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호 여사

대한민국의 정당인이자 정치학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셋째 아들로, 김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첫째, 둘째 형인 김홍일, 김홍업과는 배다른 형제다. 오랫동안 특정 정당에 가입하는 일 없이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객원교수로 일하며 학자로 지내다가 안철수 전 대표와 관계된 모종의 일로 2016년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하였다.


민주당에 입당한 뒤 민주당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았고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시민 단체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약칭 민화협)'의 상임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63년 11월 12일 김대중과 이희호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 전 대통령의 장남, 차남인 김홍일과 김홍업과는 이복 형제 지간이다. 1982년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 82학번으로 입학하였다. 




재학 기간 동안 아버지의 정치적 고난을 목도해야 했으며, 당시 전두환 정권 치하에서는 고려대에 이런저런 압력을 넣어서 그의 입학을 막으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1993년에야 고려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첫째 형인 김홍일과 둘째 형인 김홍업의 뒤를 이어 장교로 군 복무를 했다. 학군 24기 출신으로 중위로 만기전역했다.


미국 포모나대학교 태평양연구소 객원연구원을 역임했다.

  

국민의 정부 시기. 김대중 대통령 재직 중 2002년 5월 최규선 게이트 (불법 뇌물 자금 수수)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서울지방법원 형사합의23부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 등 위반에 대해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추징금 2억 원을 선고했다(2002노3189). 이후 서울고등법원 형사2부에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2년, 추징금 1억 6000만 원을 선고받았고 그 후 2005년 8월 15일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광복절 경축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2016년 1월 4일 이희호 여사를 예방한 안철수가 이희호 여사와의 비공개 독대 자리에서 이희호 여사의 안철수 신당 지지 의사표현을 들었다고 언론플레이를 하자, 즉각 "그런 거 없다. 어머니는 그냥 듣기만 하셨다"는 내용으로 보도 자료를 배포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국민의당 창당 멤버들이 연로한 어머니를 정치적 언플에 악용했다고 생각했고 이에 크게 격분했던지 정치와는 선을 긋고 지내던 기존의 태도를 바꾸고 2016년 1월 24일 국민의당과 대척점에 서 있었던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선보였다. 그 이후에도 줄곧 안철수 전문 저격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입당일에 열린 국회 기자회견에서 "2012년 대선 때 순수한 뜻으로 정권 교체를 위해 뛰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어 이 자리에 섰다"고 말했다. 


아울러 "민주당이야말로 김대중 정신과 노무현 정신이 합쳐진 60년 민주당의 정통 본류이며, 더 이상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름을 호남 분열과 갈등의 수단으로 삼아서도 안 되고 분열의 수단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름을 말하지 말라"며 민주당 탈당파를 겨냥했다.


이미 입당 인사에서 총선에 나가겠단 말을 하려고 이 자리에 선 게 아니라며 선을 그었지만, 나중에라도 총선에 나가겠냐는 기자들 질문에는 "나중에 분명히 밝히겠다"고 답하기도 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과거에 무려 15억 원을 뇌물로 받은 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두 형들도 모두 감옥 신세를 져서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명예나 평판을 떨어뜨렸는데, 민주당에서 과연 공천을 받아도 되겠느냐는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이미 11년 전에 그 죗값을 다 치렀고, 김대중의 아들을 민주당이 받아들인다면 국민의당과의 정통성 논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게 해줄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후 문재인 대표는 1월 26일 김홍걸 교수 본인이 아예 총선에 출마할 생각이 없다고 말해 출마설에 대해 분명한 매듭을 지었다. 총선에 공천을 받지 못한 대신 민주당 국민통합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친노 패권주의 프레임 문제에 대해선 "친노가 누구인지 알 수 없고, 확실한 것은 친문 의원은 1명 밖에 없더라"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비례대표 공천과 관련하여 비대위의 후보 명단 발표로 당내에 분란이 일어나자, "A,B,C그룹안을 나눈 다음 투표를 하는 것은 당헌에도 어긋난다"는 발언을 하였다.


입당 이후 2월 6일에는 민주당에서 운영하는 팟캐스트 방송인 진짜가 나타났다에 게스트로 출연하였다. 방송에 출연해서도 일측에서 제기된 국회의원 출마설을 거듭 일축하기도 하였으며, 당 입당에 앞서 자신에게 도움의 이야기를 건내준 누군가의 표현을 빌려 이른바 '진김(...)' 3인방을 공개했는데, 그 중 설훈, 김한정 의원과 김우철 민주당 국토교통위원회 전문위원 이 대표로 언급되었다.



20대 총선 기간 막판에는 문재인의 호남 선거 운동을 지원하였다. 이때 문재인은 호남이 지지를 거두면 정계 은퇴 및 대선 불출마를 하겠다고 했다. 이 때문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더불어민주당이 호남에서는 패배했으나, 정작 총선 후에 문재인 지지율은 올랐기 때문. 비록 호남에서 패배한 것은 맞지만 문재인이 직접 지원 유세를 한 PK 지역에서 낙선을 각오하고 출마한 후보들이 8개 지역구에서 당선에 성공한 기적같은 결과를 이뤄냈고, 수도권에서 더민주 지지세가 집결하여 대승을 거두면서 상황이 미묘해졌다. 


그리고 선관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득표율을 보면 더민주가 국민의당에게 패한 것은 맞지만, '전북의 맹주'라고 불리던 정동영 의원이 이제 재선에 도전하는 정치 신인 김성주 후보에게 불과 0.7% 차이로 간신히 이기는 등 압도적 참패보다는 예상 외로 접전 구도가 많았기에 문재인이 섣불리 정계 은퇴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총선 이후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의 지지율이 다시 역전하기 시작하면서 16년 8월 기준으로 호남에서는 문재인이 지지율 1위를 회복했다.


2016년 5월 18일, 5.18 광주 민주화 항쟁 36주기 기념식에서 손학규가 "정치의 새 판을 짜는 데 앞장서겠다"고 말하자, "국민들께서 이미 20대 총선을 통해 새로운 판을 짜 주셨는데 무슨 새 판을 또 짠다는 것인가?"라며 손 전 지사에게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최측근인 박지원과는 앙숙관계이다. 김홍걸 입장에서는 어머니를 이용해 먹은 안철수의 '배후'이기도 하고 사실상 국민의당 기획자나 다름없는 박지원은, 본인이 아버지의 적자로 인정한 더불어민주당을 배신하고 나가 본가를 역공하는 배신자로 보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노무현의 최측근이었던 사람이자 현재 19대 대통령인 문재인은 노무현 아들인 노건호와고는 막역한 사이이다.



2017년 5월에는 광주 및 호남에서 문재인 후보의 지지유세를 적극적으로 나서며 지역민심을 잡고자 하고 있다.  한편 문재인 후보 지지선언을 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인 김현철 교수와도 함께 유세를 하며 다녔다. 


나름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혈육의 화합이라는 점 덕에 일부 지지자들과 적지않은 수의 지역 주민들에게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결국 문재인이 대통령 당선에 성공하면서 당선기여를 하는데 성공했다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에는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의장에 취임했다. 


2018년 재보궐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공석이 된 전남 영암·무안·신안에 전략공천이 될 거라는데, 이에 대해 김홍걸 의장은 3월 17일에 한 언론사와의 통화에서 6·13 국회의원 재선거에 뜻이 없다고 한 적이 없다"면서 "당에서 출마하라는 제안이 오면, 헌신할 생각을 갖고 있다"고 진일보한 답변을 내놨다. 


민주당 이춘석 사무총장은 "6·13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와 관련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다"며 "김 의장 출마에 대해서도 언론에서 많은 이야기가 있으나 구체적으로 검토된 바가 없다"고 밝혔다. 결국 해당 지역구에는 서삼석 지역위원장이 공천을 받았다. 


2018년 6월 28일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기자간담회에서 일본에 있는 강제징용 희생자의 유골을 봉환하는 사업을 남북이 공동으로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는 일본에 아직도 남아있는 많은 수의 강제징용자의 유골 을 고려한 것과, 남북한 모두가 공감하고 추진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북측 민화협도 이에 대해서 봄부터 논의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통일부의 승인을 7월 12일날 받았으며, 14일에 베이징을 경유하여 방북하였다. 


[출처 : https://namu.wiki/w/%EA%B9%80%ED%99%8D%EA%B1%B8]

왼쪽부터 김종필, 김대중, 김영삼.


1920년대 태어나 1960년대(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정치계를 풍미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정치를 한 시대다. 


사실상 대한민국 현대사 그 자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 것이, 1960년대부터의 대한민국의 정치사는 삼김을 빼 놓고서는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다. 김종필이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3김이 완전히 정계를 떠난 2004년 뒤에도 정치가들은 삼김과 반드시 엮인다.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가 양김 산하의 정치인들이다


현재는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고, 민주화라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두 계파 모두 보수/진보진영 양측으로 알아서 갈라지거나 제 갈길을 찾아갔다. 현재의자유한국당 / 바른미래당은 김영삼의 영향이, 더불어민주당 / 민주평화당은 김대중의 영향이 크게 미쳤던 당들이다. 현재는 이 두 당은 YS가밀어준 이명박 대통령과, DJ가 밀어준 노무현 대통령 이후로 그 색이 많이 옅어져 YS와 DJ 시절 성향은 크게 줄어든 상태다.


이명박(과 이회창)과 노무현은 자신을 키워준 김영삼, 김대중의 계파들을 쳐내고 권력을 장악하며 양김과 갈등을 쌓았다. 


김종필의 경우는 민주화 운동가였던 DJ와 YS에 비해 유명세가 딸렸고, DJ가 가진전라도, YS가 가진 경상남도 기반에 비해 JP의 충청도 기반 위력은 작은 편이었다. 결국 JP는 충청도 지역을 김대중에게 넘겨, 충청도 지역은 당시 민주당의 지역이 되었다. 노무현 정권을 겪으며 충청도는 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다소 잃었고, 한때 충청지역은 물론, 수도권 일부와 강원일대에서도 선전했던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 그리고 그 세가 크게 약화된 후신인 국민중심당과 자유선진당-선진통일당은 새누리당에 흡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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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대통령에서 퇴임한 후의 16대 대선, 17대 대선 역시 YS와 DJ의 부하들끼리의 양자구도 싸움 양상을 이뤘기에 18대 대선이 되어서야 양김의 영향력이 약해지게 된다.


삼김이 본격적으로 대한민국 정권을 휘어잡은 건 90년대부터인, 92년 대선과 97년 대선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이 대통령으로서 취임한 후부터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의 정치적 경력으로 주목받는 부분은 70년대와 80년대, 박정희 정부와 신군부에 맞서던 시기다. 당시 민중운동도 꽤 활발했지만 사실상 정치계에서의 민주화 투쟁이 절대적이었으며, 양김은 당시 민주화 투쟁의 상징적 존재나 다름없었다. 당시 야당(민주당, 신민당 등)은 지리멸렬한 상황이었기에 야당에서 민주화 투쟁을 한다며 온몸을 다 바치던 YS나 DJ가 유명할 수밖에 없긴 했다. 이 김씨들은 박정희 정부와 신군부에게 항상 눈엣가시였다.


2000년대 들어서야 이회창과 노무현이 삼김에서 벗어나야 한다  라는 주장으로 각각 김영삼, 김대중에게 반기를 들었다. 왜냐하면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은 각각 신한국당, 민주당, 자유민주연합을 자기 마음대로 꾸리고 공천도 자기 마음대로 하는 체제였기에 비판을 받았었다. 그 때문에 구시대적 관습을 없애자는 이회창/노무현 은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일명 DJ(김대중), YS(김영삼), JP(김종필)로 불렸으며, 김종필은 박정희 밑에서 사실상 넘버투로 일했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신민당을 이끌며 테러/납치/감금/투옥을 비롯한 고초까지 겪으며 박정희에게 항거했다. 정부에게 항거한 양김, 박정희 밑에 있던 김종필은 대한민국 내에서 입지가 무척 탄탄했다. 물론 전두환 정부는 정적인 셋을 또 탄압했다. 알다시피 DJ와 YS는 목숨을 걸고 박정희-전두환 정권에게 항거했다.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건 김대중 납치 사건이나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이 있지만, 그 외에도 흉기 든 깡패, 폭발물 등등...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으로 정치계에 등장한 세 사람은 1970년대 제7대 대통령 선거와 유신 정권에서 전면에 나섰으며, 1980년대 대한민국 제5공화국 시대에는 신군부에 고초를 겪었다. 김영삼-김대중 "양김"은 계속 민주화 투쟁에 나섰고 결국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의 신한민주당으로 정계에 복귀한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제13대 대통령 선거과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으로 부활한 세 사람은 각각 PK, 호남, 충청(충남)의 지지를 바탕으로 합종연횡했으며, 제14대 대통령 선거와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차례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두 대통령은 각각 1998년, 2003년 퇴임하며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고,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10선 의원에 실패한 김종필이 정계를 은퇴하는 것을 끝으로 3김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후로 김대중 前 대통령은 2009년 8월 지병으로 인해 사망했고, 2015년 11월엔 김영삼 前 대통령도 사망하였다. 김종필 前 총리 역시 2018년 6월[11] 결국 사망함으로써 3김 모두 세상을 떠났다.




셋 다 성향과는 별개로 젊을 때의 인물이 워낙 좋아서 화제가 되기도 한다. JP, DJ, YS 이 사진들의 시기는 무려 김대중은 60년대, 김영삼/김종필은 50년대로, 사실 지금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냥 할아버지가 아니라 고령의 할아버지들인 셈이다. 이 세 사람은 제1공화국때부터도 주요 요직이나 정치인 자리에 있었으니 정치에 관해선 수십년 경력을 가진 베테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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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현재도 대한민국 정치권의 거물 대다수는 삼김 덕택에 정치를 시작하거나, 삶이 바뀌었다. 여야중진 대다수는 삼김에게 직접 영향을 받으면서 정치를 했다. 말하자면 삼김은 친 이승만, 즉 자유당 계열 정당 정치인들과 조병옥 등의 과거 민주당 계열 정치인들의 영향도 받았으며 박정희 때의 민주공화당 계열 정치인들의 영향도 많이 받았을 뿐만 아니라, 민주정의당 계열 정치인들의 영향도 많이 있었고 신민당-신한민주당 계열 정치인들의 영향도 많이 받았을 뿐만 아니라, 민주화 이후에는 보수정당의 민정계, 공화계, 민주계, 그리고 민주당계 정당의 동교동계가 삼김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민자당 정치인들과 신한국당 개혁성향 정치인들도 삼김의 영향을 받았고 한나라당 대다수 정치인들도 삼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친노 정치인들과 386민주화 세대 정치인들은 물론, 친박계, 친이계 등도 삼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삼김은 군부세력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군부 쿠데타 핵심세력들과 신군부, 하나회는 물론, 군 장성들에게도 삼김의 영향이 미치고 있으며 또 육,해,공군과 해병대, 야전군, 특전사 등의 군부 인사나 군 간부들도 삼김의 영향을 두루두루 받았고 마찬가지로 검찰이나 법원의 고위인사나 원로 법조인 및 원로 변호사, 판사나 검사 등에도 삼김의 영향이 안 미친 곳이 없다. 또한 대형 로펌 대표를 비롯한 대형 로펌 변호사들에게도 삼김은 압도적인 존재다. 그리고 또 언론계에도 마찬가지로 삼김의 영향이 안 미치는 데가 없는데, 조중동, 한경오 등을 막론하고 삼김의 영향이 안 미치는 곳이 없다. 그리고 지상파 및 종편의 방송에도 삼김의 영향이 미치고 있으며, 특무대-방첩대-육군보안사령부-국군보안사령부-국군기무사령부로 이어지는 군 정보기관과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으로 이어지는 정보기관에도 삼김의 영향력이 안 미치는 곳이 없었을 정도다. 


또한 대한민국의 거대 재벌 총수들과 재벌 오너 및 대기업 CEO, 재벌 기업인들과 대기업 임원들과 중소기업 CEO, 중소기업 임원들에게도 삼김의 영향이 많이 미칠 정도다. 대한민국 정치계에서 삼김과 아예 무관한 정치 세대가 주류를 차지하려면 적어도 20년은 더 필요하다. 그만큼 대한민국 정치계에서 삼김은 압도적인 존재다.


김종필의 계파는 청구동계라고 칭하는데, 3김 중에 제일 미약하고 인지도가 낮다. 2018년 6월 23일 김종필이 향년 92세로 사망하면서 삼김시대는 결국 반세기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한국 정치사의 거물인 3김 중 하나.

영원한 2인자, 원조 '대통령 빼고 다 해 본 사람'이란 말로 요약될 인물.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전직 군인. 약칭은 JP.



임해군, 광해군 형제의 외조부이며 안경공 김영정의 증손인 해녕부원군(海寧府院君) 김희철(金希哲)의 방계 후손이다. 1926년 1월 7일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운정(雲庭)이다. 40년 이상 정치가로 활동하며 여러 정부에서 국무총리만 6년 반을 지냈다. 굳이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지 않았더라도, 시사에 관심이 있다면 반드시 한 번 정도는 들어봤을 정도의 인지도를 지닌 정치가.


한고제에게는 소하, 장량이, 유비한테는 제갈량이, 조조에게는 순욱이, 태종에게는 하륜이, 세조에게는 한명회가 있다면 박정희에게는 김종필이 있었다. 이른바 삼김시대의 삼김 중 한 명으로, 김대중이 2009년, 김영삼이 2015년에 숨을 거두면서 유일한 생존자였으나, 2018년 6월 23일에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3세(만 92세)


둘째 형 김종익도 3선 국회의원을 역임, 셋째 형 김종락은 한일은행 지점장, 전무를 거쳐 무려 14년에 걸쳐 대한야구협회장을 지냈다. 


이른바 3김(金)의 주역 중 한 사람이기도 하였는데 2009년 김대중, 2015년 김영삼에 이어서 2018년 가장 고령이었던 김종필마저 모두 세상을 떠남으로서 이들의 정치 데뷔 반세기만에 3김의 주역들이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3김 시대라 불렸던 이들도 결국은 사람이라 세월의 무게를 버티지도 못하고 모두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었다. 


대통령의 길을 버리고 안락한 2인자를 선택해 9선의원과 2번의 국무총리를 역임한 김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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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이 대통령으로서 재임하는 모습에 대해 아예 대위를 사단장에 임명시킨 꼴이라며 혹평한 적이 있다. 하지만 해당 발언은, 말에 젊은 혈기가 남아있는 노 전 대통령의 언행을 비판하는 한편, 노 전 대통령의 선거공약이자 2004년 정계의 뜨거운 감자였던 행정수도 이전 약속 이행을 촉구하는 것으로, 그 외에는 인간미가 있고, 순진한 모습이 남아있는 노 전 대통령에게 호기심과 흥미가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도 2002년 대선 때는 이회창이나 이인제 등을 저격하며 중립을 지켜서 '음지에서 노무현을 지원사격했다' 라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하지만 노무현이 평소 받았던 평가 그대로, 노무현의 다혈질을 두고 우려를 많이 표했고 대통령이 되어서도 그 자질을 키우지 못하고 적만 만들다 일을 키우는 사람이라고 비평했다. 김대중은 그 선을 잘 지키는 정치 프로였다고 평가한 것과 대조된다.


2016년 11월 3일 시사저널의 경영자 및 기자와 김종필 간에 있었던 대화가 11월 14일 기사화되어 보도되었다. 기사의 주요내용은 당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국민들이 분노하여 박근혜의 하야를 요구하지만 박근혜의 고집센 성격상 하야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과는 별도로 육영수에 관한 뜻밖의 내용도 있어서 계속 다른 언론사에 인용되며 주목을 받았다. 김종필은 육영수에 대해 대통령 부인이라는 이름에 맞게 행동하는 것처럼 꾸민 것일 뿐 실제로는 남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며, 육영수의 실제 성격은 대중에게 알려진 온화하고 자애로운 모습과 전혀 다르다고 이야기했다.


2017년 4월 이재오가 김종필을 예방했을 때와 5월 홍준표가 서울 청구동 자택으로 문안인사를 왔을 때 문재인에 대해서 인신공격적인 언행을 남겼는데 베라먹을 자식(빌어먹을 자식), 그깟놈은 대통령 될 자격도 없어라고 말하여 문재인에 대한 증오와 배척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었다. 



물론 이재오와 홍준표 면전에서 공개적으로 하였던 것이었지만 이들을 의식해서 그런 것인지, 본인이 원래부터 문재인의 정치적 성향을 증오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어보이나 본인이 군부 출신으로 정치적으로 보수성향이 짙은 편이기 때문에 문재인 같은 성향의 인사를 싫어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종필은 김영삼이나 김대중, 노무현 등의 정치인에게도 좋게 평가한 전례가 있어서 저렇게 강하게 비판한 것은 이례적이다. 



그러면서도 이재오와 홍준표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면서 각각 자네같은 각오로 정치를 해야지.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통 책임감이 없어.(이재오에게 한 말) 자네는 정말 대통령이 될 자격이 있는 관상이야, 자네같은 인물이 대통령이 되어야지, 나는 (홍준표 자네를)지지하겠다(홍준표에게 한 말)고 공개적으로 홍준표 지지를 표하였다. 


하지만 건강상의 이유인지 투표는 하지 않았다(!?) 또한 19대 대선에 출마한 늘푸른한국당의 대선후보이자 친이계의 좌장인 이재오도 김종필을 예방했는데, 이재오 앞에서도 문재인에 대해 인신공격적인 표현을 하기도 했다...... 더 말하지 않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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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같으면, 뜻과 멋을 모두 갖춘 절묘한 사자성어로 덕담을 해줬을 JP가, 육두문자 수준의 단어를 언급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김영삼, 이명박뿐만 아니라 김대중과 노무현에 대해서도 좋은 평가를내리며 덕담까지 했었기 때문.  실제로 JP는 다른 정치인에 대해서 특별히 험담하지 않았고, 상당히 차분한 어조로 평해왔던 편이다. 당장에 YS와 DJ가 사이가 좋지 않지만, JP는 YS와 DJ와 모두 가까웠고 두 정치인에 대해서 호평하고 있는 점도 그러하다. 



그리고 과거의 정적들에 대해서도 본인도 세월이 흐르고 나니 그 적개심들이 모두 씻어내려졌다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이에 대해서 아무리 총리를 지낸 분이자 정치 원로라지만 특정 대통령 후보를 향해서 원색적인 비방을 하고 공개적으로 특정 후보를 지지한다는 언행이야말로 선거법 위반 대상이라고 말했다

이후에 홍준표가 낙선하고 문재인 후보가 당선된 이후에는 매스컴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침묵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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