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성

학생 운동의 이력을 지니고 있었던 이해찬은, 여러 재야 인사들과 함께 평화민주당에 입당하였다.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관악구 을 지역구로 공천을 받아 민주정의당 김종인(...) 후보와 통일민주당 김수한 후보를꺾고 당선되었다. 이후 5회 연속으로 관악을 국회의원 당선에 성공했고 20대까지 합해서 현재 7선 의원을 기록 중이다.



노태우 정부 시절에는 5공 청문회의 일원으로 참석해서 5.18 민주화운동 당시 발포 사건과 녹화사업 등을 추궁하기도 했다. 문민정부 시절에는 주로 야당이었지만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일했고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당시 후보의 선거대책본부 부본부장을 맡아 헌정 사상 최초의 평화적인 정권 교체에 공을 세웠다.


88년 등원 직후부터 5공청문회에서 통일민주당의 노무현, 이인제 의원과 함께 송곳 질의로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는 스타가 되었지만, 당내 활동에서는 DJP연합 당시 정책 공조 협상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면서 선거 전략가로 더 알려지게 된다. 확인되지 않은 카더라에 따르면 선거 운동 들어가기 직전에 이긴다고 말하며 예측한 백분율이 소수점까지 딱 맞아떨어져, 한동안 '선거의 제왕'이라 덕담을 건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교육부 장관 및 국무총리 시절


김대중 후보의 당선으로 여당의 일원이 된 이후로는 48세에 교육부 장관으로 입각, 교육 정책을 주도하고 공무원 성과급 제도를 수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의도치 않은 부작용들로 비판을 받았으며, 특히 수험생들의 부담을 줄이고 특기-적성 교육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로 도입한 정책들에 대해서는 그의 이름을 딴 이해찬 세대를 양성하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국민의 정부가 저물 때쯤 차기 대통령 후보로 노무현을 지지하였고, 참여정부 출범 이후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이 되었다. 고건 당시 국무총리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로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고 얼마 안 가 국무총리에서 사임하자 후임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총리 시절 국회 질의에서 야당 측과의 공개 설전을 마다하지 않은 파이터 기질을 발휘했다.


국무총리는 대통령과 더불어 내각을 이끄는 막중한 자리지만, 대통령의 강력한 권한에 눌려 제대로 권한 행사를 하지 못하고, 그냥 얼굴마담이나 대통령의 방패막이나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러나 참여정부가 들어서고 노무현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역할을 분담하면서 참여정부의 국무총리들은 비교적 강력한 권한을 휘둘렀다.


이해찬 총리도 그 혜택을 본 인물로서 '대표적인 책임총리(또는 실세 총리)'라는 타이틀이 생겼고, 세종특별자치시 건설을 지휘하는 등 현실 정치에서도 실세 총리로서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드러내 지금도 책임총리나 실세 총리를 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이 이해찬 총리다.


그러나, 강원도 양양군에 산불이 번지는 와중에도 골프를 친 사건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아야 했고, 이후로도 이런 행적은 정치적 부담이 되어버려 평생까임권 공격의 주요 소재가 되어버렸다. 이후 골프와 관련된 논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국무총리에서 사퇴했다.


사실 이해찬 총리가 재직 시절 골프로 구설에 오른 것은 양양 낙산사 산불건 외에도 몇 차례 더 있었다. 가장 먼저 구설에 오른 포천 포사격 훈련 사고는 당시 골프를 치다가 사건 보고를 받고 즉각 조문을 가서 별 문제가 안 됐지만, 양양 낙산사 산불 사건으로 상당한 논란이 되었고, 같은 해 남부 지역에 홍수로 수해를 입고 있었는데도 제주도에서 골프를 치는 바람에 빈축을 샀다. 결정적으로 2006년 3.1절 기념식에 불참하고 부산에 골프치러 갔던 것이 밝혀지자 청와대에서도 쉴드를 포기했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10년 만의 정권 교체로 다시 야당이 된 이후 유시민 등 친노 세력을 모아 탈당한 뒤 기존의 열린우리당의 부활을 염두로 신당 창당에 박차를 기울였다. 바쁜 일정 때문인지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고 연임 기록은 일단 5선으로 마감했다. 



그러다 대선이 임박해오자 친노 및 진보 NGO 인사들과 함께 가칭 '시민통합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한 뒤 민주당과 합당하는 방식으로 민주당에 복당하였고, 2012년 19대 총선에서 서울의 호남이라고 불릴 만큼 서울에서 민주당 지지세가 제일 막강했고 자신이 내리 5선을 지내기도 했던 서울특별시 관악을 지역을 떠나 세종특별자치시에 출마했다.


이해찬 후보는 자유선진당의 심대평을 무려 14%P차로 밀어내고 4년 만에 국회로 복귀했다. 당초에는 지역 거물 정치인이던 심대평의 당선이 점쳐졌지만 이해찬 후보는 국무총리를 지낸 경력 하나만으로도 전국적인 인지도가 월등한 데다 국무총리 시절 세종특별자치시 설립에 앞장선 경력도 있고 여기에 지역적 연고까지 있어서 생각보다 큰 7,000여 표 차로 이겼다. 


설마 이해찬... 그 4년 사이에 세종으로 아예 옮긴 건가...여담으로 2년 뒤 치뤄진 6.4 지방선거에서도 세종특별자치시장은 새정치민주연합 후보가 당선되기도 했다.




민주통합당의 첫 지도부였던 한명숙 지도부가 19대 총선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서 그 뒤를 이을 당대표를 뽑는 전당대회 경선에 출마해 김한길 의원 등을 쓰러뜨리고 당선되기도 했었지만 대선 국면에서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과정에서 지도부 인적쇄신론이 나오면서 결국 문재인 후보에게 당대표 대행을 맡기고 사퇴했다.


대선 이후에 한동안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다가 박근혜정부가 개성공단을 일방적으로 폐쇄하는 조치를 내리자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홍용표 통일부 장관이 '개성공단 노동자들에게 들어가는 임금의 70%가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미사일 개발에 들어간다'고 주장했다가 야당이 '이명박 정부부터 지금까지 약 5억 2,000만 달러가 개성공단에 들어갔는데, 이 돈이 무기 개발에 쓰여진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방치했다는 얘기가 아니냐?'고 반론하자 급히 말을 바꾼 것을 두고 한 차례 비판한 뒤, 현역 통일부 장관도 모르고 있었던 개성공단의 임금 흐름을 설명하며 홍 장관의 사퇴를 요구하는 사자후를 보여주기도 했다. 




난항 끝의 재등원(再登院)

2016년 3월 14일, 더불어민주당의 김종인 지도부가 그의 지역구인 세종시를 '전략공천 지역'으로 선정해 이 의원을 쫓아내면서 다시 그의 존재감이 되살아났다.


공천관리위원회는 이해찬 후보에겐 부적격 사유가 없다는 결정을 내리고 그를 공천하려고 했지만 김종인 대표가 차일피일 결재를 미뤘다고 한다. 이 행동을 놓고 모두들 김종인 대표가 이해찬 의원에게 '내 손으로 잘라내기 전에 본인이 명예롭게 물러나라'는 메세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해찬 의원은 자진 사퇴 의사를 밝히지 않았고 결국 더민주 지도부는 이해찬 의원을 쫓아내기에 이른다.


김종인 대표는 '정무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말하며 이해찬 후보를 컷오프한 구체적인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언론에선 주로 당내 다선 의원 물갈이의 연장선상에서, 또는 실체없다는 말도 많지만, 어쨌든 많이 비판받는 '친노 패권주의'를 표면적으로나마 청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차원에서 친노계 좌장인 이해찬 의원을 제거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부수적인 이유로는 과거 서울 관악 을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해찬과 맞붙었다 패했던 김종인 대표의 사적인 감정에서 기인한 것 아니냐는 말도 나왔고, 세종시에서 여론조사를 돌려보니 결과가 형편없어서 탈락시켰다는 말도 나온다. 심지어는 문재인 전 대표가 친문계 세력으로 친노계를 재편하려고 배후에서 조종해 친노계의 2인자인 이해찬 의원을 김종인 대표를 통하여 쫓아낸 거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다 나왔다. 



언론 보도를 인용하자면, 문재인 전 대표 쪽은 김종인 대표가 이해찬 의원을 잘라내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재고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해찬 의원 컷오프가 확정되기 전날, 문재인 전 대표와 김종인 대표가 전화 통화를 했는데 여기서 김 대표는 '전체 선거 구도를 위해 어쩔 수 없다. 


내게 맡겨달라'며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기사를 보면 김 대표 본인도 '친노 패권주의' 프레임이 가당치 않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일반 대중의 시각을 생각해 이해찬 의원을 일찌감치 잘라내기로 마음을 먹었던 거 같다.


어찌되었든, 탈당은 없을 거라는 언론의 추측성 보도와는 달리 이해찬 후보는 3월 15일, "어떠한 결격 사유도 없는데 모욕을 주고 강제로 쫓아내면서 친노를 척결한다고까지 말하는 객관적이지 않은 공천 방식은 인정할 수 없으므로 무소속 출마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김종인 대표는 이해찬 후보의 상대로 다른 곳에서 출마를 준비하던 인지도 낮은 후보를 보냈다 다만 자길 따라 동반 탈당하겠다는 세종시 당원들과 시장, 시의원들은 당에 남아 있어달라고 요청했다고 하고, 본인도 당선될 경우 더불어민주당으로 복당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결과는 새누리당 박종준 후보, 더민주 문흥수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당선된 직후 인터뷰에서 이해찬 의원은 김종인 대표의 '정무적 판단에 따른 컷오프'에 대해 엄중히 항의해 사과를 받아낼 것이며 복당이 된다면 당을 바로잡겠다'며 복당하면 차기 당대표 선거를 겨냥한 듯한 뉘앙스를 흘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 당선으로 그는 7번의 선거에서 한 번도 지지않고 전승한 국회의원이 됐는데, 이는 윗 당선 수를 따져봐도 9선 의원인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외에는 없다. 허나 그 JP조차 비례대표 1번을 받고도 떨어지는 굴욕을 겪은 바가 있다.


참고로 JP와 같은 9선인 김영삼 전 대통령은 4대 총선과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준규 전 국회의장은 3대 총선과 4대 총선에서 낙선한 흑역사가 있다. 8선 의원 중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경우 2번의 낙선, 정일형 전 의원의 경우 한 번의 2위가[22] 있으며, 새누리당의 서청원 전 최고위원의 경우 1번의 낙선이 있어 김재광 전 의원만 8선 모두 당선(!)되는 진기록을 가졌다.


같은 7선 의원인 정몽준 전 의원은 국회의원 선거는 7회 모두 당선되었으나, 2014년 서울특별시장 선거에서 패배하여 1번의 낙선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이해찬 의원은 농담 삼아 "좀 교만하게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이 왜 선거에서 지는지 모르겠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19대 대선에서 문재인 캠프의 선대위원장을 맡아 승리를 함으로써 선거의 제왕이라는 타이틀을 이어가게 되었다.




당선되는 즉시 복당하겠다며 복당을 일찍이 천명했지만, 탈당한 인물들을 복당시키느냐 마느냐를 놓고 싸우고 있는 새누리당과는 달리, 더불어민주당은 탈당해 무소속으로 20대 국회에 입성한 이해찬, 홍의락 두 의원의 복당 문제를 거의 거론하지 않는 분위기다. 


홍의락 의원이야 본인이 복당할 뜻이 없다고 말했으니 그렇다고 친다지만, 이미 본인 스스로도 복당을 천명한 바 있고, 더불어민주당의 가장 튼튼한 지지층인 친노 성향의 지지자들에게 뜨거운 지지를 받고 있기도 한 이해찬 의원의 복당을 입 밖에도 꺼내지 않는 것은 이해찬 의원이 복당해 전당대회에 출마하면 아마도 가장 유력한 당권 주자가 될 것이고, 그럼 김종인 대표는 자기가 갖고 있었던 당 지휘권을 앙숙(?)인 이해찬 의원 에게 넘겨줘야 하는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기 때문에 그걸 원치 않아서라고들 보고 있다. 


그래서 이해찬 의원의 복당은 빨라도 아마 더불어민주당의 새로운 공식 지도부가 선출된 다음인 2016년 가을 즈음, 늦으면 대선 직후에나 이뤄질 듯하다. 이해찬 의원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아마도 2016년 9월 쯤에 복당할 수 있을 거라 내다보는 중이라고.


일단 일여다야 구도에서 무소속으로 나갔는데도 무난히 당선돼 '컷오프는 잘못됐다는 걸 세종시민들이 입증해 주었다'는 등의 명분도 생겼고 전당대회에서 친문 성향 최고위원들이 다수 당선되고 친문 진영에서 밀었던 추미애 대표가 압도적 득표율로 새로 당선되면서, 복당은 시간 문제일 듯.



2016년 8월 18일, 세종시 전동면에 있는 자신의 전원주택 근처에서 퇴비 냄새가 난다고 해서 민원을 넣었다. 


이에 세종시청에서부터 심지어 세종시 행정부시장까지 나서서 이웃 농민의 퇴비를 15톤이나 수거해 가는 바람에 갑질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악취의 농도도 허용치 안이었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자 이해찬 의원실에서 반론을 제기했다. 문제의 퇴비는 일반적인 퇴비가 아닌 돼지 분변을 바탕으로 한 퇴비로, 악취가 심해 그 주변에서 살고 있던 주민들이 찜통 더위에도 창문을 열지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고 이해찬 의원도 세종시를 지역구로 하는 국회의원이지만 무엇보다도 함께 피해를 보고 있었던 인근 주민이었기 때문에 다른 주민들을 대표해 민원을 넣었다는 거였다. 


세종시청에서는 '가축분뇨의 관리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 의하여 땅 주인에게 수거 명령을 내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보수 진영 지지자들이나 반노/반문 성향의 야권 지지층의 반응들은 대체로 '전원 생활을 하려면 그 정도는 각오해야 하는 것'이라며 갑질이라고 주장한다. 새누리당 세종시당도 '이해찬 의원의 민원은 황제 민원이다'라며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그런데 문제의 해당 비료를 조사한 결과 중금속인 아연 함유량이 기준치를 초과해 부적합 결과가 나왔으며 설상가상으로 해당 마을은 상수도를 쓰지 않고 지하수를 쓰는데, 비료가 뿌려진 땅이 가장 높은 곳에 있어 중금속인 아연이 마을의 상수원으로 흘러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또한 이 사건을 보도한 언론의 발행인은 김종인 대표가 이해찬 의원 쪽과 가까웠던 당직자를 몰아내고 더민주 세종시당 사무처장에 앉힌 사람이라 중립적인 시각에서 나온 보도인지 의심스럽다는 주장도 나왔다 


2016년 9월 30일 열린 더불어민주당 당무위원회의에서 이해찬 의원과 징계를 받았던 세종시당 당원들의 일괄 복당을 의결하면서, 더불어민주당에 복귀했다.  그리고 11월 2일 더불어민주당이 당 국정자문회의를 외교안보통일 자문회의와 국가경제 자문회의로 이원화한 뒤 이해찬 의원을 외교안보통일 의장에 선임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의 민주당 후보 경선에선 특정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거나 선거 캠프에 참여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지는 않고 중립을 지켰다. 몇 차례 경선 과정을 비판하는 의견을 낸 적은 있지만 특정 후보를 겨냥하지는 않은 원론적인 의견에 가깝다. 이후 문재인이 대선 후보로 확정된 이후에 선대위원장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제19대~20대 국회의원으로, 소속 정당은 더불어민주당이며 지역구는 안산시 상록구 갑 지역이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인 참여정부 시절에는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적이 있다. 2016년 8월 22일에는 민주당의 경기도당 위원장으로 선출돼 민주당의 인천시당 위원장으로 선출된 박남춘 의원과 함께 추미애 지도부의 경기도 & 인천광역시 권역 대표 최고위원을 맡았다. 현재 이해찬, 이종걸과 같이 차기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후보로 유력한 인물 중 한 명이다.


대표적인 친문 핵심 정치인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 생애 정치입문 전 

1962년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범학교 출신으로 6.25. 때 평양에서 월남하여 목포에 정착하였다. 목포에서 대성초등학교와 영흥중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때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 마산에서 직장생활하던 형에게 맡겨졌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경상남도 마산[3]에서 자랐다. 한 학년에 600여명이었던 고등학교에 호남 출신 학생은 그를 포함해 단 2명이었다. 원래 혼자인줄만 알았는데 2학년에 올라가보니 한명이 더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고 놀림을 받았던 그는 그때부터 지역감정이 정말 근거가 없으며 폐해가 심하다고 생각했다.


1981년 마산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1985년에 고대법대를 졸업하였고 1987년 제29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육군 법무관으로 임관해 병역을 마친 뒤 1993년부터 변호사로 개업했다. 이때부터 안산에서 법무법인 해마루 소속의 변호사로 생활하며 안산에서 터를 닦았다. 법무법인 해마루는 노무현과 천정배가 1993년에 함께 설립했던 법무법인. 


1996년부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대외협력위원장, 노동위원회 대외협력부장, 언론위원회 위원장 등을 하며 민변의 대표 변호사로 떠올랐다. 민변에서 맡은 사건의 70~80%는 노동법이나 국가보안법 관련 사건이었다. 


변협인권위원으로 재직 중이던 2000년 봄,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의 형사고소를 대리하여, 살인죄 공소시효 완성 직전 주범에 대한 검찰의 구속기소를 이끌어냈다. 이때 유가족에 대한 법원의 42억 원 배상판결이 나오자, 형식적으로 소멸시효가 완성된 사건일지라도 기관에 귀책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배상청구가 가능하다는 새로운 소멸시효이론이 정립되었다. 이로써 법조계에 '전해철'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 정치 입문

2002년 노무현이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뒤, 지방선거에서 패배하며 위기를 맞이하자, 전해철은 법조계 내에서 노무현 지지선언을 주도하였다. 이때 법률지원단을 만들고 이후 대선 캠프 법률지원단의 간사를 하면서 대선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2003년 노무현이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국회에서 탄핵을 당했을 때에는 문재인과 함께 노무현 변호 준비를 실질적으로 다 하다시피 했다. 그래서 결국 2004년 3월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기각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2004년부터 청와대에 들어가 일하기 시작하였다. 2006년에는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되어 1년 7개월 가량 민정수석을 지냈다. 당시 44세의 나이로, 전현직 통틀어 최연소 민정수석이다. 이렇게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있으면서 인사청문회 등의 준비를 아주 철저하게 해, 참여정부 역대 민정수석들 가운데 전해철 시절에 청문회 통과가 가장 잘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7년에 로스쿨 제도가 도입된 과정에서도 실무작업은 전해철이 총괄했다고 한다. 그때 유능한 전해철이 빈틈없이 추진하지 않았다면, 로스쿨 도입은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후문이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안산 상록구 갑 선거구에 출마했다. 그런데 김영환이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표를 갈라먹는 바람에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 후 법무법인 해마루의 대표 변호사가 되었고, 민주통합당 안산 상록구갑 지역위원장직도 계속 수행하였다. 


2009년 이명박 정부 하에서 검찰이 박연차 게이트 수사를 할 때에는 노무현의 많은 측근들이 무서워서 도망간 와중에도 문재인과 둘이서 실질적으로 변호 준비를 다 했다.




  • 제19대 국회의원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60.76%의 득표율을 기록, 새누리당 박선희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 후 문재인 대선 캠프에 들어가 열심히 일했다. 당내에 잡음이 끊이지 않고 내부 분란이 끊이지 않아 캠프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와중에서도 그 많은 정책 다 정리하고 정책발표서 발간까지 완료했다. 당시 문재인의 공약 가운데 상당부분이 전해철의 손길을 거쳤다고 한다. 그러나 그로 인해 당내에서 친노 비선 실세 논란에 휘말려, 논란이 커지자 양정철, 이호철 등과 함께 대선 캠프에서 일괄 사퇴하였다. 겨우 대선을 두 달 남짓 남긴 시점이었다. 


이렇듯 '비선 실세'로 욕을 먹었지만 권력을 휘두르긴커녕 국회에서 고생을 많이 한 편이었다. '면이 서는' 당직보다는 일하는 위원직을 주로 많이 맡았다. 2012년 민주통합당 BBK 진상조사위원회 위원, 정봉주 구명위원회 위원, 국회 민간인 불법사찰 국정조사특위 위원 등을 지냈다.


이후 국회 국가정보원 댓글의혹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위 위원, 민주당 대통령 기록물 열람위원, 국정원법 개혁추진위원회 위원(이상 2013년), 새정치연합 야당탄압저지대책위원회 위원, 국회 서민주거복지특위 위원, 박상옥 대법관 인사청문특위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2014년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가 일어났을 때에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위원(2014~2015년)으로 활약하며 세월호 관련 입법을 모두 주도하였고, 결국 2014년 10월 세월호 관련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특별법, 2015년 1월 세월호 배보상 특별법 등을 통과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외에 법사위에서는 야당 간사로서 여당의 공격에 맞서는 수문장 역할을 하였다. 야당 간사에게는 관행상 마지막에 발언 기회가 주어지는데, 이때마다 동료 야당 의원들이 제기한 문제점을 정리하면서 핵심을 한 번 더 찌르는 마지막 공격수의 역할을 해냈다.


그가 법사위 야당 간사 시절 효과적으로 막아낸 법안이 바로 사시존치 법안이다. 2015년 19대 정기 국회 당시 총 6개의 사시존치 법안이 발의되어 있었으나(이 중 5개는 새누리당의 함진규, 노철래, 김용남, 김학용, 오신환 의원이, 나머지 1개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조경태 의원이 발의한 것으로서, 이후 조경태 의원 역시 자유한국당으로 옮겼다.) 


이들 법안이 법사위 회의 안건으로조차 상정되지 못하도록 막아내는 데 전해철 의원은 중심적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측이 가능한 것은 상임위 간사들에게 법안 심의 순서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기 때문인데, 당시 여당 간사였던 이한성 의원은 사법시험 존치 법안을 지지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바 있으므로, 양당 간사 중 사시존치 법안 심의 순서를 뒤쪽으로 두기를 주장한 측은 전해철 의원으로 보는 게 보다 타당할 듯하다.  


사법시험 폐지문제와는 별도로, 선거 때의 공약이었던 반월 시화공단 스마트허브 조성을 꾸준히 추진해가고 있다. 그 외에도 수인선 완전지하화 계획에 성공하였고, 늘푸른아파트 소송 등 여러 소송 문제도 잘 해결하여, 사법시험 준비생들이 상당히 비토하는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지역구 내에서의 평판은 좋은 편이다. 


머니투데이가 평가한 제19대 국회의원 의정활동에서 새정치민주연합 내 9위를 마크했다. 



  •  제20대 국회의원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도 상록 갑에 출마해 1여 다야의 환경 속에서도 35,481표, 38.8%를 득표하며 새누리당 이화수 후보를 9,000표 차이로 따돌리며 비교적 무난히 재선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공정거래위원회, 금융감독원, 금융위원회, 국무조정실, 국무총리 비서실, 국가보훈처, 국민권익위원회 등을 소관 기관으로 하고 금융정책수립 및 집행, 공정거래질서 유지, 국정 조정 및 규제 개혁, 국가유공자관련 보훈사업, 국민권익지키기, 경제 인문 사회분야에 관한 연구 등 다양한 분야의 정책을 입안하고 심의하는 국회 상임위원회인 정무위원회의 더불어민주당 간사로 선임되었다.


2016년 8월에 더불어민주당 경기도당 위원장 선거에 출마하여 압도적인 격차로 당선되었다. 권리당원 ARS 투표와 대의원 현장 투표를 합산한 결과, 63.3%의 득표율을 기록하여 경쟁자였던 이언주 의원을 상대로 압승했다. 이언주 의원이 20대 총선 공천 과정에서 더불어민주당 코어 지지층에서 인심을 잃고 전해철 의원이 노무현재단 운영위원을 맡은 경력으로 반사 이익을 톡톡히 본 결과물이라는 평가다.



더불어민주당이 최고위원 제도를 당의 각 시도당 위원장들이 호선하는 권역별 대표위원제로 바꾸면서 전해철 의원은 경기도 & 인천 권역 대표위원으로서 당 최고위원이 됐다. 전해철 의원이 1년, 더민주 인천시당위원장인 박남춘 의원이 나머지 1년을 맡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민주당 최대 주주라고 할 수 있는 문재인 대통령 지지층에서는 김경수, 조국, 임종석, 조응천과 함께 전해철 의원에 대한 평가가 좋은 편이다. 오히려 보수 야당에서 삼철이라고 공격 했던 것이 이득이 된 셈. 보수 야당에서 대통령 측근이라고 공언한 셈이니. 


민주당이 6.13 지방선거 - 6.13 재보선에서 압승을 거두자, 정치권의 관심은 추미애 지도부의 뒤를 이을 민주당 제3기 지도부가 어떻게 구성될 것이냐로 모아졌다. 특히 제3기 지도부는 2020년 4월에 치러질 21대 총선 공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도부가 될 것이므로, 이번 경기도지사 후보 경선을 통해 개인적인 인지도와 더불어 자타공인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이란 사실을 나름 크게 알린 전 의원이 출마할 것이냐에 대해 관심이 쏠렸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당내 친문계 핵심 인사로 분류돼 왔던 최재성 의원과, 친노계의 좌장이라고 불리어왔던 이해찬 의원도 출마 여부를 저울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당내 친문 표가 분산되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그래서 최재성 의원과는 동반 출마하지 않기로 일단 의견을 모았다는 소식이 알려졌고, 그럼 둘 중 최재성이 양보할 것이냐, 전해철이 양보할 것이냐는 쪽으로 관심이 기울여졌는데, 7월 15일 전해철 의원이 전당대회에 불출마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 정치 성향 

문재인 대통령의 사람들 중에서도 최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문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불리는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함께 이른바 '3철'로 불렸다. 이 세 사람 모두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재직 중이었던 문 대통령의 휘하에 있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 정치권 일선에서 활동하는 3철은 전해철 의원 한 명 뿐이다. 양정철 전 비서관은 19대 대선이 끝난 뒤 해외로 아예 떠났고, 이호철 전 민정수석은 정치권을 떠나 여행사를 운영하는 걸로 알려져 있던 중, 2018년 6.13 지방선거에 가까워 와서는 부산시장 선거 출마설이 나왔지만,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이 세 사람은 나중에 전해철 의원이 경기도지사 선거에 나서기로 한 뒤에 열었던 북 콘서트에서 오랜만에 다시 모이게 된다.


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명박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으러 왔을 때의 사진을 보면 당시 노 전 대통령의 변호를 맡고 있었던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하여 김경수 의원 등과 함께 노 전 대통령을 수행하고 있는 전해철 의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각별한 인연에도 불구하고 18대 대선 때 3철 논란이 잠깐 불거진 적 빼고는 상대적으로 언론의 주목을 덜 받았다. 특히 친노계를 시종일관 저격해 왔던 박근혜 정부 시절의 보수 언론들조차도 전 의원에 대해서는 거의 보도한 적이 없었다. 조중동 등 주류 보수 언론이 연일 '친노 패권주의'를 외치며 부지런히 친노 & 친문 인사들을 저격하던 2015년 즈음을 돌이켜보면 문재인 당시 대표의 최측근 인사였는데도 언론의 주목을 상대적으로 덜 받았다는 특이점이 있다. 


본인 스스로도 혹여나 보수 언론에게 빌미를 줄 일이 생길까봐 침묵을 지켰던 듯하다. 그래서인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고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한 뒤부터야 전해철 의원이 문재인 대통령의 오래된 최측근이었다는 점을 알게 된 사람들이 많다.


위에 상당히 길게 서술되어 있듯이 본인이 사법시험에 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법시험에 대단히 비판적이다. 그래서인지 적극적인 로스쿨 도입론자였다고 하며, 실제 청와대 민정수석 시절 로스쿨 도입에 가장 앞장섰다고 한다. 지난 제19대 국회 시절에는 법사위에서 야당 간사로서 사법시험 존치 법안이 심의되지 않도록 최대한 시간 끌기를 하였다. 그 때문에 전직 서울변협회장이던 나승철이 그의 지역구 사무실 앞에서 항의시위를 하기도 하였다.

1947년 경기도 황해도 연백군에서 태어났다. 네살때인 1950년 6.25 전쟁중 피난하여 수원에 정착했다. 서호초등학교 수원중학교 경복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1974년 행정고시 합격 후 재무관련 부처에서 오랫동안 재경직 공무원으로 공직생활을 하였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비밀리에 금융실명제 시행을 추진할 때 실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 때 재정경제부 차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정책기획수석비서관, 국무조정실 실장 등을 역임하였다.


노무현 정부 초기인 2003년부터 2004년까지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장관(경제부총리)을 역임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2005년부터 2006년까지 교육인적자원부(현 교육부) 장관(교육부총리)를 역임하였다.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에서 중용되어 장차관 5번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2007년 열린우리당의 마지막 정책위원회 의장을 역임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10년까지 민주당 최고위원을 역임하였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경기도지사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국민참여당 유시민 후보와의 야권단일화 경선에서 패배하여 출마하지 못했다. 경선 과정에서 패배한 것이기에 의원직은 유지하였다. 2011년 5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민주당 원내대표를 역임하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경기도 수원시 정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새정치민주연합 경기도지사 후보로 선출되어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세월호 사건으로 야당에 유리한 구도였고, 출구조사에서도 앞섰으나 실제 개표 결과는 새누리당의 남경필 후보에게 1%차이로 석패하면서 잠시 야인 신분이 되었다. 


낙선 후 2015년 3월 새정치민주연합 국정자문위원장을 맡았다. 이때 대한민국 정당사상 최초로 열린 정책엑스포 조직위원장을 맡아 새정치민주연합이 유능한 경제정당, 정책정당이 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새롭게 신설된 경기도 수원시 무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원래의 지역구는 박광온이 자신이 사퇴했을 때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가져갔기 때문에, 자신이 선거구를 옮겼다.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문재인 캠프의 선거 공동대책위원장과 일자리위원장을 맡았으며, 문재인의 당선 이후 국정기획자문위원장으로 위촉되었다.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현직인 남경필 지사와의 경기도지사 리매치가 점쳐졌으나, 불출마 선언을 하고 전해철 후보 지지를 선언하였다. 아무래도 경선까지 포함해서 두 번이나 패배한 만큼 또 출마하기에는 부담이 컸던 듯. 또한 70대의 많은 나이도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논란 : 청년들이 정치를 지망하는 이유는 출세와 욕심 때문?

2017년 9월 21일 "제정임의 문답쇼"에 출연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정치가를 꿈꾸는 청년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청년들이 정치를 돈벌이의 수단이나 생업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청년들이 그저 돈과 출세를 위해 정치를 하는 것으로 매도하는 발언을 했다. 


내용을 요약하면 

"돈과 권력과 명예를 얻을려는 욕심을 가지는데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 정치는 생업이 아니다. 정치를 치부의 수단으로 삼으면 안된다. 이른 나이(젊은이, 청년)에 정치를 직업으로 하면 안 된다. 특히 젊은 나이에 정치를 직업으로 생각하고 뛰어드는 것은 가능하면 말리고 싶다. 정 그렇게 정치가 하고 싶거든 자기분야에서 업적을 쌓고 성공하고 인정받은 후에 그걸 발판으로 들어와야 한다."

라는 내용으로 발언을 했다. 따라서 청년의 정치참여를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를 피력했다. 


하지만 젊은 청년들이 정치를 지망하는 이유를 치부의 수단이나 출세의 방편으로 생각하는 욕심이라고 보는 관점은 매우 부당하며 김진표 본인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청년들도 그러려니 넘겨짚은 발언이다. 


우선 청년들 중에도 물론 돈과 출세를 위해 정치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나 정치를 하고자 하는 모든 청년들이 그렇다는 것은 결코 아니며 청년 전체를 전부 거론하며 발언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한 발언이다. 게다가 청년의 정치참여 또한 시민의 정당한 권리행사이다.


오늘날의 청년들이 정치를 지망하는 진짜 이유는 그동안 한국의 기성 정치인이 너무나도 현실에 어두운 채로 시대착오적인 구태정치만을 반복해 온 데 대한 분노와 절망에 있다. 


한국의 기성정치인들이 한결 같이 엘리트기득권카르텔에 갇혀 서민이나 중하류층과 괴리되어 그들만의 리그 속에서 현실을 개혁하기는 커녕 기득권과 타협하며 그저 트러블 없앤다고 차떼고 포떼고 장기하듯 근본적인 원인은 건드려보지도 못하고 하나마나한 근시안적이고 언발에 오줌누기에 가까운 정책만을 거듭한 것을 청년들은 잘 알고 있다. 


거기다 정부 눈먼돈을 업자에게 뿌리는데나 골몰해서 돈은 돈대로 들고 실효성은 전혀 없는 정책(ex 10년동안 총 80조 들어간 저출산 정책등)을 정책수혜자나 당사자의 목소리는 도외시 한 채 변화 없이 계속해 온 것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가만히 있다가는 나라가 망할 수 도 있겠다는 위기의식이 정치를 지망하게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청년이 정치에 관심 가지고 정치를 지망하게 된 이유는 헬조선이라 불리는 오늘날 한국의 현실을 불러온 기성세대와 기성정치인에 대한 분노와 절망인데 그것을 치부나 돈과 권력, 명예에 대한 욕심으로 매도한 발언은 부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대표적인 모피아(경제마피아의 의미)로 불리는 김진표 본인은 노무현 정부시절 경제부장관을 하면서 신자유주의적인 기업과 기득권에게 유리한 정치를 한 인물로서 수많은 국민들에게 피해를 입혔고 자신이 세계 최고의 자살율과 저출산에 기여한 인물 중 한명인데도 지난 정치에 대한 조금의 반성이나 사과는 커녕 지금껏 아주 진보적이고 개혁적으로 잘 해온 것처럼 인터뷰하는 것은 후안무치하게 보인다.(심지어 교육부총리 시절에도 경쟁과 형평성과 학생인권 사이에서 갈피 못잡다 내신 수능 본고사 죽음의 트라이앵글을 만들어낸 장본인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차라리 청년 시절에 인내하여 본인 분야의 전문성을 확실히 쌓았고 그걸 바탕으로 정계에 들어와 실무적인 업적을 좋은 쪽으로 쌓아올렸다고 평가받는 사람이라면 저런 말을 했어도 조금이나마 설득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년들의 일관된 부정적인 반응은 본인의 정치관에 대한 논란과 별도로 경제 및 교육 분야에서 김진표의 정치인으로서의 업적 또한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함을 의미할지도.




[출처 : https://namu.wiki/w/%EA%B9%80%EC%A7%84%ED%91%9C(%EC%A0%95%EC%B9%98%EC%9D%B8)]


친노계, 친문계의 맏형이자 정신적 지주 '실세 총리'

현재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 중 현역 최다선 의원


이해찬 당대표 출마이해찬 당대표



참여정부 시절 국무총리를 지냈고, 대한민국의 제13대~17대, 그리고 제19대~20대 국회의원이기도 하다. 13대부터 17대까지는 지역구가 서울 관악구 을 지역이었고, 2008년 18대 총선 때에는 총선에 출마하지 않았다가 2012년 19대 총선 때 세종시로 지역구를 옮겼다. 소속 정당은 더불어민주당이다. 


민주당계 정당의 대표적인 선거 전략가 중 한 명으로 유명하며 그 능력을 인정받아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요직을 지낸 인물이다. 사회학 기초 교과서 중 하나인 C. 라이트 밀즈의 <사회학적 상상력>을 공역하기도 한 사회학자이기도 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자발적인 역할 분담으로 역대 국무총리 중 JP와 더불어 실세 총리의 대명사로 불리는 유이한 사람이며 민주당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친노무현계의 상징적인 큰형님이자 정신적 지주이며 투 탑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래서 보통 언론에 '친노의 좌장'이라는 수식어가 자주 따라붙는 편이다. 심지어, 친문계의 리더로 불리는 문재인 대통령도 깍듯하게 형님이라 부르면서 수장으로 존중해준다.


그리고 무려 7선 국회의원인데 이는 민주당 현역 의원들 중 최다선이며 20대 국회를 통틀어서는 자유한국당 서청원 의원(8선) 다음이지만, 서청원은 2008년 18대 총선에서 친박연대 비례대표 공천을 대가로 뇌물을 받은 게 드러나 당선 무효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7선 의원이라고 봐야 한다. 즉, 이해찬은 공식적으로 서청원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최다선 국회의원인 셈이다.


이해찬 의원이해찬 친노


이를 봤을 때 20대 국회의 후반기 국회의장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다만 다선 의원이 국회의장을 역임하고 나면 보통은 다음 총선에 출마하거나 정부 관료를 역임하지 않고 정계 은퇴 수순을 밟는 것이 관행이기 때문에, 확정적으로 예측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민주당의 최다선 의원이지, 최고령 의원은 아닌데다 여전히 친노계와 친문계의 큰어른인 거물이기에 아직은 정계 은퇴를 말할 단계가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 2018년 기준 65세로, 역대 대통령 중 그보다 많은 나이로 출마해 당선된 사람만 넷이니 그리 많은 나이라 보기도 힘들다. 막말로 다음 대선에 출마한다고 해도 나이로 공격 받을 소지는 없을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의 차기 당대표로 유력한 후보군 중 한 명이다.


충청남도 청양군 청양면(현 청양읍)에서 아버지 이인용과 어머니 박양순 슬하 5남 2녀 중 3남으로 출생. 참고로 이해찬의 조상은 덕흥대원군이다. 


이해찬 어린이이해찬 당대표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그 시절 여타 정치인들과는 달리 이해찬은 비교적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부친인 이인용 씨가 청양면 면장 출신이기 때문. 이인용 씨는 광복 후에 32살의 나이로 청양면장을 맡아 4.19 혁명 때까지 면장을 지냈을 정도로 마을주민들에게 신뢰를 받았다고 한다.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에 말기에 치러진 지방선거 에서 야당 후보로 나서 면장에 당선 되었다고 하니, 지역 주민들의 신망이 투터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찍이 서울로 상경해 덕수중학교,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를 입학한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섬유공학과를 다녔으나 적성에 맞지않아 자퇴하였고, 이듬해 문리과대학 사회학과로 재입학했다. 정계에 입문하기 전까지는 주로 운동권에서 활동했는데, 1972년 10월 유신을 계기로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어 약 1년을 복역하고 출소했다. 이 사건 후 무역회사를 다니기도 했고,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기자들이 차린 번역실에서 번역을 하기도 했으며, 앰네스티 한국지부에서 일하는 등 재야 인사로 지냈다. 1979년에는 돌배개출판사를 창업했다.


이해찬 과거이해찬 당대표


그러다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제적이 되었다가 해금 조치되면서 1980년 복학하여 복학생협의회 회장을 맡았는데, 그해 6월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이해찬은 재판을 받고 투옥되었다가 수감 2년 6개월 만에 크리스마스 특사로 석방되었다. 이후 재야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여 그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총무국장에 선출되었다. 군사 독재 정권은 그를 요시찰 인물로 삼아 감시했으나 굴하지 않고 반독재운동과 출판 활동 등에 종사했다. 1985년에 처음 서울대를 입학한 지 14년 만에 졸업하였다. 1987년 말에 한겨레신문 창간발기인을 지냈다.


학생 운동의 이력을 지니고 있었던 이해찬은, 여러 재야 인사들과 함께 평화민주당에 입당하였다.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관악구 을 지역구로 공천을 받아 민주정의당 김종인(...) 후보와 통일민주당 김수한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이후 5회 연속으로 관악을 국회의원 당선에 성공했고 20대까지 합해서 현재 7선 의원을 기록 중이다.


이해찬 레전드이해찬 당대표


호불호가 뚜렷하게 갈리는 정치인이며, 지지자들 사이의 애칭은 '해찬들', '찬들이형', 또는 '대장부엉이'라 불리며, 비토 세력들에게는 '해골', '해골찬'이라는 멸칭으로 불린다.


제20대 국회의원 중 유일하게 국무총리 경력이 있는 의원이다. 현직은 의원이지만 사석에서는 '총리(님)'이라 불린다. 일종의 예우 차원. 


2010년대 들어 민주화 운동 시절에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보이는 증상을 자꾸 보여 보는 사람을 안타깝게 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2017년 김어준의 파파이스와 같은 공개석상에서 나온 모습을 보면 가끔씩 손을 떨거나 말이 끊기는데, 이는 젊었을 때는 보이지 않던 모습으로 (말을 날카롭고 빨리 하기로 정평이 나있었다), 여러 모로 고문 후유증이 아니냐는 염려가 있다.


운동권 출신이었던 데다 친노의 좌장인 만큼, 운동권, 친노계가 포진되어있는 정의당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가진 편이다. 6월 15일 tbs와 한 인터뷰에서 민주당은 개혁 우파, 진짜 진보는 정의당이라는 발언을 하면서 그 호의를 보여주었다. 실현 가능한지는 묻지 말자 일단 지금은 민주당이 개혁 우파적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시민단체, 노동운동, 진보정당들과 함께 진보의 저변을 민주당쪽으로 확장시키는게 목표라고.


이해찬 문재인이해찬 당대표


선거의 귀재 해찬불패


지역구 7전 7승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선거 득표율이 50%를 넘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걸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같은 민주당 중진인 정세균 국회의장이 지역구 6전 6승에, 모두 50%를 넘긴 득표율로 승리한 걸 비교 대상으로 드는데, 정세균은 2012년 총선 때 서울 종로구로 지역구를 옮기기 전까지는 민주당 후보에게 압도적인 표를 몰아주던 호남에 지역구를 두고 있었으니 적당한 비교 대상이라고 보긴 힘들다.


서울 관악구가 민주당 지지세가 서울에서 제일 강한 지역이기는 하지만 호남만한 텃밭은 당연히 아님에도 연잇어 5선을 한 것은 대단한 결과이다. 


물론 항상 유리한 지역에 출마해온 것은 사실이다. 관악구는 앞서 말한 것 처럼 서울 내에서 가장 민주당 계열 지지율이 높은 지역이었고, 세종시는 본인이 국무총리 시절 수도 이전을 전면에서 지휘한 곳인데다가 자기 자신이 충청도 출신이다. 물론 이를 감안해봐도 7전 7승은 선거의 달인으로 평가받을만한 기록이기는 하다. 남경필이 보수 성향이 강한 지역구이기는 했어도 수도권에서 6전 6승을 한 것이 대단한 기록으로 여겨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해찬 명언이해찬 당대표


이른바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던 박근혜의 경우, 두 차례의 총선에서 좋은 성적을 냈고, 2006년 5.31 지방선거를 한나라당의 대승으로 이끌긴 했지만 누가 봐도 새누리의 승리가 명확해 보였던, 그것도 대통령으로서 이끌었던 20대 총선에서는 참패해 박근혜가 본인의 능력으로 선거의 여왕이 된 건지, 아니면 그동안 기울어진 운동장 덕분에 얻게 된 승리를 박근혜의 능력 덕택에 얻은 것처럼 포장이 된 건지 불투명하게되었다


반면, 이해찬은 소위 말하는 험지 출마는 해본 적이 없었고 항상 유리한 지역을 출마해왔다는 점은 박근혜와 같을지 몰라도 13대 총선에선 민주정의당의 김종인, 통일민주당의 거물 김수한을 꺾고 당선되었고, 19대 총선에선 충청 지역 정치권의 거물 심대평을 상대로 완승을 거뒀다. 큰 선거를 이끌어본 경험도 서울시장 두 명의 당선에 기여한 바 있고, 2012년 대선을 제외하면[37] 자신이 참여한 대선에서 모두 승리를 맛 보았으니 박근혜에게 크게 뒤쳐진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라 할 수 있지 않을까?


1988년 첫 출마부터 2012년 총선까지 소속 정당의 이름이 모두 다른데, 이인제나 김한길처럼 탈당을 밥먹듯이 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가 몸 담고 있었던 민주당의 이름이 유난히 자주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건 문희상도 마찬가지다. 물론 신민주연합당 시절과 열린우리당 입당으로 인한 탈당 및 20대 총선에서의 무소속 출마 등 3번 탈당하긴 했다.


이해찬 문희상이해찬 당대표




문재인 대통령 화환 외 모두 거절!


결혼식장은 문전성시를 이뤘습니다. 결혼식 한 시간 전인 11시께 이미 100여명이 넘는 이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전체 하객은 어림잡아 400명은 넘어보였습니다. 당 대표실에서는 “경북여고 동기들과 한양대 동문들, 그리고 측근 의원들과 고문 등 아주 소수에게만 연락을 돌린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래서 결혼식을 모르고 있던 의원들도 많았다”고 말했습니다. 당직자들 역시 “우리에게도 청첩장을 보내지 않았다. 사실 우리에겐 ‘고용주’ 입장인데, 아무래도 부담 가질까봐 알리지 않은 거 같다”고 말했습니다. 당직자나 일부 의원은 오히려 문자를 받은 기자들이 결혼소식을 전해줘서 알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홍영표 원내대표를 비롯해 박영선·유승희·박범계·백혜련·김정우·김영진·임종성·박경미·고용진·이훈·서영교 의원 등이 참석했다. 지난 6·13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진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당선된 국회의원 11인의 얼굴도 보였다.


정부 측 인사로는 이낙연 국무총리와 김상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조명균 통일부 장관,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홍남기 국무조정실장 등이 찾았다. 청와대에서는 한병도 정무수석과 윤영찬 국민소통수석 등이 자리해 축하 인사를 전했다.



이날 결혼식에서 하객이 아닌 ‘기자’로서 유심히 본 것은 일반인들의 결혼식과 여당 대표 결혼식이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였습니다. 통상 결혼식장 옆에 줄지어 서있는 화환은 이번 결혼식에선 눈에띄지 않았습니다. 추 대표 쪽이 ‘화환을 사양하겠다’고 미리 알린데다, 그럼에도 결혼식장으로 도착하는 화환들은 모두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다만 하객들을 맞는 추 대표 뒤로 유일한 화환이 놓여있었습니다. 바로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화환이었습니다. 추 대표에게도 대통령의 화환은 남다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축의금 접수를 받는 테이블이 북적인 건 다른 결혼식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축의금 내려는 이들이 몰리다보니 많다보니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며 기다리다가 ‘빈틈’이 생기면 축의금을 내고 방명록에 이름을 적는 모습이었습니다. 참석하지 못하는 이들을 대신해 여러 개의 축의금 봉투를 내는 것 역시 일반 결혼식과 같은 풍경이었습니다.



중앙일보는 "추 대표의 한 측근은 '추 대표가 젊었을 때부터 판사·정치인의 길을 걸으면서 딸들이 어릴 적에 잘 챙겨주지 못한 미안함을 늘 안고 있어 더 애틋해 한다'고 귀띔했다. 추 대표는 지난해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딸 서씨와 통화를 하면서 눈물을 보인 적도 있다"고 보도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851356.html#csidx2efdaa14fa207a6ad0a0e356356f6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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