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문 핵심


대한민국의 제19대~20대 국회의원으로, 소속 정당은 더불어민주당이며 지역구는 안산시 상록구 갑 지역이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인 참여정부 시절에는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적이 있다. 2016년 8월 22일에는 민주당의 경기도당 위원장으로 선출돼 민주당의 인천시당 위원장으로 선출된 박남춘 의원과 함께 추미애 지도부의 경기도 & 인천광역시 권역 대표 최고위원을 맡았다. 현재 이해찬, 이종걸과 같이 차기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후보로 유력한 인물 중 한 명이다.


대표적인 친문 핵심 정치인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 생애 정치입문 전 

1962년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범학교 출신으로 6.25. 때 평양에서 월남하여 목포에 정착하였다. 목포에서 대성초등학교와 영흥중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때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 마산에서 직장생활하던 형에게 맡겨졌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경상남도 마산[3]에서 자랐다. 한 학년에 600여명이었던 고등학교에 호남 출신 학생은 그를 포함해 단 2명이었다. 원래 혼자인줄만 알았는데 2학년에 올라가보니 한명이 더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고 놀림을 받았던 그는 그때부터 지역감정이 정말 근거가 없으며 폐해가 심하다고 생각했다.


1981년 마산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1985년에 고대법대를 졸업하였고 1987년 제29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육군 법무관으로 임관해 병역을 마친 뒤 1993년부터 변호사로 개업했다. 이때부터 안산에서 법무법인 해마루 소속의 변호사로 생활하며 안산에서 터를 닦았다. 법무법인 해마루는 노무현과 천정배가 1993년에 함께 설립했던 법무법인. 


1996년부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대외협력위원장, 노동위원회 대외협력부장, 언론위원회 위원장 등을 하며 민변의 대표 변호사로 떠올랐다. 민변에서 맡은 사건의 70~80%는 노동법이나 국가보안법 관련 사건이었다. 


변협인권위원으로 재직 중이던 2000년 봄,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의 형사고소를 대리하여, 살인죄 공소시효 완성 직전 주범에 대한 검찰의 구속기소를 이끌어냈다. 이때 유가족에 대한 법원의 42억 원 배상판결이 나오자, 형식적으로 소멸시효가 완성된 사건일지라도 기관에 귀책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배상청구가 가능하다는 새로운 소멸시효이론이 정립되었다. 이로써 법조계에 '전해철'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 정치 입문

2002년 노무현이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뒤, 지방선거에서 패배하며 위기를 맞이하자, 전해철은 법조계 내에서 노무현 지지선언을 주도하였다. 이때 법률지원단을 만들고 이후 대선 캠프 법률지원단의 간사를 하면서 대선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2003년 노무현이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국회에서 탄핵을 당했을 때에는 문재인과 함께 노무현 변호 준비를 실질적으로 다 하다시피 했다. 그래서 결국 2004년 3월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기각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2004년부터 청와대에 들어가 일하기 시작하였다. 2006년에는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되어 1년 7개월 가량 민정수석을 지냈다. 당시 44세의 나이로, 전현직 통틀어 최연소 민정수석이다. 이렇게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있으면서 인사청문회 등의 준비를 아주 철저하게 해, 참여정부 역대 민정수석들 가운데 전해철 시절에 청문회 통과가 가장 잘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7년에 로스쿨 제도가 도입된 과정에서도 실무작업은 전해철이 총괄했다고 한다. 그때 유능한 전해철이 빈틈없이 추진하지 않았다면, 로스쿨 도입은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후문이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안산 상록구 갑 선거구에 출마했다. 그런데 김영환이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표를 갈라먹는 바람에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 후 법무법인 해마루의 대표 변호사가 되었고, 민주통합당 안산 상록구갑 지역위원장직도 계속 수행하였다. 


2009년 이명박 정부 하에서 검찰이 박연차 게이트 수사를 할 때에는 노무현의 많은 측근들이 무서워서 도망간 와중에도 문재인과 둘이서 실질적으로 변호 준비를 다 했다.




  • 제19대 국회의원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60.76%의 득표율을 기록, 새누리당 박선희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 후 문재인 대선 캠프에 들어가 열심히 일했다. 당내에 잡음이 끊이지 않고 내부 분란이 끊이지 않아 캠프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와중에서도 그 많은 정책 다 정리하고 정책발표서 발간까지 완료했다. 당시 문재인의 공약 가운데 상당부분이 전해철의 손길을 거쳤다고 한다. 그러나 그로 인해 당내에서 친노 비선 실세 논란에 휘말려, 논란이 커지자 양정철, 이호철 등과 함께 대선 캠프에서 일괄 사퇴하였다. 겨우 대선을 두 달 남짓 남긴 시점이었다. 


이렇듯 '비선 실세'로 욕을 먹었지만 권력을 휘두르긴커녕 국회에서 고생을 많이 한 편이었다. '면이 서는' 당직보다는 일하는 위원직을 주로 많이 맡았다. 2012년 민주통합당 BBK 진상조사위원회 위원, 정봉주 구명위원회 위원, 국회 민간인 불법사찰 국정조사특위 위원 등을 지냈다.


이후 국회 국가정보원 댓글의혹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위 위원, 민주당 대통령 기록물 열람위원, 국정원법 개혁추진위원회 위원(이상 2013년), 새정치연합 야당탄압저지대책위원회 위원, 국회 서민주거복지특위 위원, 박상옥 대법관 인사청문특위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2014년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가 일어났을 때에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위원(2014~2015년)으로 활약하며 세월호 관련 입법을 모두 주도하였고, 결국 2014년 10월 세월호 관련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특별법, 2015년 1월 세월호 배보상 특별법 등을 통과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외에 법사위에서는 야당 간사로서 여당의 공격에 맞서는 수문장 역할을 하였다. 야당 간사에게는 관행상 마지막에 발언 기회가 주어지는데, 이때마다 동료 야당 의원들이 제기한 문제점을 정리하면서 핵심을 한 번 더 찌르는 마지막 공격수의 역할을 해냈다.


그가 법사위 야당 간사 시절 효과적으로 막아낸 법안이 바로 사시존치 법안이다. 2015년 19대 정기 국회 당시 총 6개의 사시존치 법안이 발의되어 있었으나(이 중 5개는 새누리당의 함진규, 노철래, 김용남, 김학용, 오신환 의원이, 나머지 1개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조경태 의원이 발의한 것으로서, 이후 조경태 의원 역시 자유한국당으로 옮겼다.) 


이들 법안이 법사위 회의 안건으로조차 상정되지 못하도록 막아내는 데 전해철 의원은 중심적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측이 가능한 것은 상임위 간사들에게 법안 심의 순서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기 때문인데, 당시 여당 간사였던 이한성 의원은 사법시험 존치 법안을 지지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바 있으므로, 양당 간사 중 사시존치 법안 심의 순서를 뒤쪽으로 두기를 주장한 측은 전해철 의원으로 보는 게 보다 타당할 듯하다.  


사법시험 폐지문제와는 별도로, 선거 때의 공약이었던 반월 시화공단 스마트허브 조성을 꾸준히 추진해가고 있다. 그 외에도 수인선 완전지하화 계획에 성공하였고, 늘푸른아파트 소송 등 여러 소송 문제도 잘 해결하여, 사법시험 준비생들이 상당히 비토하는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지역구 내에서의 평판은 좋은 편이다. 


머니투데이가 평가한 제19대 국회의원 의정활동에서 새정치민주연합 내 9위를 마크했다. 



  •  제20대 국회의원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도 상록 갑에 출마해 1여 다야의 환경 속에서도 35,481표, 38.8%를 득표하며 새누리당 이화수 후보를 9,000표 차이로 따돌리며 비교적 무난히 재선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공정거래위원회, 금융감독원, 금융위원회, 국무조정실, 국무총리 비서실, 국가보훈처, 국민권익위원회 등을 소관 기관으로 하고 금융정책수립 및 집행, 공정거래질서 유지, 국정 조정 및 규제 개혁, 국가유공자관련 보훈사업, 국민권익지키기, 경제 인문 사회분야에 관한 연구 등 다양한 분야의 정책을 입안하고 심의하는 국회 상임위원회인 정무위원회의 더불어민주당 간사로 선임되었다.


2016년 8월에 더불어민주당 경기도당 위원장 선거에 출마하여 압도적인 격차로 당선되었다. 권리당원 ARS 투표와 대의원 현장 투표를 합산한 결과, 63.3%의 득표율을 기록하여 경쟁자였던 이언주 의원을 상대로 압승했다. 이언주 의원이 20대 총선 공천 과정에서 더불어민주당 코어 지지층에서 인심을 잃고 전해철 의원이 노무현재단 운영위원을 맡은 경력으로 반사 이익을 톡톡히 본 결과물이라는 평가다.



더불어민주당이 최고위원 제도를 당의 각 시도당 위원장들이 호선하는 권역별 대표위원제로 바꾸면서 전해철 의원은 경기도 & 인천 권역 대표위원으로서 당 최고위원이 됐다. 전해철 의원이 1년, 더민주 인천시당위원장인 박남춘 의원이 나머지 1년을 맡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민주당 최대 주주라고 할 수 있는 문재인 대통령 지지층에서는 김경수, 조국, 임종석, 조응천과 함께 전해철 의원에 대한 평가가 좋은 편이다. 오히려 보수 야당에서 삼철이라고 공격 했던 것이 이득이 된 셈. 보수 야당에서 대통령 측근이라고 공언한 셈이니. 


민주당이 6.13 지방선거 - 6.13 재보선에서 압승을 거두자, 정치권의 관심은 추미애 지도부의 뒤를 이을 민주당 제3기 지도부가 어떻게 구성될 것이냐로 모아졌다. 특히 제3기 지도부는 2020년 4월에 치러질 21대 총선 공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도부가 될 것이므로, 이번 경기도지사 후보 경선을 통해 개인적인 인지도와 더불어 자타공인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이란 사실을 나름 크게 알린 전 의원이 출마할 것이냐에 대해 관심이 쏠렸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당내 친문계 핵심 인사로 분류돼 왔던 최재성 의원과, 친노계의 좌장이라고 불리어왔던 이해찬 의원도 출마 여부를 저울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당내 친문 표가 분산되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그래서 최재성 의원과는 동반 출마하지 않기로 일단 의견을 모았다는 소식이 알려졌고, 그럼 둘 중 최재성이 양보할 것이냐, 전해철이 양보할 것이냐는 쪽으로 관심이 기울여졌는데, 7월 15일 전해철 의원이 전당대회에 불출마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 정치 성향 

문재인 대통령의 사람들 중에서도 최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문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불리는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함께 이른바 '3철'로 불렸다. 이 세 사람 모두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재직 중이었던 문 대통령의 휘하에 있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 정치권 일선에서 활동하는 3철은 전해철 의원 한 명 뿐이다. 양정철 전 비서관은 19대 대선이 끝난 뒤 해외로 아예 떠났고, 이호철 전 민정수석은 정치권을 떠나 여행사를 운영하는 걸로 알려져 있던 중, 2018년 6.13 지방선거에 가까워 와서는 부산시장 선거 출마설이 나왔지만,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이 세 사람은 나중에 전해철 의원이 경기도지사 선거에 나서기로 한 뒤에 열었던 북 콘서트에서 오랜만에 다시 모이게 된다.


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명박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으러 왔을 때의 사진을 보면 당시 노 전 대통령의 변호를 맡고 있었던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하여 김경수 의원 등과 함께 노 전 대통령을 수행하고 있는 전해철 의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각별한 인연에도 불구하고 18대 대선 때 3철 논란이 잠깐 불거진 적 빼고는 상대적으로 언론의 주목을 덜 받았다. 특히 친노계를 시종일관 저격해 왔던 박근혜 정부 시절의 보수 언론들조차도 전 의원에 대해서는 거의 보도한 적이 없었다. 조중동 등 주류 보수 언론이 연일 '친노 패권주의'를 외치며 부지런히 친노 & 친문 인사들을 저격하던 2015년 즈음을 돌이켜보면 문재인 당시 대표의 최측근 인사였는데도 언론의 주목을 상대적으로 덜 받았다는 특이점이 있다. 


본인 스스로도 혹여나 보수 언론에게 빌미를 줄 일이 생길까봐 침묵을 지켰던 듯하다. 그래서인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고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한 뒤부터야 전해철 의원이 문재인 대통령의 오래된 최측근이었다는 점을 알게 된 사람들이 많다.


위에 상당히 길게 서술되어 있듯이 본인이 사법시험에 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법시험에 대단히 비판적이다. 그래서인지 적극적인 로스쿨 도입론자였다고 하며, 실제 청와대 민정수석 시절 로스쿨 도입에 가장 앞장섰다고 한다. 지난 제19대 국회 시절에는 법사위에서 야당 간사로서 사법시험 존치 법안이 심의되지 않도록 최대한 시간 끌기를 하였다. 그 때문에 전직 서울변협회장이던 나승철이 그의 지역구 사무실 앞에서 항의시위를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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