선거구에서 출마했으나, 한나라당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2년에는 이회창과 화해하고 이회창 후보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캠페인을 도왔으나, 이회창은 낙선하였다.



제16대 대통령 선거 이후로는 사실상 정계를 은퇴하고 인권 변호사로서 활동을 하고 있다. 이 시기 BBK 주가조작 사건, 판사 석궁 테러 사건, 미네르바 사건, 동방신기 노예계약 사건, 주한일본대사습격사건 등을 담당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간간히 종합편성채널 등의 보도 프로그램에 나와 정치 평론을 하고 있다. 


[출처 : https://namu.wiki/w/%EB%B0%95%EC%B0%AC%EC%A2%85]


전희경(全希卿, 1975년 10월 9일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이다. 초선 국회의원이며, 계파는 분명하진 않다. 나이와 정계 경력에 비해서는 드러나는 활동이 꽤 활발한 편이다.


학력 : 금오초등학교 / 경민중학교 / 의정부여자고등학교 / 이화여자대학교 행정학과


정치적 발언의 대부분이 국가의 과도한 시장 경제 개입을 규탄하는 내용일 정도로, 기업의 투자와 이윤 추구의 자유를 가장 큰 가치로 여기는 이념형 우파 정치인으로 분류된다.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나, 역사적 맥락에서는 고전적 자유주의 '우파'로 분류되는 노선이지만 한국과 같은 정경유착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매카시즘적 성향을 띠며 국가주의적 극우와 결합된 양상을 보인다. 



보수 정치인 치고 젊은 나이에 비해 단호하고 강도 높은 표현을 사용하는게 큰 특징이다. 이 때문에 극우 보수층에게 큰 지지를 받는데 비해, 나머지층에게는 비호감으로 비춰져 평가가 극과 극으로 나뉘는 정치인이다.


여러모로 한국 우파, 특히 뉴라이트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정치인이라 할 수 있다.


교과서 국정화 운동을 하고 있으며, 박근혜 정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사태관련 토론에 참여하며 활동하고 있다.


10월 15일엔 "새 교과서에 좌우 균형 맞추겠다는 것은 현행 교과서의 문제를 개선하겠다는 정책에 박수친 국민들을 실망시키는 것"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선택한 나라로 이념 중립국가가 아니다" "좌파들이 우리를 꽁꽁 묶은 기계적 중립론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기존 과거사위원회와 노사정위원회 역시 사회적 합의주의에 함몰돼 우리나라가 한발짝도 못 나가는 단초가 됐다"는 주장을 하였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왜곡된 부정적인 서술을 하는 것도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우리나라가 불안하고 부정의한 나라라는 도식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라며 이승만에 비판을 "왜곡된 부정적인 서술"이라고 주장했다.전희경, 與 의총특강 "새 교과서, 좌우균형 맞춰선 안 돼"


10월 28일에는 새누리당 중앙 강연회에 강연자로 참석해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시작일 뿐, 좌편향된 다른 과목도 바로잡아야 한다는 기조의 연설을 했다.


사실 그녀가 그전까지 정치와 큰 연관이 없었음에도 비례 당선 안정권 번호를 받을 수 있던 건 이 활동의 영향이 컸다. 물론 이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로 0순위로 진행된 국정교과서 폐기 지시 때문에 도로묵이 되어 버렸다.



석사학위 논문 표절 의혹

20대 총선 기간을 전후로, 전희경의 이화여대 석사 논문인 "한국 정보통신산업의 경쟁력 연구"(2001년)가 표절 의혹을 받고 있다. 


표절 대상으로 제시된 논문은 유병복 전 혜전대 교수 등의 2000년 논문 "한국 정보통신산업의 국제경쟁력 결정요인 분석", 산업연구원 박기홍 씨 등의 1999년 논문 "정보통신산업의 경쟁력과 규제 제도"이며, 전희경의 학위 논문에서 79%가 이들 두 논문에서 사용된 문장, 표현과 동일하다는 것. 


심지어 결론 부분은 20개 문장 가운데 무려 19개가 붙여쓰기 수준으로 똑같은 것으로 나왔다. 관련 보도 이를 두고 "표절보다는 학력위조에 더 가깝다"는 비판마저 나올 정도.


카카오톡 막말 논란

2016년 9월 21일의 대정부 질문 도중 보좌관으로부터 당시 옆에 앉아있던 표창원의원의 당시 트위터 내용을 전해듣고는 "이런 말 같지도 않은 트윗 왜 보내냐. 옆자리니까 확 패버리라고? 지금 주 차뿌까? (확 차버릴까?)" 등의 막말을 주고받아 논란이 되었다.


오마이뉴스 기사 조선일보 기사 그래서 표창원 의원이 기가 막혀하면서 페이스북에다 "제 옆자리에 앉아 계신 분이 이런 생각을... 경찰 국회경비대에 신변보호 요청을 해야 하나요? ㅠㅠ"라며 재치있게 대처했다.


두 기사의 댓글을 비교해 보면 각각 진보와 보수 성향 사람들이 같은 사안을 어떻게 다르게 보는지 확연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댓글 공감이 많아야 30개이지만, 오마이뉴스는 10000개가 넘어간다.



임종석 비서실장에 대한 색깔론

그냥 여자 김진태다. 솔직히 "김진태가 긴장하겠는데?"라는 생각도 든다.

하태경 바른정당 의원.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2017년 운영위 국정감사에서 임종석 현 비서실장에게 "주사파와 전대협이 청와대를 장악했다"며 또 다시 색깔론을 들먹이며 운영위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결국 임종석은 "5·6 공화국 때 정치 군인들이 광주를 군화로 짓밟을 때 의원님이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며 "(저는) 인생과 삶을 걸고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말할 정도로 부끄럽게 살지 않았다."고 언성을 높이며 나중에는 “그게 질의입니까?”, “국민의 대표에 맞지않는 질의다”라면서 질의 내용에 대해 매우 모욕적이며 매우 유감이라고 하였다.


일각에서는 청와대 비서실장이 중요한 자리인만큼 사상 문제라든가 대북인식에 관해선 짚고 넘어가야한다는 주장도 강하다. 허나 문정인 청와대 외교안보특보에게 ‘북한대변인’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있다 하더라도, 국회의원으로서는 부적절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발언으로 전희경은 네이버, 다음과 같은 주요 포털에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는 유명세를 누렸다. 언론의 보도 태도나 여론 또한 우호적이지 않은데, 본인이 극우 매카시즘으로 인지도를 높이려는 노이즈 마케팅을 한거라면 어느 정도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폭탄을 던진 당사자인 전희경 의원은 국회 운영위 자리를 사임했다.


[출처 : https://namu.wiki/w/%EC%A0%84%ED%9D%AC%EA%B2%BD/%EB%B9%84%ED%8C%90%20%EB%B0%8F%20%EB%85%BC%EB%9E%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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