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한민국의 금융인. 전 우리금융지주 대표이사.

MB정부 '금융권 4대 천왕'  


1944년 2월 2일 경남 하동군에서 태어났다. 1963년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고, 1967년 졸업했다.


1967년 한일은행에 입행한 뒤, 1999년 한빛증권 사장, 2002년 우리투자증권 사장을 맡으며, 38년간 우리은행, 우리금융 등에 몸담아왔다.



2004년 9월에는 금융계를 떠나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의 제의로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를 2년 반 정도 맡았다가, 이명박 정부 초기였던 2008년 초에 한국증권거래소 이사장 공모에 나섰지만 ‘MB맨’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낙하산 논란 속에 탈락했다


당시 한국증권거래소 이사장이 된 이정환 씨는 검찰 수사와 함께 지속적인 사퇴압력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거듭된 낙하산 논란에도 불구하고 2008년 6월에 제4대 우리금융지주 회장으로 취임했다. 말단 행원으로 입사해 회장까지 한 직장에서 40년 동안 일을 해왔기 때문에, 입지전적 인물로 불렸다. 


회장에 취임하자마자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맞이하여 고강도 긴축경영을 실시했다. 계열사 임원 급여를 10%씩 반납했고 2009년에도 임원 급여 10%를 추가 반납했다. 



2008년 4분기 예산의 10%를 절감했고 2009년에도 변동성 경비의 20%를 깎았다. 우리금융의 실적은 빠른 속도로 회복됐다. 


2008년 금융위기의 충격으로 순이익이 4545억 원으로 급감했지만, 2009년에는 1조 260억 원으로 회복하며 가장 빨리 금융위기의 후유증을 털어낸 금융회사로 평가받았다. 


특히 2009년 3분기에는 ‘어닝 서프라이즈’에 가까운 실적을 올렸다. 2009년 3분기 순이익은 4838억 원으로 KB, 신한, 하나 등을 포함한 국내 4대 금융지주사 가운데 단연 최대였다. 


2009년 9월 경에는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미국 뉴욕 맨해튼의 66층짜리 AIG그룹 빌딩을 계열사를 통해 사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민영화는 끝내 마무리하지 못했다. 회장 취임 이후 우리금융 민영화를 위해 정부지분 17%를 블록딜 방식으로 매각했고, 2010년부터 2012년까지 3차에 걸쳐 완전 민영화를 최초로 시도했으나 무산되었다.



2011년에는 당시 최고 실세로 꼽히던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과 우리금융지주 회장을 두고 경쟁하여 승리해 연임에 성공했다. 이에 이명박 정부가 강만수 전 장관에게 산업은행금융지주 회장을 권해 강만수 전 장관이 상당히 불쾌했다고 한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신제윤 금융위원장과 최수현 금감원장이 여러 차례 사퇴를 종용하였으나 사퇴를 거부하였다. 우리금융지주의 민영화 토대를 직접 쌓고 싶었기 때문이라나... 


2013년 감사원 감사에서 측근을 자회사 대표에 앉히고 해외 골프와 고가 선물 구입으로 회삿돈을 낭비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결국 2013년 4월 우리금융지주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출처 : 이팔성]


검찰 출신의 법마(法魔) 


유신정권 때부터 박근혜정부까지 40년 넘게 권력의 핵심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유신헌법 설계, 공안사건 조작, 여론 공작, 지역감정 조장,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비롯한 온갖 정치적 비행을 저질렀으며, 위기 때마다 철저하게 기회주의적인 처신으로 난국을 돌파하였다...


1939년 11월 25일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통영군(거제도) 장목면에서 아버지 김석윤과 어머니 강신방 사이의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외포초등학교, 마산중학교를 거쳐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본인의 주장에 의하면 부친은 태평양 전쟁, 6.25 전쟁에서 활약한 군인이지만,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서민적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어린 시절을 가난했다고 묘사하듯이, 김기춘도 집안이 가난하여 가정교사 일을 하면서 고학했다고 한다.


가정환경이나 출신이 어떻든 아무튼 그는 학업성적이 매우 우수하여, 1958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한다. 그리고 대학교 3학년 재학 중이던 1960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서 출세길이 열리게 된다. 거기다 재학시절 5.16 군사정변에 공을 세운 부친 덕에 5.16 장학회의 장학금을 받아서 학업을 했고, 입대 전 합격했기 때문에 대한민국 해군 법무관으로 군복무를 마친다. 군복무 시절 대학원에 재학했고, 대위로 전역하였다.


이후 검사로 법조계에 입문하여, 광주지검 근무 시절 지금의 부인 박화자와 결혼했다. 이어 부산지검, 서울지검에서 검사로 근무했고 대구고검의 검사장을 지냈다.



초임 검사 시절부터 그는 출세지향주의적이고 정치적인 기질을 보였는데, 


심재륜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검사 때 법무부 장관 신직수의 눈에 띄려고 날마다 장관 집 앞 언덕을 오르는 노력을 했다고 한다. 남들 잠자는 시간에 일찍 일어나 출세를 위해 상관을 하염없이 기다렸던 것이다.


역사상 최악의 유신헌법 저작


체육관 선거로 국민의 참정권을 차단하는 새 헌법을 만들려고 했고, 신참 검사이던 김기춘에게 개헌을 맡겼다. 이미 김기춘이 만든 뼈대를 헌법학자들이 손도 대지 못하도록 했다고. 즉, 김기춘이 유신 헌법을 만든 셈이다. 


박정희는 김기춘을 김똘똘이라고 부르며 총애했다고 전해진다.


법률비서관 시절 박근혜-최태민 관계를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부터 최태민-박근혜와 김기춘이 밀착관계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즉 김기춘은 청와대 비서관으로 근무하면서 이런 부적절한 관계를 근절하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편승하여 출세를 도모한 것.


제5공화국 시절, 70년대에는 엄청 잘나갔지만, 80년대 들어서는 된통 깨졌다. 그것은 김기춘이 중정에서 근무하던 1970년대 후반, 대통령의 명령으로 보안사를 크게 손보았다가 보안사를 권력기반으로 하는 전두환 일당, 즉,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보복을 받기 때문이다.


그 발단은 1977년 20사단 예하 62연대 1대대장 월북 사건이었다. 보안대 관계자는 유운학에게 진급심사에 관련된 뇌물을 요구했으나, FM적인 성격의 유운학은 이를 거부헀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보안대 소속 장교들이 유운학을 지독하게 괴롭혔다. 보안대가 전방 대대장 유운학 중령을 과도하게 갈구는 바람에 유 중령이 참다못해 월북한 사건이다. 


6.25 전쟁 이후 최고 계급의 현역 군인이 월북한 사건이기도 하다. 이 사건의 진상을 듣고 격노한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의 대공수사국장으로 있던 김기춘에게 그 처리를 지시하였다.


김기춘은 보안사 조직 축소안을 마련했고, 관련된 보안사-보안대 간부들을 여럿 중정에 끌고와서 혼을 내주기도 했다. 이 사건은 명백하게 보안사의 잘못이었기 때문에 사실 김기춘이 잘못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독재국가에서 필연적인 정보기관 사이의 암투 때문에 김기춘은 보안사 간부들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


10.26 사건 이후 전두환이 사령관으로 있던 보안사가 중앙정보부를 접수했을 때, 중정에 들이닥친 보안사의 요원들이 가장 먼저 한 말이 "김기춘 어딨어!"였다. 하지만 김기춘은 몇 달 전 청와대 법률비서관으로 전직한 상태여서 보안사로 체포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김기춘이 만약 중앙정보부에 계속 있었다면 보복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정말 운빨은 기가 막히게 터진다.


그나마 검찰에서 연명할 수 있었던 것은 한때 검찰에서 부하로 두고 있었던 노태우의 처조카 박철언에게 줄을 댔고, 당시 보안사 비서실장이던 대령 허화평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편지를 써 보냈기 때문다.  



김기춘은 1980년 대검찰청 특수1과장·서울지검 공안부장을 역임했고, 1981년에는 출입국관리국장을 지내다가 12월 17일 검찰국장으로 임명된다. 이후 김기춘은 법무연수원 검찰연수부장으로 좌천된다. 그나마 법무연수원 좌천도, 박철언이 무마해줘서 옷을 벗지 않고 연명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때 찾아오는 손님이나 이전에는 여럿 거느렸던 부하들도 거의 없이 밥도 항상 혼자 먹는 등 갖은 수모를 당했다고 한다. 검찰의 고위직은 당시 안기부 요원들에 의해 근황이 일거수일투족 체크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밥을 혼자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친구나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기피인물이라는 뜻이다. 즉, 김기춘과 얽히면 5공 정권의 요주의 인물이 된다는 뜻이었다. 유신시절 무소불위를 저지르던 과거를 감안하면 몰락의 극치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한직에 있을 때도 육영재단 등, 최태민-박근혜의 전횡에 개입했다고 한다. 


최태민 게이트가 불거진 이후, 5공 시절의 1980년대 남매-자매간 갖은 분쟁때문에 바람잘날이 없던 육영재단 일에 현직 검사였던 김기춘이 최태민-박근혜를 위해서 자주 나타났다던 증언이 나왔다.


어쨌든, 공안검사들의 전성시대였던 제5공화국 때 1970년대까지 고시 선두주자였던 김기춘은 요직이 아니라 계속 한직으로 돌았다. 1982년부터 1985년 2월까지는 내내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근무했고, 1985년 3월부터 제6공화국 출범까지는 대구지검장·대구고검장·법무연수원장을 지냈다.


전두환이 물러나자 그는 다시 출세가도를 달린다. 박철언이 6공의 황태자 노릇을 하면서 자신과 친분이 있는 김기춘을 적극 밀었기 때문이다. 


5공 때 먹은 찬밥은 6공에서 전화위복이 되는데, 그는 5공 때 한직으로 돈 사실을 가지고 깨끗하고 강직한 검사로 연극했다. 1988년에 검찰총장이 되는데, 이는 박정희의 또 다른 가신이었던 신직수를 제외하면 지금까지 깨지지 않는 최연소 취임 기록이다. 이때 5공화국 세력을 개박살 내려고 5공비리 사범 50여 명을 구속시키는 등, 5공청산에 앞장선다. 정작 6공세력까지 얽힌 비리, 5.18을 비롯한 중요 사안은 냅둔다.


13대 국회 때 여소야대로 정권이 수세에 몰리자 적절한 시기에 굵직굵직한 공안사건을 터뜨려 정권의 위기를 해결해주는 구원자 역을 하게 된다. 


그중 하나가 서경원 의원 간첩사건 의혹인데, 이때 평화민주당 김대중 총재가 연루되어 있다는 언플을 하면서 김대중의 이미지에 흠집을 냈으나, 결과적으로 김대중은 결백한 것으로 드러났다.


1991년 5월 27일부터 이듬해 10월 8일까지 법무부 장관으로 재직하였다. 


이때 노태우 정부는 3당 합당을 통해 김영삼과 힘을 합친 후 6월 항쟁 이후 국민의 요구로 이루어졌던 많은 개혁조치를 되돌리는 반동정책을 행하면서 학생운동권의 분노가 폭발하게 된다. 여기에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전경의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자, 386세대 최후의 항쟁이라는 1991년 연쇄 분신 파동이 벌어져 정권은 위기에 몰리게 된다.



이때 매주 분신자가 나오면서 전국민 항쟁으로 확산될 기미가 보이자, 김지하는 5월 5일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때려치우라"라는 글을 기고해 운동권이 기획분신을 정치적 도구로 삼는다는 주장을 펼쳤고, 그와 동시에 서강대 총장이던 박홍 루카 신부가 "분신을 부추키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5월 27일 막 법무부 장관으로 등판한 김기춘은 주작 솜씨를 발휘, "김지하와 박홍 신부의 말이 근거 있다"며 검찰에 특별 수사를 지시하여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을 일으킨다.


즉, 재야단체 전민련에 소속되어 있던 운동권 강기훈이 운동권 동지였던 김기설씨의 분신자살(1991년 5월 8일)을 부추기고 유서를 대필해 줬다는 플롯을 짠 것이다. 정부가 이러한 내용을 대대적으로 발표하면서 분신정국은 급속히 공안정국으로 반전되었으며, 그 직후인 91년 6월 4일 국무총리로 지명된 정원식 한국외대 교수 퇴임식에서 운동권 학생들에게 계란세례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완전히 전세가 역전된다.


김기춘은 자신의 솜씨를 발휘해 정권의 위기를 찬스로 전환시켰고, 운동권은 치명타를 입었으며 이 사건기점으로 공안검사 출신들이 승승장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강기훈은 무려 24년 만에 2015년 재심절차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이를 지휘한 김기춘이나 관련 공안 검사들은 전혀 사과나 반성을 한 바가 없다.


강기훈 씨는 출소 후, 전민련 운동권 선배였던 정봉주 전 의원의 주선으로 정봉주가 운영하던 학원에 1990년대 잠시 전산담당으로 취직하지만, 정봉주가 정계로 입문하면서 학원 경영을 그만두자 이후 (전과자 전력 때문에) 변변한 직업을 갖지 못했다고 한다. 


여러 번 재심을 청구하였으나, 실제로 재심에 들어간 것은 2007년이었고, 재판과정에서 홧병으로 간암이 발병하였다고 한다. 결국 재심으로 무죄판결을 받았음에도 안정을 위해 언론접촉도 피했다. JTBC 정봉주는 자신이 진행하는 한 팟캐스트에서 2016년 말 현재 강씨의 병세가 위중하다고 밝힌 바 있다.


역사 바로세우기를 내세운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당연히 청산 대상이 되어야 정상이었는데, 여기서도 다시 한 번 운빨이 터진다. 어처구니없게도 김영삼과 동향 및 동문이라는 이유였다. 


5공, 6공 시절 김기춘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박철언은 김영삼과의 불화로 정치보복을 받아 소위 "슬롯머신 비리"사건으로 감방에 갔다. 이때 박철언과 같이 얽혀서 감옥에 간 사람이 김승연 한화 그룹 회장과 이건개 당시 대전고검장. 이건개는 사시 1회로서 김기춘보다 2살 어리고, 고시로는 1회 후배로서 여러모로 김기춘과 비교될 만 하지만 김기춘만한 운빨은 없었던지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에게 줄을 댔어도 이 사건으로 사법처리가 되어 관직으로는 끝나고 말았다. 


김영삼을 적극 지지하여 따낸 국회의원이라는 직위는 정치적 방탄복이 되었고, 그는 재심에서 무죄로 밝혀진 유신-5공시절의 여러 조작사건에서 검사나 수사관으로 활약했음에도 아무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2004년 국회 법사위원장으로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주된 역활을 하였다. 


과거 공안 조작사건 기획과 지역감정 유발, 공작정치의 전력으로 시민단체에 의해 총선 낙선 대상으로 지목되기도 했지만 3선 국회의원이 되었고 법제사법위원장으로 선출되어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당시 탄핵심판 청구인이 되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탄핵심판을 기각했다.


이 당시에 노무현 대통령을 싸이코라고 지칭하는 막말을 하기도 했다.


2007년 박근혜 한나라당 대선후보 캠프의 좌장노릇을 했으며, 원로 친박 정치인으로 구성된 7인회의 일원이었다. 



2008년에 공천권을 쥔 이명박 측이 친박 대숙청을 할 때 너무 고령이다라는 이유로 공천에서 윤영에 밀려 탈락해서 야인이 되었다.


이후 2009년부터 2013년 8월 박근혜정부 비서실장이 되기까지 한국에너지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이 당시 별다른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최순실 일당과 가까이 지낸 것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


박근혜 정부 시절 비서실장 재임하면서 왕실장, 기춘대원군이라고 불렸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부속실로 쏠리던 힘을 비서실로 당겨왔다고, 이재만 총무비서관을 포함해 5명으로 구성된 청와대 인사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고 있었으며, 평소 인사 문제에 있어서 뜻을 강력히 관철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김기춘이 청와대 비서실장시절에 저질렀거나 관련된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 2013년 9월 13일 채동욱 검찰총장이 혼외자 문제가 불거지며 사퇴를 결정하자, 이의 배후에 김기춘 실장이 거론되며 사퇴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당시 야권에서는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을 덮기위해 조선일보를 통해 채동욱의 개인정보를 흘려 수사 중이던 검찰총장을 찍어내려고 했다는 주장이 있었다.
  • 2013년 11월 5일에 시작된 통합진보당 위헌정당해산 사건을 황교안 총리와 함께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2013년 12월 31일에 외아들인 김성원(당시 47세) 씨가 교통사고로 인한 뇌출혈로 식물인간이 되었다. 자식의 사고에도 주변에 알리지 않고 평소처럼 업무를 처리하였다고 찬사를 보내는 언론이 있기도 했지만 천벌을 받은 것이라는 말도 많았다. 특히나 당시에 무슨 업무를 하고 있었겠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 2014년 4월 청와대 7시간 의혹 사건과 관련해서 대통령의 행방에 관해 모른다고 답변하면서 대정부질의 중이던 박영선 의원조차 어이를 상실해 몇번이나 추궁했고, 이로 인해 세월호 7시간이 급속도로 확대된 빌미를 제공했다. 
  • 2014년 7월 7일에는 박관천의 조사로 밝혀진 최태민 일가의 비선실세 국정개입 의혹과 관련해서, "맹세코 비선라인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 같은 해명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거짓말로 밝혀졌다.
  • 2016년 12월 6일 고 김영한 청와대 민정수석의 업무수첩이 공개되었는데, 이 중 세월호 유가족인 김영오씨의 단식을 두고 김기춘의 지시기록이 논란이 되었다. 김영오씨의 단식을 두고 언론지도를 지시한 기록이었는데 민주주의 국가에서 언론통제를 시도한 것 자체도 문제가 있는 것이었고, 이 자칭 언론지도를 통해 국민적 비난이 가해지게하는 대상이 누구인가를 두고 유가족 김영오씬지 단식을 부추기는 라고 김기춘이 생각하는 집단인지는 이 문장만으로는 확인은 불가능하지만 김기춘의 해당 언론지시가 있은 뒤 2014년 7~8월무렵 조중동 등 언론매체에서 주도적으로 세월호 유가족 김영오씨에 대한 인신공격성 보도 연달아 대서특필로 써갈긴 것과 9월 초 생긴 광화문 폭식농성 사건등으로 추정컨데 전자에 더 가까워 보인다.


[출처 : 김기춘/생애]


전라북도 익산시 출신으로 본관은 김해이다.



남성고등학교,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환은행에 입사했다가, 1977년 현대그룹 계열 금융 회사인 국제종합금융으로 이직하며, 같은 고려대 출신인 당시 이명박 현대건설 사장을 알게 됐고, 이후 이명박과 친하게 지내며, 사적으로도 최측근이었고, 이명박이 현대건설 사장 퇴임 직후 정계에 입문할 때도 이명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이후, 이명박이 제17대 대통령에 당선돼 취임한 직후에도, 청와대에 그대로 입성해서 대통령실 총무비서관과 대통령실 총무기획관으로 계속 중용됐고, 이명박의 가신(家臣)을 넘어 집사라고 불리던 이명박의 최측근이다.


정권 교체 직후, 문재인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에 대한 수사가 시작돼면서 김백준을 수사하기 시작했고, 구속수사가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구속영장이 발부돼 구속 중이다.


구속수사 과정에서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사건이 이명박 정부도 연루돼 있다고 자백하면서, 이명박 또한 김백준에 이어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되었다.



BBK 주가조작 사건 의혹에서, B:이명박, B:김백준, K:김경준으로 BBK에 관련돼 있다는 언급이 오가고 있어 예전에도 논란이 된 바 있었지만, 현재는 더더욱 논란이 돼고 있다.


BBK 주가 조작 사건 뿐만 아니라, 다스 실소유주 논란 등 이명박에 대한 여러가지 의혹을 풀 키맨으로 정봉주에게 주목받고 있었다. 실제로 김백준 구속 직후 다음날 오후에 이명박은 사무실에서 겁먹은 듯한 태도를 보이며 자신에 대한 수사가 정치공작이라는 취지의 성명을 발표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백준 구속을 기점으로 이명박에 대한 수사가 급진전돼다가,그 직후 10일만에 이명박이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되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두뇌회전과 상황판단이 매우 영민한 인물이라고 한다. 외부자들에서 전여옥도 이명박의 지근거리에 있는 김백준과 다소 인연이 생겼었는데, 두뇌회전이나 상황판단력에서 이명박의 최측근 정도로 머무르기 아까울 정도로 영리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출처 : https://namu.wiki/w/%EA%B9%80%EB%B0%B1%EC%A4%80]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농공단지에 본사를 두고 있는 시트 레일, 리클라이너 등의 시트 부품과 시트를 생산하는 시트 제작회사. 현대자동차에 카시트를 납품하는 협력업체이다. 충청남도 아산시에도 공장이 있어 한국에는 2개의 공장이 있고 해외에는 15개의 공장을 가진 대규모 부품기업이다. 중국에는 9개의 공장(법인)을 가지고 있으며, 인도 공화국에 2개, 미국 알라바마에 1개, 체코, 브라질, 터키 등에도 공장을 가지고 있다. "다스는 누구 겁니까" 놀이의 실제 주체.


20여 년간 다스의 대주주였던 이명박의 처남 김재정. 초기 다스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후지기공



공식적으로는 1987년에 현대자동차의 하청업체 '주식회사 대부기공'이라는 이름으로 이명박의 처남 김재정(부인 김윤옥의 동생)과 일본의 대형 자동차 부품회사인 후지기공, 이명박의 친형 이상은이 동업하여 당시 기준으로 경상북도 월성군 외동읍 구어동에 공장을 차리면서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후지기공의 기술지원에 의존하던 회사였으나, 1990년대 중반부터 대주주 후지기공과의 기술원조 계약이 끝나가자, 관계를 정리하면서 이상은이 후지기공 법인 소유의 다스 주식을 매입하다가 1990년대 말에 다 사면서 최대주주 김재정과 2대 주주 이상은의 투톱 주주가 지배하던 회사로 변했다. 2003년 DAS로 사명을 바꾸었다. DAS는 Daebu Automotive Seat의 약자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승용차 용으로 대량의 비중을 갖고 납품하고 있으며 요새는 현대자동차에서 거래처 다변화 차원에서 다스의 비중을 줄이고 있으며, 다스 또한 현대차의 경쟁사인 르노삼성은 물론 폭스바겐, 포드 같은 외국 회사로 납품망을 다변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연합뉴스가 취재한 과거 소문으로는 현대그룹의 회장 정주영의 지시로 현대자동차 부품사업부가 별도법인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던 이명박에게 정주영이 부품 사업부 운영을 넘겨주려던 과정이 생기고 이 와중에 모종의 이유가 발생하여, 현대가에서 운영하는 계열사가 아니게 되면서 경영권이 이명박의 가족 측으로 넘어갔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해외 사업법인(공장) 중 다스의 주식이 하나도 없는 이명박의 아들 이시형이 중국 베이징 시에 있는 북경 다스, 저장 성의 항구도시인 닝보 시에 있는 닝보 다스, 장쑤 성 옌청시에 있는 강소 다스, 산둥성의 웨이하이 시 원덩 구에 있는 문등 다스까지 총 4곳의 중국 법인의 대표가 되었다. 이 4곳은 모두 다스가 지분을 100% 가지고 있는 완벽한 다스 소속 법인이다. 강소 다스와 문등 다스의 경우 다스의 회장 이상은과 그 아들 이동형이 대표직을 가지고 있었으나, 2016년 말부터 2017년 초에 모두 이시형으로 대표가 바뀌었다. 


나머지 공장은 중국자본과 합작 법인인 '북경 BAI 다스' 것이라서 중국인이 대표지만, 역시 이곳에서도 이시형은 이사로 소속되어 있다. 사실상 중국 내 다스 대부분에 다스 주식도 없는 이시형이, 다스의 대주주이자 큰 삼촌인 이상은과 그의 아들 이동형의 위치를 점점 가져오며 상당한 권한을 갖고 있는 것.


게다가 2017년 10월 14일 일요신문의 보도로 다스의 소규모 하청업체 중 하나인 에스비글로벌로지스(주)에서 다스로 1,485억이라는 어마어마한 거액이 들어간 정황이 포착되었다. 금감원 기업 공시 사이트인 DART에서 발견한 것인데, 무려 다스 미국법인에서 다스로 들어간 1,540억에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돈이다. 


그러나 에스비글로벌로지스는 자산총액 120억도 안 되는 회사라, DART에 회계감사 공시도 하지 않는 회사다. 그리고 그 회사의 최대주주는 상술된 이상은의 아들(=이명박의 조카) 이동형이다. 



그러니까 이상은의 아들이 큰 지분을 가진 작은 하청회사가 자신에게 하청을 주는 원청업체이자 거대기업인 다스에 거액을 준 것. 받은 게 아니다 근데 사실 너무 거금이라 받아도 이상하다 이것이 보도가 되자 다스를 감사한 회계법인(신한회계법인)은 급하게 3일 뒤 이 1,485억을 7천 5백만 원으로 바꿔버린다. 실수치고는 너무 큰 실수. 저게 진짜 순수한 회계사 실수면, 고소해야 될 일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거 없다. 왜일까? 실제로는 누구의 잘못일까? 이를 통해 다스 내부의 부적절한 자금흐름의 가능성이나 이상은의 아들이 다스 내 실권에서 점점 밀려나는 듯한 흐름의 낌새를 챌 수 있다.


코레일의 사장 출신인 다스의 사장 강경호. 다스는 2013년 무역의 날 시상식에서 4억 불 수출탑을 받았다.


대표는 상술된 이상은 회장 및 강경호 사장 공동 대표이사 체제이다. 이상은 회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큰형이며, 강경호 사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 서울시장 재직 시절 서울메트로 사장으로 대통령 재직 시절에는 코레일 사장을 역임했으나, 코레일 재직시절 특정범죄처벌법상알선수재 혐의로 구속되어 5개월 만에 사장직을 상실하였다. 최종적으로 2년 집행유예가 나왔다.



서류상으로 이 전 대통령은 대부기공 설립부터 지금까지 다스와 무관하다. 이 전 대통령은 다스의 등기이사로 오른 적도 없고 주식을 한 주도 가진 적이 없다.


다스는 이명박 전 대통령과 관련해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거의 모든 의혹과 연결되어 있다. BBK 투자 자금도, 도곡동 땅 실소유주 논란도 다스와 연관되어 있다. 다스의 실소유주가 밝혀지면 이 전 대통령이 받고 있는 다른 비리 의혹도 자연스레 풀리는 구조다.


17대 대선을 마지막으로 수면 아래로 사라졌지만, 제19대 대통령 선거 이후 다시 떠올라버린 이명박의 아킬레스건.


여기서 관계가 복잡해지기 시작하는데 다스에서 BBK에 투자할 당시 다스는 '유동자산 480억, 유동부채 790억, 순 자산 127억'으로 190억을 투자할 여력이 전혀 없던 회사였다. 이 과정에서 이명박의 가족인 이상은과 김재정이 1995년에 도곡동 땅 1,900여 평을 팔았던 돈 중 157억을 출자금으로 투입했는데, 문제는 이 도곡동 땅은 1993년 이명박의 차명재산이라고 대대적인 폭로가 있었던 곳이었다는 것. 


즉, 이명박이 차명재산으로 갖고 있던 157억 원이 이명박 본인이 회장이던 BBK로 흘러들어갔고 이 돈은 다시 LKe 뱅크와 옵셔널 벤처스로 흘러들어가 주가조작에 이용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얘기다. 이렇게 되면 이명박은 다스-BBK-LKe뱅크의 실소유주가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부동산 실명제법 위반은 덤.



2010년 초까지 최대주주였던 김재정(이명박의 처남이자, 김윤옥의 남동생)의 사망 후 상속세 문제로도 논란이 되고 있다. 당시 사망한 김재정의 부인 권영미에게 상속되는 과정에서, 일단 청계재단에 일부 주식을 기부한 후, 일반적으로 쉽게 일어나지 않는 상황인 상속세를 주식으로 납부(물납)하는 등의 복잡한 과정을 통해 정부(기획재정부)와 청계재단에게 상당량의 주식이 넘어갔다. 청계재단은 참고로 이명박이 출자하여 만든 재단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하는데, 기획재정부는 김재정의 상속세 416억 원 대신 받은 다스의 주식 19.7%를 공매로 팔아서 ] 현금을 받아 국고에 넣을 예정이었으나, 한국자산공사 캠코(kamco)와 기획재정부가 2011년 말에 처음 공매에 내놓을 때, 비상장주식인 다스의 58,800주를 주당 143만 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총 843억 2,572만 7,000원에 내놓아서 아무도 사려고 하지 않았다. 도대체 캠코와 기획재정부가 가격 책정을 왜 그렇게 말도 안 되게 하도록 정한 건지  알려지지 않으며 , 당시 언론이 취재한 바로 경제전문가에게 다스의 정보를 토대로 책정해 달라고 한 가격에 비해 약 2.5배 나 비싼 가격이 나왔다. 


거기다가 처음 나온 게 유찰이 되면서 가격이 점점 떨어져 갔음에도 낙찰이 안 된 이유가 있는데, 유찰이 6번 되면 ] 50%로 공매를 진행하지 않고, 다시 가격을 재평가해서 원래 가격보다 약간 비싼 가격이나 약간 싼 가격, 즉 실질적으로 원래 가격에 가깝게 돌려 버렸다는 점이다. 


2011년부터 다스 공매는 팔리지 않게 가격이 계속 원상복귀가 되어버렸다는 뜻.


상세 사항을 보면 2011년 11월 처음 143만 원대로 나온 뒤, 5회 유찰이 반복되자 84만 원대가 되었는데 6번째 유찰이 되자, 2013년 1월에 재평가해서 133만 원대로 만들고 그래도 이때는 143만 원보다 좀 줄였었다, 6번째 공매에서 78만 원대로 나온 주식이 안 팔려 또 6번 유찰되자, 2014년 1월 20일에 재평가로 되돌릴 때는 무려 152만 원대로 나와서 말도 안 되게 뛰어버리니 아무도 살 수 없었다. 


이런 게 계속 반복되고 2015년 10월 재평가 때는 무려 주당 200만 원(정확히는 200만 21원)이라는 엄청난 가격으로 나와서 주식의 왕은 삼성전자가 아니라 다스다 최소가격도 120만 원이라 역시 유찰이 반복되었다. 간단히 말해, 캠코는 공매를 143만 원에서 시작해서 80만 원대가 되면 130만 원대로 올리고, 다시 80만 원대로 떨어지면 152만 원대로 올리고, 나중에는 아예 주당 200만 원대로 올리며, 시간이 갈수록 더 팔리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렇게 안 팔리는 바람에 김재정의 상속세로 국고에 들어가야 할 돈을 7년 넘게 국고에 못 넣고 있으니 복잡한 이야기를 한마디로 하면, 정부는 부적절한 공매운영으로 이명박의 처남 김재정의 상속세를 아직도 못 받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더 이상한 포인트는 김재정이 사망하고 2년 뒤, 2012년 김재정의 부인 권영미가 다스 주식을 유상감자할 때는 주당 68만 1천 원으로 했다는 점이다. 다스측에서도 68만 원으로 정해서 하는 걸, 기획재정부와 캠코는 계속 그 이상으로만 내놓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사망 당시 김재정 명의의 부동산들이 무려 67만 평이나 있었으나, 거의 다 근저당이나 채무문제, 혹은 공동명의 가 걸려 있어서 부동산으로 상속세 물납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어떻게 모든 땅마다 채무문제를 걸어놨지? 김어준의 뉴스공장 2017년 9월 11일 방송분을 보면 주진우와 안원구(전 대구국세청장)가 이 상속건에 대해 조사하고 분석한 내용을 들을 수 있다. 팟빵 영상은 이쪽에서



BBK사건과 관련사건을 수년간 조사했던 주진우와 김어준은 꾸준히 도대체 다스의 실소유주는 누구인가? 라는 의문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명박의 외동아들인 이시형이 다스 입사 7년 만에 전무이사로 승진했고, 여기에 다스의 해외 법인 여러 곳의 대표로 선임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실질적인 소유주가 맞는다는 의혹이 더욱 커지고 있다.  


JTBC에선 다스는 MB 거라고 증언하는 다스의 전직 경리팀장과의 인터뷰를 단독 보도했다. 여기에 다스 비자금 120억여 원을 정호영 특검이 파악하고도 다스에 다시 입금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폭로까지 나와서 큰 파문이 일고 있다.  국내 다스의 고의부도를 시도하고 있다는 첩보가 언론에 포착되었다. 


관련 혐의와 관련자들을 조사하던중 검찰은 또 다른 폭탄을 찾아낸다. 삼성 다스 소송비 대납사건...



그리고 2018년 2월 21일, 검찰은 다스 실소유주는 이명박이라는 결론을 사실상 내렸다.

김종필에 이어 대통령 빼고 다해본 사람. 대한민국 법조계의 전설이자 대한민국 현대 정치에 족적을 남긴 인물.


대한민국의 법조인, 정치인이다. 법조계에서 큰 이름을 날렸으며, 현재의 선관위와 감사원을 확립했다. 호는 경사(徑史). 대법관, 감사원장, 국무총리, 한나라당 총재, 자유선진당 총재 등을 역임했다. 그래서 흔히 하는 말이 "대통령 빼고 다 해본 사람"이라고 한다. 외삼촌 김홍용, 김문용, 김성용도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2018/06/23 - [실시간 핫이슈/정치] - 김종필은 누구인가? 영원한 2인자, 원조 '대통령 빼고 다 해 본 사람...(문재인 대통령에게 악담 영상)


이회창은 개혁보수에 가까웠고 실제로 군부 세력의 적폐를 청산하는 데 앞장섰다.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이 민주적이었던 시절의 최후의 보루. 민정계의 지지를 얻기도 했지만 이회창 본인은 독재정권에 비판적인 만큼 YS를 잇는 민주계에 더 가까웠고, 이회창이 은퇴한 후 한나라당은 TK에게 넘어가며 권위주의 및 수구화를 겪게 되었다. 민주당 지지 유권자 입장에선 이회창이 무너지고 이명박근혜 및 홍준표가 나타났다고 보는 셈이다. 


실제로도 YS-이회창의 개혁보수적 성향 탓에 현재 자유한국당이 갖는 경북 텃밭이 그 당시에는 없었는데도 김대중/노무현과도 정말 아슬아슬하게 싸우다 아깝게 졌을 정도로 국민들에게 인기 또한 모자라지 않았다. 이명박의 국민행동본부, 박근혜의 어버이연합이 나타난 해가 2006년 경으로, 이회창과 민주계가 힘을 잃기 시작한 때이다. 뒤집어 말하면, 김영삼이나 이회창이 보수정당을 장악할 때에는 저런 우파 단체들도 날뛰지 않았다. 애초에 군부 세력을 구속시키고 청산하던 사람이니 그럴 일이 없었겠지만.


문민정부 당시 감사원장을 맡아 초창기 문민정부의 개혁운동에 큰 몫을 담당했던 인물이었고, 바로 이 성과 덕분에 이회창은 대권을 노릴 수 있는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치인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 중 하나였던 포용력이 너무 부족했다. 이런 그의 실책은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여실히 드러났는데, 경선에서 진 이인제를 직접 설득하지 않아 독자 출마를 말리는 데 실패함과 더불어, 3김정치 청산을 주장함으로써 김종필이 이끌었던 자민련을 자극해 DJP연합을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결국 이 2가지는 근소한 차이로 김대중 후보에 밀리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2002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진보진영이 노무현 후보를 중심으로 단결한 반면에 보수 진영은 상당히 사분오열 되어 있었다. YS나 박근혜는 이회창을 지지했지만 과거 이회창의 3김정치 청산 주장을 기억하고 있던 이한동, 김종필과 같은 충청 보수 세력은 끝내 이회창을 지지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그리고 이회창에게 팽당한 이기택과 같은 구 민주당 세력은 아예 노무현을 지지했다.


여기다가 이회창을 대권후보로 만들어 줬던 대쪽 이미지 역시 아들의 병역 문제와 관련한 노무현 진영의 흑색선전으로 인해 국민의 역린을 건드려 무너지게 되며 끝내 대권에 실패하고 만다. 이회창의 두 아들의 불법적인 병역기피 의혹은 결국 법적으로 무혐의 처분으로 종결되었다. 그리고 진실이 밝혀졌을 땐 이미 모든 게 끝났다.


이회창이 당권을 장악하던 때까지의 한나라당은 수구 이미지가 약한, 정상적인 보수주의/자유주의 노선의 정당이었다.(지역 기반도 TK/군부가 아닌 PK 중심의 민주화 세력이었다) 김영삼을 이은 보수정당 내 민주계 라인이었던데다 이회창 본인이 독재정권과 싸웠던 사람이라 빨갱이 몰이나 독재정권 찬양 등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고, 이 때문에 박근혜가 입당하고 나서 자주 마찰을 일으켰다. 



이후 대선에 출마하였던 보수진영의 인사들과 비교하자면, 명확하고 구체적인 국가관 및 정책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명박, 박근혜, 홍준표로 갈수록 점점 질이 떨어진다는 말도 나올 정도.(유승민은 일단 논외.) 정치에 민감한 민주당 지지자이나 중도보수 지지자들 사이에서 이명박근혜가 아니라 이회창정도의 인물이 대통령이 됐으면 보수정당이 일본 자민당처럼 계속 장기집권했을 가능성 또는 최소한 보수가 제대로 망가지는 사태는 피할 수도 있었다는 말도 나온다. 


후에 '우리 당이 수구적으로 변해간다' 라며 한나라당에서 민주당으로 이탈하는 정치인이 생기거나 한나라당이 권위주의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도 거의 대부분 이회창이 연패를 당하고 한나라당에서 물러난 후부터이다. 이명박이나 홍준표도 민주계와 관련이 있거나 그와 협력은 했던 관계이지만 하도 권위주의/종북몰이 등의 논란 때문에 김영삼-이회창과 전혀 다른 평가를 받는 이유도 그렇다. 


이회창이 무너지고 나서 한나라당 내 민주계 세력이 약해지고 친이와 함께 다소 권위주의 노선을 걷고, 후에는 친박이 장악하며 수구 색채가 완전히 커져버린 것 때문에 후대에 이런 평가가 나오는 것이다. 김영삼-이회창의 한나라당 시기에는 워낙에 친박 지지층과 척을 져서 경북에서 반감을 샀던 때가 있었다.



2018/06/23 - [실시간 핫이슈/정치] - 김종필은 누구인가? 영원한 2인자, 원조 '대통령 빼고 다 해 본 사람...(문재인 대통령에게 악담 영상)


물론, 이에 대해선 보수정권의 치명적이고 영원할 약점인 "차떼기나 총풍사건 같은 부패 스캔들은 도대체 뭐냐?"는 지적도 있다. 대권후보로서 한 삽질은 비록 대통령이 되지 못했음에도 역대급으로 컸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회창 본인이 있던 시기의 한나라당은 정상적인 보수주의/자유주의 정당이었다고 하지만, 그 한나라당이 수구화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회창에게 있었다. 이회창 본인이 1997년 신한국당 대선 경선에서 승리한 데에는 민정계의 단합과 지지가 있기 때문이었고, 1998년부터는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동진정책에 맞서 기존 지지층의 재결합을 위해 본격적으로 민정계와 구 유신계에 손을 내밀었다. 김영삼이 독재정권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정치인들을 무작정 내쫓고 탄압하며 반감을 샀었다. 


사실 당장 박근혜를 영입하고 공천을 준 사람이 이회창이다. 물론, 박근혜는 그때 당시 좋은 이미지였기에 김대중도 박근혜를 영입하려 애썼고, 박근혜가 군부 출신을 정계에 다시 데려오는 것을 보고 독재정권에 반감이 있던 이회창이 갈등을 만들긴 했지만. 


당시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동진정책이 매우 거셌고 특히 김대중의 국민회의는 정체성과 무관하게 세력확장을 위해 민정계 출신 인사들을 대거 영입하는 초강수를 두고 있었기에 이를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회창 본인이 있을 적에는 이회창의 강력한 당 장악력과 카리스마 및 독재정권에 비판적이던 민주계의 정신적 구심점으로서 한나라당은 정상적인 보수정당일 수 있었다. 그러나 2002년 대선 패배로 강력한 구심력이었던 이회창이 은퇴하면서 한나라당은 대혼란에 빠지고 결국 당 주도권은 박근혜와 민정계에게 넘어가고 만다. 남은 민주계도 차악으로 이명박을 지원했지만 이명박의 권위주의를 겪으며 하나하나 이탈하게 되고 박근혜에게 숙청당하게 된다.



의외로 현재 한국에선 생각하기 힘들지만, 보수정당 인물임에도 대선 당시에는 수많은 연예인이나 유명인들의 지지선언을 받았다. 심현섭, 강성범, 박성호, 김대희, 이승철, 설운도, 이용식, 홍서범, 조갑경, 변진섭, 박철, 김인문, 심권호, 유남규, 베이비복스(!) 등. 보통 유명인이나 연예인들은 민주당 후보들을 많이 지지하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이회창이 라이벌이었던 노무현처럼 독재정권에 맞서고 양심을 지키던 법조인이라는 전적이 있기도 했지만, 현재 한국이 미국처럼 보수 지지 연예인이 이순재, 송해 정도 급의 거물급이거나 김흥국처럼 재밌는 이미지로 보수 색채를 상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힘들다는 걸 고려하다면 그만큼 이회창이 진보적인 유권자들 사이에서도 우호적인 인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명박 및 박근혜가 국정원 같은 공공기관을 악용했지만 김영삼과 이회창은 안기부/국정원을 민주화시켰고 압수수색이 가능할 정도로 만들어 놓았었다. 2010년대 후반 들어 보수정당의 여러 문제점 속에서 YS-이회창이 계속 재평가되는 이유도 그들이 독재정권/반민주주의에 맞섰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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