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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에서 시작해 군수를 거쳐 행정자치부 장관 & 경남지사라는 자리에까지 오른 극적인 경력의 소유자로, 참여정부 시절 초대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임명돼 친노 정치인으로 분류되는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며,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는 무소속 신분으로 경남지사 선거에 출마해 53.5%의 득표율로 당선되는 기염을 토해 예전에는 민주당의 대선 주자감으로 거론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2012년 18대 대선에 출마하려고 경남지사직을 내던지는 정치적 자살 행위를 저지른 데다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문재인 당시 후보와 경쟁하면서 보인 그의 행보가 두 사람 간의 아름다운 경쟁을 기대했던 친노 성향 지지자들로부터 큰 실망을 사면서 정치적 고난기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지난 2014년 7.30 재보선에서 도전했다가 떨어졌던 곳인 경기도 김포시에서 20대 총선때 재도전해 당선되면서 가까스로 재기의 기회를 잡았다. 그 덕에 대한민국의 제20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지역구는 경기도 김포시 갑 지역이며 소속 정당은 민주통합당의 후신인 더불어민주당이다. 친노성향의 정치인인데도 불구하고 2012년 대선 후보 경선 때 생긴 앙금으로 인하여 문재인 대통령과는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2017년 19대 대선 때 문재인 대선 캠프의 공동 선대위원장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가난한 어부의 5남 1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해외로 돈벌이를 나간 형들을 대신해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하는 등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남해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국민대학교 어문계열에 합격했으나 등록금 문제 때문에 진학을 포기했고, 이 후 경북전문대학교 행정과를 거쳐 동아대학교 정치외교학과로 편입해 졸업한다. 대학 시절 동생 김두수와 함께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고향 남해로 낙향해 민중의당 후보로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경남 남해군-하동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5%도 채 되지 않는 득표율로 민주정의당 박희태 후보에 밀려 낙선하기도 했다.




이 후 고향 이어리의 이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여러가지 활동을 통해 기반을 쌓아나갔고, 1995년 치러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남해군수로 당선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당시 만 36세로 전국 최연소 지방자치단체장이었으며, 지금까지도 선거로 선출된 지방자치단체장으로는 최연소 기록이 깨지지 않는 중이다. 이어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당선에 성공하여 재선 남해군수를 지냈다.





남해군수 재임 시절인 1998년 MBC 다큐멘터리 <성공시대>에서 무소속에 젊은 나이라는 핸디캡을 딛고 군수로 당선된 그의 이력이 소개된 적이 있다. 당시 방송으로 그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민선 2기 남해군수 임기가 끝나갈 무렵인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경상남도지사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노무현을 만난 후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했다. 새천년민주당 소속이었던 상태에서 지역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났고 결국 17%의 저조한 득표율로 낙선했다. 상대 후보였던 한나라당의 김혁규가 넘사벽이기 때문이기도 했는데, 당시 김혁규는 무려 74% 이상의 득표율로 김두관을 개박살냈다.

이후 참여정부가 들어서자 참여정부 초대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취임했다. 



문재인 당대표의 저서인 '문재인의 운명'에 따르면 당시 장관직 수행평가에서 1위를 여러차례 차지할 만큼 장관직 수행을 잘 했다고. 그러나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그의 장관직 수행에 대해 크게 부정적이었으며, 한총련이 미군기지에 침투하여 불법시위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국회에서 해임건의안을 제출했고, 결국 해임건의안이 통과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해임건의안을 거부하고 그의 장관직을 지킬 것이라고 했으나, 계속 논란이 되자 그는 스스로 사의를 제출하면서 결국 장관직에서 퇴임하였다. 


사실, 그동안 국회에서 해임건의안이 통과된 경우는 여야를 불문하고 스스로 사임해야되는 것이 관례다. 승복하지 않으면 역풍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불명예스럽게 퇴임한 셈이 되었으나, 민주당계에서는 그는 한나라당의 딴지로 인해 피해를 본 것이라는 시각이 강해지면서 차츰 민주당계에서는 떠오르는 정치인으로 올라섰고, 열린우리당이 생기자 바로 합류했다. 


그리고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의 공천을 받아 남해군-하동군 지역구로 출마하였고, 당시 탄핵 논란으로 열린우리당에 상당히 유리하다는 평이 있어 어느때보다 당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선거운동 초반 여론조사에서도 20% 가까운 우위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한나라당의 박희태후보가 워낙 막강하다보니 박희태에게 7000표 차이로 석패했다. 2년 뒤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경남지사에 다시 도전했으나, 한나라당의 김태호도지사에게 압도적으로 밀리며 낙선. 2년 뒤에는 지역주의를 의식했는지 무소속으로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같은 지역구로 출마했지만 마찬가지로 한나라당의 여상규 후보에게 밀리며 40%의 득표율로 낙선하였다.




이로서 2년 주기로 걸친 4번의 선거에서 연속으로 2위로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러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마찬가지로 경상남도지사에 도전했고, 무소속 신분이었던 그는 민주당,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후보와 단일화되어 대통합 야권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53% 득표율을 얻으며 당선에 이달곤후보를 꺾고 성공했다. 본인으로선 도지사 선거만 3번의 도전 끝에 당선되었다. 



중앙에서 활동하던 이달곤에 비해 오랫동안 PK에 몸담아온 김두관이었기에 지역밀착형 후보라는 태그가 승리의 큰 요인이라는 분석이다. 더욱이 2006년을 기점으로 세를 보이기 시작한 PK의 진보층도 큰 활약을 하기도 했다. 이로서 지역주의 타파의 아이콘이 되면서 거물급 정치인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4대강 사업을 공개적으로 반대해 경남내 공사를 일시 중지 시켰는데, 이에 따라 중장정부가 사업권을 회수해 완전 중단시키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에 대해 본인은 경남이 불의에 대해 저항했음을 남기는 것이라고 했다.


도지사 취임 후 다시 민주당에 입당하여 무난히 도정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재임 2년차인 2012년 경남지사직을 돌연 사퇴하고 제18대 대통령 선거 경선에 출마하였다. 이로 인해 경상남도 진보층 사이에서는 배신감(?)이 쌓이게 되었다.

경선 결과, 손학규에게도 밀리며 14%의 득표율로 3위라는 초라한 성적을 받아야 했다. 


자세한 경선 과정은 이곳을 참조. 같은 PK를 기반으로 하는 문재인 후보가 월등히 지지율이 높은 상태라 후보로 선출될 가능성이 애초에 높지 않았는데, 도지사직을 뛰쳐나와 무리하게 경선에 참여하여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꼴이 되어버렸다는 비난을 받았고, 결국 대선과 병행하여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의 홍준표가 당선되면서 어렵게 얻은 경남지사 자리를 다시 새누리당쪽에 헌납한 꼴이 되어버려, 야권 지지자들에서까지 평생까임권을 얻게 되었다.



그의 이름을 거꾸로 발음한 '관두김' 이라는 불명예스런 별명까지 생긴 것은 덤이다. 경선에 참여하는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 치고 왜 경남지사직을 사퇴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사실 안철수의 국회의원 사퇴도 그렇고 대선후보 또는 경선후보 역할과 국회의원, 도지사직을 동시에 수행하면 한쪽에 소홀하게 된다는 나름의 명분이 있기는 하다. 실제로 안희정, 남경필 등이 대권도전으로 인한 도정소홀 문제로 약간 논란이 있기도 했다.


문제는 그러한 명분보다 도지사를 다시 뽑는데 드는 시간과 비용, 그리고 자신을 뽑아준 도민들에 대한 신의 문제가 더 크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두관 이후로는 경선출마를 이유로 지사직을 사퇴하는 사례는 없다.


졸지에 다시 재야가 되어버린 그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초청으로 독일에서 1년 간 연수를 받은 뒤, 경남지사 사퇴에 대해서 사과하고 나서 2014년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하지만, 지역구는 당초 활동했던 PK가 아닌 경기도 김포시로 정해졌다. 무런 연고도 없는 지역으로 나서자 낙하산이나 뜨내기라는 비판이 생겨났지만, 본인으로선 대권 도전을 위해서는 수도권에 힘을 뻗어야 한다는 정치적 계산이 들어간 수였다.




거주지도 김포로 완전히 옮기고 본인은 분투를 했지만, 지역 토박이들은 PK 그 자체라 볼 수 있는 그를 좋게 볼 리가 없었고 그나마 지역 정체성이 덜한 신도시 지역에 승부수를 둬야 했는데, 그것마저도 승리여부에 의문을 둬야 했다. 결국 경쟁상대인 새누리당의 홍철호후보에게 밀리며 4년만에 낙선의 쓴맛을 맛봐야 했다. 예상대로 농촌지역에선 홍철호에게 몰표가 쏟아졌고, 신도시에서도 패배하여40% 득표율로 선거를 마감했다. 


경남지사 당선 배경에는 PK 지역밀착형 후보였던 점이 상당히 먹혔던 것에 비해 이번 선거에서는 오히려 그 점이 낙선의 큰 요인이 되어버리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이후로도 경남으로 주소를 옮기지 않고 계속 김포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다. 마침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김포시 선거구가 갑/을로 분리되면서 자리가 하나 더 늘었고, 김포시 갑 선거구 공천을 받아 출마하게 되었다. 새누리당측의 상대는 김동식 전 김포시장. 더불어민주당에서는 PK 출마를 기대했지만, 본인은 대권도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김두관 본인 말로는 경남지사 자리에서 중도 하차해 다시 보수정당의 홍준표에게 헌납한 그 원죄 때문에 못 내려가고 있다고 하지만 믿거나 말거나다. 




현재까지 나온 관련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새누리당의 김동식 후보보다 5~10% 안팎의 우위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포시(갑)이 도시 인구가 많아 야권세가 상대적으로 강하다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하는 듯. 결과를 두고볼 일이지만, 일단 2014년 재보궐 선거때보다는 해볼만한 승부로 여겨진다. 


김동식 후보는 김두관에 비해 무게감이 떨어지는데다김포시장 시절 권력형 비리(!)로 처벌받은 전과가 있다.

여담으로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도 지역 출마자 중 91년 이후 역대 공직선거 출마횟수가 8회로 가장 많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포함하면 9회이며,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마치면 10회가 된다. 승률이 3할대라는 게 함정

결국 제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려 59.3%를 받아 前 김포시장인 김동식 후보를 완전히 KO 시킴으로써 국회의원직을 처음으로 가지게 되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 선거운동기간에 경남에 내려가서 똑같은 내용으로 고해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대충의 내용은 '죄송하다 내 잘못이다'로 시작해서 '중도사퇴는 잘못됐다' → '내가 관둬서 홍이 됐다' → '나는 준비가 미흡했다' 이 순으로 간 다음 그 다음 문재인 후보를 지지해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마무리 하며 여기에 홍준표를 벌해달라는 말은 덤.

대한민국의 제18대~20대 국회의원으로 소속된 정당은 더불어민주당이며, 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지역구는 인천 부평구 을 지역이다. 


대표적인 친노무현계-친문재인계로 분류되어온 정치인으로,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후보 간 단일화 뒷얘기를 민주통합당의 입장에서 기술한 저서 '비망록(2013년)', 지난 2016년 5월 원내대표 경선에 홍 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하자 당내 '친노' 진영이 뒷선으로 물러났다는 말까지 나왔으며, 2017년 원내대표 경선에서는 7표 차이로 우원식 의원에게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이후 2018년 원내대표에 재도전하여 총 116표 중 78표를 득표하며 노웅래 의원을 40표 차이로 꺾고 원내대표로 당선되었다.


친일파의 후손이지만 조부의 친일 행적을 미화하거나 합리화하지 않고 반성과 속죄의 차원에서 독립운동가 유공 단체들을 돕는 등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돕는 일에 힘쓰고 있는 대표적인 정치인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1957년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태어났다. 익산 이리고등학교, 동국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대우자동차에 입사하다가 노동조합 민주화 투쟁을 벌였다.


2001년부터는 시민운동을 주도했고, 2002년 무렵에 유시민을 만나 개혁국민정당에서 조직위원장을 맡아 당시 노무현 후보 당선에 일조를 하게 된다. 이후, 개혁국민정당이 열린우리당에 합류할 때, 같이 입당,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부평구 갑 지역 출마를 노렸지만, 문병호 후보에게 경선에서 패하면서 출마를 접었다. 


이후, 이해찬 총리 임명 당시 총리실의 권한이 강해지면서 총리실 비서관으로 임용되었고, 이해찬 총리가 사퇴한 후에는 한미 FTA 지원단장으로 임명되어 참여정부에서 계속 활동했다.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인 홍미영 의원을 제치고 부평구 을 지역의 공천장을 받아 출마했으며 낙선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구본철 국회의원의 당선 무효로 치러진 2009년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인천광역시 부평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5년에 더불어민주당 인천광역시당 위원장을 맡아 인천 지역에서 20대 총선과 19대 대선을 진두지휘하는 위치에 있었으나 20대 총선 후에 돌연 사임했다. 친노계 3선 중진 의원으로써 원내대표 하마평에 오르내리고 있으나 친노 세력의 당 장악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으며 오히려 20대 국회 전반기 상임위원장을 노리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6월 13일 제20대 국회 전반기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 시기에 노동시간을 기존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단축시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참고로 같은 전북 출신 후배 의원인 김성주 의원의 간청으로 산업통상자원위원회 간사로서 "탄소소재 융·복합 기술개발 및 기반조성에 관한 법률"의 상임위 안건 상정과 통과에 힘썼고, 우상호 원내대표를 비롯한 지도부와 함께 이보다 더 우선적인 법안보다 본회의 통과가 되도록 노력했다. 수구초심의 전형이라 할 수 있을 듯.


2017년 5월에는 우상호 의원의 뒤를 이을 민주당 원내대표 경선에 출마해 우원식 의원과 양자 대결을 하였으나 7표 차이로 아깝게 우원식 의원에게 승리를 내줘 친문 지지층들의 아쉬움을 샀다.



12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법정 자본금을 2조 원에서 3조 원으로 상향 조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한국광물자원공사 지원법 개정안’에 대해 표결에 앞서 홍 의원은 반대토론을 통해 멕시코 볼레오 광산 등 연이은 투자실패로 부채 덩어리가 된 광물공사는 더이상 회생이 불가능한 상태라며 개정안을 강력히 반대하였고 결국 부결되었다. 이 경우는 같은 집권 여당(소속 송기헌 의원)이 개정안을 발의하였다가 자당 의원의 반대토론 후 표결에서 부결된 꽤 특이한 사례이다.


2018년 4월에는 전북 군산에 있는 한국 GM 공장 폐쇄로 촉발된 노사 간 대립을 놓고 민주당의 특별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GM 본사와 노조 간의 임금 및 단체협약 교섭을 중재하였고, 폐쇄된 군산공장에 남은 근로자 680명에 대해 희망퇴직과 전환배치를 시행하고, 무급휴직은 실시하지 않는다는 합의를 이끌어내는데 기여했다. 임금 및 단체 협약은 데드라인을 57분 남겨둔 가운데 노조가 법정휴가, 상여금 지급방법, 귀성여비 및 휴가비, 학자금 등 일부 복리후생 항목에서 비용을 절감하는 데 동의하면서 타결되었다고 한다. 


2018년 5월 4일에는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원칙을 지키면서도 통 큰 타협을 하는 역지사지의 정치를 하겠다"며 민주당의 차기 원내대표 선거에 재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 홍 의원은 "민주당의 한국 GM 대책특별위 위원장으로서 정부와 노사 간 협의와 중재를 이끌었던 경험을 살려서, 여야가 경쟁자이자 동반자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 


입법과 정책, 예산에 대한 국회 상임위원회 활동을 활성화해서, 여당인 민주당이 국정 운영의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고 밝혔다. 


우원식 원내대표의 임기가 끝나고 노웅래 의원과의 경쟁 끝에 5월 11일 더불어민주당 3대 원내대표로 선출되었다. 116명이 출석한 가운데 78표를 얻어 38표에 그친 노 의원을 2배 이상 앞섰다. 이번 원내대표 투표에 민주당 소속 의원 121명 중 116명, 그러니깐 현재 장관직을 수행 중인 5명을 제외하고 모든 의원들이 모였다. 그만큼 신임 원내대표에 거는 민주당 내부 기대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취임 첫 행보로 단식 투쟁 중인 김성태 원내대표를 찾았다. 둘 다 노동계 출신이고, 19대 국회 환노위에서 각각 여당 간사, 야당 간사를 맡아 노동 관련 법안과 정책을 조율했던 인연이 있는 만큼 김 원내대표가 홍 신임 원내대표를 반갑게 맞았다. 홍 원내대표는 건강 챙기라며 단식 중단을 권유했다. 다만, 김 원내대표가 홍 원내대표에게 오후에 바로 협상하자고 말하자 아직 업무 파악이 안되었다고 협상을 뒤로 미루었다. 


5월 14일, 추경안 동시 통과 등을 조건으로 드루킹 특검을 수용했다. 민주당이 특검 수용으로 지방선거에 참가하는 의원 4명의 사직서가 본회의에서 처리되었고, 국회는 40여일 만에 정상화 되었다. 비록 야당의 요구대로 특검을 수용했지만 민주당은 사직서 처리와 체포 동의안, 그리고 추경안 처리의 실리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특검법 처리에 소비되는 시간을 생각하면 특검의 본격적인 수사는 지방 선거 이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여 야당 입장에서는 특검을 관철했다는 명분 말고는 얻은 것이 없다는 분석이 중론이다. 특검 수용 사실이 알려진 초기에는 친문계 네티즌들을 중심으로 비판의 여론이 거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반응하는 인원이 늘고 있다. 결국 한 차례 진통을 더 겪고, 5월 21일 정부 추경안과 드루킹 특검법이 동시에 국회를 통과했다. 


2018년 7월 13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한국여성경제포럼에서 "삼성이 글로벌 1위 기업이 된 건 1, 2, 3차 협력업체들을 쥐어짠 결과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임금 소득 기여도가 굉장히 낮은데도 조세 부담은 오히려 가계에 비해 낮다. 삼성이 작년 순이익 60조 원 가운데 20조 원만 풀면 2백만 명에게 천만 원씩 더 줄 수도 있다"는 발언을 했다. 


이에 친재벌 성향의 보수 언론들과 수구-보수 성향의 누리꾼들은 "반기업 정서를 부추기는 선동적인 발언이며, 특히나 문재인 대통령이 싱가포르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국내 일자리를 늘리는데 신경 쓰라"는 당부를 한 직후 나온 발언으로 적절치 않다"며 홍영표 원내대표를 향해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언론사 사장들이 장충기에게 보낸 충성 문자가 떠오른다면 기분 탓이 아니다.


7월 10일 법사위, 예결위, 산자위, 정보위, 국토위, 환노위 등 주요 상임위원장을 야당 몫으로 한 것 때문에 대노한 범진보계 누리꾼들에게 페이스북에서 큰 수난을 당하고 있는데다 한국당의 스파이가 아니냐는 극언까지 듣고 있다. 친문계 핵심 멤버인데 한국당 스파이라니 이들은 원내대표의 타이틀은 물론 6.13 선거 압승 업적, 자기 자신의 업적을 통 크게 말아 먹었다는 소리를 하기도 한다.


합종연횡 면에서 연대해야 할 바른미래당과 평화와 정의의 모임을 홀대하여 장기적 이익을 갉아먹었다는 비판도 있다. 이 일 때문에 하반기 국회에도 공전 가능성이 높아진데다, 안 그래도 여전히 계류 중인 법안들을 하나도 통과시키지 않으려는 한국당에게 실질적인 이익과 명분을 준 셈이 되어, 훗날에 대통령하고 여당에게 치명적인 타격으로 돌아올 가능성도 높아졌다는 것이다.


싸움을 두려워하다 장기적 이익을 놓친 셈이라는 얘기로, 범진보 연합 과반으로 밀어붙이면 충분히 될 일이었고 적어도 이 카드로 협박은 시도했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분명히 민평당과 정의당은 표결 강행에 긍정적인 입장이었고 바미당도 뚜렷한 비판 목소리를 낸 바 없으므로 반란표 나올까봐 불안하면 바미당까지 끼워주면 됐다. 바미당까지 꼈으면 자유당 포위 모양새가 되어 "몰아줬더니 오만하게 군다"는 역풍도 맞을 일이 없을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의석수대로 배분하더라도 농해수위 등 인기 상임위를 자유당에게 주고 의정활동에 중요한 상임위는 뺏기지 말았어야 한다.



한편  이번 원 구성 협상 결과에 '야당 의석이 더 많으니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한다'는 입장을 피력하는 누리꾼이나 민주당 지지층은 툭하면 지지 철회하겠다는 강경파를 향하여 "민주당이 국회를 마음대로 이끄는 모습을 그렇게 보고 싶다면 다음 총선 때 민주당을 최소 180석 이상의 의석을 가진 거대 여당으로 만들면 된다. 180석을 먹었는데도 민주당이 머뭇거리면 그때 촛불로 뒤집으면 그만이다."라고 역설하기도 한다.


게다가 일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오히려 이 협상 결과는 '표면상으로는 한국당이 가장 실익을 많이 챙겨간 거 같은데 실제로는 민주당의 압승이라고 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 한국당이 가져간 상임위들은 법사위를 빼고 거의 다 지역구 관리에 용이한 곳이지, 청와대의 국정 운영에 문제가 될 만한 곳은 한 곳도 없으며, 청와대의 국정 운영에 영향을 끼칠 만한 상임위는 죄다 민주당이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어차피 법사위는 (야당 의원이 맡는다는 국회 전통상 야당에게) 줄 수밖에 없는 곳이다. 민주당이 80석이었고 한나라당 의석은 170석 이상을 넘나들던 18대 국회에서도 법사위원장은 민주당 의원이 맡았었다. 뼈는 민주당, 살은 한국당으로 완벽하게 나눠졌다. 이 정도로 확실하게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은 결과는 어느 정도 청와대와 교감한 게 아니냐고 밖에 볼 수 없다”고 덧붙였다.


[출처 : https://namu.wiki/w/%ED%99%8D%EC%98%81%ED%91%9C]

수도권 최고령 국회의원이자 현역 최다선 의원, 최경환과 더불어 친박의 좌장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전직 기자.



대한민국의 제11대, 제13대~16대, 제18~20대 국회의원으로 소속 정당은 무소속이며, 지역구는 경기도 화성시 갑 지역이다. 20대 국회 기준 현역 최다선 국회의원이자 최경환과 더불어 친박계의 좌장으로 손꼽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때는 6.3 항쟁 당시 박정희 독재 정권에 저항했던 정의로운 기자였고, 지금은 친박계의 좌장, 그리고 이제는 상도동계 중에서 성향이 180도 정도로 가장 크게 변화한 인물.


1943년, 충청남도 천안군 입장면에서 태어났다. 중앙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부생 때 6.3 항쟁에 참여하였다. 이후 병역을 이수하고 1969년부터 1980년까지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일하였다. 1980년에는 5.18 민주화운동을 현장에서 취재하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을 <5.18특파원리포트>에 내신기자 중 한 명으로서 이름을 올리고 기고했을 정도. 


후에 친박계 좌장으로서의 행동과 대비되는 것으로 당시의 서청원을 알았던 사람들에게는 탄식할 일.


이후 그는 김영삼 의원과 관계를 맺고 정계에 진출하며 점차 상도동계 대표의원으로 성장한다. 이때의 지역구는 모두 현재 동작구 갑을 포함하는 동작구로 모교 중앙대와 김영삼 대통령의 자택이 있을 정도로 상징성이 높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동작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조종호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그러나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한민주당 박실 후보와 민주정의당 허청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고 민주화추진협의회에 가입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동작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16] 같은 해 통일민주당 대변인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989년 통일민주당 총재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3당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3년 12월부터 1994년 12월까지 정무 제1장관을 겸임하였다. 이 때부터 보수정치인으로서 쭉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한편 16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선출투표에서 새천년민주당 이만섭 의원(당시 8선, 전 국회의장)에게 단 8표 차이로 패해서 의장이 되지 못했다. 당시 그는 5선이었으니 다음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영원히 없었다.


2002년 5월부터 2003년 1월까지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대표라는 직함이지만 총재직에서 물러나 실질적으로 당을 이끌던 이회창 대선후보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2인자인 직함이었다. 


이후 이회창이 대선에서 패배하자 대선 재검표를 주장했으나, 어찌됬던 노무현의 승리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아서 결국 대선패배의 책임을 지고 대표직을 사퇴했다.


이후 17대 총선은 탄핵여파가 워낙 컸던데다가, 불법 대선자금 수사 문제로 인해 불출마했다. 그리고 서청원이 20여년간 가지고있던 동작구 갑 지역구는 이 때 당선된 초선 의원인 열린우리당 소속의 전병헌이 12년간 가져간다. 그 전병헌도 서청원처럼 비리가 터졌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박근혜를 지지하였다.



하지만, 이명박 및 친이계와 사이가 상당히 나빠지면서 친이계의 친박계 공천학살 첫 표적이 되었다. 때문에 2008년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지 못하자 친박연대를 창당해서 당대표가 되었고 비례대표 2번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양정례(비례 1번), 김노식(비례 3번)의 비례대표직 금품 수수로 대법원에 의해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여담으로 충격적이지만 당시 대법원 상고심 변호사 중에서 이념적으로 대척점에 위치한 현 대통령 문재인이 포함되었다.(....) 


그 뒤 친박연대가 새누리당과 합당하면서 다시 새누리당으로 돌아왔다.


박근혜 정부에 들어서서는 2013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경기도 화성시 갑 선거구로 옮겨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에 이미 70세의 고령이어서 그런지 심근경색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어서 쓰냐는 민주통합당측 공세가 있었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도 화성시 갑 지역구에 출마해서 당선되었다. 건강 문제는 쑥 들어갔다. 거물답게 지역구 사업에 예산을 잔뜩 끌어왔다는 후문



박근혜정부 들어 비박계로 분류되는 김무성 대표와 시시건건 마찰을 빚었는데, 당 대표 경선 과정에서 김무성에게 밀려 2위로 떨어진 이후에도 친박 좌장 타이틀이란 영향력은 건재하여,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과정에서 이른바 박근혜 마케팅을 동원해 유승민을 포함한 비박계 의원들이 공천되지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최경환 등 친박 의원들과 같이 박 대통령의 진실한 사람(진실한 친박)이란 민망한 표현을 쓰는 등 새누리당 내부 분열의 원인을 제공하였고, 그 결과...


20대 총선에서 122석을 얻고 원내 제2당으로 밀려난 새누리당의 대참패 이후, 김무성을 포함한 지도부는 전격 사퇴 수순에 들어갔는데도 별 소식이 없다. 아마도 수도권을 제외하고 경상도 등 새누리당의 주요 텃밭 지역에서 친박계 의원들이 어찌어찌 당선에 성공했기 때문.



그런데 당 내부에서 국회의장에 서청원을 지명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 친박 대표주자인 서청원의 박 대통령 마케팅으로 선거에서 참패한 것을 보면... 꿈도 희망도 없다. 결국 6월 8일 20대 국회의 전반기 의장을 더민주가 맡는 것으로 합의하면서 무산.


6월 9일 20대 국회 전반기 의장 선출을 위한 의원 표결에서, 현역 최다선 의원으로서 임시 의장을 맡았다.


표결 후, 당선자인 정세균 의원에게 의장석을 넘겨주었다.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승리했다면 국회의장이 될 수도 있었을 본인에게는, 꽤나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을 듯. 정치인으로서 마지막 꿈이 국회의장이라고 알려져 있다. 


위의 서술을 보아도 알 수 있듯, 국회의장 출마 자격이라고 암묵적으로 인정되는 5선 시절, 즉 16대 국회부터 국회의장 자리에 도전했었고, 20대 국회에서야말로 의장석에 앉을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으나, 끝내 임시 의장만 맡아 봤으니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할 만한 상황. 


설상가상으로 자신이 섰던 라인에서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당에서 청산되어야 될 구태정치인 1호로 지목되었다. 최경환과 함께 출당처리된다 만다 하고 있을 정도이므로.


11월 22일 남경필 경기도지사가 비박계 인사들을 협박하고 모욕 주는 조폭과 같은 행태를 일삼았다고 주장하면서, 서청원의 정계은퇴를 요구하고 탈당했다. 한겨레는 사설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반독재 투쟁을 벌였던 그가 마지막 정치경력에 왜 이런 오명을 남기는지 안타깝고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깠다.



남경필이 폭로한 9명의 친박의원 모임의 일원이다. 이른바 진박 9인회. 최씨 일가와 문고리 3인방 등이 사라져 생긴 박근혜정부의 권력 공백을 2016년 10월 25일 1차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날부터 이들이 메우고 지원하고 있다. 서청원, 최경환, 윤상현을 축으로 정갑윤, 원유철, 정우택, 홍문종, 유기준, 조원진이 포진하고 있다. 매일 작전회의를 하여 이정현이 박근혜에게 전해준다고 하였다. 


정황상 탄핵 정국에 혼란을 야기하였던 제3차 대국민 담화도 이들의 치밀한 전략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2017년 7월 1일에 서청원 의원의 아들이 쌍방폭행 혐의로 경찰에 입건되었다. 기사엔 자유한국당 의원의 아들인 서 모씨라 되어있지만, 현재 자유한국당에 서씨 성을 가진 국회의원은 서청원 뿐이다. 


20대 국회 본회의에 가장 많이 결석한 것으로 드러났다. 2위인 김용태 자유한국당 의원의 1.6배 정도 되는 수치로, 압도적인 결석을 자랑했다. 


제3당을 이끄는 유승민 바른미래당 공동대표나, 진박집회에 참석하는 것을 좋아하는 조원진 대한애국당 대표보다도 훨씬 높은 수치다. 다만 본회의 참석률뿐만 아니라 상임위원회 참석률, 법안 발의 실적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서 의원의 전반적인 의정활동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이 역사상 최대 참패를 겪은 후, 2018년 6월 20일에 스스로 탈당 선언을 했다. 보수계의 몰락에 책임을 통감한다는 이유였다. 


홍준표 체제에서 겨우 피했던 출당 등의 중징계가 다시 제기될 가능성이 높아졌고, 당의 선거 참패로 남은 2년의 임기 동안 당협위원장도 아닌 서청원 의원이 스스로 보수 진영 내에서 무언가를 할 여지 자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차기 총선도 불출마할 가능성이 높다. 친박계가 몰락함에 따라 정치 생명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게 되었고, 또 서청원 의 나이도 이젠 70대 후반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이번 임기를 끝으로 정치에서 물러날 것으로 보인다.


7월 13일 20대 국회 후반기 국회 의장단을 선출하는 본회의에서 또(...) 임시 의장을 맡았다. 본래는 전반기 국회의장인 정세균 의장이 퇴임하기 직전에 본회의를 주최해서 하반기 의장단을 선출하는게 원칙이다. 


하지만 5월 29일 정세균 의장의 임기가 만료된 후에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및 2018년 재보궐선거로 인해 국회 의장단 및 상임위 구성을 위한 여야 협상이 계속해서 미뤄졌기 때문에 의장단이 공석이었다. 그래서 또 서청원이 명목상 임시 의장 자리를 또 맡아서 의장단을 선출하게 된 것. 


후반기 국회의장은 더불어민주당의 문희상 의원이 맡게 되면서 결국 국회의장이라는 서청원의 꿈은 임시로 의장석에 앉아 본 걸로 끝나게 되었다.


[출처 : https://namu.wiki/w/%EC%84%9C%EC%B2%AD%EC%9B%90]

동교동계 직계와 친노계에 모두 해당하는 인물. 친노계의 큰형님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의정부시 행복로 근처에 위치한 숭문당의 창업주. 호는 정흥(正興)인데 사실은 개명 전 이름은 문정흥이었다. 야구인 김영조의 사위이며, 미스코리아 출신 배우 이하늬의 외삼촌이다.


대한민국의 제14대, 16대~20대 국회의원이며 경기도 의정부시에서 깊게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참여정부 시절에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2번이나 민주당의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거물급 인사다.현재 20대 국회의원 기준 더불어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중 최고령 국회의원이다.


1945년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의정부 지역의 대지주였다. 말하자면 금수저. 경복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학생운동에 투신, 여러 번 감옥을 들락날락거렸다. 이 때문에 행정고시를 준비하기도 했으나, 그만두고 1980년대 반독재 투쟁을 벌이던 김대중 휘하에서 민주화운동을 벌인다. 의정부시가 원래 실향민이 많아서 레드 콤플렉스가 심한 지역인데다가, 아버지 역시 열혈 박정희 지지자로서 매우 보수적인 인사였기 때문에, 당시 "빨갱이"로 매도되던 김대중 밑에서 일하는 아들의 행동에 대해 대노했다고 한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이 총재로 있는 평화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의정부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주공화당 김문원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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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한국당 홍문종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8년 김대중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 등을 역임하였다. 김대중이 당선된 날 아버지 묘소에 가서 "아버지! 제가 간 길이 옳았죠!" 라고 오열했다고.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2003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되자 국회의원직을 사임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경기도 의정부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06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정보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 5선 의원이 되었다. 이어 열린 대선에서 민주당이 패하고 지도부가 사퇴하자 첫번째 비상대책위원장이 되었다.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가 사퇴하자 두번째로 비상대책위원장이 되었다. 정세균 상임고문, 원혜영 의원과 더불어 당내 여러 인사들과 친화력이 높아 당내 대표적인 관리형 정치인으로 꼽힌다. 공교롭게도 셋 다 모두 범 친노계 인사로 꼽힌다.


2014년 말 땅콩회항 사건이 터진 가운데 2004년, 처남의 대한항공 취업 청탁을 했다는 의혹이 불거져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에 대해 문희상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은 대국민 사과를 하였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컷오프됐는데 "도대체 왜 짤린 거지?"가 대체적인 전문가의 의견이다. 취업 청탁 의혹이 있지만 이미 12년이나 지난(...) 문제일 뿐더러, 문희상의 지역구에 딱히 대체할 인물도 없어서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조차도 분개했다고 한다. 결국 문희상은 원래 지역구에 '전략공천'되었다. 결국 6선에 성공했다.


야권의 승리와 더불어서 2016년 4월 현재 20대 국회의 유력한 국회의장 후보로 물망에 오르고 있다. 계파색이 옅고 이제 나이도 많아서 이석현, 정세균 의원보다 정계은퇴에 대한 부담도 크기 때문. 다만 2004년 취업청탁에 대한 구설수가 있다는 것이 약점이다. 그러나, 의장직을 건 당내 경선에서 정세균에게 패배했다.


2017년 문재인 정부에서 일본 특사가 되었다. 사실 일본통까지는 아니여도 일본과 나름 연이 있는 인물이다.


5월 17일날 열린 일본과의 외교회담에서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에 대해 한일 양국, 한미일 삼국의 긴밀한 연계가 중요함을 강조하였고 빠른 시일 내에 정상회담을 하는 것을 제안하였다. 또한 위안부 합의가 국민 대다수가 정서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입장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특사의 성격을 지닌 만큼 재협상 등의 요구는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마찬가지로 논란이 되었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의 경우 회담에서 논의 되지는 않았지만, 추후 유지 여부는 새 정부가 정할 일이라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아베 신조와의 만남에서 아베는 높은 위치의 의자에 앉고 문희상 특사는 낮은 의자에 앉게 해서 일부러 이렇게 무시한 거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 MBN 기사 낮은 의자에 푹 꺼져 앉아서 야쿠자 보스 행세를 하고 있으나, 정작 아베는 높은 의자에 앉아서 내려다보고 있다. 2017년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아베 신조를 만났는데 여기서도 문희상이 앉았던 의자와 똑같은 의자에 앉았고, 이 때도 홀대론이 나왔다.


2017년 국회 본회의 출석율 100%(!)를 기록했다. 다선의원들이 대체로 정당 활동이나 지역구 활동에 전념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놀라운 기록이다. 문 의원을 제외하고 출석율 100%를 기록한 의원들이 모두 20명인데 모두 초선이나 재선, 높아봐야 3선 의원들이다. 괜히 부동명왕이 아닌가 보다.


20대 국회 더불어민주당 후반기 국회의장 후보자 선거에 박병석 의원과 함께 출마했다. 묘하게 민주당은 재수 성공률이 높기 때문에(...) 차기로 유력하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대통령도 재수였고, 원내대표도 재수였다.


2018년 5월 16일 더불어민주당 20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후보자 선거에서 총 116표 가운데 67표를 얻어 박병석 의원(47표)을 넉넉하게 제쳤다. 이후 여야 간 상임위 분배 기싸움으로 의장 선출이 연기 되었으나, 7월 10일 여야 원내대표들이 7월 13일 국회의장 선출을 위한 본회의를 합의하면서 13일 의장으로 선출될 예정이다.그래서 요새 사진 보면 표정이 아주 밝다.


현역 정치인 중에서 상당히 독보적인 인상파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주류 언론에서 외모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본인도 외모를 이용한 자학 개그를 만들 지경이다. 하지만, 동료 의원들 사이에서는 유순한 성격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취미도 서예이며, 국회의 서예 동호회 회원이라고 한다. 위에 나왔듯이, 정치 자체의 스타일도 자신의 주장을 저돌적으로 밀어붙이기보다는 친화력으로 타협하는 위치에 가깝다.


언론이나 정계에서 불리는 별칭으로 '장비', '포청천' 등이 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부동명왕'이라는 별명이 새로 떠오르고 있다. 그나마 칭찬해 주는 말이 "문희상, 겉은 장비 속은 조조"일 정도로 아무리 칭찬해줘도 외모는 결국 장비다(...).


인상이 강경 보수파 정치인으로 보여서 잘 모르는 젊은 지지자들 사이에선 '자유한국당 의원인 줄 알았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나온다... 얼굴이 자한당 한나라당 의원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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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질녀 이하늬는 2015년 12월 23일 방영된 라디오 스타에서 자신이 살 찌면 외숙부 문희상과 닮았다고 자학했다(...) 여담으로 네이버에 문희상 치면 연관 검색어가 '문희상 이하늬'이다. 실제로 이하늬는 외숙부의 선거 유세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하늬의 아버지, 즉 문희상의 매제인 이상업은 문희상이 청와대 비서실장 시절 경찰청장 후보에 이름이 올랐었지만, 정작 이 문희상과의 관계 때문에 당시 민정수석이었던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비서실장의 매제가 경찰청장이 되면 국민들이 어찌 납득하겠냐'라는 논리를 펴서 임명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문희상 본인도 반박할 수 없는 지적이라 받아들였다고.


더불어민주당 인사들의 외모를 나누자면 인상파에 분류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동일한 스타일로는 이해찬 의원이 있다고. 다만 이해찬 의원은 까칠함이 많이 드러난다.


* 19대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식에는 이해찬과 문희상이 나란히 앉았는데, 이 두 사람의 표정만 보면 "강성 반문 성향의 원로 의원들이 억지로 취임식에 참여한 것 같다(...)"는 반응들이 올라왔다. 


물론 이 두 사람은 친노-친문계에서는 맏형급으로 분류되는 의원들이고,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뛴 인물들이다. 친문의 대장급인데, 두 사람 다 외모는(…) 뒤에 심재권 의원과 이석현 의원도 표정만 보면..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 일본 특사로 일본에 가게 됐을 때 일본인들에게 '야쿠자 두목, 오야붕, 악당 얼굴 같다'는(...) 인상 평을 들었다. "대화를 하자면서 야쿠자 오야붕을 보내다니..."라는 분위기.어쩐지 아베가 더 편한 의자에 앉은것 치고는 좌불안석 같더라니 사실 조선통신사 때부터 이어지던 유구한 전통이라고 한다



같은 지역구를 맡는 홍문종 자유한국당 소속 국회의원과 같은 외교통일위원회 소속이다.

18대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활동할때 당시 한나라당국방위 간사가 유승민 의원이였는데, 2009년 당시 제2롯데월드 논란에서 당시 유승민은 여당 간사임에도 매우 신랄한 비판으로 제2롯데월드를 반대했었는데 이것이 꽤 인상적이였던 모양. 당시 국회 속기록에서 "이런 분이 있기에 이명박 정권과 대한민국에 미래가 있다. 


존경의 염(念)을 표한다." 라고 하였으며. 훗날 문재인 대선 선대위원장을 맡았을때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유승민 후보는 대통령감이다. 자질과 역량을 모두 갖춘 정치인." 이라며 이례적인 상대후보 평을 한 적이 있을 정도.


2018년 지방선거의 결과로 보수가 궤멸했다는 표현에 대해 보수 세력의 몰락이지 보수의 궤멸이 아니라고 선을 그으며 민주당도 한때 폭망했다가 살아났음을 언급하였다. 다만 보수 정치인들이 이번에야 말로 크게 반성하고 희생과 혁신을 해야 할 것이라고 쓴소리를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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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ㅣ https://namu.wiki/w/%EB%AC%B8%ED%9D%AC%EC%83%81]

제20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후보에 출마하면서...

국회의장 후보 문 희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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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선배, 동료 의원 여러분!

대한민국은 헌정사상 유례가 없는 두 가지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첫째는 촛불혁명입니다.

대한민국 연인원 1,700만의 국민은 촛불 하나만 들고 피 한 방울, 쓰레기 한 톨 흘리지 않고 헌법적 절차에 따라 현역 대통령을 탄핵하고 촛불정부를 세웠습니다. 세계는 이 촛불혁명을 새 시대 민주주의의 표본으로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더불어민주당 정부이기 이전에 "이게 나라냐!"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 달라!"는 촛불혁명의 결과로 탄생한 정부입니다. 따라서 촛불혁명을 완성해야 할 역사적 책무를 진 정부입니다. 지난 1년간 문재인 정부가 80%안팎의 지지를 유지하는 것은 지역, 세대, 이념을 초월한 국민의 강력한 지지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한반도 평화입니다.

문재인 정부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했고, 그 여세를 몰아 국내는 물론 세계의 축복 속에서 4.27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판문점 평화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세계사적으로 평화가 한반도 중심에서 이뤄졌다는 면에서 경천동지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4.27 남북 정상회담은 대한민국의 외교 안보뿐 아니라 대한민국 경제 패러다임의 대변화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선배, 동료 의원 여러분!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촛불혁명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입법은 국회에서 법률 개정과 인준 절차를 밟아야 완성될 수 있습니다. 우리 국회가 그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여러분과 함께 다음 세 가지 과제를 해 내고자 합니다.


첫째, “협치와 통합의 국회”를 만들겠습니다.

제20대 국회는 20년만의 황금분할의 다당체제입니다. 어느 한 정당이 절대 다수를 이룰 수 없는 의석분포입니다. 협치 없이는 촛불혁명의 제도화는 이룰 수 없습니다. 협치와 통합을 위해서는 더 이상 행정부의 시녀나 거수기가 아닌 삼권분립의 한 축인 입법부로서의 권위가 바로 서는 국회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2014년 10월 30일 당 비대위원장 연설 때 ‘청청여여야야언언’(靑靑與與野野言言)이라는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청와대는 청와대다워야 하고, 여당은 여당다워야 하고, 야당은 야당다워야 하고, 언론은 언론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국회는 국회다워야 한다는 ‘국국’(國國)이라는 말씀을 추가하고자 합니다. 제20대 후반기 국회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회다운 국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으로, 치열한 토론 끝에 더 큰 목표를 위해 합의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과 역지사지(易地思之), 오직 국민만 보고 가는 무신불립(無信不立)의 정신으로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4당 체제의 협치와 통합의 국회를 위해선 검증받은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2014년 비대위원장을 맡았을 때 당내 싸움, 여야 싸움이 없었고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켰습니다. 그러면서도 큰 성과가 있었습니다. 9월 말 국회등원, 10월말 세월호 3법 협상 타결, 12년 만에 12월 2일 법정시한 내 새해 예산안 처리 등입니다. 그 결과 비대위 출범 당시 13-16%에 머물던 당 지지율이 30%선에 육박했습니다.


제가 국회의장이 된다면 협치 국회를 위해 정세균 국회의장이 시작한 원내대표단 정례회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상임위원회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쟁점 사안을 정리하여 원만한 협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당 상임위원장 및 간사 의원들과 지속적인 소통 채널을 만들어 협치와 통합의 국회를 만들어 가겠습니다.


둘째, “일 잘하는 실력 국회”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국민들은 국회를 계파와 정파 간, 그리고 여야 간 싸움터로 보고 있습니다. 허구한 날 정쟁을 일삼는 국회는 국민으로부터 외면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국민은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들이 일하는 국회, 생산적인 국회를 만들어 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국회가 나라를 걱정하고 민생에 밀착한 정책대안을 만드는 일에 전념하는 바쁜 국회가 되어서 불필요한 정쟁이 없어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제가 국회의장이 되면 ‘일 잘하는 실력 국회’가 되도록 연중무휴 상시국회를 만들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상임위의 소위원회를 활성화해야 합니다. 기존의 예산, 결산, 법률 외에 사안별 소위원회를 만들어 언제든지 국정조사나 청문회를 열어 특정 사안을 집중 심사함으로써 국정통제가 효과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국회의원들의 입법과 의정활동을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 국회 입법지원기구들의 전문성과 역량을 강화하겠습니다.


이와 함께 의원외교활동도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활동이 될 수 있게 하겠습니다. 더 이상 의원외교활동이 ‘외유’라고 폄하되거나 무시되지 않도록 시스템적으로 개선하겠습니다.


또한 한반도 평화 정착에 있어서 남북은 물론 북미 정상회담의 진전에 따른 비핵화, 한반도 평화체제 합의에 대한 미 의회 설득 그리고 필요시 비준을 위한 대미 의회 외교를 추진할 것입니다. 중국, 러시아, 일본 등과의 국회회담과 의원외교를 통해 한반도 평화 정착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상 첫 남북 국회회담도 성사시켜 남북화해와 협력 그리고 평화통일의 길을 다지겠습니다.


이러한 외교의원외교활동이 국익을 위한 공공외교가 될 수 있도록 지원체제의 전문성과 정보수집 기능을 강화하겠습니다.


셋째는 “국민통합과 미래를 준비하는 국회”를 만들겠습니다.

국회는 국민의 대의기관으로 국민통합 기능이 있습니다. 제가 국회의장이 되면 ‘국민대타협 자문위원회’를 구성하여 저출산 고령화 사회, 사회 양극화 문제, 고용 재정 위기 등 저성장 문제를 다루겠습니다. 지속가능한 성장 동력 확보를 위해 당사자 간의 대화와 신뢰에 기반 한 국민대타협 친화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겠습니다.


또한 새로운 산업과 과학기술 발전, 기후변화와 환경오염 등에 관한 중장기적 미래 과제를 도출하고, 법률이 시대를 따라가는 사후적 입법이 아닌 국민통합과 미래 준비를 위한 법률개정 수요를 발굴하는 선제적 입법을 실천해 갈 것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선배, 동료 의원 여러분!


확실하고 분명한 것은 제가 제안하는 국회는 어느 개인의 힘으로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국회의원 한 분 한 분의 적극적인 협력이 필요합니다. 모두가 함께 할 때 촛불혁명의 제도화와 국민통합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것이 국민이 원하고 촛불국회의 역사적 소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20대 국회의원 모두가 소명의식을 갖고 각고의 분골쇄신 노력을 요청 드리는 바입니다.


제20대 국회 후반기의 남은 2년은 대한민국 헌정사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 전환기가 되느냐 마느냐를 가름하게 될 것입니다. 성공한다면 민주주의가 확고하게 뿌리 내리고, 제20대 국회가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국민을 위한 촛불국회로 기록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승자와 패자로 나뉘지 않고 우리 모두 승자가 될 것입니다.


제20대 후반기 국회의장직은 개인의 명예로운 은퇴를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이 맞이하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움켜쥐고 나라다운 나라, 선진 대한민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역사적 소명을 실천하기 위한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미래의 제21대 국회가 국회다운 국회, 국민의 신뢰와 사랑받는 국회로 거듭날 수 있도록 이제 남은 제20대 국회 기간 동안 이 시대가 요구하는 촛불국회의 사명을 향하여 전력을 다하여 주시기를 간곡히 염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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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moonhs.net/]



대한민국의 언론인, 정치인이다. 1958년 전라남도 광주시(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다.


정양석, 조훈현, 신보라와 더불어 광주전남(光州全南)출신 자유한국당 의원이다.


지역감정이 판을 치기 전 군부 독재에 맞서 투쟁하던 김영삼에 의해 정계에 입문한 경우와 다르게, 심재철이 신한국당에 입당한 시기는 군사정권의 연장인 민정당과의 삼당합당 이후로 김영삼이 인재수집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영입이었다. 


광주 출신인 심재철은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대한 결정적인 위증으로 김대중을 사형 선고 받게 하였기 때문에 당시 김대중이 이끄는 평민당 입당에 거절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참고로 이 심재철 항목은 심재철에게 비판적인 글은 끝없이 지워지고 아무도 관심 없어하는 (보통은 그저 본인 홈페이지에나 올라와 있는) 사소한 수상 경력이나 입법 내용으로 도배가 됐었다.



민주화 후퇴의 책임

1958년 전라남도 광주시(현재의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고, 광주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에 진학한 후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대학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10만 명이 모인 집회에서 서울역 회군을 결정하는 오판을 한다. 


(이 문장 뒤에 "물론 지도부와 연락 중이던 DJ의 지시에 의한 것도 있다"는 내용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는 심재철 측의 첨부인 듯하다. 그 문장대로라면 서울의 봄 행사의 주동자가 김대중이라는 얘기가 된다. 오오 역사 창조)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서는 전두환의 12.12 군사반란에 항거하기 위하여 수만 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었다. 밤 8시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위 지도부는 계속 시위를 할 것인지 해산할 것인지를 두고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고 한다.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이었던 유시민과 이해찬이 시위 철수 반대를 주장했지만, 심재철은 철수를 강하게 주장하며 서울역 회군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단행한다. 


심재철 : "솔직히 처음 예상보다 너무나 많은 수의 인원이 군집했다. 이 많은 인원 수를 통제할 방법은 사실상 전무하다. 이대로 계속 청와대까지 진군하다간 사분오열되어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볼 지 모른다. 일단 각 학교로 해산 뒤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 다시 진군하자"


유시민 : "지금 이 상태에서 해산을 명하는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여기서 물러나면 모든게 끝난다. 이 많은 인원이 현재 여기서 복귀한다면 신군부는 어떤 보복행위를 할 지 모른다. 결단코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걸 끝내야 한다."


당시 서울대 학생회 간부들의 발언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판단은 각자에게 맡긴다.


후에 심재철은 "엄청난 역사의 무게를 감당하기에 20대 초반의 우리는 너무 어렸고, 상황을 너무 몰랐다"는 발언으로 본인의 오판에 대하여 설명하였으나, 그 당시 서울의 봄이 무슨 20대 애들이 몰려와서 난동 부리는 수준도 아니고, 너무나 궁색한 변명이라는 이야기가 매우 많다. 때문에 공수부대가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겁을 먹어 자진 해산했다는 비판이 이후 심재철의 일생을 따라다녔으며, 며칠 후 광주에서 수백명의 시민들이 계엄군의 총포에 희생되고 행방불명 되는 참상이 벌어져, 철수한 학생들은 광주에 대해 평생 일종의 부채의식을 지니게 되었으나 심재철 본인은 5.18 민주화운동을 끊임없이 부정하는 보수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어버린 사람이라는 평가가 따라다니고 있다.


민간인 고문 (서울대 프락치 사건) 주동 후 책임 전가

심재철은 군사정권 당시 독재와 싸운다는 미명 하에 민간인을 고문했다. 이 사건 때문에 심재철이 아닌 뜬금없는 유시민이 그 폭력 행위를 행했다는 누명을 쓰고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다. 


2006년 유시민의 장관 취임을 위한 청문회를 앞두고 예전 일명 서울대 프락치 사건(학생 운동권의 민간인 고문 사건)에서 프락치로 몰려 고문을 당했던 전기동이 "나를 프락치로 몰았던 사람이 장관이 되면 안 된다"며, 1인 시위를 하여 보수언론과 한나라당에서 이 사건에 주목했다. 이에 한나라당에서는 전기동을 유시민 인사청문회 증인으로 신청하였는데, 거부당하자 대신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때 한나라당 의원들이 "유시민에게 폭행당하였다는 사실을 증언하라"고 하자, 전기동은 "유시민은 폭행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그럼 누가 폭행했냐"고 묻자 "현직 한나라당 의원이자 서울역 회군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던 심재철 의원이 폭행에 가담했다"고 증언했다. 이에 당황한 한나라당 이성구 의원이 즉시 기자회견을 중단시키고 전기동을 돌려 보내며, 이 사건은 어영부영 끝나 버렸다. 


당시 전기동의 주장은 "나는 (가짜 서울대생이였지) 프락치가 아님에도 여러 사람이 나에게 폭행을 가했고, 유시민은 폭행이 일어날 때마다 자리를 피했다가 끝나고 나타나는 등, 교묘하게 뒤에서 지시하였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 나를 보고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폭행 가담자들에게 나를 돌려 보내라고 지시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볼 때 폭행을 뒤에서 조종한 자가 유시민이 확실하다는 주장이다. 다만 직접 폭행을 가한 사람은 심재철 한나라당 의원이라고... 


덕분에 서로 할 말이 없어, 마타도어가 가장 난무하는 선거 때도 이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는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허위 진술

심재철은 "김대중으로부터 20만원을 받아 시위에 사용했다"고 증언하였다. 이로 인해 김대중이 내란음모를 꾸몄다고 검찰이 기소하였고, 이 때문에 김대중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에 심재철은 "내가 가장 심하게 고문을 받았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소리를 하였다.


그 뒤 교사에 임용되어 동대문여자중학교[9]에서 영어교사를 지내다가 MBC에 입사하였다. MBC방송국 보도국 기자를 지냈으며 1988년 방송사 최초 MBC노조를 만들어 초대 전임자를 지냈고 1992년 MBC방송민주화 투쟁 중 업무방해·노동쟁의조정법, 징역8월·집유2년 (1993.1.20)을 선고받는다.


이 항목은 심재철이 MBC방송국 보도국 기자를 지냈으며 1988년 방송사 최초 MBC노조를 만들어 초대 전임자를 지냈고 1992년 MBC방송민주화 투쟁에서 옥고(업무방해·노동쟁의조정법, 징역8월·집유2년 (1993.1.20)를 치렀다는 글로 수정되었다.[10] 당시의 상황은 이미 군부 독재 시절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결정적으로 집행유예는 말 그대로 집행을 안 한다는 뜻이니 미결수로 구치소에 수감된 시기를 옥고를 치른 것으로 한 셈이다.


MBC 기자를 거쳐, 1995년 12월에 신한국당 부대변인, 안양 동안 갑구 지구당 위원장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당시 출신도 광주광역시고 나름 운동권이었기에 김대중에게 가려 했으나, 배신자는 당연히 안 받아줘서 신한국당으로 갔다는 얘기가 풍문으로 돌았었다. 


건국절 주장: 건국절을 주장하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주권이 없었다"며 건국절을 주장하는 새누리당과 박근혜의 의도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것"이라는 광복회의 주장을 "견강부회"라며 비난했다.


" 대통령 재검표를 요구하는 집회에 사용한 플래카드에 북한에서 사용하는 광명체와 흡사하다"는 주장을 하였다.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 사찰 의혹 사건에 대한 국정조사 특위’(불법 사찰 국정조사)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4개월 동안 단 1차례도 회의를 열지 않고 방치하면서 월 600만원씩 1년 간 받았다고 한겨레신문이 2013년 8월에 보도했다.


하지만 이에 아무런 반응도 안 하고 4개월 후, 특위 설립 16개월간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특위 활동을 종료하기 위해 모여 5분만에 회의를 마치며 특위를 해산했다. 이에 중앙일보에서 "1년 반 동안 21분 회의하고 해산한 국회 민간인사찰특위"#라는 비판적 기사를 게재하자 뒤늦게 활동비 9천만 원을 반납했다고 주장했다.


“광우병에 걸린 소로 만든 등심 스테이크는 먹어도 절대 안전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네티즌들이 반발하자 "'절대'라는 단어는 뺀다"고 궁색한 변명을 하였다.


이후 MBC <PD수첩>이 '광우병' 방송을 내보내면서 자신의 발언을 비방할 목적으로 악의적으로 보도해 명예가 훼손됐다며 5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으나 대법원에서 최종 패소했다.


성실한 의정활동과 정직한 정치로 대학생들이 뽑은 '거짓말 안 하는 정치인'으로 선정되었다.하지만 2013년 3월 22일 국회 본회의 도중 누드 사진을 본 것이 밝혀지고, 그에 대해 거짓 해명을 한 것이 밝혀짐으로 인해 그 빛이 바래고 말았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에 대한 모욕적인 유언비어를 담은 카카오톡 메세지를 보내다 걸린 적이 있다. 본인은 "남에게 받은 것을 확인한 것"이라고 하였고 직접적인 사과는 하지 않았다.


2008년 한 인터넷 카페에서 '배신의 역사 심재철'이라는 글이 올라오자, 스마일이라는 대화명의 유저가 "허위사실 유포"라며 "사이버경찰에 신고한다"는 댓글을 달았다. 이때 다른 유저가 스마일의 대화명을 클릭하자 심재철의 공식 블로그로 연결되어, 네티즌들로부터 "본인이 댓글 알바하냐"고 조롱을 당했다. 아예 후원금이라며 18원을 보내는 운동이 벌어졌을 정도.


2013년 3월 2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누드 사진을 보고 있는 모습이 본회의를 취재하던 기자에게 포착된 적이 있다. 심재철 의원은 '누가 카카오톡으로 뭔가를 보내줘 이게 뭔가하고 열어봤더니 그런 사진이었다'고 해명했지만, 본인이 직접 '누드 사진'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는 모습을 찍은 기자도 있었기 때문에 얼마 안 가 거짓말임이 들통나고 말았다. 기사 공교롭게도 심재철 의원은 국회 윤리특별위원회 소속이었는데(...) 이 일로 윤리특위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훗날 이 사건이 잠깐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는데,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자유한국당이 6.13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뒤 내홍에 휩쓸렸을 때 심재철 의원이 당시 당 대표 권한대행도 겸하고 있었던 김성태 원내대표의 사퇴를 요구하고 나서자, 김성태 원내대표가 대놓고 "2013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여성의 누드 사진을 보는 모습이 언론사 카메라에 노출됐을 때 막아주지 않았느냐. 나한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또 그걸로도 모자라 "당의 혜택을 받아 국회부의장을 하면서 특수활동비를 받았는데, 밥 한 번 산 적이 있느냐"고 비난하기도 했다고(...) *


2001년 3월 29일자 여러 신문의 1면에 등장하였는데, 그 방법이 매우 전형적인 언론 이용의 행태라 하여 손석희에게 지적당했다.


2017년 9월 4일 자유한국당 보이콧 시위를 촬영하고 있었던 더불어민주당 의원인 손혜원 의원의 촬영을 피켓으로 막으려던 적이 있었다.


2017년 11월 28일 문재인 대통령을 내란죄로 형사고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기사 이에 대해 여당 지지층은 "문 대통령에 대해 정녕 형사고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본인이 직접 하면 되지, '해야 한다'고만 주장하고 정작 아무것도 안 하는 건 무슨 생각인 거냐"는 비판을 던졌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를 향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유한국당 의원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짓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게 모범적인지는 둘째 치고 일부 보수층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다른 자유한국당 의원보다 심재철이 조금이나마 낫지 않냐는 의견이다. 일단 본인이 DJ, 노무현 정부 시절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서는 의원 중 한 명이었기도 하고. 물론 본인이 역관광 당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6.13 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이 참패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홍준표가 대표직에서 사퇴하자 당권을 잡으려는 듯이 몸풀기를 하고 있다.


[출처 : https://namu.wiki/w/%EC%8B%AC%EC%9E%AC%EC%B2%A0#s-2.3]


1974년 7월 14일 생으로, 경상북도 영일군(현 포항시)에서 태어났다. 이후 부산에서 성장하여, 부산 남성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1998년 제40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고, 2001년 제30기로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뒤, 인천지방검찰청 검사로 검찰생활을 시작하였다.



2007년 3월 광주지검에서 근무할 당시 일명 ‘도가니 사건’(광주 인화학교 사건)의 공판검사를 맡았다. 이때 임 검사는 자신의 미니홈피에 다음과 같은 일기를 남겼다:


“오늘 특히 민감한 성폭력 사건 재판이 있었다. 6시간에 걸친 증인신문 시 이례적으로 법정은 고요하다. 법정을 가득 채운 농아자들은 수화로 이 세상을 향해 소리 없이 울부짖는다. 그 분노에, 그 절망에 터럭 하나하나가 올올이 곤두선 느낌… […] 어렸을 때부터 지속된 짓밟힘에 익숙해져버린 아이들도 있고, 끓어오르는 분노에 치를 떠는 아이들도 있다. (그런데 가해자 측) 변호사들은 그 (피해자) 증인들을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이는데 막을 수가 없다. 피해자들 대신 세상을 향해 울부짖어 주는 것, 이들 대신 싸워주는 것, 그리하여 이들에게 이 세상은 살아볼 만한 곳이라는 희망을 주는 것. 변호사들이 피고인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나 역시 내가 해야 할 일을 당연히 해야겠지.”


위의 일기 내용은 영화 ‘도가니’가 관객에게 충격을 주며 돌풍을 일으키던 2011년 10월 뒤늦게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12년 2월 검사 인사에서 ‘우수 여성 검사’로 선정되었고, 서울중앙지검 공판부에 배치되었다. 당시 법무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여성 검사 역할과 비중이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점을 감안해 대검찰청과 서울중앙지검에 5명의 여성 검사들을 주요 부서에 발탁했다”며 임은정 검사의 이름을 올리며 홍보했다.


이제 조용히 대세에 묻어가기만 하면 검찰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는 몸이었으나, 2012년 9월 6일, 민청학련 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던 박형규 목사의 재심 공판에서 무죄를 구형하여 검찰은 물론이고 법조계 전체에 커다란 충격파를 일으켰다. 


당시 검찰 상부에서는 백지구형을 지시해 놓은 상태였으나, 지시를 거부하고 무죄를 구형한 것이다. 무죄 구형도 그렇지만, 그때의 논고(최종진술) 또한 화제가 되었다:


"이 땅을 뜨겁게 사랑해 권력의 채찍에 맞아 가며 시대의 어둠을 헤치고 걸어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몸을 불살라 그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히고 묵묵히 가시밭길을 걸어 새벽을 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으로 민주주의의 아침이 밝아, 그 시절 법의 이름으로 가슴에 날인했던 주홍글씨를 뒤늦게나마 다시 법의 이름으로 지울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는 모진 비바람 속에서 온 몸으로 민주주의 싹을 지켜낸 우리 시대의 거인에게서 그 어두웠던 시대의 상흔을 씻어내며 역사의 한 장을 함께 넘기고 있습니다. 피고인이 위반한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와 제4호는 헌법에 위반되어 무효인 법령이므로 무죄이고, 내란선동죄는 관련 사건들에서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관련 증거는 믿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피고인이 정권교체를 넘어 국헌문란의 목적으로 한 폭동을 선동하였다고 볼 수 없으므로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2012년 12월 28일,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죄로 1962년 유죄선고를 받은 윤길중 진보당 간사장에 대한 재심 결심공판에서도 무죄를 구형했다. 물론 법원도 당일 무죄를 선고했다.



역시나 대검 감찰본부는 2013년 2월 직무상 의무 위반, 품위 손상 등으로 법무부에 임 검사의 정직을 청구했고, 같은 달 법무부는 그에게 정직 4개월의 징계 처분을 내렸다. 임은정 검사는 이에 대하여 서울행정법원에 징계처분취소 소송을 제기했고, 서울행정법원은 2014년 2월 21일 징계처분을 취소하라는 판결을 선고하였다. 


법무부에서는 항소하였으나, 2014년 11월 6일 서울고등법원에서는 법무부의 항소를 기각하였다. 법무부는 상고했고 대법원은 2년 10개월째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다가 2017년 10월 31일에 선고할 것이라고 한다. 대법원은 결국 2017년 10월 31일 상고를 기각하여 임은정 검사가 승소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대법원의 판결 이유는, 무죄구형이나 내부게시판에 글을 올린 행위는 징계 대상이 될 수 없고, 근무시간 위반만 징계사유가 될 수 있지만 이 또한 징계의 정도가 과중하여 위법하다는 취지이다(대법원 2017. 10. 31 선고 2014두45734 판결).


2015년 이후부터는 의정부지방검찰청에서 검사로 일하고 있다. 그런데 2015년 12월 3일 검사로서의 직무수행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으로 의심받아 심층적격심사[5]를 받았다. 누가 보더라도 검찰 상부가 '찍어내기'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수많은 네티즌들이 격분하였다. 


무죄 구형 후 법무부의 한 간부가 ‘임은정이 적격심사 얼마 남았냐’고 묻더란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를 듣고 ‘적격심사를 계기로 자르려는구나’ 싶었다고. 자신이 대상자 명단에 올랐다는 한겨레 보도가 나오기 전 실제로 ‘(검찰 상부에서) 자르기로 했으니 마음의 준비 해야 할 것 같다’는 동료의 귀띔을 들었다고 한다. 


인터뷰에서 밝히길 '그때는 돌아버리겠더라. 누가 볼까 싶어 집까지는 씩씩하게 걸어 들어왔는데, 현관문을 닫고 주저앉아 ‘너무 힘듭니다, 견디겠습니다만, 너무 힘듭니다’하고 신에게 하소연했다'고 한다. 친한 동료들까지 나와 연락하길 주저한다고 느껴질 때는 정말 많이 외로웠다고 한다.


그러나 임 검사의 퇴직 사유를 발견하지 못한 법무부는 지난해 1월8일 결국 ‘적격’ 판정을 내렸다.



2016년 6월 27일에는 최근 자살한 후배 검사가 "부장검사 폭언에 힘들어했다"고 밝힌 검사 부친의 기사를 링크하며, 자신이 당한 폭언 사례를 페이스북에 공개했다. "검사와 스폰서, 그런 식으로 노는 걸 좋아하는 간부를 만나고는 성매매 피의자로 보여 결재를 못받겠으니 부 바꿔달라고 요구하기도 했"고, "스폰서달고 질펀하게 놀던 간부가 저를 '부장에게 꼬리치다가 뒤통수를 치는 꽃뱀 같은 여검사'라고 욕하고 다녀 제가 10여년 전에 맘고생을 많이 했다"고. 



그러면서 검사적격기간을 단축하는 검찰청법개정안에 대해 인사부터 좀 제대로 하고 적격심사를 강화하는게 순서일 거라는 지적을 하기도 하였다.


2017년 8월 17일, 2년만에 서울북부지방검찰청 부부장검사로 승진하게 되었다.


한겨레와 인터뷰를 했다. 상당히 의외인 인터뷰인데 검찰 내에서 언론과 대응하는 공식 직책은 차장검사로 차장검사를 제외하고는 수사 보안 등을 이유로 언론과의 접촉이 금기시 되는 게 검찰 내 불문율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검사윤리강령상 이런 인터뷰는 기관장 승인 사항이다. 


또한 전 국민의 관심이 쏠린 특정 사건의 담당 검사로서의 ‘사건’에 대한 인터뷰가 아닌, 검찰 전체에 대한 비판을 SNS에 쏟아냈던 임은정 검사의 평소 견해를 중심으로 이뤄진 인터뷰였기 때문에 훨씬 더 이례적이다. 


임은정 검사도 인터뷰에서 “대검찰청에서 (인터뷰) 허락을 해주다니 얼떨떨하다. 정말 세상이 좋아졌나 보다”라며 환하게 웃었다고 한다. 천지개벽을 맞은 기분이었다고. 도가니 사건, 백지구형 사건 등 여러 뒷이야기들과 검찰과 검찰 개혁에 대한 임은정 검사의 얘기와 생각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역시라면 역시랄까, 이 인터뷰를 가지고 상부에서 뭐라고 했다고.


1948년 충청북도 제천군(현 제천시)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하였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4년 5개월 동안 복역하였다. 이후 기업체를 경영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겨레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노원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통일민주당 백남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도봉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인 민주자유당 신오철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95년 김대중이 정계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따라가지 않았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도봉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새정치국민회의 설훈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같은 해 노무현, 원혜영, 김원기 등과 국민통합추진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였다. 2002년 재보궐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박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3년부터 2004년까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을 역임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도봉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김선동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컷오프 대상에 포함되었는데, 순순히 승복하고 불출마 선언을 했다. 승복 인터뷰에서 물러나야 할 때를 아는 것이 삶의 소중한 가치라고 생각했으며, 그 동안 당이 어려워서 물러나지 못했다는 변을 밝혔는데, 사실상 정계은퇴 선언으로 봐도 무방할 듯.


정계은퇴 후로는 주영진의 뉴스브리핑에서 정치 평론을 하고 있는데, 민주당 출신이었으나 민주당에도 따끔하게 지적을 하면서 기계적 중립을 지키려고 하는 패널이라는 평이다. 2018년 1월부터는 CBS 뉴스쇼의 꼭지 '월간 아무개' 에 고정출연하고 있다.


2018년 자유한국당 권석창 의원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의원직을 상실하면서 재보궐 선거 출마설이 나왔으나 본인은 부인했다. 정계은퇴가 확실한 듯.


2018년 7월,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장 후보에 선출된 문희상이 20대 국회 하반기 국회사무총장직을 제안해 기존 활동하던 코오롱글로벌 사외이사와 기타 방송활동을 중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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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ㅣ https://namu.wiki/w/%EC%9C%A0%EC%9D%B8%ED%83%9C]



2018년 3월 6일 더불어민주당 충청남도 공주시 지역위원회 사무국장인 오영환 당원이 박수현 전 의원이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시 지역위원회 의견을 무시하고 박수현 전 의원의 내연녀를 공주시의회 비례대표 후보로 공천했다는 논란이 벌어졌다. 



해당 후보(김영미)는 2014년 지방선거에서 당선되어 현역 공주시의원이다. 이것은 2018년 3월 7일 헤럴드경제에서 기사화되었다. 


전 대변인은 2005년부터 별거 중이긴 했으나, 2016년에 이혼절차에 들어가 2017년에 이혼이 확정되었기에, 저 당시에 김영미 시의원을 공천 준 것은 박수현이 이혼하기 전 사안이긴 하다. 즉 김영미 씨가 공천을 받은 게 2014년이고 이혼절차가 시작된 것은 2016년이므로 둘의 관계가 언제 시작했는가에 따라서는 실제 내연관계일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2005년부터 별거 상태라 실질적 기혼자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당시 진행 중이었을 경우 일단 법적으로는 내연관계가 성립된다. 결국 둘의 관계가 어느 시점부터 시작되었는가가 주된 논점이 될 것이다.


박수현 전 청와대 대변인 측은 의혹을 전면 부인하며 반박했다. 김영미 시의원은 박수현 전 의원의 내연녀가 아니며, 이미 이전에도 논란이 되었지만 결국 사실무근인 것으로 판명된 내용이라는 것이다. 


박 전 대변인 측은 오영환 사무국장 측이 주장한 것처럼 그렇게 자신의 사생활에 관련된 문제가 일반 당직자들까지 다 알 정도로 파다했다면 19대 국회 시절 민주통합당 대변인, 그리고 청와대 대변인으로 기용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하며 오영환 국장이 충남지사 선거 출마를 선언한 특정 후보와 가깝다는 점을 들어 경선을 앞둔 경쟁자 측의 마타도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아래 내용은 직접적으로 김영미 시의원이 박수현 전 의원의 내연녀가 아니라고 부인하는 문장이 빠져있다는 점을 들어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식의 해명이라고 주장하는 쪽도 있다. 우회적으로 이야기했지 직접 부인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오영환 당원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한테서는 의구심을 키웠다고 비판받았다. 


하지만 시의원 공천 과정에만 문제가 없었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만약 실제로 둘이 당시 내연관계였다면 상황이 다르겠지만.


안녕하십니까. 박수현입니다. 


충남도지사 경선을 앞두고 치졸하고 악의적인 선동이 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저열한 네거티브를 동원해 선거 구도를 바꿔 보겠다는 얄팍한 술수가 우리 민주당원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고 있습니다. 민주당원이라고 자칭하는 분이 제기한 문제인 만큼, 우리 민주당원 동지들께 분명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글을 올립니다. 


첫째, 저는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사람입니다.


청와대는 인사혁신처에서 파견 나온 전문요원들이 철저히 인사검증을 합니다. 그 중에 대변인은 '대통령의 입'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가장 엄중한 인사 검증이 진행됩니다. 만약 저에게 사생활 문제가 있다면 검증 초기에 곧바로 드러날 것입니다. 문제의 당사자들을 통해 확인하면 곧바로 확인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청와대 인사 검증을 아무런 문제없이 통과한 사람입니다. 또한 저는 19대 국회에서 대변인과 원내대변인을 역임했습니다.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민주당 대변인인 저의 사생활에 문제가 있었다면 그들에게는 정말 좋은 먹잇감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타 정당에서도 저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당의 특정 후보를 지지하시는 분이 이런 짓을 하는군요. 


둘째, 저는 지금껏 단 한 차례도 여성문제와 관련 진정, 고소, 고발을 당한 적이 없습니다. 


간통죄가 있을 당시[2]에는 물론이고 폐지 이후에도 민·형사적으로도 단 한 차례도 송사나 조사, 내사에 휘말린 적이 없습니다. 도덕적 문제라면 누구보다 공격받기 쉬운 국회의원과 청와대 대변인인데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와 관련된 당사자들이 가만히 있었을까요? 


셋째, 여성의 정치적 진출을 돕는 것은 민주당의 당론입니다. 


그래서 여성위원회를 통해 훈련된 여성당원의 정치적 진출을 용이하게 하도록 비례대표로 진출시키는 것이 우리 당의 전통 입니다. 2014년 제6회 지방선거 당시 공주뿐만 아니라 천안 등 대부분 지역위원회 여성위원장이 시·군의원 비례대표 공천을 받았습니다. 특히 2014년 지방선거 당시 현재의 더불어민주당은 일부 지역에서 후보조차 우리 당 이름으로 내지 못하고 무소속을 고민할 정도로 충남에서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지역위 여성위원장은 더욱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때문에 여성위원장들이 비례대표 공천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공주지역위원회는 비례대표 의원 입후보자가 오직 1명뿐이었습니다. 


넷째, 2014년 일부 여성당원과 지역 당원, 여성단체가 우리 당의 여성 비례의원 공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충남도당에 대한 항의 방문과 집회, 농성, 중앙당 항의 집회 등 수 개월에 걸쳐 집단 반발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공주지역은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충남도당위원장으로 이들의 공격 대상이었지만, 공주의 비례대표 의원 공천과 관련된 항의나 반발이 정식으로 제기된 적은 없었습니다. 


다섯째, 한 때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지가 등 뒤에서 비수를 꽂았습니다.


일부에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국회의원도 하고 청와대 대변인도 했으니 좀 챙겨 줘라. 한자리를 주던지." 그런데 20년 가까이 민주당을 지키며 고난의 정치 생활을 해온 저의 재산은 마이너스 6000여만 원입니다. 챙겨 줄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없습니다. 한 자리 챙겨주라고 하지만 그런 적폐를 없애 달라는 국민들의 촛불민주주의로 탄생된 정권입니다. 같은 당의 당원에게 저열한 방법으로 악의적인 상처를 입히면서 이를 '검증'이라고 합니다. 악의적인 루머를 퍼 나르고 다른 당과 맞장구치며 즐거워합니다. 


진짜 검증이 필요한 일은 제쳐 두고 우리 식구 상처 내는 일에만 몰두하는 참담한 행태를 우리는 언제까지 감수해야 할까요? 우리 민주당원의 현명한 판단 만이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운영 성공을 뒷받침하고 민주당을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장문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청와대 대변인 박수현 올림



이렇게 답하면서 오영환 사무국장이 양승조 후보 지지를 하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2018년 3월 9일, 처음에 폭로한 오영환 사무국장과 박수현 예비후보의 전처가 나와서 박수현과는 여자 문제로 이혼했다고 폭로하였다. 


하지만 박수현 예비후보 캠프 측에 따르면 이혼 당시 전 부인 박재은 씨가 변호인에게 제출한 준비서면에는 여자 문제로 이혼을 한다는 내용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소송 과정에서도 박재은 씨는 이혼 사유로 생활고만을 언급했을 뿐 여자 문제를 사유로 꼽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박수현 예비후보측과 박재은 씨가 이혼을 협의하는 자리에 오영환 씨가 함께 나타났었다고 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함께 나타난 두 사람은 아래와 같은 터무니없는 요구를 했다고 한다. 


박재은 씨와 오영환 씨는 이혼 조건으로 박수현 예비후보에게 A·B·C안 등 세 가지 요구를 했다. 


A :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서울시 소유의 부지를 20년 동안 임차할 수 있게 해주고, 자금 50억 원도 대출 받을 수 있게 해줄 것.


B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에 있는 150억 원 상당의 부지를 자신들이 매입할 수 있게 해주고, 매입 금액의 90%를 대출받을 수 있게 조치를 취해줄 것.


C : 서울시 강남구 영동대로에 있는 주유소 매입자금인 500억 원을 대출받을 수 있게 해줄 것.


박수현 예비후보는 이들이 요구한 A·B·C안 중 어느 하나 들어줄 수 없었고, 돈도 없었다고 한다. 박수현 예비후보는 청와대 직원 중 유일하게 마이너스 재산을 신고한 바 있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 부인 박재은 씨는 이혼의 조건으로 ‘현금 1억 원 지급과 매월 말일 300만 원 지급’을 제안했다고 한다. 



빚만 6000만 원이었던 박 예비후보였지만 어렵게 조건을 들어줬고, 2017년 10월부터 현재까지 매월 말일 박재은 씨에게 300만 원을 지급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박 예비후보는 빚을 갚기는커녕 전 부인 박재은 씨에게 돈만 지급하고 있다고 한다. 


결국 3월 12일 최고위원회의를 통해, 박수현에 대해 자진 사퇴를 요구하기로 했다. 기사 논란이 지속되는 것 자체가 민주당의 불안요소라는 것. 자진 사퇴를 받지 않으면 결국 부적격으로 처리할 것이란 전망이 있었으나, 공식 입장은 어디까지나 조사가 좀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박수현 예비후보 또한 공식적으로 사퇴요구를 받은 적이 없다며 자진사퇴 의사가 없다며, 출마를 강행하겠다고 일축했다.


2018년 3월 12일, 박수현이 오영환을 회유하고 도지사 당선 이후에 직책 제안으로 매수하려고 했다는 카카오톡 문자메시지와 통화 녹음파일이 TV조선을 통해 폭로됐다. 기사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설령 전 부인의 박수현이 불륜을 저질렀다는 내용이 거짓이라 해도, 도지사 당선 이후 보상을 암시하는 듯한 발언으로 해석될 수 있는 점이 또 다른 논란이 될 전망이다.


이에 대해 박수현은 회유한 적이 없었다는 입장을 밝혔다. 위의 보도 직후 언론사와의 통화에서 박수현이 밝히길, 오 씨의 폭로 후 그에게 전화를 걸자마자 오 씨 본인이 펑펑 울었으며, 오 씨가 박수현에게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되겠냐며 물었다고 밝혔다. 


박수현은 오 씨와의 오랜 대화 끝에 그에게 인간적 신뢰 회복하는 정도로 마무리하면 되지 않겠냐고 말을 건넸을 때 오 씨는 그에게 "어떤 방법으로 하면 되겠냐"고 말했다고 했으며, 박수현은 오 씨에게 그의 페이스북에 '불륜이 아니다'라는 취지의 글을 올려줄 것을 요청했지만 오씨가 이를 거부했고, 이에 박수현은 오 씨에게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에 "박수현과 화해 협력하기로 했다"는 취지의 입장이라도 비공개로 전달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3월 13일 1시경, 박수현은 본인의 페이스북에 대해 위의 회유사건에 대해 낱낱이 열거했다. 오전 7시, 오 씨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느냐' 하고 연락이 왔고, 박 전 대변인은 중앙당 지도부에 '우리가 화해했다는 입장을 전달하면 기뻐하지 않겠느냐' 라고 말했더니, 오 씨는 자신이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입장을 정리해주면 그렇게 발표하겠다고 했다. 


박 전 대변인은 오 씨가 말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을 정리, 카카오톡 메신저로 보내면서 오 씨의 입장을 최종적으로 수정하면 그대로 수용하여 중앙당에 전달하기 위해 하루 종일 기다렸다고 밝혔다. 추가로 박 전 대변인은 오전 9시쯤 오 씨에게 '중앙당에서 확인 전화가 올 수 있으니 전화를 꼭 받아줄 것'을 요청했고, 내용에 대해서는 오 씨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도 좋다고 밝혔다. 그러나 오 씨는 종일 연락이 되지 않았고, 그 사이 작성을 요청했던 메세지 초안을 들고 TV조선에 찾아가 '박수현이 거짓말을 시켰다'고 했고, 결국 그 내용은 방영되었다.


결국 3월 14일에 충남지사 예비후보직을 자진 사퇴했다. 박수현은 안희정 충남지사 성폭력 사건 다음 날인 지난 3월 6일 이미 자진 사퇴를 하기로 마음을 굳혔으나, 내연녀 의혹이 갑자기 터지는 바람에 이날 바로 사퇴하면 더러운 의혹을 인정하는 꼴이므로 싸울 시간이 필요했다고 밝혔다. 



[출처 : https://namu.wiki/w/%EB%B0%95%EC%88%98%ED%98%84(%EC%A0%95%EC%B9%98%EC%9D%B8)]



문재인 정부의 전 청와대 대변인이자, 대한민국의 현 국회의장 비서실장.


대한민국의 제19대 국회의원이었으며 지역구는 충남 공주시였다. 소속 정당은 더불어민주당이다.


20대 총선 때 공주시-부여군-청양군 선거구에 도전장을 냈지만 경쟁자였던 새누리당 정진석 의원에게 48.1 : 45.0이라는 스코어로 패배했다. 그 뒤 지난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안희정 캠프에 몸담았다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 첫 번째 청와대 대변인으로 기용되었다. 이후 충청남도 도지사 예비후보로 지냈다가 현재는 문희상 국회의장의 비서실장이다.


1964년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나 공주금학초등학교,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중학교,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서양사학과에 입학했다가, 학생운동으로 중퇴했다.



15대 대선 때 이인제 후보 캠프 및 국민신당 송파 갑 위원장, 15대 조영재 의원 보좌관 등을 거쳐 정치계에 입문했다. 그러다가 열린우리당이 생기는 시점에서 완전히 민주당 쪽에 정착했다.


2005년 재보궐선거 때 충청남도 공주시-연기군 국회의원 열린우리당 경선에서 승리했지만, 당 지도부에서 보좌관 경력을 허위로 기재했다는 이유로 공천을 부결시켰다. 사실 진짜 이유는 당선 가능성이 썩 높지 않아서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어쨌든 처음 출마 기회를 날렸지만 일단 계속 당에 잔류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안희정 선거 캠프의 본부장을 맡아 충청남도지사 당선을 이끌면서 일약 안희정의 측근으로 부상했다. 그리고 충남도 정책보좌관을 역임하면서 경력을 이어 갔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충청남도 공주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8/07/13 - [Hot issue/정치] - [박수현 국회의장 비서실장] 과거 내연녀 공천 논란 사건 정황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를 불과 42일 남겨 둔 2016년 3월 2일 4·13 총선 선거구 획정안이 본회의를 통과함에 따라 선거구가 통합되는 충남 공주·부여·청양 지역 선거에서 19대 지역구였던 공주시에서는 승리했으나 부여군, 청양군에서 지면서 새누리당 정진석 후보에게 3,300여 표차(3.17%)로 패해 재선에 실패하게 됐다. 재선 실패 후 더불어민주당의 전략홍보본부장을 맡았다.


한때 안희정 충남지사의 대변인 역할을 맡았다. "민주당 내 경선에서 60% 이상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문재인 후보의 대세론이 붕괴할 것이다" 라는 주장을 함으로 문재인을 도리어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2017년 5월 16일, 문재인 정부의 출범 첫 청와대 대변인으로 임명되었다.


대변인 임명 이후 왕성한 활동을 이어 가고 있는 가운데, 7회 지방선거에서 유력한 차기 충남지사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이를 증명하듯 차기 충남지사 선호도에서 1 ~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올 지방선거 때에는 천안 병 선거구 국회의원이면서 국회 보건위원장인 양승조 의원, 아산시장 복기왕과 당 내 경쟁구도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



2018년 1월 13일, 그러니까 7회 지방선거 5개월 전에 이미 사표를 제출한 상태다. 사유는 충남지사 출마. 국회의원이 아닌 공직자는 지방선거 출마 4개월 전까지 사의를 표명해야 하는데, 미리 사표를 제출해 놓은 것. 하지만, 후임자를 찾지 못해 1월 28일까지 청와대 대변인직을 수행했다. 


2018년 1월 29일 새로운 청와대 대변인으로 김의겸 전 한겨레 기자가 선임됐고, 2월 2일에 대변인에서 물러났다. 2월 5일에 충남도지사 출마를 선언한다고 한다.


3월 5일 안희정 충남지사 성폭력 사건이 폭로됨에 따라 앞으로 충남도지사 경선에서 악재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3월 6일 안희정 전 지사의 성폭력 의혹 사건으로 모든 일정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도지사 선거에 대한 입장은 추후 정리하여 발표하겠다고 했다. 게다가 후술할 논란도 터져버렸다.


3월 14일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 출석에 본인의 입장을 설명하고 지도부의 입장을 들었다. 그 이후 지역구인 공주시로 내려간 뒤에, 충남도지사 예비후보직을 자진사퇴하였다. 기사 입장문 전문


그러나 후보직을 사퇴한 이후 스캔들은 잠잠해졌으며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충남권 승리에 혁혁한 공헌을 했다는 평가까지 받으며 사실상 재기에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역구였던 공주·부여·청양의 기초단체장 선거를 모두 이겼으며, 차기 총선에서 경쟁할 가능성이 있던 공주의 김정섭, 부여의 박정현 모두 이번에 기초단체장으로 당선되었기에 경쟁자까지 없는 상황이다. 오시덕이 다시 전향해서 오지 않는 이상에야... 


때문에 차기 총선에서 자신의 지역구로 다시 출마할 가능성이 높았는데, 하반기 국회의장으로 결정된 문희상이 박수현을 국회의장 비서실장으로 임명하였다.



2018년 3월 6일 더불어민주당 충청남도 공주시 지역위원회 사무국장인 오영환 당원이 박수현 전 의원이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시 지역위원회 의견을 무시하고 박수현 전 의원의 내연녀를 공주시의회 비례대표 후보로 공천했다는 논란이 벌어졌다. 


해당 후보(김영미)는 2014년 지방선거에서 당선되어 현역 공주시의원이다. 


박 전 대변인은 2005년부터 별거 중이긴 했으나, 2016년에 이혼절차에 들어가 2017년에 이혼이 확정되었기에, 저 당시에 김영미 시의원을 공천 준 것은 박수현이 이혼하기 전 사안이긴 하다. 즉 김영미 씨가 공천을 받은 게 2014년이고 이혼절차가 시작된 것은 2016년이므로 둘의 관계가 언제 시작했는가에 따라서는 실제 내연관계일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2005년부터 별거 상태라 실질적 기혼자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당시 진행 중이었을 경우 일단 법적으로는 내연관계가 성립된다. 결국 둘의 관계가 어느 시점부터 시작되었는가가 주된 논점이 될 것이다....


결국 3월 14일에 충남지사 예비후보직을 자진 사퇴했다. 박수현은 안희정 충남지사 성폭력 사건 다음 날인 지난 3월 6일 이미 자진 사퇴를 하기로 마음을 굳혔으나, 내연녀 의혹이 갑자기 터지는 바람에 이날 바로 사퇴하면 더러운 의혹을 인정하는 꼴이므로 싸울 시간이 필요했다고 밝혔다. 


2018/07/13 - [Hot issue/정치] - [박수현 국회의장 비서실장] 과거 내연녀 공천 논란 사건 정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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