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대선 당시 이회창이 전두환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우자 감옥에 있는 전두환이 이회창에게 "고맙다"며 "우리 때문에 정치적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니냐" 화답할 만큼 매우 기뻐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2018/07/03 - [실시간 핫이슈/정치] - [이회창은 누구?] 대통령 빼고 다해본 사람


옥중 전 씨 사면 건의 이회창 대표에 고맙다, 구두 메세지 그에 대해 이회창 후보도 전두환의 화답에 "고생 많으시다. 추석 때 나오시기를 바랐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다"고 전두환 측에게 화답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한겨레에서는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추석전 전두환 노태우 두분의 석방을 바랐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게 됐다"고 전두환 측근들에게 화답하였다고 보도했다.


이회창 비판자들에게는 "엘리트주의에 극도로 찌든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디어오늘>의 기사에 따르면 고려대 출신 기자에게 "고려대 나오고도 기자 할 수 있느냐??"라는 말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기자는 못해도 대통령은 할 수 있다 만약 사실이라면 고작 고졸인 김대중과 노무현에게 패배한 것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고려대 출신한테 진 것도 충격이고 그러나 이회창이 영입한 비서울대 출신 인사들이 많고 (예컨대 연세대 최경환 경제부총리나 고려대 오세훈 전 서울시장) 이회창의 분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최측근인 이흥주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은 명지대, 오랜 세월 이회창을 보좌한 이채관 총재 정무특별보좌관은 경남대를 나왔다는 사실로 볼 때, 공적으로는 유능한 사람을 두루 뽑은 편이었으나 사적으로 마음 속 깊이 묻혀 있던 엘리트주의가 술자리를 빌어 표출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취중진담



5.16 쿠데타 직후 혁명재판소 1심 재판관으로서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사법살인행위 중 하나로 꼽히는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에 대한 사형선고에 참여한 바 있다. 참고자료 이 사건에 대해 이회창 본인은 초임 판사 시절에 혁명재판소 재판관으로 사실상 강제로 차출된 것이며 자신으로서는 해당 판결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고 해명하였다. 


즉, 법률의 위헌적 소급적용에 의한 정치탄압 및 사법살인극에 참여했다는 사실 자체는 본인도 부정하지 못한 이회창의 대표적인 흑역사이다.


2002년 대선 당시 선거철의 정치인이면 누구나 그러듯이 시장을 찾아가 친서민 유세를 벌였는데, 한 상인에게 흙 묻은 생오이를 건네받고는 그대로 우적우적 씹어먹었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었다. 인터넷에선 '이회창 흙오이 사건' 이라고 유명해졌으며 "분명히 봤다"라는 증언만 있을 뿐 진귀한 장면을 담은 사진 등 증거가 없어서 '인터넷 3대 미스터리' 로 화자되기도 한다. 


이후 흙오이는 선거철만 되면 심심치않게 시장에 등장하는 정치인을 빗대거나, 정황은 아는데 찾을 수 없는 자료를 지칭하는 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하지만 기사 당시 대선 경쟁과정에 있던 상대당의 대변인의 발언에서 보듯이 꼭 카더라 통신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2002년 이회창 대통령 후보가 5월 15일 서울 은평구 대조동 동명여자정보산업고등학교를 방문해 일일교사로 강의를 했다. 350여 명의 여학생들이 모인 강당에서 시작을 농담으로 해서 분위기를 풀어보자고 한말이 ""여러분들을 보니 명랑하고 '빠순이 부대'가 많은 것 같아요". "우리 당에도 많아요. 지방 돌아다녀보면 오빠부대 많아요. (저는) 오빠가 아니라 '늙빠'지. 늙은 오빠….". 분위기가 썰렁해지자 그냥 준비해온 강연을 하고 마쳤다.



기자들에게 비보도를 요청했으나 얼마뒤 새어 나가서 세상에 공개되었다. 알고보니 정병국 의원이 어린 여학생들 눈높이에 맞춘다고 써줬다고 한다. 이회창은 '10대 나이의 오빠부대'를 뜻하는 말로 썼는데, 학생들은 '술집 여종업원' 또는 '과도한 팬질을 하는 여학생'으로 그 말을 받아 들인것이다.


자유선진당 시절 한 위키러는 모 사회단체 체육대회에 축사를 하는 이회창을 보고는 "저 양반 명색이 대통령 될 뻔한 사람이었는데 여기서 동네 체육대회 축사나 하는 걸 보니 한 편으로 측은(?)해 보였다"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노무현에겐 '노사모'가 있었더라면 이회창에겐 '창사랑'이라는 팬클럽이 있었다. 이회창의 정치 입문과 동시에 천리안·나우누리 등 포털 사이트에 처음 생겼다.기사 하지만 지지자 연령대가 다소 높은 탓이었는지 노사모만큼의 활동량은 보이지 못했고 미풍에 그치고 말았다. 


노무현 지지세가 강했던 젊은층 사이에서는 '이회충', 이회창 지지자들을 '회충알'이라고 부르면서 비토가 심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느 정도 존속은 되었는지 17대 대선에서 정계복귀에는 제법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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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렇지만 어떠한 사이트를 들어갈 때 광고배너창 하단에는 "창 닫기"라는 버튼이 있다. 그런데 당시 대선 정국 때 보수 언론사들의 사이트의 광고배너창 하단에는 이 버튼의 문구가 "창 한 번만 띄워주기"로 바뀌었다. 물론 대선이 끝나고 "창 닫기"라는 문구로 돌아왔다(...)


박정희 군사정부하에서 사법살인 당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재판 때 배석판사 중 한 명이었다는 게 1997년 대선 과정에서 알려지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 자신의 본의가 아니라 강제로 하게 된 재판이고, 배석판사로 아무런 권한도 없었다고 해명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조용수 항목 참조.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이회창이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미니홈피에 유세문구 중 하나로 킹왕昌! 드립을 날리기도 했다. (킹왕짱은 2007~2008년 전후로 인기 좀 있었던 유행어였다. 게다가 이 무렵엔 각 커뮤니티와 젊은층 사이에서 反MB정서가 만연해 있었는데, 이회창은 이명박에 비하면 당시엔 상대적으로 수구적인 색채가 많이 옅어(?)보이는지라 이회충이라며 욕을 먹었던 16대 대선에 비하면 젊은층 사이에서도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정계의 거두였지만 재산은 많지 않은 정도를 넘어서 일반인으로서는 감당도 못 할 양의 채무를 지니고 있다. 08년 국회의원 출마 당시 재산신고 때 무려 채무만 120억 원(...)을 신고한 바 있다. 해명에 따르면 이는 대선 공탁금 등을 환급받지 못한 07년말 기준이라 그렇고 이후 환급받아 남은 빚은 20억 원 정도라고 하나 20억 원도 보통 큰 금액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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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에 3번이나 출마한 데다 마지막 1번은 무소속으로 출마해 모든 것을 차떼기도 못 받고자기 돈으로 해야 했으니 그게 전부 빚으로 남는 것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함 없는 생활을 누리고 있는데 그 이유야 뭐.


2007년 대선 후보 당시 조선일보에서 진행한 문답 인터뷰에서 좋아하는 아이돌 스타로 원더걸스를 꼽았다. 참고로 2002년에는 이효리.


2002년 대선 때 모 산부인과 의사가 '이회창 아들처럼 179cm의 키에 45kg의 몸무게를 지닌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불가능하다'라는 내용의 <179cm 45kg 인간 미이라>(...)라는 책을 출간했다가 공직선거법위반죄로 유죄판결(집행유예)을 받은 바 있다.

보수주의자인 것과는 별개로 동성애에 대해선 긍정적인 인식을 보였다. 2001년 딴지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어준 총수가 국방부장관이 동성연애자라면 어떻게 할 것이냐? 라는 질문에 국방부장관이 동성연애를 하는데 군의 전력이 약화가 되지 않는다면 딱히 문제될 것 없지 않느냐 라는 답변을 했다. 김어준은 이 답변을 듣고 공적 임무와 사적 자연인 사이의 경계에 대한 기준을 확실히 가지고 있었다는 평을 내렸다. 괜히 이회창이 진보적인 유권자들에게도 긍정적인 인식이 있던 게 아니었던 셈


대선 첫 출마인 97년 당시에는 동성애자의 인권운동이 대두되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는데 이 시절에도 "사회운동화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으나 현재의 정치인들 보다도 진일보한 인식을 보여주었다.


이회창의 동생인 경제학자 이회성은 2015년 10월 IPCC(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 의장으로 선출되어 재임중이다. 이는 한국인이 국제기구의 수장이 된 5번째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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