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다선 의원

수도권 최고령 국회의원이자 현역 최다선 의원, 최경환과 더불어 친박의 좌장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전직 기자.



대한민국의 제11대, 제13대~16대, 제18~20대 국회의원으로 소속 정당은 무소속이며, 지역구는 경기도 화성시 갑 지역이다. 20대 국회 기준 현역 최다선 국회의원이자 최경환과 더불어 친박계의 좌장으로 손꼽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때는 6.3 항쟁 당시 박정희 독재 정권에 저항했던 정의로운 기자였고, 지금은 친박계의 좌장, 그리고 이제는 상도동계 중에서 성향이 180도 정도로 가장 크게 변화한 인물.


1943년, 충청남도 천안군 입장면에서 태어났다. 중앙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부생 때 6.3 항쟁에 참여하였다. 이후 병역을 이수하고 1969년부터 1980년까지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일하였다. 1980년에는 5.18 민주화운동을 현장에서 취재하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을 <5.18특파원리포트>에 내신기자 중 한 명으로서 이름을 올리고 기고했을 정도. 


후에 친박계 좌장으로서의 행동과 대비되는 것으로 당시의 서청원을 알았던 사람들에게는 탄식할 일.


이후 그는 김영삼 의원과 관계를 맺고 정계에 진출하며 점차 상도동계 대표의원으로 성장한다. 이때의 지역구는 모두 현재 동작구 갑을 포함하는 동작구로 모교 중앙대와 김영삼 대통령의 자택이 있을 정도로 상징성이 높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동작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조종호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그러나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한민주당 박실 후보와 민주정의당 허청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고 민주화추진협의회에 가입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동작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16] 같은 해 통일민주당 대변인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989년 통일민주당 총재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3당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3년 12월부터 1994년 12월까지 정무 제1장관을 겸임하였다. 이 때부터 보수정치인으로서 쭉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한편 16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선출투표에서 새천년민주당 이만섭 의원(당시 8선, 전 국회의장)에게 단 8표 차이로 패해서 의장이 되지 못했다. 당시 그는 5선이었으니 다음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영원히 없었다.


2002년 5월부터 2003년 1월까지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대표라는 직함이지만 총재직에서 물러나 실질적으로 당을 이끌던 이회창 대선후보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2인자인 직함이었다. 


이후 이회창이 대선에서 패배하자 대선 재검표를 주장했으나, 어찌됬던 노무현의 승리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아서 결국 대선패배의 책임을 지고 대표직을 사퇴했다.


이후 17대 총선은 탄핵여파가 워낙 컸던데다가, 불법 대선자금 수사 문제로 인해 불출마했다. 그리고 서청원이 20여년간 가지고있던 동작구 갑 지역구는 이 때 당선된 초선 의원인 열린우리당 소속의 전병헌이 12년간 가져간다. 그 전병헌도 서청원처럼 비리가 터졌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박근혜를 지지하였다.



하지만, 이명박 및 친이계와 사이가 상당히 나빠지면서 친이계의 친박계 공천학살 첫 표적이 되었다. 때문에 2008년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지 못하자 친박연대를 창당해서 당대표가 되었고 비례대표 2번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양정례(비례 1번), 김노식(비례 3번)의 비례대표직 금품 수수로 대법원에 의해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여담으로 충격적이지만 당시 대법원 상고심 변호사 중에서 이념적으로 대척점에 위치한 현 대통령 문재인이 포함되었다.(....) 


그 뒤 친박연대가 새누리당과 합당하면서 다시 새누리당으로 돌아왔다.


박근혜 정부에 들어서서는 2013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경기도 화성시 갑 선거구로 옮겨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에 이미 70세의 고령이어서 그런지 심근경색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어서 쓰냐는 민주통합당측 공세가 있었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도 화성시 갑 지역구에 출마해서 당선되었다. 건강 문제는 쑥 들어갔다. 거물답게 지역구 사업에 예산을 잔뜩 끌어왔다는 후문



박근혜정부 들어 비박계로 분류되는 김무성 대표와 시시건건 마찰을 빚었는데, 당 대표 경선 과정에서 김무성에게 밀려 2위로 떨어진 이후에도 친박 좌장 타이틀이란 영향력은 건재하여,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과정에서 이른바 박근혜 마케팅을 동원해 유승민을 포함한 비박계 의원들이 공천되지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최경환 등 친박 의원들과 같이 박 대통령의 진실한 사람(진실한 친박)이란 민망한 표현을 쓰는 등 새누리당 내부 분열의 원인을 제공하였고, 그 결과...


20대 총선에서 122석을 얻고 원내 제2당으로 밀려난 새누리당의 대참패 이후, 김무성을 포함한 지도부는 전격 사퇴 수순에 들어갔는데도 별 소식이 없다. 아마도 수도권을 제외하고 경상도 등 새누리당의 주요 텃밭 지역에서 친박계 의원들이 어찌어찌 당선에 성공했기 때문.



그런데 당 내부에서 국회의장에 서청원을 지명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 친박 대표주자인 서청원의 박 대통령 마케팅으로 선거에서 참패한 것을 보면... 꿈도 희망도 없다. 결국 6월 8일 20대 국회의 전반기 의장을 더민주가 맡는 것으로 합의하면서 무산.


6월 9일 20대 국회 전반기 의장 선출을 위한 의원 표결에서, 현역 최다선 의원으로서 임시 의장을 맡았다.


표결 후, 당선자인 정세균 의원에게 의장석을 넘겨주었다.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승리했다면 국회의장이 될 수도 있었을 본인에게는, 꽤나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을 듯. 정치인으로서 마지막 꿈이 국회의장이라고 알려져 있다. 


위의 서술을 보아도 알 수 있듯, 국회의장 출마 자격이라고 암묵적으로 인정되는 5선 시절, 즉 16대 국회부터 국회의장 자리에 도전했었고, 20대 국회에서야말로 의장석에 앉을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으나, 끝내 임시 의장만 맡아 봤으니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할 만한 상황. 


설상가상으로 자신이 섰던 라인에서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당에서 청산되어야 될 구태정치인 1호로 지목되었다. 최경환과 함께 출당처리된다 만다 하고 있을 정도이므로.


11월 22일 남경필 경기도지사가 비박계 인사들을 협박하고 모욕 주는 조폭과 같은 행태를 일삼았다고 주장하면서, 서청원의 정계은퇴를 요구하고 탈당했다. 한겨레는 사설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반독재 투쟁을 벌였던 그가 마지막 정치경력에 왜 이런 오명을 남기는지 안타깝고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깠다.



남경필이 폭로한 9명의 친박의원 모임의 일원이다. 이른바 진박 9인회. 최씨 일가와 문고리 3인방 등이 사라져 생긴 박근혜정부의 권력 공백을 2016년 10월 25일 1차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날부터 이들이 메우고 지원하고 있다. 서청원, 최경환, 윤상현을 축으로 정갑윤, 원유철, 정우택, 홍문종, 유기준, 조원진이 포진하고 있다. 매일 작전회의를 하여 이정현이 박근혜에게 전해준다고 하였다. 


정황상 탄핵 정국에 혼란을 야기하였던 제3차 대국민 담화도 이들의 치밀한 전략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2017년 7월 1일에 서청원 의원의 아들이 쌍방폭행 혐의로 경찰에 입건되었다. 기사엔 자유한국당 의원의 아들인 서 모씨라 되어있지만, 현재 자유한국당에 서씨 성을 가진 국회의원은 서청원 뿐이다. 


20대 국회 본회의에 가장 많이 결석한 것으로 드러났다. 2위인 김용태 자유한국당 의원의 1.6배 정도 되는 수치로, 압도적인 결석을 자랑했다. 


제3당을 이끄는 유승민 바른미래당 공동대표나, 진박집회에 참석하는 것을 좋아하는 조원진 대한애국당 대표보다도 훨씬 높은 수치다. 다만 본회의 참석률뿐만 아니라 상임위원회 참석률, 법안 발의 실적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서 의원의 전반적인 의정활동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이 역사상 최대 참패를 겪은 후, 2018년 6월 20일에 스스로 탈당 선언을 했다. 보수계의 몰락에 책임을 통감한다는 이유였다. 


홍준표 체제에서 겨우 피했던 출당 등의 중징계가 다시 제기될 가능성이 높아졌고, 당의 선거 참패로 남은 2년의 임기 동안 당협위원장도 아닌 서청원 의원이 스스로 보수 진영 내에서 무언가를 할 여지 자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차기 총선도 불출마할 가능성이 높다. 친박계가 몰락함에 따라 정치 생명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게 되었고, 또 서청원 의 나이도 이젠 70대 후반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이번 임기를 끝으로 정치에서 물러날 것으로 보인다.


7월 13일 20대 국회 후반기 국회 의장단을 선출하는 본회의에서 또(...) 임시 의장을 맡았다. 본래는 전반기 국회의장인 정세균 의장이 퇴임하기 직전에 본회의를 주최해서 하반기 의장단을 선출하는게 원칙이다. 


하지만 5월 29일 정세균 의장의 임기가 만료된 후에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및 2018년 재보궐선거로 인해 국회 의장단 및 상임위 구성을 위한 여야 협상이 계속해서 미뤄졌기 때문에 의장단이 공석이었다. 그래서 또 서청원이 명목상 임시 의장 자리를 또 맡아서 의장단을 선출하게 된 것. 


후반기 국회의장은 더불어민주당의 문희상 의원이 맡게 되면서 결국 국회의장이라는 서청원의 꿈은 임시로 의장석에 앉아 본 걸로 끝나게 되었다.


[출처 : https://namu.wiki/w/%EC%84%9C%EC%B2%AD%EC%9B%90]

국회의장(國會議長, The Speaker of the National Assembly)은 대한민국 입법부의 장(長)으로 임기는 2년이다. 입법부를 대표하며 입법부의 사무를 집행한다. 본회의에서 사회를 맡는다. 대법원장, 대통령 또는 국무총리와 함께 삼부요인이다.


대통령 중심제 국가의 국회의장은 보통 국가의전서열 2위로 대접받으며, 국회의장 개인의 권한이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국회라는 헌법기관의 대표로서 높은 위상을 갖고 있다. 이에 반해 내각제 국가의 국회의장은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약하며 '의회 진행자'로서의 역할에 치중하는 느낌이다.


국회의장은 국회의원들의 무기명투표, 재적의원의 과반수 득표로 선출되며 일반적으로 원내1당에서 나오며[3] 선출 후 중립성의 이유로 당적보유 및 상임위 활동은 금지된다. 한국 국회법은 국회의장의 당적보유금지를 직접 명시해 놓은 게 특징이다. 


의회정치의 원조라는 영국이나 일본의 경우 의장의 당적포기는 어디까지나 관행이다.


2002년 박관용 국회의장(한나라당)이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그 이전까지는 국회의장도 법적으로는 당적 보유가 가능했지만 박관용 의장이 일본과 영국의 사례를 들어 처음으로 탈당했고, 2004년 김원기 국회의장이 들어서면서 국회의장의 탈당의무를 명시하는 국회법 개정을 단행해서 2005년에 생겼다.


헌법기관장으로 대한민국 공식 국가의전서열 2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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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위인 이유는 삼권분립 체계에서 국민의 대표인 입법부를 존중하는 의미로 국회의장의 의전서열을 대통령 다음으로 예우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의전서열 3위와 4위는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원장과 헌법재판소장이다.) 2위라는 매우 높은 의전서열에 비해 실제 권한은 미약한 편. 


그렇다고 단순 사회직이나 명예직은 결코 아니다. 총리급 인사나 감사원장 등의 임명동의안 통과나 예산안 추가경정 통과와 비록 천재지변, 국가적 비상상황, 교섭단체장들의 합의한 경우 등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쓸 수 없지만, 법률안을 상임위원회를 생략하고 직접 본회의에 상정할 수 있는 직권상정이라는 매우 강력한 특권을 가지고 있다. 이 특권이 가지는 위력 때문에 국회에서 국회 공성전이나 날치기 같은 많은 깽판이 있었다.


한국의 초대 국회의장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고 국회의장 출신 대통령은 이승만이 유일. 아직 여성 국회의장은 없다. 2010년대에 들어서 국회의장은 총리와 더불어 대통령 선거에 출마시키지 않을 사람 위주로 선출한다.


대개 5선 이상급의 다선 의원 중 계파색이 옅고, 온건파로 분류되는 의원이 맡으며, 관례상 임기가 끝나면 '사실상' 정계은퇴를 하기 때문에 출신당의 당론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기 용이하고 원내정당들의 교섭을 맡기 적합해진다. 그래서 정계은퇴에 큰 부담이 없는 만 65세 이상의 고령의 국회의원이 맡는 경우가 많다.


국회의장은 높은 국가의전서열에 비하면 인지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국가의전서열 5위인 국무총리보다도 떨어지는데, 국무총리는 정치적으로 대통령의 방탄 역할을 하고 행정부가 워낙에 주목받는 탓에 사람들이 잘 아는 편이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이라는 선출직 특성상 국회 내에서도 의장보다 대중적 인기도와 국민 지지가 높은 당대표나 잠룡 스타급 의원이 훨씬 언론노출도는 물론이고 실제 파워도 큰 게 사실. 


본회의 때 특정 당을 편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기 때문에 양 당에게 갈굼을 받는 존재이기도 하다. 다만 국회선진화법 시행 이후 국회의장의 존재감이 꽤 커진 감이 있기는 하다. 


의안의 본회의 상정을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여야 합의를 거치게 되었는데, 정국 경색이 잦다 보니 양자 중재를 위해 국회의장이 자주 나서기 때문. 직권상정이라는 특수한 권한이 있어서 이걸 남발하면 존재감은 확실하겠지만, 이는 국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음을 의미한다. 국회의원 과반수의 득표를 얻어 의장에 당선된다. 선거로 뽑힌 사람들이 선거로 뽑는 사람인 셈. 


국가의전서열 2위인 초고위직이고 입법부를 대표하는 직책인만큼 국회 업무 이외의 다양한 일을 하고있다. 특히,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 고위관료를 비롯한 VIP를 맞이하고 회담하는 외교 업무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의장의 일정을 보면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의회를 방문하는 외국 VIP와 회담을 할 정도다. 


외국 관료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필수 코스로 들리는 곳이 국회인 만큼 국회를 대표하는 국회의장은 외교업무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뿐만 아니라, 외국 방문, 국제회의 참석, 회담, 각종 행사 참석 등, 생각보다 많이 바쁜 직책이다.


국회의장은 의원 임기가 끝나면 관례상 차기 총선에 불출마하는데 이는 15대 국회 후반기 의장이었던 박준규 전 의장이 제16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생긴 관례이다. 따라서 국회의원 임기가 끝나면 사실상 정계은퇴수순을 밟게 된다. 이것은 관례일 뿐 의무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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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ㅣ https://namu.wiki/w/%EA%B5%AD%ED%9A%8C%EC%9D%98%EC%9E%A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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