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철 의원 프로필] 민주화 운동 선봉장에서.. 누드사진까지..
대한민국의 언론인, 정치인이다. 1958년 전라남도 광주시(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다.
정양석, 조훈현, 신보라와 더불어 광주전남(光州全南)출신 자유한국당 의원이다.
지역감정이 판을 치기 전 군부 독재에 맞서 투쟁하던 김영삼에 의해 정계에 입문한 경우와 다르게, 심재철이 신한국당에 입당한 시기는 군사정권의 연장인 민정당과의 삼당합당 이후로 김영삼이 인재수집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영입이었다.
광주 출신인 심재철은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대한 결정적인 위증으로 김대중을 사형 선고 받게 하였기 때문에 당시 김대중이 이끄는 평민당 입당에 거절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참고로 이 심재철 항목은 심재철에게 비판적인 글은 끝없이 지워지고 아무도 관심 없어하는 (보통은 그저 본인 홈페이지에나 올라와 있는) 사소한 수상 경력이나 입법 내용으로 도배가 됐었다.
민주화 후퇴의 책임
1958년 전라남도 광주시(현재의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고, 광주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에 진학한 후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대학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10만 명이 모인 집회에서 서울역 회군을 결정하는 오판을 한다.
(이 문장 뒤에 "물론 지도부와 연락 중이던 DJ의 지시에 의한 것도 있다"는 내용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는 심재철 측의 첨부인 듯하다. 그 문장대로라면 서울의 봄 행사의 주동자가 김대중이라는 얘기가 된다. 오오 역사 창조)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서는 전두환의 12.12 군사반란에 항거하기 위하여 수만 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었다. 밤 8시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위 지도부는 계속 시위를 할 것인지 해산할 것인지를 두고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고 한다.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이었던 유시민과 이해찬이 시위 철수 반대를 주장했지만, 심재철은 철수를 강하게 주장하며 서울역 회군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단행한다.
심재철 : "솔직히 처음 예상보다 너무나 많은 수의 인원이 군집했다. 이 많은 인원 수를 통제할 방법은 사실상 전무하다. 이대로 계속 청와대까지 진군하다간 사분오열되어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볼 지 모른다. 일단 각 학교로 해산 뒤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 다시 진군하자"
유시민 : "지금 이 상태에서 해산을 명하는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여기서 물러나면 모든게 끝난다. 이 많은 인원이 현재 여기서 복귀한다면 신군부는 어떤 보복행위를 할 지 모른다. 결단코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걸 끝내야 한다."
당시 서울대 학생회 간부들의 발언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판단은 각자에게 맡긴다.
후에 심재철은 "엄청난 역사의 무게를 감당하기에 20대 초반의 우리는 너무 어렸고, 상황을 너무 몰랐다"는 발언으로 본인의 오판에 대하여 설명하였으나, 그 당시 서울의 봄이 무슨 20대 애들이 몰려와서 난동 부리는 수준도 아니고, 너무나 궁색한 변명이라는 이야기가 매우 많다. 때문에 공수부대가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겁을 먹어 자진 해산했다는 비판이 이후 심재철의 일생을 따라다녔으며, 며칠 후 광주에서 수백명의 시민들이 계엄군의 총포에 희생되고 행방불명 되는 참상이 벌어져, 철수한 학생들은 광주에 대해 평생 일종의 부채의식을 지니게 되었으나 심재철 본인은 5.18 민주화운동을 끊임없이 부정하는 보수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어버린 사람이라는 평가가 따라다니고 있다.
민간인 고문 (서울대 프락치 사건) 주동 후 책임 전가
심재철은 군사정권 당시 독재와 싸운다는 미명 하에 민간인을 고문했다. 이 사건 때문에 심재철이 아닌 뜬금없는 유시민이 그 폭력 행위를 행했다는 누명을 쓰고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다.
2006년 유시민의 장관 취임을 위한 청문회를 앞두고 예전 일명 서울대 프락치 사건(학생 운동권의 민간인 고문 사건)에서 프락치로 몰려 고문을 당했던 전기동이 "나를 프락치로 몰았던 사람이 장관이 되면 안 된다"며, 1인 시위를 하여 보수언론과 한나라당에서 이 사건에 주목했다. 이에 한나라당에서는 전기동을 유시민 인사청문회 증인으로 신청하였는데, 거부당하자 대신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때 한나라당 의원들이 "유시민에게 폭행당하였다는 사실을 증언하라"고 하자, 전기동은 "유시민은 폭행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그럼 누가 폭행했냐"고 묻자 "현직 한나라당 의원이자 서울역 회군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던 심재철 의원이 폭행에 가담했다"고 증언했다. 이에 당황한 한나라당 이성구 의원이 즉시 기자회견을 중단시키고 전기동을 돌려 보내며, 이 사건은 어영부영 끝나 버렸다.
당시 전기동의 주장은 "나는 (가짜 서울대생이였지) 프락치가 아님에도 여러 사람이 나에게 폭행을 가했고, 유시민은 폭행이 일어날 때마다 자리를 피했다가 끝나고 나타나는 등, 교묘하게 뒤에서 지시하였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 나를 보고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폭행 가담자들에게 나를 돌려 보내라고 지시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볼 때 폭행을 뒤에서 조종한 자가 유시민이 확실하다는 주장이다. 다만 직접 폭행을 가한 사람은 심재철 한나라당 의원이라고...
덕분에 서로 할 말이 없어, 마타도어가 가장 난무하는 선거 때도 이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는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허위 진술
심재철은 "김대중으로부터 20만원을 받아 시위에 사용했다"고 증언하였다. 이로 인해 김대중이 내란음모를 꾸몄다고 검찰이 기소하였고, 이 때문에 김대중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에 심재철은 "내가 가장 심하게 고문을 받았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소리를 하였다.
그 뒤 교사에 임용되어 동대문여자중학교[9]에서 영어교사를 지내다가 MBC에 입사하였다. MBC방송국 보도국 기자를 지냈으며 1988년 방송사 최초 MBC노조를 만들어 초대 전임자를 지냈고 1992년 MBC방송민주화 투쟁 중 업무방해·노동쟁의조정법, 징역8월·집유2년 (1993.1.20)을 선고받는다.
이 항목은 심재철이 MBC방송국 보도국 기자를 지냈으며 1988년 방송사 최초 MBC노조를 만들어 초대 전임자를 지냈고 1992년 MBC방송민주화 투쟁에서 옥고(업무방해·노동쟁의조정법, 징역8월·집유2년 (1993.1.20)를 치렀다는 글로 수정되었다.[10] 당시의 상황은 이미 군부 독재 시절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결정적으로 집행유예는 말 그대로 집행을 안 한다는 뜻이니 미결수로 구치소에 수감된 시기를 옥고를 치른 것으로 한 셈이다.
MBC 기자를 거쳐, 1995년 12월에 신한국당 부대변인, 안양 동안 갑구 지구당 위원장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당시 출신도 광주광역시고 나름 운동권이었기에 김대중에게 가려 했으나, 배신자는 당연히 안 받아줘서 신한국당으로 갔다는 얘기가 풍문으로 돌았었다.
건국절 주장: 건국절을 주장하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주권이 없었다"며 건국절을 주장하는 새누리당과 박근혜의 의도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것"이라는 광복회의 주장을 "견강부회"라며 비난했다.
" 대통령 재검표를 요구하는 집회에 사용한 플래카드에 북한에서 사용하는 광명체와 흡사하다"는 주장을 하였다.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 사찰 의혹 사건에 대한 국정조사 특위’(불법 사찰 국정조사)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4개월 동안 단 1차례도 회의를 열지 않고 방치하면서 월 600만원씩 1년 간 받았다고 한겨레신문이 2013년 8월에 보도했다.
하지만 이에 아무런 반응도 안 하고 4개월 후, 특위 설립 16개월간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특위 활동을 종료하기 위해 모여 5분만에 회의를 마치며 특위를 해산했다. 이에 중앙일보에서 "1년 반 동안 21분 회의하고 해산한 국회 민간인사찰특위"#라는 비판적 기사를 게재하자 뒤늦게 활동비 9천만 원을 반납했다고 주장했다.
“광우병에 걸린 소로 만든 등심 스테이크는 먹어도 절대 안전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네티즌들이 반발하자 "'절대'라는 단어는 뺀다"고 궁색한 변명을 하였다.
이후 MBC <PD수첩>이 '광우병' 방송을 내보내면서 자신의 발언을 비방할 목적으로 악의적으로 보도해 명예가 훼손됐다며 5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으나 대법원에서 최종 패소했다.
성실한 의정활동과 정직한 정치로 대학생들이 뽑은 '거짓말 안 하는 정치인'으로 선정되었다.하지만 2013년 3월 22일 국회 본회의 도중 누드 사진을 본 것이 밝혀지고, 그에 대해 거짓 해명을 한 것이 밝혀짐으로 인해 그 빛이 바래고 말았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에 대한 모욕적인 유언비어를 담은 카카오톡 메세지를 보내다 걸린 적이 있다. 본인은 "남에게 받은 것을 확인한 것"이라고 하였고 직접적인 사과는 하지 않았다.
2008년 한 인터넷 카페에서 '배신의 역사 심재철'이라는 글이 올라오자, 스마일이라는 대화명의 유저가 "허위사실 유포"라며 "사이버경찰에 신고한다"는 댓글을 달았다. 이때 다른 유저가 스마일의 대화명을 클릭하자 심재철의 공식 블로그로 연결되어, 네티즌들로부터 "본인이 댓글 알바하냐"고 조롱을 당했다. 아예 후원금이라며 18원을 보내는 운동이 벌어졌을 정도.
2013년 3월 2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누드 사진을 보고 있는 모습이 본회의를 취재하던 기자에게 포착된 적이 있다. 심재철 의원은 '누가 카카오톡으로 뭔가를 보내줘 이게 뭔가하고 열어봤더니 그런 사진이었다'고 해명했지만, 본인이 직접 '누드 사진'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는 모습을 찍은 기자도 있었기 때문에 얼마 안 가 거짓말임이 들통나고 말았다. 기사 공교롭게도 심재철 의원은 국회 윤리특별위원회 소속이었는데(...) 이 일로 윤리특위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훗날 이 사건이 잠깐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는데,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자유한국당이 6.13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뒤 내홍에 휩쓸렸을 때 심재철 의원이 당시 당 대표 권한대행도 겸하고 있었던 김성태 원내대표의 사퇴를 요구하고 나서자, 김성태 원내대표가 대놓고 "2013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여성의 누드 사진을 보는 모습이 언론사 카메라에 노출됐을 때 막아주지 않았느냐. 나한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또 그걸로도 모자라 "당의 혜택을 받아 국회부의장을 하면서 특수활동비를 받았는데, 밥 한 번 산 적이 있느냐"고 비난하기도 했다고(...) *
2001년 3월 29일자 여러 신문의 1면에 등장하였는데, 그 방법이 매우 전형적인 언론 이용의 행태라 하여 손석희에게 지적당했다.
2017년 9월 4일 자유한국당 보이콧 시위를 촬영하고 있었던 더불어민주당 의원인 손혜원 의원의 촬영을 피켓으로 막으려던 적이 있었다.
2017년 11월 28일 문재인 대통령을 내란죄로 형사고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기사 이에 대해 여당 지지층은 "문 대통령에 대해 정녕 형사고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본인이 직접 하면 되지, '해야 한다'고만 주장하고 정작 아무것도 안 하는 건 무슨 생각인 거냐"는 비판을 던졌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를 향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유한국당 의원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짓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게 모범적인지는 둘째 치고 일부 보수층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다른 자유한국당 의원보다 심재철이 조금이나마 낫지 않냐는 의견이다. 일단 본인이 DJ, 노무현 정부 시절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서는 의원 중 한 명이었기도 하고. 물론 본인이 역관광 당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6.13 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이 참패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홍준표가 대표직에서 사퇴하자 당권을 잡으려는 듯이 몸풀기를 하고 있다.
[출처 : https://namu.wiki/w/%EC%8B%AC%EC%9E%AC%EC%B2%A0#s-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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