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안


대한민국의 법조인. 박근혜 정부 초기 제55대 법무부 차관으로 임명되었다가 불과 1주일도 안 된 2013년 3월 21일에 성접대 논란으로 사퇴했다. 건설업자의 주선으로 강원도 별장에서 젊은 여성들과 난교를 벌였다는 혐의를 받았기 때문에, 중국 수호지식으로 누리꾼들이 그에게 붙여준 4자 애칭은 다름 아닌 '별장난교 김학의'.



1956년 8월 22일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1975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여 1980년에 졸업했다. 군대를 면제받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석사과정 재학중인 1982년에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1984년 사법연수원을 제14기로 수료했다. 연수원 동기로는 김진태 전 검찰총장,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 채동욱 전 검찰총장 등이 있었다.


검찰 재직 시절에는 업무 처리가 깔끔하고 원만한 성품이라는 평을 들었다. 수원지검 공안부장, 대검 공안기획관을 거치는 등 공안 쪽 업무를 많이 맡았지만, 임관 초기엔 대검 중수부 연구관, 법무연수원 기획부장을 하기도 했다. 



탁월한 리더쉽으로 안정적인 조직관리 능력을 인정 받았으며 친화력과 대인설득력이 뛰어나 상하간 대인관계도 원만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부하를 편안하게 대해주는 편이어서 부하들 사이에 평판이 좋은 편이었다. 그리고 기획력 역시 돋보이는 수준이었으며, 춘천지검장 시절 직접 제작한 파워포인트로 CEO식 특강을 펼쳐 검찰 내에서 화제를 낳기도 했다. 검찰 내부에선 독점규제법 전문가로도 정평이 나있었다.


이런 평가에 힘입어 2010년 7월부터 2011년 8월까지 제28대 인천지방검찰청 지검장을 지냈고, 2011년 8월부터 2012년 10월까지는 제41대 광주고등검찰청 검사장을 지냈다. 그리고 2012년 10월부터 2013년 3월까지는 제20대 대전고등검찰청 검사장을 지냈다. 이렇듯 한때는 '대한민국 검찰청의 정통 아이콘'이라 불릴 정도로 검찰 내에서 촉망 받는 인재였다. 



2013년 초에는 한상대 전 검찰총장의 후임 인선을 위한 1차 후보군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검찰총장 후보추천위원회에서 천거한 최종 3인의 후보에는 들지 못했다. 그때 만약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그래서 옷을 벗을 것으로 예상됐지만, 2013년 3월 15일 제55대 법무부 차관으로 임명되어 극적으로 재기했다.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황교안보다 연수원 기수는 한 기수 아래여도 경기고등학교는 한 해 선배인 동문이었기 때문에, 장관과 차관 둘 다 경기고 출신의 공안통이라 호흡을 잘 맞출 것이라는 기대를 모으기도 했다.


법무부 차관으로 임명되자마자 법조계 고위층 성접대 동영상 사건에 연루되고 말았다. 당시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강원도 원주시 별장에서 이뤄진 은밀한 성접대 장면이 촬영된 문제의 동영상을 입수했는데, 여기에 김학의가 등장하였던 것.  


사실 이 동영상은 건설업자 윤중천의 아내에 의해 윤중천과의 간통 혐의로 고소되었다가 오히려 윤중천을 성폭행 혐의로 고소한 여성사업가 권 모씨의 사건을 수사하던 와중에 발견된 것이었다. 경찰이 입수한 동영상 화면에는 상의 속옷 차림에 하의를 탈의한 중년 남성이 가수 박상철의 ‘무조건’을 부르며 여성을 뒤에서 안고 노래 부르다 낯뜨거운 장면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경찰청 관계자에 따르면 이미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한 여성이 "김학의 차관을 접대했다"고 직접 진술한 상황이었다. 별장에서는 각종 음란비디오와 쇠사슬, 채찍 등이 발견되었고, 성접대에 동원된 여성은 모두 30명이며, 그 중 5명은 대학생이라는 사실까지 밝혀졌다. 윤중천 역시 김학의가 원주시 별장에 왔다 갔다는 사실을 시인했다.사진 참조 게다가 영상도 워낙 고화질이라 화면 속의 남자가 김학의라는 데 의심의 여지는 거의 없었다. 음성분석 전문가인 모 교수도 김학의와 95% 동일인이라는 의견을 제출하였다.


이에 경찰은 법무부에 김학의 차관의 출국금지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은 당시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건설업자가 사업 관련 이권을 따내기 위해 검찰 고위직에게 향응을 제공한 것 자체도 큰 문제였지만, 건설업자가 이를 위해 수많은 젊은 여성들을 협박하고 강제로 창녀짓을 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 


피해 여성들의 진술에 따르면, 그들은 완전히 선의로, 장차 모델이나 의류 관계 일 같은 걸 해보고 싶다는 그런 꿈을 갖고서 윤중천을 만난 여대생들이었는데, 윤중천이 아무런 경제적 대가도 없이 순전히 폭력과 협박으로 최음제를 먹이고 성접대를 강요했으며, 동영상까지 무단촬영한 것이었다. 그리고 김학의는 이러한 사정을 다 알 수 있었을 텐데도 태연하게 그 여성들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한번도 아니고 강원도 원주시와 서울 등지에서 수차례나...



게다가 더 큰 문제는 그 여성들에게 윤중천이 마약을 먹인 정황도 포착됐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경찰은 윤중천의 강원도 별장에서 유력 인사들에게 성접대를 했다고 진술한 여성 3명의 머리카락을 뽑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냈는데, 분석 결과 여성 1명의 모발에서 필로폰 성분이 검출됐다. 그리고 나머지 2명의 머리카락에서도 마약 성분이 검출됐다. 


검찰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 성상납 받는 데 정신이 팔린 나머지 마약 먹은 여자와 몸을 섞었는데도 이를 전혀 몰랐거나, 여자가 마약 먹은 걸 알았을 텐데도 그냥 눈감아 주었다는 혐의를 받게 된 것.


이에 김학의는 연루 의혹을 전면 부인한 뒤, 2013년 3월 21일 법무부 차관직에서 전격 사퇴했다. 



후일, 2019년 3월에 들어서야 박관천 전 경감은 이 사건이 당시 민정수석실에서 알고 있고 공직기강비서관실도 이를 여섯 번 보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소 부담이 가는 수준이라 임명이 강행되었으며, 이 배후엔 최순실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전·현직 군장성, 미군 간부도 별장 접대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1953년 8월 30일 충청북도 청원군 내수읍 세교리 (현 청주시 청원구)에서 태어났다. 내수중학교와 청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5년부터 보병 소위로 지냈다. 참고로 육군사관학교 제31기 출신이다. 위탁교육으로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에 들어갔고, 1979년에 학사 학위를 받았다. 영관급 장교이던 1992년에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외교안보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군 경력으로는 1982년부터 1984년까지 육군사관학교 전사(戰史)학과 교수를 지냈고 국방부 정책기획관, 육군본부 비서실장과 전략기획처장, 53사단장 등을 지냈다. 국방부에서 근무하다가 중장 시절에 수방사령관을 지냈고 육군 참모차장을 지내다가 바로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했다. 2010년에는 합동참모의장으로 영전했고 2011년에 군문을 나섰다. 야전군사령관을 지내지 않았는데 그동안 맡았던 보직 등을 보면 야전군 지휘관보다는 정책 등을 다루는 관료에 가깝다.


육군 대장 진급을 위한 커리어에서 제일 중요한 두 개의 보직이 사단장과 군단장인데, 대장 진급자들을 보면 사단장이나 군단장 중에서 최소 1개는 전방 야전부대 지휘관 경력이 있는데, 한민구의 경우 사단장과 군단장 모두 전방 야전부대 경력이 없다. 군장장급 직위를 수방사령관 으로 보직 받긴 했지만 이 역시 전방 야전부대는 아니다. 육군 출신 합동참모의장은 야전군사령관 경력이 필수나 다름 없을 정도로 야전군사령관을 거치고 합동참모의장으로 영전하는데 한민구의 경우 야전군사령관 경력 없이 합동참모의장으로 영전했다. 어찌보면 관운이 매우 좋은 모양.


전역 후 국회의원 출마(충북 청주)가 예상되었으나, 새누리당의 요청을 거절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무래도 박근혜 정권 출범 후 국방부장관으로의 취임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2014년 6월 30일에 김관진에 이어 국방장관으로 취임하였다. 취임 직후에 제28보병사단 폭행사망 사건이 언론에 공개되어 대국민사과를 하는 등 곤욕을 치르고 있다. 그러나 해당 사건은 한 장관이 취임하기 전에 발생한 사건이며, 그가 취임하기 전에 조직적인 사건 축소·은폐 의혹이 있었으므로 한 장관보다는 김 전 장관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김관진 한민구


다만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2달이 지났고 전 정부 주요 인사들이 떠나는 동안 후임 내정자의 임명이 난항을 겪는 모습을 보여 현직에서 물러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그의 임명이 확정되며드디어 7월 13일에 국방부 장관 직에서 물러났다.


가족으로는 부인 곽정임 여사와 슬하에 1남 1녀가 있다. 할아버지가 의병장이었던 한봉수이다.


의병장 한봉수

의병장 한봉수 한민구



  • "방산비리는 생계형비리다." -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2015년 6월 16일 불거진 방산비리를 두고 "예전엔 방산비리가 대형 비리였지만, 요즘은 생계형이다."라는 너무나도 황당한 발언으로 공분을 샀다. 물론, 과거에는 권력 남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비리가 주를 이루었다면 현재는 납품업체의 이권을 봐주고 대신 금품이나 전역 이후 일자리 알선 등 이루어 지는 양상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방산비리의 양상의 변화를 그런데로 맥락을 잘 짚은 것은 맞다.


그러나 문제는 부적절한 용어의 선정이었다. 대한민국 국민 평균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급여와 연금을 받는 고위직 군인들의 비리를 단순한 생계형 범죄와 동일선상에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과연 방산비리 척결에 대한 의지가 있는 것인가?"는 의문을 낳고 있다. 결국 6월 19일에 해당 발언에 대해 사과했다. 그러나 한번 시작된 논란은 쉽게 꺼지지 않는 중이다.


다만, 한편으로는 방위사업청에 파견되는 군인들이 이후 진급에 어려움을 겪는 등의 이유로 업체들이 전역 후 일자리 알선이나 금품 유혹을 뿌리치기 쉽지 않다는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존재하는 만큼 생계형 비리라는 말이 마냥 틀렸다고 보기 힘들다는 측도 존재한다. 


물론 이런 입장 가진 사람들도 비리를 옹호하는건 아니고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냥 일반인 회사원들은 중간관리직 단계에서 퇴직 당하면 군인들 이상으로 재취업에 어려움을 겪는다는걸 생각하면 결코 옹호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도 하고.


문민통제가 없었던 시절에도 방산비리는 참수형 이상으로 집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생계형 국방장관 한민구의 발언이 대단히 부적절했던것은 사실이다.


  • THAAD 허위 보고 논란

이 후 2017년 5월 30일엔 사드 추가반입을 한 것을 인수인계를 하지 않았고 국방부가 이를 숨겼다는 정황이 드러나면서 전임자였던 김관진 실장과 공모하고 대통령에게 명령 불복종으로 항명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받고 있다. 


청와대는 해당 사실을 밝혔는데, 6월 말 미국과의 회담을 앞두고 사드 '배치'에 대하여 별도보고를 지시했다. 한민구는 보고시에 사드 2기 배치만을 보고 했다. 그날 저녁 사드 배치 관련 장성에게서 청와대 관계자가 전화로 추가 4기 반입에 대한 정보를 전달 받았고 익일 오찬에서 청와대 안보실장은 한민구에게 사드 추가 배치 (반입말고) 확인을 요청하였다. 


한민구는 "그런 게 있었습니까?"라고 반문, 30일 문재인 대통령의 직통 전화에서 사드 발사대 4기 반입(배치아님)이 최종적으로 확인됐다. 6월 2일엔 '사드 배치에 대해 정부의 입장변화가 없을 것'이란 의견을 한미국방장관 회담에 시사할 것임을 밝혀, '민주적 절차를 밟고 국민들을 설득할 과정이 필요하다.'란 뜻을 전날에 밝혔던 문재인 대통령의 의사를 대놓고 무시했다.

 

한민구 명령 불복종


  • 그 외 각종 논란들 

2016년 7월 5일 국회대정부 질문에서 제28보병사단 의무병 살인사건을 두고 그런 작은 것을 가지고 전체를 문제시라는 발언을 했다. 다른 데는 다 멀쩡해서 그때 국방부 자체 조사만으로 가혹행위가 4천 건이나 적발되었나 '그런 사람을 패서 죽이는 일은 거의 안 일어나는데 군대가면 맞아 죽는 것처럼 그런다'는 의도로 말한 것 같지만, 맞아 죽는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어도 군대에서 부조리를 당하거나, 육체적, 정신적 피해를 입은 사례는 수도 없이 많았고, 군사법원의 문제점도 저 사건 하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으니 논점 일탈이다. 또한 이 발언을 할 때 피해자 故 윤일병의 어머니를 비롯해 군 피해자의 가족이 방청하고 있었다. 


2016년 11월 11일 최순실 게이트로 국회에서 질의를 받는 중 록히드 마틴과의 계약으로 인해 집행될 예산조차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었다. 국방부 장관이라는 사람이 록히드 마틴의 애치조차 몰랐다는 것이다.


한민구 박근혜


2016년 11월 14일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을 추진해 가서명했다. 이명박 정부 때 중단되었던 협정을 한 달도 채 안 되어 시국이 혼란한 틈을 타 속전속결로 끝내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는데 사람들이 찾아보지 않았을 뿐 4년 전 중단되었을 때부터 재추진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고 몇 년 전부터 꾸준히 말이 나왔고 홈페이지에 공고까지 띄웠다. 국방부는 이에 대해 지금은 안보가 중요할 때이며, 북한의 SLBM을 막고 북핵에 대한 정보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자신의 임기 도중 군 내부 전산망이 북한으로 추정된 세력에게 해킹당한 적이 있는데, 12월 국회 국방위원회 보고에서 "그렇게 심각한 영향을 초래하는 수준은 아니다"라고 보고한 적이 있는데, 해킹 당시의 군 작계 중 일부인 작전계획 5027이 유출된 걸로 확인되었다. 엄연한 군의 작계가 적으로 추정되는 세력에게 넘어갔는데 이런 망발을 국회 국방위원회에 보고하는 자가 과연 국방부 장관에 적합한 자질을 가졌는 지부터가 의문이다. 더불어 군의 가장 최신 작계인 5015도 털린 게 드러나. 충격과 공포를 주고있다.


국가정보원·국방부 여론조작 사건으로 인해 선임 국방부장관인 김관진이 구속 수감됨에 따라 한민구도 수사 대상이 되었으며 구속 수감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물론 이 사건에 대한 수사대상 중 최선임자가 다름아닌...


그리고 2017년 계엄령 모의 사건 으로 인해 또 수사대상이 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가 기각될 경우 바로 시위에 참가한 국민들을 병력으로 제압하기 위해 김관진과 모의하여 각 부대 병력들을 준비했다는 정황이 포착되었고, SBS에서는 한민구 장관의 지시로 기무사가 해당 문건을 작성했다는 뉴스를 내보냈다. 이로 인해 한민구는 김관진과 같이 군인권센터에 의해 내란음모죄로 고발당했다. 안그래도 국가정보원·국방부 여론조작 사건에 대한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 사건에 대한 재판까지 같이 받게 되었다. 


한민구 문재인

타임지와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150대 영향력 있는 정치인물 중 93위에 들기도 했다.(2013) 이해찬, 전해철과 같이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후보로 유력한 인물 중 한 명이다.  


  • 성장과정 

1957년 서울특별시에서 우당 이회영의 손자이자 이회영과 한산 이씨 이은숙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아버지 이규동과 어머니 변봉섭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전 국회의원이자 국가정보원장 이종찬의 사촌 동생이다. 그리고 성재 이시영의 조카손자이다.


국민학교 시절 경기도 시흥군 안양읍(현 안양시)으로 이사하여 성장 했다. 예원학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노동자 야학운동을 하다가 대한민국 육군 병으로 복무하였다. 이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다시 학사편입으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공법학과 3학년에 편입하였다. 1988년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당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 가입하였다.


  • 정치 활동 요약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자유민주연합 김일주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노무현을 지지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2013년까지 대한농구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열린우리당 원내부대표를 역임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10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8년 국정감사에서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에게 "MB의 졸개"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유인촌 장관이 "찍지 마 X발"이라는 표현을 하게 만들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5년부터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를 역임하고 있다.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를 주도했으며 3월 2일 마지막 주자로 나와 대한민국 국회의원 단독 연설론 가장 오래 발언한(12시간 32분) 인물이 되었다. 그동안 문재인 대표체제에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파업을 벌인 행위는 잘못된 것이지만 필리버스터를 통해서 다시 보게 되었다는 의견이 많고, 새삼스레 선친들의 독립운동 행적이 재조명 되기도 했다.


다만, 지역구인 만안구의 여론 자체로는 새누리당 후보와 기껏해야 박빙 우위인 데다, 당 내에서는 강득구 후보 에게 밀리는 지라 20대 국회에서 그를 보게 될지는 미지수였다. 평촌신도시를 업은 동안구가 만안구를 앞지른 상황 에서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딱히 발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현실에 유권자들이 피로감을 느낀 탓이다. 안양 지역구 3구를 전부 양당의 원로 의원이 차지 하고 있는데, 이러한 점 때문에 안양 내 타 지역구 의원들에 비하면 컷오프 유력 후보 쇄신 대상으로 더 부각되는 처지.


이종걸 프로필]


그런데, 경쟁력 높은 같은 당의 강득구 후보를 제치고 경선도 아니고 단수공천 됐다. 공천위원장의 말로는 딱히, 이종걸 후보가 경쟁력이 있어서 단수 공천한 것이 아니라 원내대표로서 고생했기 때문에 단수공천을 했다고 밝혔는데, 이는 민주주의 원칙에도 어긋나며, 공정하지 않은 선정 방식. 즉, 계파 배분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정청래의원이 같은 당내 인물에게 날린 막말을 이유로 공천배제를 당한 반면, 밑에 나와 있듯이 현 대통령에게 막말을 날린 적이 있는 인물이 막말 논란 없이 단수공천을 받았다는 것 때문에 공천의 불공정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거론되고 있으며 필리버스터로 얻은 인기를 다시 날려먹고 있다. 


단수 공천 확정 이후로는, TV조선을 비롯한 종편에 출연하면서, 이해찬 전 총리에게 "자진해서 출마를 포기하라"고 압박하는 등, 역시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걸 보여주며, 친노 진영 네티즌들에게 필리버스터로 쇄신된 이미지를 다 날려먹었다. 


본선에서는 만안구에서 시, 도의원을 지낸 새누리당 장경순 후보 와 맞붙었다. 투표전 여론조사에서는 별로 상황이 좋지 못했으나 문재인 전 대표의 응원영상 효과 덕인지 개표결과, 45.4%를 득표해 8762표차로 이기고 5선에 성공했다. 


그리고 2016년 4월 15일 비상대책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와 함께 비주류로 분류되는 김종인, 박영선 의원 등의 만류에도 7월 29일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로 출마하였고, 8월 5일 당 대표 예비경선을 통과했다. 그러나 8월 27일 본 전당대회에서 추미애에 밀려 패하였다.


그후 19대 대선 경선에서는 이재명 후보 지지선언을 했다. 그렇지만 문재인이 후보로 선출되자 문캠에 합류했다. 합류 후에는 정력적으로 대선에서 활동했으며, 특히 대선토론 당시 유승민에게서 "북한이 우리의 주적이냐?" 라는 까다로운 색깔론공세에 대해서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반박해 대선정국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특히, 보수언론 및 보수정파에서 시동 걸려고 했던 색깔론 공세에 완벽한 반박의 논리가 된 데다가, 글 쓴 사람도 문재인과 사이가 아주 나쁜 걸로 여겨지던 이종걸이라는 점이 큰 화제가 되어 뉴스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등, 문재인 후보에 대한 색깔론 확산을 틀어막은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종걸 페북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에는 존재감이 많이 떨어진 편. 소속위인 국방위원회 와 지역구에서의 활동은 여전히 활발하지만 중앙당에서의 활동은 상대적으로 조용하다. 추미애 대표의 '머리 자르기' 발언에 대해 국민의당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비판한 사례 외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2018년 6월 21일 새 당대표를 뽑는 8.25 전당대회 출마를 당내에서 가장 먼저 공식화했다.


  • "문재인 대표는 부산 마이너리티" 발언 논란 

2016년 1월 8일에는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기자들과 식사를 하며 당시 당 대표였던 문재인 의원에게 "문재인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의 힘을 이어받은 부산개혁파"라며 "부산 마이너리티라 그런지 화법이 안 맞는다. 어제 문 대표와 만났는데 생각이 자꾸 멀어지는 것 같다" 는 발언을 했다. 이어 "여의도 야당이 부산개혁파 손에 바뀔 수 있느냐는 말도 나온다"는 발언까지 하며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려는 일부 의원들과 궤를 같이 하려는 취지를 내 비쳤는데...


2015년 12월 중순부터 최고위원회에 불참하는 등 원내대표로써 당무를 거부하고 있는 중이었기에 더불어민주당의 핵심 지지층들로부터 원내대표가 당무거부로도 모자라 당 대표를 잡아 흔들고 분열까지 조장하고 있다며 맹비난을 받았다. 


이 후 19대 총선이 끝난 5월 5 MBC 라디오 [신동호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는 "두 사람의 스타일의 차이로 서로 부딫히는 경우가 많았었다. 문재인 전 대표를 곁에서 모시면서 인간적으로 그렇게 한 것에 대해서 정말 후회도 된다"고 말했었으며, 8월초 8.27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 대표 출마를 선언하며 오마이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분당 사태의 절반 이상은 문재인 당시 대표의 책임이다"고 말하면서 "부산 마이너리티 발언은 '그들이 어떤 현상을 주도하고, 그야말로 안정된 주체세력으로 추진해나가는 데는 부족한 측면이 있다'고 얘기한 것이었는데, 이번 총선을 보니 아니었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1월에 있었던 인터뷰에서의 발언을 계기로 '부산 마이너리티'란 용어는 친노, 친문 지지층들이 이종걸 의원을 비난할 때 수시로 언급되는 중.


이종걸 문재인

現 정의당 원내대표

심상정과 함께 대한민국의 진보정당 소속으로 최초이자 단 둘뿐인 3선 의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노동운동가이다. 2018-07-18 08:05:10 기준 제20대 국회의 창원시 성산구의 국회의원으로 정의당 소속이다. 뛰어난 대중성을 갖고 있는 진보정당의 정치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 노회찬의 어린시절

1956년 부산에서 아버지 노인모와 어머니 원태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함경도 출신으로 6.25 전쟁때 부산으로 피난했으며 전쟁 직후 서로 만나 결혼해 둘 사이에 노회찬, 노회건 형제를 두었다고 한다. 매우 유복한 환경 가운데 태어나 문화적으로 풍부한 유년시절 속에 성장했다. 


노회찬의 어린시절


부산 초량국민학교, 부산중학교를 졸업했다. 어린 시절부터 첼로를 배워 수준급의 첼로 실력을 자랑한다. 정치 초년생 시절에는 '첼로를 켜는 정치인'으로 어필을 많이 해서 90년대 초반에는 노회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첼로였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치적 이념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고, 본인도 정치인으로서 인지도가 올라간 후에는 첼로에 대한 얘기를 꺼려하고 있다. 학창 시절 음악 뿐만 아니라 펜싱과 육상에 뛰어났다고 한다. 


1972년 부산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재수하여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이 때부터 고향인 부산을 떠나 서울에서 생활했다.


경기고 재학시절에는 10월 유신에 반대하여 반독재 투쟁에 참여했다. 유인물을 만들어서 배포하는 일을 하며 이 시기부터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 시기 다양한 책을 접하며 함석헌, 선우휘, 백기완 등 재야인사들과 만나게 된다. 


당시 경기고 동기 중에는 이종걸과 황교안이 있다. 황교안은 학도호국단 연대장을 맡은 적이 있는데, 이종걸 노회찬이 반독재 유인물을 뿌리고 다닌 걸 생각하면 참 대조적이다. 또 1년 선배로는 정두언 전 의원이 있다. 나중에 박근혜 정부 말기 탄핵 정국에 "황교안 대행과 고교 동창인 점은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1976년,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대학 입시에 낙방했다. 그는 곧바로 군대에 지원해 입대한다. 군복무를 마친 뒤 1979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노회찬의 대학시절

  • 노회찬의 대학시절 : 민주화 운동 그리고 노동운동

대학에 입학 후 민주화운동을 계속 하던 중 광주 민주화 운동에 크게 충격을 받는다. 그는 조직화된 노동자가 앞장서야 근본적인 변혁이 가능하다는 판단하에,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든다. 그는 고려대학교 재학 중인 1982년 영등포 청소년 직업학교(현 서울산업정보학교)에서 용접기능사 2급 자격증 등을 따서 용접공으로 현장 노동자들 틈으로 섞여들어가, 일명 '학출'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노회찬은 1980년대 초중반부터 시위를 조직하고 노조를 결성한 죄로 수배되었다. 그는 꽤 긴 시간 동안 수배자 신분으로 도망다녔다.


정치 인생 내내 노동자와 서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성향을 지키고 있으며 대한민국 정치판에 만연해 있는 권위주의나 엘리트주의를 지양하고 대중주의적 정치를 가장 잘 실천하고 있는 정치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같은 정당의 심상정 조승수 등과 더불어 학생 운동 출신이라는 정체성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제도권 정치에 성공적으로 연착륙한 몇 안 되는 정치인이다. 특히 노회찬은 원래 유복한 가정 출신이었는데도 고시나 인맥 등을 통해 입신양명에 치중하지 않고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했는데, 환경이 아니라 소신으로 형상한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 지키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장점과 더불어 운동권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강성의 이미지 대신 소통력과 친화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서인지 나름 많은 풍파를 겪었음에도 유명세에 비해 비판이 비교적 적은 편. 2016년 메갈 문제로 정의당과 심상정이 한참 비난을 받았을 때에도 노회찬에 대해서는 비교적 우호적인 평가가 많았다. 


다만 그에 대한 비판이 적은 것은 기본적으로 주목도가 낮은 소수 정당에서만 활동하였으며 검증압박이 심한 대선이나 광역단체장의 유력후보가 된 적도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과거 이력들이 많이 발굴되지 않은 측면도 있다.


노회찬 민주화 운동, 노동운동


한편 나름 유명 정치인이 되었음에도 주류정당에 편입되지 않고 계속 진보성향의 정당에 몸담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일각에서는 소신과 초심을 잃지 않고 있다고 호평하는 반면 다른 일각에서는 2000년대 이후 민주당 등의 중도성향의 정당과 정치적 지향성 측면에서 별 차이가 없어졌는데도 분파적 성향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성격이나 성향 측면에서 봐도 진보 정당보다는 좀 더 대중적인 정당에 어울린다는 평가가 많다. 


  • 노회찬의 언변

언변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도 유명한데, 유시민 못지 않게 뛰어난 말솜씨를 자랑한다. 도리어 어떤 경우에는 유시민도 능가하는 언변을 보여주기도 한다. 


유시민이 보수 계열 정당의 정치인 중 토론 상대로 가장 좋은 상대로 꼽은 인물이 박형준과 유승민으로 모두 정계 인물 중 뛰어난 토론 실력으로 유명한데, 노회찬은 그 박형준을 상대로 맹공을 퍼부어서 잠시 쩔쩔매게 한 적까지 있다.(...) 그리고 썰전에서 다시 만났다. 


노회찬 썰전


다만 말하는 스타일은 두 사람이 전혀 다른데, 유시민이 뛰어난 논리력과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사안에 대해 분석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노회찬은 상황에 맞는 적절한 비유와 풍자를 통해 복잡한 사안을 직관적으로 이해시키는 능력이 탁월하다.


이 때문에 김어준 총수는 "홍준표와 토론에서 다이다이(...)를 떠서 상대가 될 만한 정치인은 역대급으로 뽑아도 한 손을 채우지 못하지만, 노회찬 의원은 능히 상대가 될 만하다"고 평했다. 홍준표의 토론 스타일은 논리 대신 강한 어휘로 상대를 찍어누르는 타입이기에 논리로 상대하려다가는 도리어 말려들기 십상이지만, 노회찬 의원의 언변이라면 그것마저 받아치는 게 가능하다고 본 듯. 글쎄 19대 대선 토론보면 딱히 그런거 같지도 않은데 그야 뭐 대선 땐 사람이 맛이 가니까.. 


또한 특유의 유머감각과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는 여유가 있어서 일단 그가 방송에 출연하면 민감한 사안에서도 험악하거나 민망한 분위기가 잘 연출되지 않으며 항상 최소한의 재미가 보장된다. 여담으로 노회찬이 100분토론에서 손석희에게 대놓고 노안과 나이 인증을 강제로 당했다.(...) 이런 능력 덕분에 정치인 노회찬은 단순히 진정성이 있는 정치인을 넘어 대중적인 인기도 높아졌다.


  • 사실상 진보세력의 원내 입성을 기대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

박근혜 정권에서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으로 통진당 세력이 무너진 후, 노회찬과 심상정이 이끌고 있는 정의당이 사실상 진보세력의 원내 입성을 기대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되어 버렸다. 정의당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나름의 입지와 지지도를 얻는 데는 성공했지만 기존 주류정당의 대안으로까지 부상하지는 못한 상황이다. 


그 원인으로 당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특유의 진보성을 구축하는 대신 대중성에만 치중하다가 진보정당 특유의 선명함이 많이 퇴색하고 기성정당과의 차별성이 모호해진 점, 노회찬/심상정/유시민 등 소수의 스타 정치인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고 인재 영입이나 양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점 등이 지적되고 있다. 


2016년 현재 이들도 이미 환갑 줄에 들어섰기 때문에 빨리 지명도와 자질을 갖춘 후배 정치인이 나타나지 않을 경우 그마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진보세력이 크게 위축될 우려가 있다. 때문에 최근에는 당 수뇌부에 젊은 당원들을 기용하는 등 세대교체를 진행 중이다.


노회찬 심상정  정의당



[출처 : https://namu.wiki/w/%EB%85%B8%ED%9A%8C%EC%B0%AC]

김종필에 이어 대통령 빼고 다해본 사람. 대한민국 법조계의 전설이자 대한민국 현대 정치에 족적을 남긴 인물.


대한민국의 법조인, 정치인이다. 법조계에서 큰 이름을 날렸으며, 현재의 선관위와 감사원을 확립했다. 호는 경사(徑史). 대법관, 감사원장, 국무총리, 한나라당 총재, 자유선진당 총재 등을 역임했다. 그래서 흔히 하는 말이 "대통령 빼고 다 해본 사람"이라고 한다. 외삼촌 김홍용, 김문용, 김성용도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2018/06/23 - [실시간 핫이슈/정치] - 김종필은 누구인가? 영원한 2인자, 원조 '대통령 빼고 다 해 본 사람...(문재인 대통령에게 악담 영상)


이회창은 개혁보수에 가까웠고 실제로 군부 세력의 적폐를 청산하는 데 앞장섰다.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이 민주적이었던 시절의 최후의 보루. 민정계의 지지를 얻기도 했지만 이회창 본인은 독재정권에 비판적인 만큼 YS를 잇는 민주계에 더 가까웠고, 이회창이 은퇴한 후 한나라당은 TK에게 넘어가며 권위주의 및 수구화를 겪게 되었다. 민주당 지지 유권자 입장에선 이회창이 무너지고 이명박근혜 및 홍준표가 나타났다고 보는 셈이다. 


실제로도 YS-이회창의 개혁보수적 성향 탓에 현재 자유한국당이 갖는 경북 텃밭이 그 당시에는 없었는데도 김대중/노무현과도 정말 아슬아슬하게 싸우다 아깝게 졌을 정도로 국민들에게 인기 또한 모자라지 않았다. 이명박의 국민행동본부, 박근혜의 어버이연합이 나타난 해가 2006년 경으로, 이회창과 민주계가 힘을 잃기 시작한 때이다. 뒤집어 말하면, 김영삼이나 이회창이 보수정당을 장악할 때에는 저런 우파 단체들도 날뛰지 않았다. 애초에 군부 세력을 구속시키고 청산하던 사람이니 그럴 일이 없었겠지만.


문민정부 당시 감사원장을 맡아 초창기 문민정부의 개혁운동에 큰 몫을 담당했던 인물이었고, 바로 이 성과 덕분에 이회창은 대권을 노릴 수 있는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치인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 중 하나였던 포용력이 너무 부족했다. 이런 그의 실책은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여실히 드러났는데, 경선에서 진 이인제를 직접 설득하지 않아 독자 출마를 말리는 데 실패함과 더불어, 3김정치 청산을 주장함으로써 김종필이 이끌었던 자민련을 자극해 DJP연합을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결국 이 2가지는 근소한 차이로 김대중 후보에 밀리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2002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진보진영이 노무현 후보를 중심으로 단결한 반면에 보수 진영은 상당히 사분오열 되어 있었다. YS나 박근혜는 이회창을 지지했지만 과거 이회창의 3김정치 청산 주장을 기억하고 있던 이한동, 김종필과 같은 충청 보수 세력은 끝내 이회창을 지지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그리고 이회창에게 팽당한 이기택과 같은 구 민주당 세력은 아예 노무현을 지지했다.


여기다가 이회창을 대권후보로 만들어 줬던 대쪽 이미지 역시 아들의 병역 문제와 관련한 노무현 진영의 흑색선전으로 인해 국민의 역린을 건드려 무너지게 되며 끝내 대권에 실패하고 만다. 이회창의 두 아들의 불법적인 병역기피 의혹은 결국 법적으로 무혐의 처분으로 종결되었다. 그리고 진실이 밝혀졌을 땐 이미 모든 게 끝났다.


이회창이 당권을 장악하던 때까지의 한나라당은 수구 이미지가 약한, 정상적인 보수주의/자유주의 노선의 정당이었다.(지역 기반도 TK/군부가 아닌 PK 중심의 민주화 세력이었다) 김영삼을 이은 보수정당 내 민주계 라인이었던데다 이회창 본인이 독재정권과 싸웠던 사람이라 빨갱이 몰이나 독재정권 찬양 등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고, 이 때문에 박근혜가 입당하고 나서 자주 마찰을 일으켰다. 



이후 대선에 출마하였던 보수진영의 인사들과 비교하자면, 명확하고 구체적인 국가관 및 정책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명박, 박근혜, 홍준표로 갈수록 점점 질이 떨어진다는 말도 나올 정도.(유승민은 일단 논외.) 정치에 민감한 민주당 지지자이나 중도보수 지지자들 사이에서 이명박근혜가 아니라 이회창정도의 인물이 대통령이 됐으면 보수정당이 일본 자민당처럼 계속 장기집권했을 가능성 또는 최소한 보수가 제대로 망가지는 사태는 피할 수도 있었다는 말도 나온다. 


후에 '우리 당이 수구적으로 변해간다' 라며 한나라당에서 민주당으로 이탈하는 정치인이 생기거나 한나라당이 권위주의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도 거의 대부분 이회창이 연패를 당하고 한나라당에서 물러난 후부터이다. 이명박이나 홍준표도 민주계와 관련이 있거나 그와 협력은 했던 관계이지만 하도 권위주의/종북몰이 등의 논란 때문에 김영삼-이회창과 전혀 다른 평가를 받는 이유도 그렇다. 


이회창이 무너지고 나서 한나라당 내 민주계 세력이 약해지고 친이와 함께 다소 권위주의 노선을 걷고, 후에는 친박이 장악하며 수구 색채가 완전히 커져버린 것 때문에 후대에 이런 평가가 나오는 것이다. 김영삼-이회창의 한나라당 시기에는 워낙에 친박 지지층과 척을 져서 경북에서 반감을 샀던 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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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에 대해선 보수정권의 치명적이고 영원할 약점인 "차떼기나 총풍사건 같은 부패 스캔들은 도대체 뭐냐?"는 지적도 있다. 대권후보로서 한 삽질은 비록 대통령이 되지 못했음에도 역대급으로 컸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회창 본인이 있던 시기의 한나라당은 정상적인 보수주의/자유주의 정당이었다고 하지만, 그 한나라당이 수구화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회창에게 있었다. 이회창 본인이 1997년 신한국당 대선 경선에서 승리한 데에는 민정계의 단합과 지지가 있기 때문이었고, 1998년부터는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동진정책에 맞서 기존 지지층의 재결합을 위해 본격적으로 민정계와 구 유신계에 손을 내밀었다. 김영삼이 독재정권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정치인들을 무작정 내쫓고 탄압하며 반감을 샀었다. 


사실 당장 박근혜를 영입하고 공천을 준 사람이 이회창이다. 물론, 박근혜는 그때 당시 좋은 이미지였기에 김대중도 박근혜를 영입하려 애썼고, 박근혜가 군부 출신을 정계에 다시 데려오는 것을 보고 독재정권에 반감이 있던 이회창이 갈등을 만들긴 했지만. 


당시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동진정책이 매우 거셌고 특히 김대중의 국민회의는 정체성과 무관하게 세력확장을 위해 민정계 출신 인사들을 대거 영입하는 초강수를 두고 있었기에 이를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회창 본인이 있을 적에는 이회창의 강력한 당 장악력과 카리스마 및 독재정권에 비판적이던 민주계의 정신적 구심점으로서 한나라당은 정상적인 보수정당일 수 있었다. 그러나 2002년 대선 패배로 강력한 구심력이었던 이회창이 은퇴하면서 한나라당은 대혼란에 빠지고 결국 당 주도권은 박근혜와 민정계에게 넘어가고 만다. 남은 민주계도 차악으로 이명박을 지원했지만 이명박의 권위주의를 겪으며 하나하나 이탈하게 되고 박근혜에게 숙청당하게 된다.



의외로 현재 한국에선 생각하기 힘들지만, 보수정당 인물임에도 대선 당시에는 수많은 연예인이나 유명인들의 지지선언을 받았다. 심현섭, 강성범, 박성호, 김대희, 이승철, 설운도, 이용식, 홍서범, 조갑경, 변진섭, 박철, 김인문, 심권호, 유남규, 베이비복스(!) 등. 보통 유명인이나 연예인들은 민주당 후보들을 많이 지지하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이회창이 라이벌이었던 노무현처럼 독재정권에 맞서고 양심을 지키던 법조인이라는 전적이 있기도 했지만, 현재 한국이 미국처럼 보수 지지 연예인이 이순재, 송해 정도 급의 거물급이거나 김흥국처럼 재밌는 이미지로 보수 색채를 상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힘들다는 걸 고려하다면 그만큼 이회창이 진보적인 유권자들 사이에서도 우호적인 인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명박 및 박근혜가 국정원 같은 공공기관을 악용했지만 김영삼과 이회창은 안기부/국정원을 민주화시켰고 압수수색이 가능할 정도로 만들어 놓았었다. 2010년대 후반 들어 보수정당의 여러 문제점 속에서 YS-이회창이 계속 재평가되는 이유도 그들이 독재정권/반민주주의에 맞섰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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