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1969년 서울특별시 출생 남성, 실명 김동원, 닉네임 드루킹으로, 명지대를 졸업하고 대기업 건설사에서 근무하며 2000년대 초중반 친노 커뮤니티 서프라이즈에서 쁘띠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한 친여권성향 논객인 동시에 정치자영업자이다. 



참고로 그 유명한 변희재도 여기 출신이다. 여기에서 탈퇴해서 지금의 극우 성향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본명은 김동원, 페이스 북에서는 Sj KIM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2018년, 문재인 정권을 공격하는 여론 조작을 하다가 구속되었다. 경찰에 따르면 문 정부를 공격하는 댓글 공작을 통해 역으로 보수 세력의 댓글 부대에 대한 수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행동했다고 추정된다고 한다. 


네이버 블로그에 국내 정치 동향, 국제 정세를 분석한 글들을 주로 올리고 2009년부터 닉네임을 드루킹, 블로그 이름을 드루킹의 자료창고로 바꾸고 활동했다. 2009, 2010년 2년 연속 네이버에서 파워 블로거로 선정되었으며 2010년부터 2018년 2월까지 유령 회사이지만 경기도 파주시 문발동 507-7에 위치한 유령 회사 느릅나무 출판사의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경제적 공진화 모임이라는 사이비 종교 수준의 단체를 운영하고 있으며, 드루킹 본인이 직접 강연을 하거나 국내외 인사(노회찬, 유시민, 다마키 타다시 등)들을 초청하여 정기적으로 강연을 개최하였다. 또한 파주시 출판단지 인근에 '산채'라고 하는 사무실이 존재한다고 한다.


'경인선', '경공모', '세이맘' 등의 조직을 통해 민주당 경선 대선 그리고 현정부 초기까지 때부터 특정 정당 혹은 정치인과 연관되어 네이버 댓글 및 기사순위조작과 대형커뮤니티에 여론조작 그리고 인사청탁을 한 것인지 아닌지 논란이 되고 있다.  



드루킹은 일본 침몰을 예언하였는데, 이를 대비하여 일본 침몰 후 일본의 이재민들을 개성으로 피난 시켜서 자신이 운영하는 특별지구를 만들 목적으로 김경수 의원에게 오사카 총영사직을 요구하였다. 



김경수 의원이 청와대에 추천했지만 청와대에서 이를 거절하자 문재인 정부를 프리메이슨과 연관된 제수이트 같은 비밀결사 조직이라고 주장하며 공격하였다. 그는 음모론이나 예언들을 섞어 황당한 주장을 경공모 회원들에게 주입하고 문재인 정부를 공격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던 것이다.


드루킹을 잘 안다고 주장한 사람이 드루킹의 실체라며 드루킹에 관한 글을 페이스 북에 올려서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특검의 수사결과 드루킹과 김경수 의원이 지속적으로 접촉하고 김경수 의원이 재벌개혁의 자문까지 구했다는 보도까지 나오면서 드루킹이 일방적으로 여권 정치인들에게 접근하였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드루킹은 정치 경제 파워블로거로 활동하여 네티즌들에게 인지도가 있었고, 특히 그중에서도 국내 정치에 관한 예측과 관련해선 파격적이면서도 일반인이 접하기 어려운 정보의 제공과 함께 사람들의 이목을 끈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글을 보면 역사, 인물 및 철학에 관한 인용을 많이 볼 수 있으며 일관된 경향이 있다. 오랜 과거의 것들을 다소 난해하고 현학적으로 다루는 이들과 다르게, 아주 간단한 언어로 자신의 방식대로 풀어서 전달하고 있다.


미디어펜에 따르면 드루킹은 육아정보 카페 '세이맘'(세상을 이끄는 맘들) 등에서 회원들에게 더불어민주당 당원으로 가입하라고 권유하는가 하면, 가입 방법을 자세히 공지하기도 했다. 세이맘은 주부들이 육아와 요리 정보 등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는 온라인 카페이지만 정치 색이 뚜렷한 게시 글로 가득하며 현재 폐쇄 절차를 밟고 있다. 이


밖에도 드루킹은 김경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팬 카페인 '우경수'(우윳빛깔 김경수), 블로그 '경인선'(경제도 사람이 먼저다) 등의 가입과 접속을 권유하는 등 홍보 활동을 펼쳐온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일보 기사를 통해 드루킹 일당이 조직적으로 댓글 조작을 관리한 기사의 종류가 일부 드러났다.


같은 날 한겨레의 보도에 따르면 드루킹의 매크로 구입 시기는 2018년 1월 15일이고 첫 사용 날은 이틀 뒤인 17일이다. 그 외에도 현 청와대 인사와 접촉 정황 및 김경수 후원정황 기사가 보도되었다.


안철수 후보를 비난하고 안희정 후보를 지지하는 여론 조작, 스마트폰 ‘비행기 모드’를 이용해 네이버 보안망을 뚫고 댓글을 조작한 사실 등이 드러났다.  2018년 4월 19일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제19대 대통령 선거 당시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를 가장 곤경에 처하게 했던 네거티브 선거 전인 MB 아바타 공격은 드루킹과 그 지지자 세력들의 댓글 조작으로 인한 프레임이라고 한다.


2018년 4월 19일 문화일보 보도에서는 드루킹이 자신의 조직을 활용해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의 당내 경선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고 보도하였다.기사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드루킹은 구속되기 직전까지 실시간으로 댓글 조작을 지시했다고 한다.기사


2018년 4월 19일 중앙일보 보도를 통해 드루킹이 김경수와 어떻게접촉하고 댓글을 썼는지 일부 공개되었다. 



이같이 '경인선', '경공모', '세이맘' 등의 조직을 통해 민주당의 경선, 대선, 그리고 현 정부 초기까지 때부터 특정 정당 혹은 정치인과 연관되어 네이버 댓글 및 기사 순위 조작과 대형 커뮤니티에 여론조작, 그리고 인사 청탁을 한 것인지 아닌지 논란이 되고 있다. 


특검을 계속 해 봐야 알겠지만 어찌되었든 가장 핵심 쟁점사항인 김경수와 민주당 인사가 금품을 주며 댓글조작을 사주한 정황이 드러난다면, 정부와 여당에게 타격이 갈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문 대통령이 현재 높은 지지를 받고 있는 큰 이유 중 하나는 이명박근혜에 비해 인격적으로 낫다는 점 때문이다.


또한, 대통령이 이런 핵심측근과 당의 행동을 인지했고 지시했는지에 대한 여부로 수사방향이 확산될 수 밖에 없다. 만약 여기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적으로 관여한 정황이 드러날 경우, 대통령직 퇴임 후 구속수사까지 받을 수 있는 사항이며 그렇지 않더라도 핵심측근 혹은 민주당 인사가 이런 위법 행위를 저질렀는데도 인지조차 못한 무능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가 씌워질 수 밖에 없다. 또한, 민주당도 댓글조작 범죄를 방조한 파렴치한 정당으로 낙인찍히는 것은 덤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드루킹이라는 존재는 정치인 커넥션보다, 정치인으로도 언론인으로도 정의할 수 없는 "개인"이 "인터넷 공간"을 이용하여 그룹을 만들고, 세력을 형성해 가면서 "언론인"으로서도, "정치인"으로서도 적용할 수 없는 애매한 신분을 유지하며, 개인의 명예, 개인의 만족, 혹은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과 현실의 공간을 오가면서 어떤 여론조작과 비슷한 행위를 할때.. 과연 어떤 처분이 내려지고, 어떤 선례를 만들지에 대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00% 단정할 수 없는 애매한 증거로 김경수-드루킹 커넥션으로 김경수를 처벌한다면.. 그 후에 벌어질 일은... 그야말로 온라인 전쟁이 되지 않을까 싶다. 역으로 걸어서 똥물을 뒤집어 씌우기 쉬워질 수도 있고.. 


한편 민주당 당대표에 출마한 김진표 의원의 페이스 북 글이 화재가 되고 있다. 



김진표 의원은 허익범 특검은 지금 이미 경찰조사에서 밝혀진 사실을 가지고 새로운 무언가가 나온 것처럼 의도적이고 악의적인 망신주기 수사를 하고 있다"며 "'논두렁시계'를 연상시킨다"고 지적하면서 "지난 지방선거 때 야당이 드루킹으로 정치공세를 펼칠 때 김경수 본인이 특검을 가장 먼저 요구했다...지난 지선에 경남에 선거운동을 하러 갔을 때 저는 당당하게 우리당의 김경수 후보를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특검은 구시대적인 마녀사냥을 멈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김경수 도지사 역시 8월 2일 특검의 압수수색에 대한 의견을 페이스 북에 올렸다. 

 



대표적인 거물급 여성 정치인이자 민주당의 한 축이었던 인물

한국의 前 정치인. 


여권 신장을 위해 노력한 여성운동 1세대의 대표적 인물로 환경부, 여성부 장관 및 국회의원을 거쳐 한국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가 됐다. 하지만 2015년 국회의원 재직 중 과거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기소돼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이 최종 확정됨으로써, 전직 국무총리 중 최초로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오점을 남겼다.



1944년 평안남도 평양시에서 출생했다. 6.25 전쟁 때 부모를 따라 월남해 서울에서 자랐다. 


정신여자중학교, 정신여자고등학교를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했다. 




1967년 박성준과 결혼했지만, 남편은 바로 감옥으로 끌려갔다. 소위 통혁당 사건 때문이었다. 10년 여 동안 옥바라지를 하며, 1977년 한신대학교에서 신학 석사를 받은뒤 한신대 강사가 되었다. 



민주화 및 재야 여성 운동가로도 활동하다 1979년 광주교도소에 투옥됐다. 2년 6개월여 만에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 


같은 해 남편도 크리스마스 특사로 출소했고,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엄마가 된 한명숙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여성학 석사학위도 받는 등, 가사와 학업을 병행했다. 이후 남편은 일본 릿쿄대학에서, 한명숙은 오차노미즈여자대학에서 박사 논문을 준비하다 중단하고, 부부가 함께 미국 유니온 신학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한명숙은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객원연구원 자격을 받았다. 



  • 여성운동

호주제 폐지, 군가산점 폐지, 여성쿼터제 도입, 출산-육아 휴가제, 성매매특별법 제정, 여성부 창설 등에 참여했다. 


1989년부터 5년간 한국여성민우회 회장이었다. 2000년 전국여성대회에도 참석하는 등 여성부 신설에 힘을 보탰고 2011년 당개혁특별위원회 때 유승희 전국여성위원장을 통해 당시 여성 공천 15% 의무화 실시에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관측되며, 2015년 12월 당적을 스스로 던질 때까지도 새정치민주연합 내 전국여성위원회를 통해 간접적으로 당내 여성 운동을 주도했다.




이미경 의원, 유승희 의원, 서영교 의원 등과 조현옥 현 청와대 인사수석이 그녀의 인맥이다. 또한 국회의원 시절부터 보좌관으로 국무총리 때도 의전비서관을 역임한 조한기(현재 충남개발공사 감사)도 한명숙 계로 분류된다.



  • 정계활동

1999년 김대중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했다. 이듬해 새천년민주당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직을 시작으로, 이듬해 신설된 여성부 초대 장관을 역임했다. 


DJ정권의 주요 업적 중 하나인 호주제 폐지 및 여성쿼터제 역시 한명숙의 주도로 이뤄진 것이며, 모성보호법 차원으로 생긴 출산휴가, 최대 5년간 여성들이 사용할 수 있는 육아휴직 등이 이때 생겨난 것이다.





2003년 노무현정권 당시 환경부 장관이 됐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땐 지역구 도전에 나서 고양시 일산구 갑으로 국회에 재입성했다. 경륜은 물론 여성으로서 갖는 상징성 덕분에 국무총리 물망에 오르내렸고, 이해찬에 이어 총리에 올랐다. 대한민국 사상 최초 여성 국무총리다. 김대중 정권 시절이던 2002년 장상이 서리직을 맡은 적은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임명된 최초의 여성 총리는 한명숙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 후, 2차례의 정치자금수수 혐의로 2009년 기소되면서 수년간 곤혹을 치렀고 이명박 정부 내내 언론과 여당의 정치 공세를 견뎌야 했다. 지리한 법정 공방 끝에 대한통운 건은 무죄를 받았으나, 한신건영 건은 유죄 판결이 확정돼 실형이 선고됐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대통합민주신당은 대선 과정의 당내 잡음 및 패배 후유증으로 친노와 비노로 갈라졌고, 이해찬과 유시민이 한명숙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탈당하기에 이르렀다. 당에 남은 한명숙은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지역구를 공천받았으나 낙선했다. 초반 여론 조사로는 무명에 가까운 한나라당 백성운 후보에 10% 가량 앞서며 분위기가 좋았다. 그러나 불과 투표 사흘 전 캠프 소속 선거운동원이 지역 대표들에게 밥을 산 것이 드러나 불구속 입건됐고 결과는 3.3%차의 패배.




2010년 대한통운 정치자금수수 혐의에서 벗어난 뒤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민주당 경선(100% 여론조사 방식)에서 이계안 후보를 누르고 서울특별시장 후보에 선출됐다. 그렇지만 한나라당 오세훈 후보의 압승이 될 것으로 예측됐고 더구나 3월 천안함 피격사건이 터져 언론 보도와 여론은 야당에게 불리했다. 


선거 2주 전 여론 조사로도 적게는 11.9%포인트(조선일보), 많게는 22.8%포인트(중앙일보) 오세훈의 리드였다. 그렇지만 서울만은 광우병 논란, 용산 참사 등으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반감이 있었고 노무현에 대한 동정 및 향수가 있어 한명숙이 해볼 여지가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왠걸 투표 당일이 되자 자체 조사상 한명숙의 근소한 역전이 점쳐졌다. 서울시청 앞에서 지지자들과 승리 예감을 만끽할 정도였다. 그러나 막판 강남 3구의 오세훈 지지표에 덜미를 잡혀 다시금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불과 0.6% 차의 선전이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 한명숙은 민주통합당 대표최고위원으로서 선거를 지휘했고 본인 역시 비례대표로 출마했다. 그러나 야권단일화, 여성 15% 할당 공천 강행 과정의 당내 갈등, 비례대표 공천문제, 김용민 후보 막말 파문 등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으며, 이명박 정부에 불리한 여론 결과가 이어졌음에도 민주통합당이 새누리당에게 단독 과반을 내주고 완패하자 모든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뇌물죄로 실형을 산 것에는 판결이 과하다 정당하다를 놓고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갑론을박이 많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때 당시 총선의 대 참패가지고는 모두가 위아더월드로 무능하다고 까는 편. 오죽하면 실형판결을 받은 것보다 총선때 보인 무능함이 더 용서가 안 된다할 정도(...)



  • 정치자금수수혐의

전술한 경선 과정에서 대한통운에서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를 받아 2009년 기소되었고 한신건영에서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로 2010년 추가 기소되었다. 


먼저 대한통운 건은 4천 5백만 원의 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공방 끝에 3심까지 전부 무죄를 선고받으면서 마무리지었다.

 


하지만 한신건영 9억 원 관련 건은 기소된 이듬해 재판이 시작되어 1심에서 증인이 진술을 번복하여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검찰이 항소하여 2013년 진행된 2심에서 유죄로 판결받아 징역 2년, 추징금 8억 8천 3백만 원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2015년 3심이 진행되었는데 결과는 뒤집지 못한 채 유죄로 판결받아(13명 중 유죄 8명, 일부 유죄 5명) 2심과 같은 형량을 받았다.





추징금 중 3억 원의 소재를 대상으로 해서는 파악되어 모두 일치한 의견을 보였지만, 남은 6억 원의 증거 여부를 대상으로 해 의견이 갈린 것이다.




대법원의 판결은 주요한 증거와 수사 기록을 검토하는 것이 아닌 1심과 2심 판결을 대상으로 한 법리를 심의하여 판결을 확정한다. 그러므로 이번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은 1심보다는 2심의 법리가 합당하다 하여 형을 확정한 것이다. 그것과 반대로 법리에 맞지 않는다. 판결하였을 때는 원심을 파기하여 고등법원이나 지방법원 합의부에 돌려보내 다시 재판을 받게 한다.




결국 한명숙은 '최초로 실형을 선고받은 전직 국무총리'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2015년 8월 24일부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이것을 두고 당시 새정치민주연합에서는 정치권력이 개입된 정치 보복성 판결이라며 목멘 소리로 반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보수성향 네티즌들은 '첫 번째 3억 원에 한해서는 대법관 전원 일치 유죄판결이 나왔으므로, 야당 추천 대법관도 유죄라고 본 것이다.'며 반박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사실이라는 견해도 있다. 


전 국무총리 한명숙을 대상으로 한 이런 판결을 두고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내에선 격론이 오갔다. 이것을 억울한 정치 탄압으로 간주하고 쟁점화해야 한다는 의견과, 대법원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이 부딪혔다. 이 과정에서 대법원 판결을 존중해야 한다는 처지였던 혁신 위원 이동학의 일부 발언이 당내 반대 세력에게 꼬투리가 잡혀 혁신 위원 이동학이 사과하는가 하면, 당시 대표 문재인은 당 최고위에서 전 국무총리 한명숙의 추징금 8억 8천만 원을 당 차원에서 대납하자고 제안했다가 빈축을 사고 취소하는 등 여러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했다.




정작 한명숙 변호인단에서는 "추징금을 모금하면 혐의를 인정하는 것이 된다"고 판단해 거절했다. 또한 대납하더라도 선처받는 것이 아니다. 형벌은 민사상 배상이나 범죄로 얻은 수익을 대상으로 한 추징과는 별도로 국가가 내리는 제재 겸 재사회화 조치이기에 피해자에게 제대로 배상했을지라도 국가는 그것과 무관하게 제재한다.

 


2015년 12월 11일, 결국 한명숙은 당시 대표 문재인에게서 당적 정리를 요구받았고, 본인도 이것을 받아들여 탈당해 무소속 신분이 되었다.




2017년 8월 23일, 징역 2년을 마치고 만기출소했다.  한명숙 전 총리의 출소식에는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원내대표, 이해찬, 문희상 의원과 지지자 100여 명이 모였으며 추미애 대표는 "기소도 잘못됐고, 재판도 잘못됐다"며 사법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명숙 전 총리의 출소에 대해 김진애 전 의원은 "그 맑음이 감동이다", 최민희 더불어민주당 디지털소통위원장은 "큰 감동과 깨달음을 안고 간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보수언론은 물론이고 진보 성향의 경향신문도 사설을 통하여 검찰이 표적수사를 했지만 건설업자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증거가 나와 유죄를 받은 건 사실인데 한명숙을 영웅시한다고 더불어민주당을 비판했다. 언론의 보도에 의하면 한명숙이 추징금을 내지않고 버티자 검찰은 환수팀을 구성하여 전세보증금 1억5000만원을 환수하였다. 검찰은 나머지 추징금 7억3000여만원도 환수할 계획이라고 한다.




  • 트리비아

과거 넷상에서는 "한명숙과 접촉하는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때가 잦다"면서 한명숙의 별명으로 한명숙청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했다. 한명숙이 현재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터라 지금은 크게 쓰이진 않는다. 또 실상을 파고 보면, 이름값 높은 정치인으로서 이런저런 사람과 접촉하고 사진 찍히는 일이 잦았을 텐데 이렇게 만난 사람들이 훗날 몰락하는 때가 생기면 예전에 한명숙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재발굴되어 한명숙청 어쩌고 몰아갔다고 보는 게 옳으리라. 이게 반대 진영인 박근혜까지 이 숙청 목록에 거론되었을 정도로 억지였는데 지금 와서 보면 사실이었나 싶긴 하지만 그런 식이면 접점이 안 닿을 사람이 없다.





대한민국의 제19대~20대 국회의원으로, 소속 정당은 더불어민주당이며 지역구는 안산시 상록구 갑 지역이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인 참여정부 시절에는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적이 있다. 2016년 8월 22일에는 민주당의 경기도당 위원장으로 선출돼 민주당의 인천시당 위원장으로 선출된 박남춘 의원과 함께 추미애 지도부의 경기도 & 인천광역시 권역 대표 최고위원을 맡았다. 현재 이해찬, 이종걸과 같이 차기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후보로 유력한 인물 중 한 명이다.


대표적인 친문 핵심 정치인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 생애 정치입문 전 

1962년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범학교 출신으로 6.25. 때 평양에서 월남하여 목포에 정착하였다. 목포에서 대성초등학교와 영흥중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때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 마산에서 직장생활하던 형에게 맡겨졌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경상남도 마산[3]에서 자랐다. 한 학년에 600여명이었던 고등학교에 호남 출신 학생은 그를 포함해 단 2명이었다. 원래 혼자인줄만 알았는데 2학년에 올라가보니 한명이 더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고 놀림을 받았던 그는 그때부터 지역감정이 정말 근거가 없으며 폐해가 심하다고 생각했다.


1981년 마산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1985년에 고대법대를 졸업하였고 1987년 제29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육군 법무관으로 임관해 병역을 마친 뒤 1993년부터 변호사로 개업했다. 이때부터 안산에서 법무법인 해마루 소속의 변호사로 생활하며 안산에서 터를 닦았다. 법무법인 해마루는 노무현과 천정배가 1993년에 함께 설립했던 법무법인. 


1996년부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대외협력위원장, 노동위원회 대외협력부장, 언론위원회 위원장 등을 하며 민변의 대표 변호사로 떠올랐다. 민변에서 맡은 사건의 70~80%는 노동법이나 국가보안법 관련 사건이었다. 


변협인권위원으로 재직 중이던 2000년 봄,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의 형사고소를 대리하여, 살인죄 공소시효 완성 직전 주범에 대한 검찰의 구속기소를 이끌어냈다. 이때 유가족에 대한 법원의 42억 원 배상판결이 나오자, 형식적으로 소멸시효가 완성된 사건일지라도 기관에 귀책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배상청구가 가능하다는 새로운 소멸시효이론이 정립되었다. 이로써 법조계에 '전해철'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 정치 입문

2002년 노무현이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뒤, 지방선거에서 패배하며 위기를 맞이하자, 전해철은 법조계 내에서 노무현 지지선언을 주도하였다. 이때 법률지원단을 만들고 이후 대선 캠프 법률지원단의 간사를 하면서 대선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2003년 노무현이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국회에서 탄핵을 당했을 때에는 문재인과 함께 노무현 변호 준비를 실질적으로 다 하다시피 했다. 그래서 결국 2004년 3월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기각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2004년부터 청와대에 들어가 일하기 시작하였다. 2006년에는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되어 1년 7개월 가량 민정수석을 지냈다. 당시 44세의 나이로, 전현직 통틀어 최연소 민정수석이다. 이렇게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있으면서 인사청문회 등의 준비를 아주 철저하게 해, 참여정부 역대 민정수석들 가운데 전해철 시절에 청문회 통과가 가장 잘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7년에 로스쿨 제도가 도입된 과정에서도 실무작업은 전해철이 총괄했다고 한다. 그때 유능한 전해철이 빈틈없이 추진하지 않았다면, 로스쿨 도입은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후문이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안산 상록구 갑 선거구에 출마했다. 그런데 김영환이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표를 갈라먹는 바람에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 후 법무법인 해마루의 대표 변호사가 되었고, 민주통합당 안산 상록구갑 지역위원장직도 계속 수행하였다. 


2009년 이명박 정부 하에서 검찰이 박연차 게이트 수사를 할 때에는 노무현의 많은 측근들이 무서워서 도망간 와중에도 문재인과 둘이서 실질적으로 변호 준비를 다 했다.




  • 제19대 국회의원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60.76%의 득표율을 기록, 새누리당 박선희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 후 문재인 대선 캠프에 들어가 열심히 일했다. 당내에 잡음이 끊이지 않고 내부 분란이 끊이지 않아 캠프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와중에서도 그 많은 정책 다 정리하고 정책발표서 발간까지 완료했다. 당시 문재인의 공약 가운데 상당부분이 전해철의 손길을 거쳤다고 한다. 그러나 그로 인해 당내에서 친노 비선 실세 논란에 휘말려, 논란이 커지자 양정철, 이호철 등과 함께 대선 캠프에서 일괄 사퇴하였다. 겨우 대선을 두 달 남짓 남긴 시점이었다. 


이렇듯 '비선 실세'로 욕을 먹었지만 권력을 휘두르긴커녕 국회에서 고생을 많이 한 편이었다. '면이 서는' 당직보다는 일하는 위원직을 주로 많이 맡았다. 2012년 민주통합당 BBK 진상조사위원회 위원, 정봉주 구명위원회 위원, 국회 민간인 불법사찰 국정조사특위 위원 등을 지냈다.


이후 국회 국가정보원 댓글의혹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위 위원, 민주당 대통령 기록물 열람위원, 국정원법 개혁추진위원회 위원(이상 2013년), 새정치연합 야당탄압저지대책위원회 위원, 국회 서민주거복지특위 위원, 박상옥 대법관 인사청문특위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2014년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가 일어났을 때에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위원(2014~2015년)으로 활약하며 세월호 관련 입법을 모두 주도하였고, 결국 2014년 10월 세월호 관련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특별법, 2015년 1월 세월호 배보상 특별법 등을 통과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외에 법사위에서는 야당 간사로서 여당의 공격에 맞서는 수문장 역할을 하였다. 야당 간사에게는 관행상 마지막에 발언 기회가 주어지는데, 이때마다 동료 야당 의원들이 제기한 문제점을 정리하면서 핵심을 한 번 더 찌르는 마지막 공격수의 역할을 해냈다.


그가 법사위 야당 간사 시절 효과적으로 막아낸 법안이 바로 사시존치 법안이다. 2015년 19대 정기 국회 당시 총 6개의 사시존치 법안이 발의되어 있었으나(이 중 5개는 새누리당의 함진규, 노철래, 김용남, 김학용, 오신환 의원이, 나머지 1개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조경태 의원이 발의한 것으로서, 이후 조경태 의원 역시 자유한국당으로 옮겼다.) 


이들 법안이 법사위 회의 안건으로조차 상정되지 못하도록 막아내는 데 전해철 의원은 중심적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측이 가능한 것은 상임위 간사들에게 법안 심의 순서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기 때문인데, 당시 여당 간사였던 이한성 의원은 사법시험 존치 법안을 지지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바 있으므로, 양당 간사 중 사시존치 법안 심의 순서를 뒤쪽으로 두기를 주장한 측은 전해철 의원으로 보는 게 보다 타당할 듯하다.  


사법시험 폐지문제와는 별도로, 선거 때의 공약이었던 반월 시화공단 스마트허브 조성을 꾸준히 추진해가고 있다. 그 외에도 수인선 완전지하화 계획에 성공하였고, 늘푸른아파트 소송 등 여러 소송 문제도 잘 해결하여, 사법시험 준비생들이 상당히 비토하는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지역구 내에서의 평판은 좋은 편이다. 


머니투데이가 평가한 제19대 국회의원 의정활동에서 새정치민주연합 내 9위를 마크했다. 



  •  제20대 국회의원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도 상록 갑에 출마해 1여 다야의 환경 속에서도 35,481표, 38.8%를 득표하며 새누리당 이화수 후보를 9,000표 차이로 따돌리며 비교적 무난히 재선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공정거래위원회, 금융감독원, 금융위원회, 국무조정실, 국무총리 비서실, 국가보훈처, 국민권익위원회 등을 소관 기관으로 하고 금융정책수립 및 집행, 공정거래질서 유지, 국정 조정 및 규제 개혁, 국가유공자관련 보훈사업, 국민권익지키기, 경제 인문 사회분야에 관한 연구 등 다양한 분야의 정책을 입안하고 심의하는 국회 상임위원회인 정무위원회의 더불어민주당 간사로 선임되었다.


2016년 8월에 더불어민주당 경기도당 위원장 선거에 출마하여 압도적인 격차로 당선되었다. 권리당원 ARS 투표와 대의원 현장 투표를 합산한 결과, 63.3%의 득표율을 기록하여 경쟁자였던 이언주 의원을 상대로 압승했다. 이언주 의원이 20대 총선 공천 과정에서 더불어민주당 코어 지지층에서 인심을 잃고 전해철 의원이 노무현재단 운영위원을 맡은 경력으로 반사 이익을 톡톡히 본 결과물이라는 평가다.



더불어민주당이 최고위원 제도를 당의 각 시도당 위원장들이 호선하는 권역별 대표위원제로 바꾸면서 전해철 의원은 경기도 & 인천 권역 대표위원으로서 당 최고위원이 됐다. 전해철 의원이 1년, 더민주 인천시당위원장인 박남춘 의원이 나머지 1년을 맡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민주당 최대 주주라고 할 수 있는 문재인 대통령 지지층에서는 김경수, 조국, 임종석, 조응천과 함께 전해철 의원에 대한 평가가 좋은 편이다. 오히려 보수 야당에서 삼철이라고 공격 했던 것이 이득이 된 셈. 보수 야당에서 대통령 측근이라고 공언한 셈이니. 


민주당이 6.13 지방선거 - 6.13 재보선에서 압승을 거두자, 정치권의 관심은 추미애 지도부의 뒤를 이을 민주당 제3기 지도부가 어떻게 구성될 것이냐로 모아졌다. 특히 제3기 지도부는 2020년 4월에 치러질 21대 총선 공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도부가 될 것이므로, 이번 경기도지사 후보 경선을 통해 개인적인 인지도와 더불어 자타공인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이란 사실을 나름 크게 알린 전 의원이 출마할 것이냐에 대해 관심이 쏠렸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당내 친문계 핵심 인사로 분류돼 왔던 최재성 의원과, 친노계의 좌장이라고 불리어왔던 이해찬 의원도 출마 여부를 저울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당내 친문 표가 분산되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그래서 최재성 의원과는 동반 출마하지 않기로 일단 의견을 모았다는 소식이 알려졌고, 그럼 둘 중 최재성이 양보할 것이냐, 전해철이 양보할 것이냐는 쪽으로 관심이 기울여졌는데, 7월 15일 전해철 의원이 전당대회에 불출마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 정치 성향 

문재인 대통령의 사람들 중에서도 최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문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불리는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함께 이른바 '3철'로 불렸다. 이 세 사람 모두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재직 중이었던 문 대통령의 휘하에 있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 정치권 일선에서 활동하는 3철은 전해철 의원 한 명 뿐이다. 양정철 전 비서관은 19대 대선이 끝난 뒤 해외로 아예 떠났고, 이호철 전 민정수석은 정치권을 떠나 여행사를 운영하는 걸로 알려져 있던 중, 2018년 6.13 지방선거에 가까워 와서는 부산시장 선거 출마설이 나왔지만,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이 세 사람은 나중에 전해철 의원이 경기도지사 선거에 나서기로 한 뒤에 열었던 북 콘서트에서 오랜만에 다시 모이게 된다.


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명박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으러 왔을 때의 사진을 보면 당시 노 전 대통령의 변호를 맡고 있었던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하여 김경수 의원 등과 함께 노 전 대통령을 수행하고 있는 전해철 의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각별한 인연에도 불구하고 18대 대선 때 3철 논란이 잠깐 불거진 적 빼고는 상대적으로 언론의 주목을 덜 받았다. 특히 친노계를 시종일관 저격해 왔던 박근혜 정부 시절의 보수 언론들조차도 전 의원에 대해서는 거의 보도한 적이 없었다. 조중동 등 주류 보수 언론이 연일 '친노 패권주의'를 외치며 부지런히 친노 & 친문 인사들을 저격하던 2015년 즈음을 돌이켜보면 문재인 당시 대표의 최측근 인사였는데도 언론의 주목을 상대적으로 덜 받았다는 특이점이 있다. 


본인 스스로도 혹여나 보수 언론에게 빌미를 줄 일이 생길까봐 침묵을 지켰던 듯하다. 그래서인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고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한 뒤부터야 전해철 의원이 문재인 대통령의 오래된 최측근이었다는 점을 알게 된 사람들이 많다.


위에 상당히 길게 서술되어 있듯이 본인이 사법시험에 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법시험에 대단히 비판적이다. 그래서인지 적극적인 로스쿨 도입론자였다고 하며, 실제 청와대 민정수석 시절 로스쿨 도입에 가장 앞장섰다고 한다. 지난 제19대 국회 시절에는 법사위에서 야당 간사로서 사법시험 존치 법안이 심의되지 않도록 최대한 시간 끌기를 하였다. 그 때문에 전직 서울변협회장이던 나승철이 그의 지역구 사무실 앞에서 항의시위를 하기도 하였다.

타임지와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150대 영향력 있는 정치인물 중 93위에 들기도 했다.(2013) 이해찬, 전해철과 같이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후보로 유력한 인물 중 한 명이다.  


  • 성장과정 

1957년 서울특별시에서 우당 이회영의 손자이자 이회영과 한산 이씨 이은숙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아버지 이규동과 어머니 변봉섭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전 국회의원이자 국가정보원장 이종찬의 사촌 동생이다. 그리고 성재 이시영의 조카손자이다.


국민학교 시절 경기도 시흥군 안양읍(현 안양시)으로 이사하여 성장 했다. 예원학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노동자 야학운동을 하다가 대한민국 육군 병으로 복무하였다. 이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다시 학사편입으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공법학과 3학년에 편입하였다. 1988년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당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 가입하였다.


  • 정치 활동 요약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자유민주연합 김일주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노무현을 지지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2013년까지 대한농구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열린우리당 원내부대표를 역임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10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8년 국정감사에서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에게 "MB의 졸개"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유인촌 장관이 "찍지 마 X발"이라는 표현을 하게 만들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5년부터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를 역임하고 있다.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를 주도했으며 3월 2일 마지막 주자로 나와 대한민국 국회의원 단독 연설론 가장 오래 발언한(12시간 32분) 인물이 되었다. 그동안 문재인 대표체제에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파업을 벌인 행위는 잘못된 것이지만 필리버스터를 통해서 다시 보게 되었다는 의견이 많고, 새삼스레 선친들의 독립운동 행적이 재조명 되기도 했다.


다만, 지역구인 만안구의 여론 자체로는 새누리당 후보와 기껏해야 박빙 우위인 데다, 당 내에서는 강득구 후보 에게 밀리는 지라 20대 국회에서 그를 보게 될지는 미지수였다. 평촌신도시를 업은 동안구가 만안구를 앞지른 상황 에서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딱히 발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현실에 유권자들이 피로감을 느낀 탓이다. 안양 지역구 3구를 전부 양당의 원로 의원이 차지 하고 있는데, 이러한 점 때문에 안양 내 타 지역구 의원들에 비하면 컷오프 유력 후보 쇄신 대상으로 더 부각되는 처지.


이종걸 프로필]


그런데, 경쟁력 높은 같은 당의 강득구 후보를 제치고 경선도 아니고 단수공천 됐다. 공천위원장의 말로는 딱히, 이종걸 후보가 경쟁력이 있어서 단수 공천한 것이 아니라 원내대표로서 고생했기 때문에 단수공천을 했다고 밝혔는데, 이는 민주주의 원칙에도 어긋나며, 공정하지 않은 선정 방식. 즉, 계파 배분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정청래의원이 같은 당내 인물에게 날린 막말을 이유로 공천배제를 당한 반면, 밑에 나와 있듯이 현 대통령에게 막말을 날린 적이 있는 인물이 막말 논란 없이 단수공천을 받았다는 것 때문에 공천의 불공정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거론되고 있으며 필리버스터로 얻은 인기를 다시 날려먹고 있다. 


단수 공천 확정 이후로는, TV조선을 비롯한 종편에 출연하면서, 이해찬 전 총리에게 "자진해서 출마를 포기하라"고 압박하는 등, 역시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걸 보여주며, 친노 진영 네티즌들에게 필리버스터로 쇄신된 이미지를 다 날려먹었다. 


본선에서는 만안구에서 시, 도의원을 지낸 새누리당 장경순 후보 와 맞붙었다. 투표전 여론조사에서는 별로 상황이 좋지 못했으나 문재인 전 대표의 응원영상 효과 덕인지 개표결과, 45.4%를 득표해 8762표차로 이기고 5선에 성공했다. 


그리고 2016년 4월 15일 비상대책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와 함께 비주류로 분류되는 김종인, 박영선 의원 등의 만류에도 7월 29일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로 출마하였고, 8월 5일 당 대표 예비경선을 통과했다. 그러나 8월 27일 본 전당대회에서 추미애에 밀려 패하였다.


그후 19대 대선 경선에서는 이재명 후보 지지선언을 했다. 그렇지만 문재인이 후보로 선출되자 문캠에 합류했다. 합류 후에는 정력적으로 대선에서 활동했으며, 특히 대선토론 당시 유승민에게서 "북한이 우리의 주적이냐?" 라는 까다로운 색깔론공세에 대해서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반박해 대선정국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특히, 보수언론 및 보수정파에서 시동 걸려고 했던 색깔론 공세에 완벽한 반박의 논리가 된 데다가, 글 쓴 사람도 문재인과 사이가 아주 나쁜 걸로 여겨지던 이종걸이라는 점이 큰 화제가 되어 뉴스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등, 문재인 후보에 대한 색깔론 확산을 틀어막은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종걸 페북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에는 존재감이 많이 떨어진 편. 소속위인 국방위원회 와 지역구에서의 활동은 여전히 활발하지만 중앙당에서의 활동은 상대적으로 조용하다. 추미애 대표의 '머리 자르기' 발언에 대해 국민의당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비판한 사례 외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2018년 6월 21일 새 당대표를 뽑는 8.25 전당대회 출마를 당내에서 가장 먼저 공식화했다.


  • "문재인 대표는 부산 마이너리티" 발언 논란 

2016년 1월 8일에는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기자들과 식사를 하며 당시 당 대표였던 문재인 의원에게 "문재인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의 힘을 이어받은 부산개혁파"라며 "부산 마이너리티라 그런지 화법이 안 맞는다. 어제 문 대표와 만났는데 생각이 자꾸 멀어지는 것 같다" 는 발언을 했다. 이어 "여의도 야당이 부산개혁파 손에 바뀔 수 있느냐는 말도 나온다"는 발언까지 하며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려는 일부 의원들과 궤를 같이 하려는 취지를 내 비쳤는데...


2015년 12월 중순부터 최고위원회에 불참하는 등 원내대표로써 당무를 거부하고 있는 중이었기에 더불어민주당의 핵심 지지층들로부터 원내대표가 당무거부로도 모자라 당 대표를 잡아 흔들고 분열까지 조장하고 있다며 맹비난을 받았다. 


이 후 19대 총선이 끝난 5월 5 MBC 라디오 [신동호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는 "두 사람의 스타일의 차이로 서로 부딫히는 경우가 많았었다. 문재인 전 대표를 곁에서 모시면서 인간적으로 그렇게 한 것에 대해서 정말 후회도 된다"고 말했었으며, 8월초 8.27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 대표 출마를 선언하며 오마이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분당 사태의 절반 이상은 문재인 당시 대표의 책임이다"고 말하면서 "부산 마이너리티 발언은 '그들이 어떤 현상을 주도하고, 그야말로 안정된 주체세력으로 추진해나가는 데는 부족한 측면이 있다'고 얘기한 것이었는데, 이번 총선을 보니 아니었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1월에 있었던 인터뷰에서의 발언을 계기로 '부산 마이너리티'란 용어는 친노, 친문 지지층들이 이종걸 의원을 비난할 때 수시로 언급되는 중.


이종걸 문재인

민주화 이후 최초로 민주당계 정당 깃발을 들고 대구에서 당선된, 지역주의 타파의 상징이 된 정치인 


문재인 정부의 첫 행정안전부 장관이자, 16~18대, 20대 국회의원이다. 소속 정당은 더불어민주당이며, 지역구는 대구광역시 수성구 갑 지역이다. 그리고 한 줄 요약에서 보듯이 민주당이 창당된 이래 처음으로 대구광역시에서 당선된 국회의원이기도 하다.


이해찬, 전해철, 이종걸과 같이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후보군으로 꼽히는 유력한 인물 중 한 명이다. 실제로 당대표 후보군 중 지지율이 1위로 올라갔다.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아버지 김영룡과 어머니 차숙희 사이의 1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 경북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였고,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젊은 시절에는 강경파 운동권이었고,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등 여러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대학 제적과 수감을 반복했다. 신림동에서 서점을 열기도 하고 6월 항쟁 당시 명동성당 농성장에도 있었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젊은 시절을 겪은 사람답게, 정치권에 입문한 뒤에도 과거 3당 합당 등, 정계의 휘몰아치는 소용돌이 속에서 당적이 몇 차례 바뀔 수밖에 없었다. 


열린우리당 창당 전까지는 보수 정당이었던 한나라당에 몸담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이 창당되자 민주당계 정당으로 둥지를 옮겼고, 그 후에도 쭉 이쪽에서 활동해 왔으며 2018년 기준으로 여전히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다. 


TK 출신임에도 더불어민주당 소속인 점, 선거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어 내어 노무현 전 대통령, 이정현 , 조경태 , 정운천, 홍의락 의원과 함께 지역주의 타파의 아이콘으로 회자되곤 한다.


한겨레민주당에 입당하여 정치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후 민주당에서 당직자를 역임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통합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의왕·과천에 출마했지만 신한국당 안상수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그리고 이듬해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3김 타파를 명분으로 신한국당과의 합당으로 말미암아 한나라당 소속이 되었으나, 대학교 선배이자, 멘토였던 제정구 의원이 사망하자 그의 지역구를 물려 받아 경기도 군포시로 지역구를 옮겼고,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처음으로 국회 입성에 성공하였다.


분명히 한나라당 의원이지만, 출신이 출신이다보니 여러 현안에 대해 당시 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보다 더 진보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통합민주당 시절의 동지였던 노무현이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후인 2003년 8월, 전격적으로 한나라당을 탈당해 이부영, 이우재, 김영춘, 안영근 등과 열린우리당 창당에 합류했다.


이후에도 군포시에서 연속으로 당선되어 3선 기록을 달성하였다. 따지고 보면 나름 군포시를 중심으로 하던 중진 의원이던 셈.



그러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는 지역주의 타파라는 기치를 내걸고 새누리당의 본거지인 대구로 내려가 수성구 갑으로 지역구를 옮기는 패기파격적인 행보를 벌였다. 비록 선거에서는 이한구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지만, 40.4%라는 고무적인 득표율을 받았다. 


가능성을 확인한 김부겸은 일찌감치 2016년 20대 총선에서 수성구 갑에 재도전할 것임을 밝히고 지역구 표밭 일구기에 돌입했다. 


대구광역시는 우리나라에서 새누리당 지지세가 제일 강력한 지역 이라 승리를 낙관할 수는 없었지만, 김부겸은 선거 시즌 내내 가상 대결에서 위협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2014년 7.30 재보선에서 전남 순천·곡성에서 출마해 당선된 이정현 의원에 이어 이변을 연출할 기대주로 관심을 받았다. 


그리고 19대 총선 때 민주통합당의 비례대표로 선출된 후 그 당시 더불어민주당의 현역 의원들 중에서 유일하게 대구광역시 출마를 준비하던 홍의락 의원이 컷오프를 당한 후 탈당하자, 홍 의원의 컷오프 철회와 당 복귀를 요구하며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중대한 결심까지 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하는 등 대구광역시에 도전장을 내민 민주당 정치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여론조사에서는 전부 김문수 후보에게 10%p 내외의 차이로 앞서는 것으로 나왔으며 특히 투표 8일 전인 4월 5일자 문화일보 - 포커스컴퍼니의 조사에서는 62.3%대를 얻어 김문수 후보를 무려 30%p 차이로 제쳤다.


대구광역시의 정치적 성향을 감안하면 실제 결과가 어떻게 될 지 모르지만 이 정도라면 김부겸의 당선 가능성이 조금 더 높아진 셈이라고 볼 수 있었다. 투표 당일 출구조사에서도 이 기세를 계속해서 이어가 62%라는 유력한 결과로 별다른 이변 없이 당선이 될 것으로 확실시되었다.



20대 총선 당일날 새누리당 후보군에 좌절한 대구광역시의 투표율이 54.8%로 전국 최저인 가운데 찍을 놈이 생긴 수성 갑 선거구는 전국 평균(58%)을 넘어선 68.2%의 투표율을 기록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새누리당의 김문수 후보의 51,374표(37.7%)를 크게 웃도는 84,911표(62.3%) 를 얻으면서 8년 만에 국회로 돌아오게 됐다.


지역주의 타파의 아이콘이자 대구광역시에서 당선된 유일한 더불어민주당 의원으로서.


김부겸이 당선된 요인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지역 기반을 조용히 다졌기 때문이다. 2번의 낙선 뿐만 아니라, 원외 활동에서 권영진 대구시장과도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자신은 순천의 서갑원처럼 대구광역시 발전에 발목을 잡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공약에도 민주당을 발목만 잡는 야당에서 협력하는 야당으로 바꾸겠다고 천명하기도 했기 때문에 민주당의 반감이 희석된 것도 영향이 컸다.


대구광역시에서 야당 후보가 당선된 것은 1988년 4월 26일 치뤄진 13대 총선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여담으로 이 20대 총선에서는 2003년 그와 함께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의 창당 멤버로 활약했던 김영춘이 부산에서 당선되는 쾌거를 얻기도 했다. 김영춘 또한 비슷하게 19대 총선을 1년 앞두고 자신의 출생지로 낙향해서 지역 기반을 조용히 다져 왔다. 


독수리 5형제 중 자신과 김영춘만 당선되서 아쉽다고 했다고.



이후 영남권 신공항 문제가 크게 불거졌을 때는 민주당의 유일한 대구 지역구 의원으로서 밀양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공교롭게도 김부겸을 제외한 민주당의 영남권 지역구 의원들은 모두 부산 및 낙동강 벨트 지역이어서 자연스럽게 가덕도를 지지하였고 이 때문에 민주당 내에 김부겸 vs 낙동강 벨트 지역구 의원이란 대립 구도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신공항 문제는 당 전체가 쪼개질 위기에 처할 정도로 심각한 내분이 발생한 새누리당에게 여론의 포커스가 맞춰졌고, 또 민주당의 지지층이 대부분 부산 가덕도 쪽이 낫지 않겠냐는 방향으로 심리가 쏠려 김부겸은 상대적으로 이 문제에서 관심을 많이 못 받았다. 


김부겸 본인도 활발하게 밀양 지지 활동을 벌이긴 했지만 가덕도 지지 인사 및 민주당 전체에 대해 심한 비난을 가하지는 않아 자극적인 뉴스를 만들지도 않았고. 그래서일까, 경우에 따라서는 "그때 김부겸은 밀양을 지지했을 거 같은데 왜 뉴스가 없지?"라며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다고(...)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에는 여당의 대구 국회의원이 되었고, 나중에는 행안부 장관으로 발탁되면서 지역구에 있는 그의 사무소에는 대구광역시 각지의 민원이 쇄도하고 있다고 한다. 사무소 직원 말로는 "여기는 수성구 민원만 받으니까 다른 지역구 민원은 그 지역구 의원의 사무소에 문의하라"는 말이 입에 맴돌 정도로 민원이 몰린다고.


1947년 경기도 황해도 연백군에서 태어났다. 네살때인 1950년 6.25 전쟁중 피난하여 수원에 정착했다. 서호초등학교 수원중학교 경복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1974년 행정고시 합격 후 재무관련 부처에서 오랫동안 재경직 공무원으로 공직생활을 하였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비밀리에 금융실명제 시행을 추진할 때 실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 때 재정경제부 차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정책기획수석비서관, 국무조정실 실장 등을 역임하였다.


노무현 정부 초기인 2003년부터 2004년까지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장관(경제부총리)을 역임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2005년부터 2006년까지 교육인적자원부(현 교육부) 장관(교육부총리)를 역임하였다.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에서 중용되어 장차관 5번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2007년 열린우리당의 마지막 정책위원회 의장을 역임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10년까지 민주당 최고위원을 역임하였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경기도지사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국민참여당 유시민 후보와의 야권단일화 경선에서 패배하여 출마하지 못했다. 경선 과정에서 패배한 것이기에 의원직은 유지하였다. 2011년 5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민주당 원내대표를 역임하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경기도 수원시 정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새정치민주연합 경기도지사 후보로 선출되어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세월호 사건으로 야당에 유리한 구도였고, 출구조사에서도 앞섰으나 실제 개표 결과는 새누리당의 남경필 후보에게 1%차이로 석패하면서 잠시 야인 신분이 되었다. 


낙선 후 2015년 3월 새정치민주연합 국정자문위원장을 맡았다. 이때 대한민국 정당사상 최초로 열린 정책엑스포 조직위원장을 맡아 새정치민주연합이 유능한 경제정당, 정책정당이 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새롭게 신설된 경기도 수원시 무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원래의 지역구는 박광온이 자신이 사퇴했을 때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가져갔기 때문에, 자신이 선거구를 옮겼다.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문재인 캠프의 선거 공동대책위원장과 일자리위원장을 맡았으며, 문재인의 당선 이후 국정기획자문위원장으로 위촉되었다.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현직인 남경필 지사와의 경기도지사 리매치가 점쳐졌으나, 불출마 선언을 하고 전해철 후보 지지를 선언하였다. 아무래도 경선까지 포함해서 두 번이나 패배한 만큼 또 출마하기에는 부담이 컸던 듯. 또한 70대의 많은 나이도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논란 : 청년들이 정치를 지망하는 이유는 출세와 욕심 때문?

2017년 9월 21일 "제정임의 문답쇼"에 출연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정치가를 꿈꾸는 청년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청년들이 정치를 돈벌이의 수단이나 생업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청년들이 그저 돈과 출세를 위해 정치를 하는 것으로 매도하는 발언을 했다. 


내용을 요약하면 

"돈과 권력과 명예를 얻을려는 욕심을 가지는데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 정치는 생업이 아니다. 정치를 치부의 수단으로 삼으면 안된다. 이른 나이(젊은이, 청년)에 정치를 직업으로 하면 안 된다. 특히 젊은 나이에 정치를 직업으로 생각하고 뛰어드는 것은 가능하면 말리고 싶다. 정 그렇게 정치가 하고 싶거든 자기분야에서 업적을 쌓고 성공하고 인정받은 후에 그걸 발판으로 들어와야 한다."

라는 내용으로 발언을 했다. 따라서 청년의 정치참여를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를 피력했다. 


하지만 젊은 청년들이 정치를 지망하는 이유를 치부의 수단이나 출세의 방편으로 생각하는 욕심이라고 보는 관점은 매우 부당하며 김진표 본인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청년들도 그러려니 넘겨짚은 발언이다. 


우선 청년들 중에도 물론 돈과 출세를 위해 정치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나 정치를 하고자 하는 모든 청년들이 그렇다는 것은 결코 아니며 청년 전체를 전부 거론하며 발언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한 발언이다. 게다가 청년의 정치참여 또한 시민의 정당한 권리행사이다.


오늘날의 청년들이 정치를 지망하는 진짜 이유는 그동안 한국의 기성 정치인이 너무나도 현실에 어두운 채로 시대착오적인 구태정치만을 반복해 온 데 대한 분노와 절망에 있다. 


한국의 기성정치인들이 한결 같이 엘리트기득권카르텔에 갇혀 서민이나 중하류층과 괴리되어 그들만의 리그 속에서 현실을 개혁하기는 커녕 기득권과 타협하며 그저 트러블 없앤다고 차떼고 포떼고 장기하듯 근본적인 원인은 건드려보지도 못하고 하나마나한 근시안적이고 언발에 오줌누기에 가까운 정책만을 거듭한 것을 청년들은 잘 알고 있다. 


거기다 정부 눈먼돈을 업자에게 뿌리는데나 골몰해서 돈은 돈대로 들고 실효성은 전혀 없는 정책(ex 10년동안 총 80조 들어간 저출산 정책등)을 정책수혜자나 당사자의 목소리는 도외시 한 채 변화 없이 계속해 온 것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가만히 있다가는 나라가 망할 수 도 있겠다는 위기의식이 정치를 지망하게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청년이 정치에 관심 가지고 정치를 지망하게 된 이유는 헬조선이라 불리는 오늘날 한국의 현실을 불러온 기성세대와 기성정치인에 대한 분노와 절망인데 그것을 치부나 돈과 권력, 명예에 대한 욕심으로 매도한 발언은 부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대표적인 모피아(경제마피아의 의미)로 불리는 김진표 본인은 노무현 정부시절 경제부장관을 하면서 신자유주의적인 기업과 기득권에게 유리한 정치를 한 인물로서 수많은 국민들에게 피해를 입혔고 자신이 세계 최고의 자살율과 저출산에 기여한 인물 중 한명인데도 지난 정치에 대한 조금의 반성이나 사과는 커녕 지금껏 아주 진보적이고 개혁적으로 잘 해온 것처럼 인터뷰하는 것은 후안무치하게 보인다.(심지어 교육부총리 시절에도 경쟁과 형평성과 학생인권 사이에서 갈피 못잡다 내신 수능 본고사 죽음의 트라이앵글을 만들어낸 장본인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차라리 청년 시절에 인내하여 본인 분야의 전문성을 확실히 쌓았고 그걸 바탕으로 정계에 들어와 실무적인 업적을 좋은 쪽으로 쌓아올렸다고 평가받는 사람이라면 저런 말을 했어도 조금이나마 설득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년들의 일관된 부정적인 반응은 본인의 정치관에 대한 논란과 별도로 경제 및 교육 분야에서 김진표의 정치인으로서의 업적 또한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함을 의미할지도.




[출처 : https://namu.wiki/w/%EA%B9%80%EC%A7%84%ED%91%9C(%EC%A0%95%EC%B9%98%EC%9D%B8)]


동교동계 직계와 친노계에 모두 해당하는 인물. 친노계의 큰형님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의정부시 행복로 근처에 위치한 숭문당의 창업주. 호는 정흥(正興)인데 사실은 개명 전 이름은 문정흥이었다. 야구인 김영조의 사위이며, 미스코리아 출신 배우 이하늬의 외삼촌이다.


대한민국의 제14대, 16대~20대 국회의원이며 경기도 의정부시에서 깊게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참여정부 시절에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2번이나 민주당의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거물급 인사다.현재 20대 국회의원 기준 더불어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중 최고령 국회의원이다.


1945년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의정부 지역의 대지주였다. 말하자면 금수저. 경복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학생운동에 투신, 여러 번 감옥을 들락날락거렸다. 이 때문에 행정고시를 준비하기도 했으나, 그만두고 1980년대 반독재 투쟁을 벌이던 김대중 휘하에서 민주화운동을 벌인다. 의정부시가 원래 실향민이 많아서 레드 콤플렉스가 심한 지역인데다가, 아버지 역시 열혈 박정희 지지자로서 매우 보수적인 인사였기 때문에, 당시 "빨갱이"로 매도되던 김대중 밑에서 일하는 아들의 행동에 대해 대노했다고 한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이 총재로 있는 평화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의정부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주공화당 김문원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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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한국당 홍문종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8년 김대중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 등을 역임하였다. 김대중이 당선된 날 아버지 묘소에 가서 "아버지! 제가 간 길이 옳았죠!" 라고 오열했다고.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2003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되자 국회의원직을 사임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경기도 의정부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06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정보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 5선 의원이 되었다. 이어 열린 대선에서 민주당이 패하고 지도부가 사퇴하자 첫번째 비상대책위원장이 되었다.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가 사퇴하자 두번째로 비상대책위원장이 되었다. 정세균 상임고문, 원혜영 의원과 더불어 당내 여러 인사들과 친화력이 높아 당내 대표적인 관리형 정치인으로 꼽힌다. 공교롭게도 셋 다 모두 범 친노계 인사로 꼽힌다.


2014년 말 땅콩회항 사건이 터진 가운데 2004년, 처남의 대한항공 취업 청탁을 했다는 의혹이 불거져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에 대해 문희상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은 대국민 사과를 하였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컷오프됐는데 "도대체 왜 짤린 거지?"가 대체적인 전문가의 의견이다. 취업 청탁 의혹이 있지만 이미 12년이나 지난(...) 문제일 뿐더러, 문희상의 지역구에 딱히 대체할 인물도 없어서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조차도 분개했다고 한다. 결국 문희상은 원래 지역구에 '전략공천'되었다. 결국 6선에 성공했다.


야권의 승리와 더불어서 2016년 4월 현재 20대 국회의 유력한 국회의장 후보로 물망에 오르고 있다. 계파색이 옅고 이제 나이도 많아서 이석현, 정세균 의원보다 정계은퇴에 대한 부담도 크기 때문. 다만 2004년 취업청탁에 대한 구설수가 있다는 것이 약점이다. 그러나, 의장직을 건 당내 경선에서 정세균에게 패배했다.


2017년 문재인 정부에서 일본 특사가 되었다. 사실 일본통까지는 아니여도 일본과 나름 연이 있는 인물이다.


5월 17일날 열린 일본과의 외교회담에서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에 대해 한일 양국, 한미일 삼국의 긴밀한 연계가 중요함을 강조하였고 빠른 시일 내에 정상회담을 하는 것을 제안하였다. 또한 위안부 합의가 국민 대다수가 정서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입장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특사의 성격을 지닌 만큼 재협상 등의 요구는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마찬가지로 논란이 되었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의 경우 회담에서 논의 되지는 않았지만, 추후 유지 여부는 새 정부가 정할 일이라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아베 신조와의 만남에서 아베는 높은 위치의 의자에 앉고 문희상 특사는 낮은 의자에 앉게 해서 일부러 이렇게 무시한 거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 MBN 기사 낮은 의자에 푹 꺼져 앉아서 야쿠자 보스 행세를 하고 있으나, 정작 아베는 높은 의자에 앉아서 내려다보고 있다. 2017년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아베 신조를 만났는데 여기서도 문희상이 앉았던 의자와 똑같은 의자에 앉았고, 이 때도 홀대론이 나왔다.


2017년 국회 본회의 출석율 100%(!)를 기록했다. 다선의원들이 대체로 정당 활동이나 지역구 활동에 전념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놀라운 기록이다. 문 의원을 제외하고 출석율 100%를 기록한 의원들이 모두 20명인데 모두 초선이나 재선, 높아봐야 3선 의원들이다. 괜히 부동명왕이 아닌가 보다.


20대 국회 더불어민주당 후반기 국회의장 후보자 선거에 박병석 의원과 함께 출마했다. 묘하게 민주당은 재수 성공률이 높기 때문에(...) 차기로 유력하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대통령도 재수였고, 원내대표도 재수였다.


2018년 5월 16일 더불어민주당 20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후보자 선거에서 총 116표 가운데 67표를 얻어 박병석 의원(47표)을 넉넉하게 제쳤다. 이후 여야 간 상임위 분배 기싸움으로 의장 선출이 연기 되었으나, 7월 10일 여야 원내대표들이 7월 13일 국회의장 선출을 위한 본회의를 합의하면서 13일 의장으로 선출될 예정이다.그래서 요새 사진 보면 표정이 아주 밝다.


현역 정치인 중에서 상당히 독보적인 인상파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주류 언론에서 외모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본인도 외모를 이용한 자학 개그를 만들 지경이다. 하지만, 동료 의원들 사이에서는 유순한 성격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취미도 서예이며, 국회의 서예 동호회 회원이라고 한다. 위에 나왔듯이, 정치 자체의 스타일도 자신의 주장을 저돌적으로 밀어붙이기보다는 친화력으로 타협하는 위치에 가깝다.


언론이나 정계에서 불리는 별칭으로 '장비', '포청천' 등이 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부동명왕'이라는 별명이 새로 떠오르고 있다. 그나마 칭찬해 주는 말이 "문희상, 겉은 장비 속은 조조"일 정도로 아무리 칭찬해줘도 외모는 결국 장비다(...).


인상이 강경 보수파 정치인으로 보여서 잘 모르는 젊은 지지자들 사이에선 '자유한국당 의원인 줄 알았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나온다... 얼굴이 자한당 한나라당 의원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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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질녀 이하늬는 2015년 12월 23일 방영된 라디오 스타에서 자신이 살 찌면 외숙부 문희상과 닮았다고 자학했다(...) 여담으로 네이버에 문희상 치면 연관 검색어가 '문희상 이하늬'이다. 실제로 이하늬는 외숙부의 선거 유세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하늬의 아버지, 즉 문희상의 매제인 이상업은 문희상이 청와대 비서실장 시절 경찰청장 후보에 이름이 올랐었지만, 정작 이 문희상과의 관계 때문에 당시 민정수석이었던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비서실장의 매제가 경찰청장이 되면 국민들이 어찌 납득하겠냐'라는 논리를 펴서 임명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문희상 본인도 반박할 수 없는 지적이라 받아들였다고.


더불어민주당 인사들의 외모를 나누자면 인상파에 분류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동일한 스타일로는 이해찬 의원이 있다고. 다만 이해찬 의원은 까칠함이 많이 드러난다.


* 19대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식에는 이해찬과 문희상이 나란히 앉았는데, 이 두 사람의 표정만 보면 "강성 반문 성향의 원로 의원들이 억지로 취임식에 참여한 것 같다(...)"는 반응들이 올라왔다. 


물론 이 두 사람은 친노-친문계에서는 맏형급으로 분류되는 의원들이고,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뛴 인물들이다. 친문의 대장급인데, 두 사람 다 외모는(…) 뒤에 심재권 의원과 이석현 의원도 표정만 보면..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 일본 특사로 일본에 가게 됐을 때 일본인들에게 '야쿠자 두목, 오야붕, 악당 얼굴 같다'는(...) 인상 평을 들었다. "대화를 하자면서 야쿠자 오야붕을 보내다니..."라는 분위기.어쩐지 아베가 더 편한 의자에 앉은것 치고는 좌불안석 같더라니 사실 조선통신사 때부터 이어지던 유구한 전통이라고 한다



같은 지역구를 맡는 홍문종 자유한국당 소속 국회의원과 같은 외교통일위원회 소속이다.

18대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활동할때 당시 한나라당국방위 간사가 유승민 의원이였는데, 2009년 당시 제2롯데월드 논란에서 당시 유승민은 여당 간사임에도 매우 신랄한 비판으로 제2롯데월드를 반대했었는데 이것이 꽤 인상적이였던 모양. 당시 국회 속기록에서 "이런 분이 있기에 이명박 정권과 대한민국에 미래가 있다. 


존경의 염(念)을 표한다." 라고 하였으며. 훗날 문재인 대선 선대위원장을 맡았을때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유승민 후보는 대통령감이다. 자질과 역량을 모두 갖춘 정치인." 이라며 이례적인 상대후보 평을 한 적이 있을 정도.


2018년 지방선거의 결과로 보수가 궤멸했다는 표현에 대해 보수 세력의 몰락이지 보수의 궤멸이 아니라고 선을 그으며 민주당도 한때 폭망했다가 살아났음을 언급하였다. 다만 보수 정치인들이 이번에야 말로 크게 반성하고 희생과 혁신을 해야 할 것이라고 쓴소리를 덧붙였다.


2018/07/13 - [Hot issue/정치] - [주승용 국회부의장] 만렙 철새의 금의환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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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ㅣ https://namu.wiki/w/%EB%AC%B8%ED%9D%AC%EC%83%81]

1948년 충청북도 제천군(현 제천시)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하였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4년 5개월 동안 복역하였다. 이후 기업체를 경영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겨레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노원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통일민주당 백남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도봉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인 민주자유당 신오철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95년 김대중이 정계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따라가지 않았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도봉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새정치국민회의 설훈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같은 해 노무현, 원혜영, 김원기 등과 국민통합추진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였다. 2002년 재보궐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박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3년부터 2004년까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을 역임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도봉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김선동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컷오프 대상에 포함되었는데, 순순히 승복하고 불출마 선언을 했다. 승복 인터뷰에서 물러나야 할 때를 아는 것이 삶의 소중한 가치라고 생각했으며, 그 동안 당이 어려워서 물러나지 못했다는 변을 밝혔는데, 사실상 정계은퇴 선언으로 봐도 무방할 듯.


정계은퇴 후로는 주영진의 뉴스브리핑에서 정치 평론을 하고 있는데, 민주당 출신이었으나 민주당에도 따끔하게 지적을 하면서 기계적 중립을 지키려고 하는 패널이라는 평이다. 2018년 1월부터는 CBS 뉴스쇼의 꼭지 '월간 아무개' 에 고정출연하고 있다.


2018년 자유한국당 권석창 의원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의원직을 상실하면서 재보궐 선거 출마설이 나왔으나 본인은 부인했다. 정계은퇴가 확실한 듯.


2018년 7월,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장 후보에 선출된 문희상이 20대 국회 하반기 국회사무총장직을 제안해 기존 활동하던 코오롱글로벌 사외이사와 기타 방송활동을 중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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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ㅣ https://namu.wiki/w/%EC%9C%A0%EC%9D%B8%ED%83%9C]




제20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동교동계 직계와 친노계에 모두 해당하는 인물. 친노계의 큰형님.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의정부시 행복로 근처에 위치한 숭문당의 창업주. 호는 정흥(正興)인데 사실은 개명 전 이름은 문정흥이었다. 야구인 김영조의 사위이며, 미스코리아 출신 배우 이하늬의 외삼촌이다.




대한민국의 제14대, 16대~20대 국회의원이며 경기도 의정부시에서 깊게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참여정부 시절에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2번이나 민주당의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거물급 인사다.현재 20대 국회의원 기준 더불어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중 최고령 국회의원이다.


1945년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의정부 지역의 대지주였다. 말하자면 금수저. 경복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학생운동에 투신, 여러 번 감옥을 들락날락거렸다. 이 때문에 행정고시를 준비하기도 했으나, 그만두고 1980년대 반독재 투쟁을 벌이던 김대중 휘하에서 민주화운동을 벌인다. 의정부시가 원래 실향민이 많아서 레드 콤플렉스가 심한 지역인데다가, 아버지 역시 열혈 박정희 지지자로서 매우 보수적인 인사였기 때문에, 당시 "빨갱이"로 매도되던 김대중 밑에서 일하는 아들의 행동에 대해 대노했다고 한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이 총재로 있는 평화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의정부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주공화당 김문원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한국당 홍문종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8년 김대중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 등을 역임하였다. 김대중이 당선된 날 아버지 묘소에 가서 "아버지! 제가 간 길이 옳았죠!" 라고 오열했다고.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2003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되자 국회의원직을 사임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경기도 의정부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06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정보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 5선 의원이 되었다. 이어 열린 대선에서 민주당이 패하고 지도부가 사퇴하자 첫번째 비상대책위원장이 되었다.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가 사퇴하자 두번째로 비상대책위원장이 되었다. 정세균 상임고문, 원혜영 의원과 더불어 당내 여러 인사들과 친화력이 높아 당내 대표적인 관리형 정치인으로 꼽힌다. 공교롭게도 셋 다 모두 범 친노계 인사로 꼽힌다.


2014년 말 땅콩회항 사건이 터진 가운데 2004년, 처남의 대한항공 취업 청탁을 했다는 의혹이 불거져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에 대해 문희상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은 대국민 사과를 하였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컷오프됐는데 "도대체 왜 짤린 거지?"가 대체적인 전문가의 의견이다. 취업 청탁 의혹이 있지만 이미 12년이나 지난(...) 문제일 뿐더러, 문희상의 지역구에 딱히 대체할 인물도 없어서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조차도 분개했다고 한다. 결국 문희상은 원래 지역구에 '전략공천'되었다. 결국 6선에 성공했다.


야권의 승리와 더불어서 2016년 4월 현재 20대 국회의 유력한 국회의장 후보로 물망에 오르고 있다. 계파색이 옅고 이제 나이도 많아서 이석현, 정세균 의원보다 정계은퇴에 대한 부담도 크기 때문. 다만 2004년 취업청탁에 대한 구설수가 있다는 것이 약점이다. 그러나, 의장직을 건 당내 경선에서 정세균에게 패배했다.


2017년 문재인 정부에서 일본 특사가 되었다. 사실 일본통까지는 아니여도 일본과 나름 연이 있는 인물이다.



5월 17일날 열린 일본과의 외교회담에서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에 대해 한일 양국, 한미일 삼국의 긴밀한 연계가 중요함을 강조하였고 빠른 시일 내에 정상회담을 하는 것을 제안하였다. 또한 위안부 합의가 국민 대다수가 정서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입장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특사의 성격을 지닌 만큼 재협상 등의 요구는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마찬가지로 논란이 되었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의 경우 회담에서 논의 되지는 않았지만, 추후 유지 여부는 새 정부가 정할 일이라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아베 신조와의 만남에서 아베는 높은 위치의 의자에 앉고 문희상 특사는 낮은 의자에 앉게 해서 일부러 이렇게 무시한 거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 MBN 기사 낮은 의자에 푹 꺼져 앉아서 야쿠자 보스 행세를 하고 있으나, 정작 아베는 높은 의자에 앉아서 내려다보고 있다. 2017년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아베 신조를 만났는데 여기서도 문희상이 앉았던 의자와 똑같은 의자에 앉았고, 이 때도 홀대론이 나왔다.






2017년 국회 본회의 출석율 100%(!)를 기록했다. 다선의원들이 대체로 정당 활동이나 지역구 활동에 전념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놀라운 기록이다. 문 의원을 제외하고 출석율 100%를 기록한 의원들이 모두 20명인데 모두 초선이나 재선, 높아봐야 3선 의원들이다. 괜히 부동명왕이 아닌가 보다.


20대 국회 더불어민주당 후반기 국회의장 후보자 선거에 박병석 의원과 함께 출마했다. 묘하게 민주당은 재수 성공률이 높기 때문에(...) 차기로 유력하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대통령도 재수였고, 원내대표도 재수였다.


2018년 5월 16일 더불어민주당 20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후보자 선거에서 총 116표 가운데 67표를 얻어 박병석 의원(47표)을 넉넉하게 제쳤다. 이후 여야 간 상임위 분배 기싸움으로 의장 선출이 연기 되었으나, 7월 10일 여야 원내대표들이 7월 13일 국회의장 선출을 위한 본회의를 합의하면서 13일 본회의를 통해 후반기 국회의장에 당선됐다.


현역 정치인 중에서 상당히 독보적인 인상파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주류 언론에서 외모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본인도 외모를 이용한 자학 개그를 만들 지경이다. 하지만, 동료 의원들 사이에서는 유순한 성격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취미도 서예이며, 국회의 서예 동호회 회원이라고 한다. 위에 나왔듯이, 정치 자체의 스타일도 자신의 주장을 저돌적으로 밀어붙이기보다는 친화력으로 타협하는 위치에 가깝다.


언론이나 정계에서 불리는 별칭으로 '장비', '포청천' 등이 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부동명왕'이라는 별명이 새로 떠오르고 있다. 그나마 칭찬해 주는 말이 "문희상, 겉은 장비 속은 조조"일 정도로 아무리 칭찬해줘도 외모는 결국 장비다(...).



인상이 강경 보수파 정치인으로 보여서 잘 모르는 젊은 지지자들 사이에선 '자유한국당 의원인 줄 알았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나온다... 얼굴이 자한당 한나라당 의원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게다가 질녀 이하늬는 2015년 12월 23일 방영된 라디오 스타에서 자신이 살 찌면 외숙부 문희상과 닮았다고 자학했다(...) 여담으로 네이버에 문희상 치면 연관 검색어가 '문희상 이하늬'이다. 실제로 이하늬는 외숙부의 선거 유세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하늬의 아버지, 즉 문희상의 매제인 이상업은 문희상이 청와대 비서실장 시절 경찰청장 후보에 이름이 올랐었지만, 정작 이 문희상과의 관계 때문에 당시 민정수석이었던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비서실장의 매제가 경찰청장이 되면 국민들이 어찌 납득하겠냐'라는 논리를 펴서 임명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문희상 본인도 반박할 수 없는 지적이라 받아들였다고.



더불어민주당 인사들의 외모를 나누자면 인상파에 분류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동일한 스타일로는 이해찬 의원이 있다고. 다만 이해찬 의원은 까칠함이 많이 드러난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 일본 특사로 일본에 가게 됐을 때 일본인들에게 '야쿠자 두목, 오야붕, 악당 얼굴 같다'는(...) 인상 평을 들었다. "대화를 하자면서 야쿠자 오야붕을 보내다니..."라는 분위기. 어쩐지 아베가 더 편한 의자에 앉은것 치고는 좌불안석 같더라니 사실 조선통신사 때부터 이어지던 유구한 전통이라고 한다.


18대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활동할때 당시 한나라당국방위 간사가 유승민 의원이였는데, 2009년 당시 제2롯데월드 논란에서 당시 유승민은 여당 간사임에도 매우 신랄한 비판으로 제2롯데월드를 반대했었는데 이것이 꽤 인상적이였던 모양. 당시 국회 속기록에서 "이런 분이 있기에 이명박 정권과 대한민국에 미래가 있다. 존경의 염(念)을 표한다." 라고 하였으며. 훗날 문재인 대선 선대위원장을 맡았을때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유승민 후보는 대통령감이다. 자질과 역량을 모두 갖춘 정치인." 이라며 이례적인 상대후보 평을 한 적이 있을 정도.



[출처 : https://namu.wiki/w/%EB%AC%B8%ED%9D%AC%EC%83%81]




김종필에 이어 대통령 빼고 다해본 사람. 대한민국 법조계의 전설이자 대한민국 현대 정치에 족적을 남긴 인물.


대한민국의 법조인, 정치인이다. 법조계에서 큰 이름을 날렸으며, 현재의 선관위와 감사원을 확립했다. 호는 경사(徑史). 대법관, 감사원장, 국무총리, 한나라당 총재, 자유선진당 총재 등을 역임했다. 그래서 흔히 하는 말이 "대통령 빼고 다 해본 사람"이라고 한다. 외삼촌 김홍용, 김문용, 김성용도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2018/06/23 - [실시간 핫이슈/정치] - 김종필은 누구인가? 영원한 2인자, 원조 '대통령 빼고 다 해 본 사람...(문재인 대통령에게 악담 영상)


이회창은 개혁보수에 가까웠고 실제로 군부 세력의 적폐를 청산하는 데 앞장섰다.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이 민주적이었던 시절의 최후의 보루. 민정계의 지지를 얻기도 했지만 이회창 본인은 독재정권에 비판적인 만큼 YS를 잇는 민주계에 더 가까웠고, 이회창이 은퇴한 후 한나라당은 TK에게 넘어가며 권위주의 및 수구화를 겪게 되었다. 민주당 지지 유권자 입장에선 이회창이 무너지고 이명박근혜 및 홍준표가 나타났다고 보는 셈이다. 


실제로도 YS-이회창의 개혁보수적 성향 탓에 현재 자유한국당이 갖는 경북 텃밭이 그 당시에는 없었는데도 김대중/노무현과도 정말 아슬아슬하게 싸우다 아깝게 졌을 정도로 국민들에게 인기 또한 모자라지 않았다. 이명박의 국민행동본부, 박근혜의 어버이연합이 나타난 해가 2006년 경으로, 이회창과 민주계가 힘을 잃기 시작한 때이다. 뒤집어 말하면, 김영삼이나 이회창이 보수정당을 장악할 때에는 저런 우파 단체들도 날뛰지 않았다. 애초에 군부 세력을 구속시키고 청산하던 사람이니 그럴 일이 없었겠지만.


문민정부 당시 감사원장을 맡아 초창기 문민정부의 개혁운동에 큰 몫을 담당했던 인물이었고, 바로 이 성과 덕분에 이회창은 대권을 노릴 수 있는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치인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 중 하나였던 포용력이 너무 부족했다. 이런 그의 실책은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여실히 드러났는데, 경선에서 진 이인제를 직접 설득하지 않아 독자 출마를 말리는 데 실패함과 더불어, 3김정치 청산을 주장함으로써 김종필이 이끌었던 자민련을 자극해 DJP연합을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결국 이 2가지는 근소한 차이로 김대중 후보에 밀리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2002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진보진영이 노무현 후보를 중심으로 단결한 반면에 보수 진영은 상당히 사분오열 되어 있었다. YS나 박근혜는 이회창을 지지했지만 과거 이회창의 3김정치 청산 주장을 기억하고 있던 이한동, 김종필과 같은 충청 보수 세력은 끝내 이회창을 지지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그리고 이회창에게 팽당한 이기택과 같은 구 민주당 세력은 아예 노무현을 지지했다.


여기다가 이회창을 대권후보로 만들어 줬던 대쪽 이미지 역시 아들의 병역 문제와 관련한 노무현 진영의 흑색선전으로 인해 국민의 역린을 건드려 무너지게 되며 끝내 대권에 실패하고 만다. 이회창의 두 아들의 불법적인 병역기피 의혹은 결국 법적으로 무혐의 처분으로 종결되었다. 그리고 진실이 밝혀졌을 땐 이미 모든 게 끝났다.


이회창이 당권을 장악하던 때까지의 한나라당은 수구 이미지가 약한, 정상적인 보수주의/자유주의 노선의 정당이었다.(지역 기반도 TK/군부가 아닌 PK 중심의 민주화 세력이었다) 김영삼을 이은 보수정당 내 민주계 라인이었던데다 이회창 본인이 독재정권과 싸웠던 사람이라 빨갱이 몰이나 독재정권 찬양 등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고, 이 때문에 박근혜가 입당하고 나서 자주 마찰을 일으켰다. 



이후 대선에 출마하였던 보수진영의 인사들과 비교하자면, 명확하고 구체적인 국가관 및 정책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명박, 박근혜, 홍준표로 갈수록 점점 질이 떨어진다는 말도 나올 정도.(유승민은 일단 논외.) 정치에 민감한 민주당 지지자이나 중도보수 지지자들 사이에서 이명박근혜가 아니라 이회창정도의 인물이 대통령이 됐으면 보수정당이 일본 자민당처럼 계속 장기집권했을 가능성 또는 최소한 보수가 제대로 망가지는 사태는 피할 수도 있었다는 말도 나온다. 


후에 '우리 당이 수구적으로 변해간다' 라며 한나라당에서 민주당으로 이탈하는 정치인이 생기거나 한나라당이 권위주의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도 거의 대부분 이회창이 연패를 당하고 한나라당에서 물러난 후부터이다. 이명박이나 홍준표도 민주계와 관련이 있거나 그와 협력은 했던 관계이지만 하도 권위주의/종북몰이 등의 논란 때문에 김영삼-이회창과 전혀 다른 평가를 받는 이유도 그렇다. 


이회창이 무너지고 나서 한나라당 내 민주계 세력이 약해지고 친이와 함께 다소 권위주의 노선을 걷고, 후에는 친박이 장악하며 수구 색채가 완전히 커져버린 것 때문에 후대에 이런 평가가 나오는 것이다. 김영삼-이회창의 한나라당 시기에는 워낙에 친박 지지층과 척을 져서 경북에서 반감을 샀던 때가 있었다.



2018/06/23 - [실시간 핫이슈/정치] - 김종필은 누구인가? 영원한 2인자, 원조 '대통령 빼고 다 해 본 사람...(문재인 대통령에게 악담 영상)


물론, 이에 대해선 보수정권의 치명적이고 영원할 약점인 "차떼기나 총풍사건 같은 부패 스캔들은 도대체 뭐냐?"는 지적도 있다. 대권후보로서 한 삽질은 비록 대통령이 되지 못했음에도 역대급으로 컸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회창 본인이 있던 시기의 한나라당은 정상적인 보수주의/자유주의 정당이었다고 하지만, 그 한나라당이 수구화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회창에게 있었다. 이회창 본인이 1997년 신한국당 대선 경선에서 승리한 데에는 민정계의 단합과 지지가 있기 때문이었고, 1998년부터는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동진정책에 맞서 기존 지지층의 재결합을 위해 본격적으로 민정계와 구 유신계에 손을 내밀었다. 김영삼이 독재정권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정치인들을 무작정 내쫓고 탄압하며 반감을 샀었다. 


사실 당장 박근혜를 영입하고 공천을 준 사람이 이회창이다. 물론, 박근혜는 그때 당시 좋은 이미지였기에 김대중도 박근혜를 영입하려 애썼고, 박근혜가 군부 출신을 정계에 다시 데려오는 것을 보고 독재정권에 반감이 있던 이회창이 갈등을 만들긴 했지만. 


당시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동진정책이 매우 거셌고 특히 김대중의 국민회의는 정체성과 무관하게 세력확장을 위해 민정계 출신 인사들을 대거 영입하는 초강수를 두고 있었기에 이를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회창 본인이 있을 적에는 이회창의 강력한 당 장악력과 카리스마 및 독재정권에 비판적이던 민주계의 정신적 구심점으로서 한나라당은 정상적인 보수정당일 수 있었다. 그러나 2002년 대선 패배로 강력한 구심력이었던 이회창이 은퇴하면서 한나라당은 대혼란에 빠지고 결국 당 주도권은 박근혜와 민정계에게 넘어가고 만다. 남은 민주계도 차악으로 이명박을 지원했지만 이명박의 권위주의를 겪으며 하나하나 이탈하게 되고 박근혜에게 숙청당하게 된다.



의외로 현재 한국에선 생각하기 힘들지만, 보수정당 인물임에도 대선 당시에는 수많은 연예인이나 유명인들의 지지선언을 받았다. 심현섭, 강성범, 박성호, 김대희, 이승철, 설운도, 이용식, 홍서범, 조갑경, 변진섭, 박철, 김인문, 심권호, 유남규, 베이비복스(!) 등. 보통 유명인이나 연예인들은 민주당 후보들을 많이 지지하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이회창이 라이벌이었던 노무현처럼 독재정권에 맞서고 양심을 지키던 법조인이라는 전적이 있기도 했지만, 현재 한국이 미국처럼 보수 지지 연예인이 이순재, 송해 정도 급의 거물급이거나 김흥국처럼 재밌는 이미지로 보수 색채를 상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힘들다는 걸 고려하다면 그만큼 이회창이 진보적인 유권자들 사이에서도 우호적인 인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명박 및 박근혜가 국정원 같은 공공기관을 악용했지만 김영삼과 이회창은 안기부/국정원을 민주화시켰고 압수수색이 가능할 정도로 만들어 놓았었다. 2010년대 후반 들어 보수정당의 여러 문제점 속에서 YS-이회창이 계속 재평가되는 이유도 그들이 독재정권/반민주주의에 맞섰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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