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길 의원

1947년 경기도 황해도 연백군에서 태어났다. 네살때인 1950년 6.25 전쟁중 피난하여 수원에 정착했다. 서호초등학교 수원중학교 경복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1974년 행정고시 합격 후 재무관련 부처에서 오랫동안 재경직 공무원으로 공직생활을 하였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비밀리에 금융실명제 시행을 추진할 때 실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 때 재정경제부 차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정책기획수석비서관, 국무조정실 실장 등을 역임하였다.


노무현 정부 초기인 2003년부터 2004년까지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장관(경제부총리)을 역임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2005년부터 2006년까지 교육인적자원부(현 교육부) 장관(교육부총리)를 역임하였다.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에서 중용되어 장차관 5번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2007년 열린우리당의 마지막 정책위원회 의장을 역임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10년까지 민주당 최고위원을 역임하였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경기도지사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국민참여당 유시민 후보와의 야권단일화 경선에서 패배하여 출마하지 못했다. 경선 과정에서 패배한 것이기에 의원직은 유지하였다. 2011년 5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민주당 원내대표를 역임하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경기도 수원시 정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새정치민주연합 경기도지사 후보로 선출되어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세월호 사건으로 야당에 유리한 구도였고, 출구조사에서도 앞섰으나 실제 개표 결과는 새누리당의 남경필 후보에게 1%차이로 석패하면서 잠시 야인 신분이 되었다. 


낙선 후 2015년 3월 새정치민주연합 국정자문위원장을 맡았다. 이때 대한민국 정당사상 최초로 열린 정책엑스포 조직위원장을 맡아 새정치민주연합이 유능한 경제정당, 정책정당이 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새롭게 신설된 경기도 수원시 무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원래의 지역구는 박광온이 자신이 사퇴했을 때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가져갔기 때문에, 자신이 선거구를 옮겼다.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문재인 캠프의 선거 공동대책위원장과 일자리위원장을 맡았으며, 문재인의 당선 이후 국정기획자문위원장으로 위촉되었다.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현직인 남경필 지사와의 경기도지사 리매치가 점쳐졌으나, 불출마 선언을 하고 전해철 후보 지지를 선언하였다. 아무래도 경선까지 포함해서 두 번이나 패배한 만큼 또 출마하기에는 부담이 컸던 듯. 또한 70대의 많은 나이도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논란 : 청년들이 정치를 지망하는 이유는 출세와 욕심 때문?

2017년 9월 21일 "제정임의 문답쇼"에 출연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정치가를 꿈꾸는 청년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청년들이 정치를 돈벌이의 수단이나 생업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청년들이 그저 돈과 출세를 위해 정치를 하는 것으로 매도하는 발언을 했다. 


내용을 요약하면 

"돈과 권력과 명예를 얻을려는 욕심을 가지는데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 정치는 생업이 아니다. 정치를 치부의 수단으로 삼으면 안된다. 이른 나이(젊은이, 청년)에 정치를 직업으로 하면 안 된다. 특히 젊은 나이에 정치를 직업으로 생각하고 뛰어드는 것은 가능하면 말리고 싶다. 정 그렇게 정치가 하고 싶거든 자기분야에서 업적을 쌓고 성공하고 인정받은 후에 그걸 발판으로 들어와야 한다."

라는 내용으로 발언을 했다. 따라서 청년의 정치참여를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를 피력했다. 


하지만 젊은 청년들이 정치를 지망하는 이유를 치부의 수단이나 출세의 방편으로 생각하는 욕심이라고 보는 관점은 매우 부당하며 김진표 본인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청년들도 그러려니 넘겨짚은 발언이다. 


우선 청년들 중에도 물론 돈과 출세를 위해 정치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나 정치를 하고자 하는 모든 청년들이 그렇다는 것은 결코 아니며 청년 전체를 전부 거론하며 발언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한 발언이다. 게다가 청년의 정치참여 또한 시민의 정당한 권리행사이다.


오늘날의 청년들이 정치를 지망하는 진짜 이유는 그동안 한국의 기성 정치인이 너무나도 현실에 어두운 채로 시대착오적인 구태정치만을 반복해 온 데 대한 분노와 절망에 있다. 


한국의 기성정치인들이 한결 같이 엘리트기득권카르텔에 갇혀 서민이나 중하류층과 괴리되어 그들만의 리그 속에서 현실을 개혁하기는 커녕 기득권과 타협하며 그저 트러블 없앤다고 차떼고 포떼고 장기하듯 근본적인 원인은 건드려보지도 못하고 하나마나한 근시안적이고 언발에 오줌누기에 가까운 정책만을 거듭한 것을 청년들은 잘 알고 있다. 


거기다 정부 눈먼돈을 업자에게 뿌리는데나 골몰해서 돈은 돈대로 들고 실효성은 전혀 없는 정책(ex 10년동안 총 80조 들어간 저출산 정책등)을 정책수혜자나 당사자의 목소리는 도외시 한 채 변화 없이 계속해 온 것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가만히 있다가는 나라가 망할 수 도 있겠다는 위기의식이 정치를 지망하게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청년이 정치에 관심 가지고 정치를 지망하게 된 이유는 헬조선이라 불리는 오늘날 한국의 현실을 불러온 기성세대와 기성정치인에 대한 분노와 절망인데 그것을 치부나 돈과 권력, 명예에 대한 욕심으로 매도한 발언은 부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대표적인 모피아(경제마피아의 의미)로 불리는 김진표 본인은 노무현 정부시절 경제부장관을 하면서 신자유주의적인 기업과 기득권에게 유리한 정치를 한 인물로서 수많은 국민들에게 피해를 입혔고 자신이 세계 최고의 자살율과 저출산에 기여한 인물 중 한명인데도 지난 정치에 대한 조금의 반성이나 사과는 커녕 지금껏 아주 진보적이고 개혁적으로 잘 해온 것처럼 인터뷰하는 것은 후안무치하게 보인다.(심지어 교육부총리 시절에도 경쟁과 형평성과 학생인권 사이에서 갈피 못잡다 내신 수능 본고사 죽음의 트라이앵글을 만들어낸 장본인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차라리 청년 시절에 인내하여 본인 분야의 전문성을 확실히 쌓았고 그걸 바탕으로 정계에 들어와 실무적인 업적을 좋은 쪽으로 쌓아올렸다고 평가받는 사람이라면 저런 말을 했어도 조금이나마 설득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년들의 일관된 부정적인 반응은 본인의 정치관에 대한 논란과 별도로 경제 및 교육 분야에서 김진표의 정치인으로서의 업적 또한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함을 의미할지도.




[출처 : https://namu.wiki/w/%EA%B9%80%EC%A7%84%ED%91%9C(%EC%A0%95%EC%B9%98%EC%9D%B8)]


송영길 / 1963년 3월 21일 / 전라남도 고흥군
학력 : 연세대학교 경영학 학사, 조선대학교 정치학 명예
배우자 남영신, 슬하 1남 1녀
더불어민주당 / 인천 계양구 을

전라남도 고흥군 출신의 더불어민주당 소속 정치인.

광주대동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과와 일본학과를 졸업했으며, 36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정계에 뛰어들기 전에는 1984년 연세대 총학생회장이 되는 등 학생운동계에서 활동했고, 이어 인천 지역에서 택시 노조 운동을 하면서 노동 운동에도 참여했던 경험이 있다.

사법시험 합격 후에는 주로 인권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이어 1990년대 후반부의 이른바 젊은 정치인 수혈에 따른 386 정치인들의 등장 무렵에 첫 주자로 나서게 되었다.

바로 1999년 재보궐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의 공천을 받아 인천 강화-계양 갑 지역에 출마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정계에 데뷔한 송영길이었으나 당시 김대중 정부의 옷로비 의혹 등으로 인해 불리하게 선거 과정이 전개되면서 안상수에게 석패했다.

하지만, 16대 총선 이후 강화군이 서구와 합구되면서 이번에는 계양구 지역구로 다시 재도전하여 재보궐선거에서 만났던 안상수 상대로 설욕에 성공하며 국회입성에 성공했고 그 뒤로 17대와 18대 선거에서 모두 승리하면서 3선 의원을 기록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러시아 특사로 파견되었고, 이후 러시아와의 인연을 감안하여 문재인 정부의 북방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북방경제협력위원회는 북방경제 및 한중관계 및 한러관계에 기반한 북방경제에 집중한다. 북방경제는 중국,러시아와의 협력을 뜻하는 것이며, 문재인 정부의 외교정책 중 하나인 신북방정책의 일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남북한관계가 호전되고 있는 가운데 2018년 7월 11일 통일부의 방북 허가를 받고 북방경제협력위원회 인사들과 함께 북한 라선특별시를 13일부터 14일날 동안 방문할 계획이다. 이는 러시아가 주최하는 남북러 국제 세미나 참석 및 라선항 방문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한편...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에서 정치적 공식 발언 이외의 발언을 통해서도 주목받은 흔치 않은 정치인인데, 바로 "박근혜 변기 사건"의 주인공이자 시발점이다.

송영길이 인천시장이던 2013년, 인천에 방문한 박근혜에게 쉬라며 인천시장실을 빌려주었는데, 박근혜가 남이 쓴 변기를 쓸 수 없어서 송영길이 쓰던 사무실 화장실 변기를 없애버리고, 새 변기를 가져와 설치했다고 한다... 하루종일 있는 게 아니라 고작 한두 시간 있기로 한 건데, 그렇게까지 한 것이다.



시장실의 침대 담요 같은 것도 새 것으로 다 바꿔버렸다고 한다. 이 발언은 민주당이 탄핵 가결 직전까지 기획한 논스톱 팟캐스트 방송에서, 송영길이 박근혜에게 겪었던 경험을 지나가는 이야기로 했던 것인데, 인터넷을 통해 이것이 퍼져나가 큰 화제가 되면서 인터넷에 박근혜의 다른 화장실 집착 기벽에 대한 발언이 나오고, 주요 방송과 언론에서도 수차례 언급이 되는 등 후폭풍이 상당히 컸다.

당시 송영길은 그것보다는 대통령과 인천 재정 상황 같은 것을 진지하게 이야기하며 의견을 교환하길 원했단다. 특히 러시아와 인천의 교류에 대해 협조를 요청하고 싶은 게 있었다고 한다.

송영길은 그전에 러시아 방문 후 푸틴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거 했어도 별 도움 안 됐겠지만 그런데 변기 공사가 끝나자 박근혜가 시장실에 혼자 들어간 뒤에 다른 사람들 절대 못 들어가게 경호원들로 문앞을 완전히 막아버려서 서운했다고 한다.

박근혜가 돌아갈 때가 되자 송영길이 '이거 도로 다시 뜯어가면 어떡하지?'하고 생각했는데 그러지 않고 그냥 다 가 버려서, 시장 임기 끝날 때까지 대통령이 남겨놓은 그 변기와 담요를 썼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더 지나고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박근혜의 특이한 습관 및 행적에 대해 의심스러운 정황들이 쏟아지자 그 기억이 떠올라 '그 일은 진짜 좀 정상이 아니고 이상했던 거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럴 기회가 와서 말했던 것이라고 한다.

이 변기 이야기는 대중적 충격을 추며 대히트를 쳐서 신문과 뉴스에까지 나와 회자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박근혜가 탄핵 가결 후 파면이 되고, 감옥에 구속까지 된 이후에도 계속 대중에 회자되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심지어 몇몇 종편 뉴스에서는 박근혜가 검찰 내 어떤 조사실에서 조사받는다는 정보뿐만 아니라, 검찰 건물 내에서 그녀가 사용할 것으로 예측되는 화장실의 위치정보까지 취재하여 보도했다.

그것도 역시 이 변기폭로 사건의 영향을 받은 일이라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역대급 임팩트넷상에서 '검찰 조사 받을 때는 어떤 변기를 쓰냐', '구치소 변기는 뜯고 정든 청와대 변기로 바꿀 수 있겠냐?', '나중에 교도소로 옮기게 되면 구치소에서 쓰던 변기 가져갈 수 있냐?' 등 수많은 변기 드립의 원조가 되었다.



[출처 : https://namu.wiki/w/%EC%86%A1%EC%98%81%EA%B8%B8(%EC%A0%95%EC%B9%98%EC%9D%B8)​]

바른미래당의 유일한 상도동계 국회의원.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가 출신 정치인. 2017년 초반 바른정당의 초대 대표를 맡았으며, 2018년 현재 당적은 바른미래당이다.

대학생 시절인 5공 때 민주화 운동과 학생운동을 했다가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받다가 6.29 선언으로 석방된 사회운동가였으며, 정계 입문 이후 상도동계의 젊은 정치인으로 활동하였고, 2000년대 남원정이라는, 보수정당 내 민주계와 소장파를 대표하던 인물 중 하나였다.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새누리당이 위기를 맞을 때 유승민, 남경필 등과 함께 당내 개혁 및 박근혜의 퇴진을 요구하였으나 친박의 비토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2016년말 김무성, 유승민과 개혁 보수를 가치로 내세워 바른정당을 창당하여 초대 대표를 맡았다.

이후 바른정당이 잇따른 탈당 러쉬가 있을 때 당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맡았으며, 2018년 국민의당·바른정당 합당에 참여하여 바른미래당을 창당하게 되었다.



당내에서는 박주선 공동대표와 함께 민주계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며, "유승민의 조력자"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친유계의 고문 역할을 할 정도로 당내에서 정신적 지주로 꼽히는 인물 중 하나이다.

동안에 미중년이다.

2018년 현재 한국 나이로 61세인데, 그 나이보다 젊어보인다. 전원책 변호사와 고작 3살 차이다심지어 같은 당 내에서 동갑인 유승민 대표보다도 동안으로 보인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참고로 유승민 대표도 나름 동안 소리를 듣는 사람이다...

게다가, 체력이나 체격도 좋다고 한다. 국회 생활을 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의원회관 내에 있는 피트니스 센터에서 운동하는 걸 보면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20대보다 건장한 근육질이라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판했던 연극 환생경제에 출연했던 인물 중 한 명이다. 깍뚜기(5000년 역사 바로 세우기 위원장)역이 바로 정병국이다.

19대 대선 이후 '나는 반성한다-다시 쓰는 개혁보수'라는 책을 냈다. 왜 보수정당과 보수 정치인이 몰락하고 청년층에게 버림받았는지에 대한 설명과 반성, 어떻게 보수가 다시 인정을 받을지에 대한 대안을 적은 참회록이다. 여담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유한국당에서는 이 책을 두고 카오스가 열렸다(...).

김현철의 장남(즉, 김영삼 전 대통령의 손자)이 얼마 전부터 그로부터 정치 수업을 받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과거부터 김현철과는 친분이 있기 때문. 재밌는 건 정작 김현철은 보수정당에서 더불어민주당으로 이적했다는 점(...).

처음 청와대에서 일할 때나 상도동계에서 비서관으로 활동했을 때, 김영삼 전 대통령은 그를 친근하게 뱅국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근데 사실 이 분은 원래 발음이 그랬다. 손명순 여사께도 맹순이라고 불렀으니 다만 정병국이 국회의원이 된 이후로는 "정 의원"이라고 불렀다고.


바른정당에서는 유승민, 남경필, 하태경, 지상욱 등과 함께 자강론자로 꼽힌다.

바른정당 친이계 최측근 라인 중에서 주호영, 김영우가 중재론/자강론에서통합론으로 입장을 바꾸면서, 바른정당 2차 탈당사태때 결국 자유한국당으로 입당하게 되었다는 점을 보면 의외라면 의외겠지만, 애당초 정병국의 경우 친이계 내에서도 상도동계 최측근이었고 개혁보수 성향이 강한 소장파형 인물이었다 보니 딱히 신기할 건 없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도 이상득 관련 예산을 삭감한 한나라당 소장파 중 한 명이었을 정도. 다만 남경필 지사의 경우에는 결국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했다(...).

바른정당의 초대 당 대표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당원대표자회의 의장을 맡을 정도로 당내에서 여러모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물이다.

어떻게 보면 유승민 대표와 함께 바른정당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을 정도. 전국적으로 유명했다면 유승민 대표와 투톱도 되셨을 분이다 다만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너무 빨리 대표직에서 사임하신 것 아니냐는 아쉬움도 많았다고 한다. 그럴 법도 한 것이 정병국 사임 후 유승민 취임 전까지 바른정당의 상황이 그닥 좋지 못했기도 했고(...).

이후 이혜훈 전 바른정당 대표와 함께 2018년 1월 28일 국민의당-바른정당 통합추진위원회의 인재영입위원이 되었다.

본인의 정치관을 들어보면 실제로 故 김영삼 전 대통령과 손명순 여사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 하다. 실제 손명순 여사의 보좌관으로도 활동한 바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YS 정신에 대해 민감한 정치인이기도 하다.

홍준표가 자유한국당 당사에 박정희와 김영삼 사진을 같이 걸어놓은 것에 대해서 "김영삼이 잡으려고 했던 호랑이는 박정희였다. 당신이 YS에 대해서 알긴 아느냐"며 비판했을 정도.

이런 부분 때문에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보수 정치인이기도 하다.

실제 그는 기존 보수 정치인들과는 달리 보수-진보 구분을 이승만, 박정희 시절이 아닌, 김영삼-김대중 등의 민주화의 두 아버지들에 의해 분화되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이러한 관계로 3당 합당에도 군사독재 세력을 합류시킨 점에서 한계점이 명확했다고 밝혔다.

문재인 정부의 초대 국방장관. 손원일, 윤광웅에 이어 해군 출신으로는 3번째 국방장관이다..


1949년 충청남도 논산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은진(恩津) 송씨로, 조선시대 후기의 유학자이자 권신인 우암 송시열의 13대손이며, 고조부는 구한말 을사늑약 직후에 자결한 애국지사 송병선(건국훈장 국민장 추서)이다.


대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9년 해군사관학교 27기로 입학하여 1973년에 항해소위로 임관하였다. 청주함장 등을 역임했다. 1997년에 해군 준장으로 진급했다. 합동참모본부 해상작전과장, 시험평가부장을 지냈다. 1999년 제2함대사령부 산하의 제2전투전단장으로 제1연평해전의 승전으로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해군 소장으로 진급한 뒤 제1함대사령관을 지냈고, 2002년까지 조함단장, 기획관리참모부장을 지냈다. 특히 조함단장 시설에는 세종대왕급 이지스함, 독도급 대형수송함, 손원일급 잠수함 등을 포함한 2000년대 한국 해군의 주력함 도입을 결정짓는 역할을 했다. 


2005년에 해군 중장으로 진급하여 합참의 인사군수참모본부장, 전략기획본부장을 지냈다. 당시의 합참 근무를 통해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국방개혁 2020, 전작권 전환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이때의 활동이 훗날 민주당, 문재인 현 대통령의 국방정책을 보좌하는 쪽으로 연결된 것으로 여겨진다.


논란 제조기.. 그가 굳이 만들어 낸 수많은 논란들...



위장전입

청와대는 송영무의 국방장관 후보 지명을 발표하며 그의 위장전입 논란 가능성이 존재함을 공개 인정했다. 1989년 행해진 위장전입의 목적은 군인공제회 아파트 분양을 위한 것으로, 당시 아버지와 차녀가 암투병 중이기에 군인공제회 아파트를 분양받아 전역하고 함께 사는 것을 고려한 것이다. 아파트 특성상 집값은 거의 오르지 않았으며 5대 인사 원칙에는 부합되지 않는다. 다만, 이 경우는 군인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청문회에서도 이 부분은 추궁되지 않았다.


음주운전

1991년 3월, 음주운전이 적발된 전력이 있었는데, 군을 통하면서 해당 사안을 처벌받지 않았다. 음주적발되어 경찰서 조사를 받았으나 이후 군으로 복귀조치된 후 처벌통지가 오지 않았다. 송 후보자는 "음주운전 사실이 있었던 점을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며, 이유야 어찌되었든 잘못된 행동임을 깊이 자각하고 있다"며 "당시 후보자는 부대 인근에서 부하직원 격려회식 시 음주 후 관사로 귀가하던 중 경찰에 의해 음주측정을 받은 바 있다"고 음주운전 사실을 인정했다.


음주운전을 처벌받지 않은 것이 상부와 결탁해 은폐한 것 아니냐는 의혹에는 부정했다. 그 해 해당 부대에서 음주단속에 걸린 장교 33명 중 21명이 마찬가지로 아무런 통보도 처벌도 받지 않았다.




여담으로 김학용 의원(경기도 안성)이 송 후보자가 자진 사임을 하지 않았으니 추가로 증언을 공개한다며 같은 해 7월에 적발된 음주운전 적발 경력이 있다고 밝혔지만 송후보자가 즉각적으로 자신이 운전하지 않았다고 밝혔으며 동기생 박 대령이 운전하는 차에 동석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추가로 송 후보 측에서 박대령의 사실관계 확인관계를 요청했고 박대령도 증언하겠다고 나왔다.


계룡대 군납비리 사건 축소의혹

해당 사건에 대해서는 김영수(군인) 문서 참조. 송영무 당시 해군총장이 해당 사안에 대한 수사를 축소시키려고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김 전 소령이 전직하기 전의 면담에 대해 송영무가 미화 왜곡해 퍼뜨린 것을 김 전 소령이 사실을 밝혔고, 장관 임명 전에도 불리한 내용이 나오지 않도록 미리 입단속하고자 "언론에 좋은 말 해달라"며 전화했다가 녹취록이 공개돼 송 씨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김관진 석방 '다행' 발언

김관진 전 국방장관이 2012년의 18대 대선에서 사이버사령부의 댓글 공작 관련으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된지 이틀만에 열린 국회 법사위에 출석해 “김관진 전 장관이 석방됐는데 소회가 어떠냐”는 한국당 김진태 의원의 질문에 대해 “동료로 같이 근무했었는데 참 다행이라 생각한다”고 답변했다.[25] 이에 여당소속 박범계 의원으로부터 '적절하지 않은 답변'이란 질책을 받아야만 했다. 


버스전용차로 사용 발언 논란

2017년 7월 13일 장관 임명식에서 버스전용차로를 사용했다는 발언을 해 논란이 되었다. 불법을 저지른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자 버스전용차로를 사용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아내였다며 분위기를 풀려는 농담이었다고 변명해명했다. 


미니스커트 발언 논란

북한군 병사의 판문점 귀순 직후인 11월 27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방문하여 병사들과 오찬을 하던 중 "원래 식사자리에서 길게 얘기하면 재미가 없는데, '식사 전 얘기와 미니스커트는 짧을수록 좋다'고 하죠"라는 발언이 여성 비하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1시간 만에 사과하는 곤욕을 치렀다. 당시 옆에서 통역을 하던 통역장교가 깜짝 놀란 건 덤이다. 


이 발언은 윈스턴 처칠의 "A good speech should be like a woman's skirt: long enough to cover the subject and short enough to create interest."를 인용한 것이다. 그래서 "처칠이 하면 명언이고, 왜 송영무가 하면 망언이냐?"라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여권이 신장되지 못했던 20세기와 여성운동이 전세계적으로 활발해진 현대의 차이라고 봐야할 듯 하다.


기품원장 임명과 보은인사 논란

3월 8일 이창희 전 국방개혁자문위원회 자문위원이 국방기술품질원(기품원) 원장으로 내정됐다.[26] 문제는 이창희 전 자문위원은 방위사업청 퇴직 후 3년이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업무 관련성이 있는 유관기관에, 즉, 기품원장으로 임용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직자윤리법에 따라 취업심사를 받아야 했다는 것이다. 


국방기술품질원도 '인사혁신처 고시 2015-10호'에 의거 취업제한 기관에 포함돼 있다. 이 전 자문위원이 지난 1월 공직자윤리법에 따라 취업심사가 통과되지 않은 상태에서 임명을 강행해 발표 7시간만에 기품원장 취임을 취소했다. 


하지만 불과 2개월만에 재임명되면서 '문재인, 송영무 코드인사'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이 전 자문위원은 기품원 원장 1차임명이 취소되자 인사혁신처에 취업심사를 요구했다고 알려졌다. 


이 전 자문위원이 송 장관의 대전고 후배이고,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의 안보특보와 대선 캠프 국방안보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내고 송영무 국방부 장관의 인사청문회 태스크포스(TF)에도 참여한 점을 들어 처음부터 무리한 '감투 씌워주기'였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당초 방사청은 이 전 자문위원의 취임이 무산된 만큼 다시 신임 원장 공모를 낼 예정이었다. 하지만 재공고를 거치지 않고 이 전 자문위원으로 내정하기로 했다. 이유에 대해서는 방사청과 인사혁신처에서는 묵묵부답이다.


 "여성은 행동거지 조심해야" 발언

군내 성폭력을 뿌리 뽑겠다고 마련된 자리에서 "어떻게 보면 여성들이 행동거지라든가 말하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해서 조심해야 해야 한다", "여자들 일생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좀 있다. 이걸 깨닫게 해줘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 기사 앞선 처칠의 발언 인용에 이어, 벌써 두번째로 성관련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른 것이다. 결국 또 사과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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