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4월 19일 경상남도 김해시에서 출생. 호는 우당(尤堂)이다. 종교는 가톨릭이다(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1958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진학하였다. 대학에 재학중이던 1960년, 제1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였고, 이듬해인 1961년 제13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 후 대한민국 공인회계사 시험까지 모두 합격하였다.


법무관(해군 대위)으로 병역을 마치고 1971년까지 검사로 근무하다가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의 공천을 받아 부산직할시 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신민당 김영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3년에 열린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민주공화당 후보로 부산직할시 서구-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김영삼 후보와 동반 당선,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9년 10.26 이후 공화당을 혁신하자는 정풍운동을 주도하였다. 정풍운동은 공화당이 야당할 각오로 국민 앞에 사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제명 당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부산직할시 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군사정권의 강압에 의해 강제 사퇴당했다. 이후 그는 유신 정권에 가담했던 과거를 참회하는 저서 "부끄러운 이야기"를 내며 정치적으로 전향하였다. 

민주화추진협의회 인권옹호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김민석, 허인회, 송영길 등 학생운동가들을 변론하였다. 1985년 1월 김영삼과 김대중이 연합한 신한민주당의 창당준비위원이 되었다. 1985년 2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부산직할시 중구-동구-영도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합동연설회장에서 군사정권의 폭압정치시절 "전두환 육군소장 그룹은 광주에서 양민 2,000명 이상을 학살하고 정권을 잡았다." 는 연설로 부산 6개 선거구 중 민주정의당 후보가 과반수 낙선했고, 민주한국당 김정길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7년 김영삼과 김대중이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자 신한민주당을 탈당해 동참한다. 정책심의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제13대 대통령 선거을 앞두고 김영삼, 김대중 양김의 분열로 제1 야당 통일민주당이 양분화 된 상황에서 소수파인 후보단일화 주장자들(이철, 조순형, 홍사덕, 장기욱, 허경구 등)의 대표로 활동했다. 아울러 양김씨의 통합을 촉구하며 삭발시위를 하기도 했다. 갈등이 봉합되지 않자 단일화를 요구하며 통일민주당을 탈당한다. 이 일로 정치적으로 고립되었지만 13~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서초구 갑 선거구에 당선되었다.


1992년 신정치개혁당을 창당하고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7%대의 지지율(4위)로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득표율로는 당선가능성과 거리가 멀었지만 정치인으로서는 상당한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때의 인기 덕분에 그는 남양유업의 신제품 브랜드 우유 '다우'의 TV광고모델로 등장하기까지한다. 이때 남양우유에서 내세운 슬로건 '무균질(無均質) 우유'에 빗대어 '무균질 정치인'으로 자신을 홍보한 것이 꽤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켰다.



1994년 통일국민당 잔류파와 합당하여 신민당(1994년)을 창당하였으나, 각목 전당대회 파문으로 이미지에 상처만 남긴 채 탈당하였다. 1995년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초반에는 압도적으로 높은 인지도를 앞세워 지지율 1위를 달렸으나,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과 자유민주연합의 암묵적인 지원을 얻은 조순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에 전격 입당하여 선대위원장을 맡았다. 이때 통영시 유세에서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처벌하지 않았다면 전라도 데모대들이 국가를 위기로 빠트렸을 것"이라는 지역감정 조장 발언으로 큰 비난을 받았다.


파문이 일자 박찬종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최대 피해자가 전라도 사람들이기 때문에 한 표현이었을 뿐"라고 해명했으나, 지역감정을 조장한 상식 이하의 발언으로 비난을 받았고 당시 5.18 민주화운동시민연합은 대국민 사과를 요구하는등 지탄을 받았다. 신한국당이 예상보다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전국구 21번으로 등록했던 박찬종이 낙선한 것은 덤.


1997년 신한국당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에 참여하였으나, 당내 기반이 취약한 탓에 중도에 경선을 포기하고 탈당했다. 그 후 국민신당에 입당하여 이인제를 지지하였다. 1998년 재보궐선거에서 자신의 지역구였던 서울 서초갑에 출마하였으나 3파전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무색하게 8.7%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4위에 그쳤다.


2000년에는 민주국민당의 창당에 참여하여 부산광역시 중구-동구 선거구에서 출마했으나, 한나라당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2년에는 이회창과 화해하고 이회창 후보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캠페인을 도왔으나, 이회창은 낙선하였다.



제16대 대통령 선거 이후로는 사실상 정계를 은퇴하고 인권 변호사로서 활동을 하고 있다. 이 시기 BBK 주가조작 사건, 판사 석궁 테러 사건, 미네르바 사건, 동방신기 노예계약 사건, 주한일본대사습격사건 등을 담당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간간히 종합편성채널 등의 보도 프로그램에 나와 정치 평론을 하고 있다. 


[출처 : https://namu.wiki/w/%EB%B0%95%EC%B0%AC%EC%A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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