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그것이 알고싶다

  • 이재명과 경기동부연합..


이재명은 2010년 지방선거 당시 김미희 당시 민주노동당 후보에게 야권연대 단일화 대가로 경기동부연합 쪽에서 운영하는 '나눔환경'이라는 업체를 성남시 청소용역 업체로 선정해 특혜를 제공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제기되었다. 이 기사에서 경기동부연합 연관성 의혹을 언급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야 정치권과 재야·시민사회 일각에서는 주사파 혁명론과 민족해방(NL) 이론으로 무장한 구 통진당 인맥과 경기동부연합 운동권 세력이 이재명의 실질적인 정치 기반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 일 이외에도 이재명은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일대에 기반을 두고 있는 구 통합진보당의 핵심이었던 경기동부연합 소속 조직이 지지 핵심 기반이라는 의혹을 여러 차례 받아왔다. 대표적으로 이재명 성남시장을 소개한 한 언론의 기사에 따르면 이재명의 주요 지지기반을 경기동부연합으로 분석하였다. 언론에서도 나올 정도로 이재명은 선거에서 성남시에 기반을 둔 단체인 경기동부연합의 지지를 받았고, 이들이 주요 지지기반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재명과 경기동부연합의 연관성은 적지 않다.


이재명 논란


경기동부연합이란 이재명이 시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경기도 성남시에 기반을 둔 정치단체로, 이석기의 내란음모 혐의로 인하여 헌법재판소에서 해산 판결을 받아 해산된 구 통합진보당의 핵심 세력이었다. 이정희, 김세연, 이석기 등등이 주요 인물이었고, 2012년 총선 직후 터진 통합진보당 경선부정을 저지른 세력이기도 하다. 


물론 시장으로 출마한 성남시에 기반을 둔 단체들의 도움을 받아 선거유세를 다니고, 도움을 받을 수는 있지만 해당 단체가 논란이 있어왔고, 이 조직이 소속된 정당이었던 통합진보당이 종북 논란이 있었고, 한 당원의 내란음모 관련 발언을 이유로 정당이 해산까지 받았던 것을 고려해 보자면,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이러한 단체를 선택한 것에 대한 말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재명 비판


  • 이재명의 띠 색깔

2017년 조기 대선을 앞두고 실시된 더불어민주당의 대통령선거 후보 경선에서 이재명은 다른 후보들과는 달리 당의 색깔인 파란색이 아닌 주황색 띠를 차고 왔는데 주황색은 구 통합민주당의 핵심 세력인 경기동부연합이 주축이 되어 창당한 민중연합당의 색깔과 비슷하다. 이재명의 띠 색깔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으나, 이재명은 오렌지 혁명을 상징하는 주황색을 사용했을 뿐이라는 언급을 하였다. 이재명과 오렌지 혁명이 무슨 관련이 있다고?


이에 대해 이재명은 이러한 이유로 자신이 종북이라고 매도되는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하면서 종북몰이라고 강력히 비판했지만 대통령선거 후보 경선에서 당의 색깔이 아닌 다른 색을 썼을 때 일어날 논란을 생각했다면 경솔한 판단이 아닐 수 없다.


이재명 주황색


2017년 7월 6일, 양심수 없는 나라로에 참가하였는데 이것이 이석기 석방 운동 아니냐는 의심어린 눈초리가 보수 세력에서 제기되었다. 다만 해당 단체는 전국여성연대, 조계종,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원불교, 한국기독교장로회, 기독교대한감리회와 제도권 정당인 더불어민주당, 정의당도 참여한 단체. 일반적으로 폭력을 사용하지 않은 채 자신의 신념을 표현하여 정치/종교/인종/문화 등의 온갖 요인으로 인해 박해를 받아 구속된 모든 사람을 석방하라는 요구지 이석기를 석방해달라는 요구가 기본 전체가 된것이 아니다. 


만약, 이것이 종북적 행위일시 대한민국의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지지자와 조계종, 원불교, 장로회, 감리교는 종북화한다. 해당 언론에선 양심수(이석기)라는 병기를 사용 중이지만, 해당 언론사는 박근혜를 반대하는 국민을 촛불세력이라 규정하거나 트럼프의 행적을 지지하거나 수리온에 대해 옹호적이고 문재인 및 원내정당중 자유한국당, 대한애국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에 비판을 가하는 언론사이므로 걸러서 들어야 한다. 


사실 이재명은 종북은 정신병이라 하거나, 더민주 신입당원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지금 북한에 가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며, 종북은 당연히 문제고, 종북몰이도 과감하게 대처해야 된다"고 말한 적도 있다.


[출처 : https://namu.wiki/w/%EC%9D%B4%EC%9E%AC%EB%AA%85(1964)/%EB%85%BC%EB%9E%80%20%EB%B0%8F%20%EC%82%AC%EA%B1%B4%EC%82%AC%EA%B3%A0#s-8.6]

바닥에서 오로지 능력과 노력만으로 정상에 오른 영화 같은 인생사. 


인생사가 다사다난하다. 빈농 노름꾼의 자식으로 태어나 초졸 소년공으로 온갖 산업재해를 입고 보상도 못받고 검정고시로 중앙대 법대에 입학했다. 장학금 하나 믿고 뼈를 깎는 수험 생활 끝에 변호사가 됐다. 정치인이 돼서도 한 번에 당선되는 법이 없었다. 3회만에 당선됐지만, 2017년에 사망한 셋째 형이 동생의 공직 자리를 이용해 알선 수재를 하려다 까이고 원수가 됐다. 여동생은 청소부 일을 하다 과로로 죽었다.


그의 인생사를 쭉 훑어보고 그의 정치 커리어를 쭉 훑다보면 "나는 어차피 밑바닥이니 잃을 게 없다. 이렇게 살다 죽더라도 능력과 노력만으로 이 세상을 다 씹어먹어보이겠다" 라는 일념 하나로 살아온 것만 같은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대한민국 정계의 에미넴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셈.



이재명 성남


  • 출생 그리고 가족

1963년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5남 4녀 중 일곱째였으나, 누나 둘이 요절하면서 다섯째가 됐다. 


그의 부친 이경희는 경북 영양군 사람으로 대구 청구대학교를 중퇴하고 순경, 교사 등을 하다 노름에 빠졌고, 이후 탄광관리자 등을 전전하다가 경북 안동군 예안면 산골 '지통마'에서 농사를 지었었다. 그의 부친에 대한 증언으로는 싫은 소리 못하는 사람, 산골 마을에서 동장을 맡았다 등이 있다. 


하지만 그나마 조그만 땅뙈기까지 노름에 날리고 976년 하산해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 시장통에서 청소부 일을 했다. 참고로 이재명 시장의 모친은 공중 변소 앞에 하루 종일 앉아 요금을 받았다고. 너무 가난해 남들 다 중학교에 진학할 때 이재명은 성남 상대원 공단 소년공으로서 괴로운 삶을 살았다. 


그의 생일을 까먹은 어머니가 점쟁이에게 물어(...) 정했다고. 생일 파티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학교 등록을 하려면 알아야 되니까.


초등학교는 의무 교육이기 때문에 다녔지만, 초등학교와 집의 거리가 6km이 였기에 재해나 추위가 닥치면 가지 못하거나 본인이 재해를 만들거나(...) 해서 결석일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엔 교사만을 보고 본인도 교사가 되면 권위적일수 있겠다는 체벌도 할 수 있고 생각에 교사를 내심 꿈꿨지만 바로 공장 일을 하였기에 포기했다고 한다.


  • 공장생활 시작

첫 번째 공장은 염산과 황동을 다루는 목걸이 공장이었고, 2번째 공장은 붕산으로 땜을 하는 공장이었는데 사장의 야반도주로 월급을 떼였다. 


이후 여러 공장을 전전하다가 5번째로 일한 글러브 공장에서 프레스기 작업 중 프레스기에 왼쪽 팔이 그대로 끼어들어가는 산업재해를 당해 장애 6급 판정을 받았으나, 당시 본인은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해 치료를 받지 않았다. 팔부상으로 병역 신체검사에서 제2국민역(5급) 판정을 받아 병역이 면제됐다. 


여담이지만 군의관이 엑스레이를 보며 "이 새끼 이거 개판이네" 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 얘기는 이재명 시장이 그 말에 상처 받았는지 두고두고 언급하는 말이다. 사실 이 사실은 이 시장이 장애를 숨기고 싶어했던 그 이유 때문인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가 스티브 유가 주제넘게 병역문제로 디스하자 본인이 직접 꺾인 왼팔을 보여주며 인증했다.  참고로 현재는 왼쪽 손목 뼈없이 근육으로 버티는 중이라고 한다.


당시 자신을 개 패듯 두들겨 패던 공장 관리자가 고졸인 것을 보고, '나도 고졸이 되면 관리자가 될 수 있겠다'라는 생각에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 때 락카실을 자원해서 일을 했는데, 락카질은 도금 공정의 마지막 단계 이기에 먼지 하나 없는 밀폐 구역을 만들어 작업을 했기 때문이었다. 근무시간에조차 허락 없인 열리지 않는 이중문 안쪽에서 혼자 작업을 했기 때문에 할당된 작업량을 서둘러 끝낸 뒤 귀퉁이에 숨어 몰래 책을 봤다고 한다. 하지만 완전히 밀폐된 열악한 작업 조건 아래 벤젠과 아세톤 냄새를 너무 맡아 후각을 상실했으며 코가 비뚤어졌다. 


또, 3번째 공장에서는 고무 조각이 손가락에 박혔는데 파편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특히 4번째 공장 때 날카로운 함석들에 찔려 흉터가 많다고 한다. 더불어, 폭력을 휘두르던 작업반장 때문에 난청과 부분적 청각 장애도 있다. 


우울증과 장애로 너무 힘든 나머지 17살 때 자살을 여러 차례 시도했다. 첫 시도 때 연탄불이 알아서 꺼졌고, 2번째 때는 둘째 형이 구해줬으며, 우울증에 시달리던 마지막 시도땐 다량의 수면제를 구하러 갔다가 눈치 챈 의사가 소화제를 대신 줘 죽지 못했다. 


이 무렵 어머니는 낮에는 일을 하시다 밤에는 막걸리 장사를 하셨는데 손님 중 한 명이 안주를 나눠 주더니 "귀가 참 잘 생겼네" 라며 복귀라고 뭘 해도 잘 될 놈이라 칭찬하였다. 때마침 중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하였기 때문에 그때부터 우울했던 것이 점점 상쇄되고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재명 과거


  • 검정고시와 대학입학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대학입학 학력고사에서 1982년 중앙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그가 밝힌 법대 진학 이유는 순전히 장학금과 생활비 지원 때문이었다. 당시 공장 월급이 8만 원 정도였는데 등록금 면제는 물론 생활비로 매월 20만 원 가량을 지원받는 조건이었다고 한다. 중앙대학교에 입학하던 날 어머니가 교복을 사주어 교복을 입고 중앙대학교를 갔다. 어머니도, 그 외 가족들도 대학은 물론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어 교복을 입는 줄 알았다고 한다. 


사실 이재명 시장은 중고등학교를 못 다녀봐 교복을 못 입어 봤기 때문에 오히려 좋았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그런 목적으로 어머니가 교복을 사주실때도 가만히 있었다고. 사실 이 시장도 몰랐는데 변명하는 거 아닐까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보니 교복을 입은 사람은 자기 뿐이였다고 한다. 아싸가 안된게 다행이다


역시 공장에서 일하던 셋째 형 이재선에게 지원받은 생활비를 쪼개주겠다 설득해 대입 시험을 치르게 했고, 이재선은 건국대학교에 들어가 공인회계사가 됐다.


대학교에 다니며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었고 원래부터 약자에 대해 동병상련이 있었던지라 세상이 자신만 잘 살아야 되는 것은 아니였다는 것을 이때 깨닫기 시작했다고 한다.


  • 인권변호사 겸 시민운동가 시절 

선배들에게 사법시험에 관해 들었고, 특히 장애인이라 취업이 힘든 자신에게 고시공부만이 살 길이라는 생각으로 사법시험에 도전한다. 1986년 사법시험에 붙기 직전 청소부였던 아버지 이경희가 위암으로 위독해 입원했는데, 정작 문병을 가니 아버지가 친구들을 모아놓고 "그놈을 내가 거길(법대를) 보냈어"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아들이 공부한다고 밀어주기는커녕 이 모든 가난의 원인이었던 아버지였지만 아픈 마당에 구태여 반박하기도 그래서 그때는 그저 맞다고 했다고 밝혔다. 


결국 1986년 10월 23일  제28회 사법시험에 합격한다 급히 병세가 나빠져 혼수상태에 빠진 아버지 귀에 합격했다고 보고를 했지만 이미 의식이 없어 들었는지는 알턱이 없다고. 며칠 후 이경희는 사망했다.


노무현 변호사의 강연을 들은 후, 군부독재정권에 반대하는 뜻으로 자신이 변호사가 될 것이라고 주변에 말하고 다녔고 순간 멈칫했다지만 결국 변호사 겸 성남 지역 시민운동가로 활동하게 된다. 사족이지만 모친에게는 성적이 안 나와서 변호사를 하는 것이라 둘러댔다고 한다. 


한편 시민운동가로 활동하게 된 계기에 대해 앞서 말하였던 대학생활 중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체를 알게된 것도 있고, 자신의 힘들었던 시절을 되돌아 볼 때 사회모순으로 억울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밝힌 적도 있다.


법률사무소를 연 초반에는 상당히 젊은 나이였기에 상담 오는 사람마다 족족 젊은 사람이라 신용하지 못하고 나가는 데다 개업한지 얼마 안 된 터라 돈을 벌지 못했다고 한다. 변호사 초장기엔 노동운동이나 인권과 관련된 변호 활동을 위주로 하였고 이 당시가 바로 인권변호사 시절이다. 


문민정부 집권 이후 고문이나 시위 강제진압들이 사라지면서 1995년, 본격적으로 시민운동가가 된다.


이재명 변호사


  • "양심값은 5천억"

2002년 분당아파트 특혜 분양 사건 당시 이재명이 본격적으로 이에 대해 이의제기와 문제제기를 하였었는데, 당시 관련 인물들은 20억 상당의 지역신문사를 보장해줄테니 문제제기를 자제하라고 회유를 하였던 사건이 있었다. 당시 이재명은 "양심값은 5천억"이라고 농담을 던졌는데 이에 대해 진지하게 받아들인 이들이 이재명과 모종의 거래를 하다 실패하였다는 식으로 말하며 몸값을 높여 당황하였다고 회고하였다. 


그렇게 되며 협박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협박을 받을 당시 실제로 두려움을 느껴 총포소지허가증를 받아 가스총을 소지하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협박에도 회유가 되지 않자 패륜아, 악덕 변호사 등의 이미지를 붙여 그를 공격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며 떨어져 나갔다고.농담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2004년, 이재명이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사건이 있는데 당시 성남시민들이 공공 의료원을 설립하는 것을 목표로 국내 최초로 2만명이 주민 발의 조례를 한 일이 있었다. 당시 주민이 시 의회에 장정 1년을 준비한 해당 조례를 넘기자 47초 만에 날치기로 심의 자체가 거부 되었었다. 당시 이재명은 주민 대표 중 한명이였는데 이 당시 성남시민들과 의회에서 항의를 하는 과정에서 회의 속개를 진행하고 의회를 나간 의원들을 붙잡으러 다니다 30여명이 같이 연행되며 특수공무집행방해 및 공용물건손상죄를 선고하였다. 당시 대표 주민이였던 임모씨에겐 구속 영장을 발부하였으나 기각되었다.


당시 이재명 시장이 흘린 눈물이 현재도 자주 화제가 되는데, 이재명 시장은 부결까지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심의 자체가 거부 당하자 마음 속에서 울분과 허망감이 나와 울음을 흘렸던 것이라고 회고하였다. 이후 교회 지하실에서 지인과 도시락을 먹으며 또 울다가 시장이 되서 시립의료원을 만들자고 마음을 먹었다고 말했다. 본래는 정치에 나오면 패가망신한다는 생각에 하지 않았었다고.


여담이지만 이재명 시장은 생각보다 자주 눈물을 흘리는데, 이 때문에 인간스럽다는 평[21]과 더불어 갭모에 겉바속촉 외강내유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이재명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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