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관


대한민국의 제19대~20대 국회의원으로, 소속 정당은 더불어민주당이며 지역구는 안산시 상록구 갑 지역이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인 참여정부 시절에는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적이 있다. 2016년 8월 22일에는 민주당의 경기도당 위원장으로 선출돼 민주당의 인천시당 위원장으로 선출된 박남춘 의원과 함께 추미애 지도부의 경기도 & 인천광역시 권역 대표 최고위원을 맡았다. 현재 이해찬, 이종걸과 같이 차기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후보로 유력한 인물 중 한 명이다.


대표적인 친문 핵심 정치인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 생애 정치입문 전 

1962년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범학교 출신으로 6.25. 때 평양에서 월남하여 목포에 정착하였다. 목포에서 대성초등학교와 영흥중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때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 마산에서 직장생활하던 형에게 맡겨졌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경상남도 마산[3]에서 자랐다. 한 학년에 600여명이었던 고등학교에 호남 출신 학생은 그를 포함해 단 2명이었다. 원래 혼자인줄만 알았는데 2학년에 올라가보니 한명이 더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고 놀림을 받았던 그는 그때부터 지역감정이 정말 근거가 없으며 폐해가 심하다고 생각했다.


1981년 마산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1985년에 고대법대를 졸업하였고 1987년 제29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육군 법무관으로 임관해 병역을 마친 뒤 1993년부터 변호사로 개업했다. 이때부터 안산에서 법무법인 해마루 소속의 변호사로 생활하며 안산에서 터를 닦았다. 법무법인 해마루는 노무현과 천정배가 1993년에 함께 설립했던 법무법인. 


1996년부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대외협력위원장, 노동위원회 대외협력부장, 언론위원회 위원장 등을 하며 민변의 대표 변호사로 떠올랐다. 민변에서 맡은 사건의 70~80%는 노동법이나 국가보안법 관련 사건이었다. 


변협인권위원으로 재직 중이던 2000년 봄,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의 형사고소를 대리하여, 살인죄 공소시효 완성 직전 주범에 대한 검찰의 구속기소를 이끌어냈다. 이때 유가족에 대한 법원의 42억 원 배상판결이 나오자, 형식적으로 소멸시효가 완성된 사건일지라도 기관에 귀책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배상청구가 가능하다는 새로운 소멸시효이론이 정립되었다. 이로써 법조계에 '전해철'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 정치 입문

2002년 노무현이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뒤, 지방선거에서 패배하며 위기를 맞이하자, 전해철은 법조계 내에서 노무현 지지선언을 주도하였다. 이때 법률지원단을 만들고 이후 대선 캠프 법률지원단의 간사를 하면서 대선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2003년 노무현이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국회에서 탄핵을 당했을 때에는 문재인과 함께 노무현 변호 준비를 실질적으로 다 하다시피 했다. 그래서 결국 2004년 3월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기각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2004년부터 청와대에 들어가 일하기 시작하였다. 2006년에는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되어 1년 7개월 가량 민정수석을 지냈다. 당시 44세의 나이로, 전현직 통틀어 최연소 민정수석이다. 이렇게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있으면서 인사청문회 등의 준비를 아주 철저하게 해, 참여정부 역대 민정수석들 가운데 전해철 시절에 청문회 통과가 가장 잘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7년에 로스쿨 제도가 도입된 과정에서도 실무작업은 전해철이 총괄했다고 한다. 그때 유능한 전해철이 빈틈없이 추진하지 않았다면, 로스쿨 도입은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후문이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안산 상록구 갑 선거구에 출마했다. 그런데 김영환이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표를 갈라먹는 바람에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 후 법무법인 해마루의 대표 변호사가 되었고, 민주통합당 안산 상록구갑 지역위원장직도 계속 수행하였다. 


2009년 이명박 정부 하에서 검찰이 박연차 게이트 수사를 할 때에는 노무현의 많은 측근들이 무서워서 도망간 와중에도 문재인과 둘이서 실질적으로 변호 준비를 다 했다.




  • 제19대 국회의원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60.76%의 득표율을 기록, 새누리당 박선희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 후 문재인 대선 캠프에 들어가 열심히 일했다. 당내에 잡음이 끊이지 않고 내부 분란이 끊이지 않아 캠프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와중에서도 그 많은 정책 다 정리하고 정책발표서 발간까지 완료했다. 당시 문재인의 공약 가운데 상당부분이 전해철의 손길을 거쳤다고 한다. 그러나 그로 인해 당내에서 친노 비선 실세 논란에 휘말려, 논란이 커지자 양정철, 이호철 등과 함께 대선 캠프에서 일괄 사퇴하였다. 겨우 대선을 두 달 남짓 남긴 시점이었다. 


이렇듯 '비선 실세'로 욕을 먹었지만 권력을 휘두르긴커녕 국회에서 고생을 많이 한 편이었다. '면이 서는' 당직보다는 일하는 위원직을 주로 많이 맡았다. 2012년 민주통합당 BBK 진상조사위원회 위원, 정봉주 구명위원회 위원, 국회 민간인 불법사찰 국정조사특위 위원 등을 지냈다.


이후 국회 국가정보원 댓글의혹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위 위원, 민주당 대통령 기록물 열람위원, 국정원법 개혁추진위원회 위원(이상 2013년), 새정치연합 야당탄압저지대책위원회 위원, 국회 서민주거복지특위 위원, 박상옥 대법관 인사청문특위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2014년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가 일어났을 때에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위원(2014~2015년)으로 활약하며 세월호 관련 입법을 모두 주도하였고, 결국 2014년 10월 세월호 관련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특별법, 2015년 1월 세월호 배보상 특별법 등을 통과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외에 법사위에서는 야당 간사로서 여당의 공격에 맞서는 수문장 역할을 하였다. 야당 간사에게는 관행상 마지막에 발언 기회가 주어지는데, 이때마다 동료 야당 의원들이 제기한 문제점을 정리하면서 핵심을 한 번 더 찌르는 마지막 공격수의 역할을 해냈다.


그가 법사위 야당 간사 시절 효과적으로 막아낸 법안이 바로 사시존치 법안이다. 2015년 19대 정기 국회 당시 총 6개의 사시존치 법안이 발의되어 있었으나(이 중 5개는 새누리당의 함진규, 노철래, 김용남, 김학용, 오신환 의원이, 나머지 1개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조경태 의원이 발의한 것으로서, 이후 조경태 의원 역시 자유한국당으로 옮겼다.) 


이들 법안이 법사위 회의 안건으로조차 상정되지 못하도록 막아내는 데 전해철 의원은 중심적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측이 가능한 것은 상임위 간사들에게 법안 심의 순서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기 때문인데, 당시 여당 간사였던 이한성 의원은 사법시험 존치 법안을 지지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바 있으므로, 양당 간사 중 사시존치 법안 심의 순서를 뒤쪽으로 두기를 주장한 측은 전해철 의원으로 보는 게 보다 타당할 듯하다.  


사법시험 폐지문제와는 별도로, 선거 때의 공약이었던 반월 시화공단 스마트허브 조성을 꾸준히 추진해가고 있다. 그 외에도 수인선 완전지하화 계획에 성공하였고, 늘푸른아파트 소송 등 여러 소송 문제도 잘 해결하여, 사법시험 준비생들이 상당히 비토하는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지역구 내에서의 평판은 좋은 편이다. 


머니투데이가 평가한 제19대 국회의원 의정활동에서 새정치민주연합 내 9위를 마크했다. 



  •  제20대 국회의원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도 상록 갑에 출마해 1여 다야의 환경 속에서도 35,481표, 38.8%를 득표하며 새누리당 이화수 후보를 9,000표 차이로 따돌리며 비교적 무난히 재선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공정거래위원회, 금융감독원, 금융위원회, 국무조정실, 국무총리 비서실, 국가보훈처, 국민권익위원회 등을 소관 기관으로 하고 금융정책수립 및 집행, 공정거래질서 유지, 국정 조정 및 규제 개혁, 국가유공자관련 보훈사업, 국민권익지키기, 경제 인문 사회분야에 관한 연구 등 다양한 분야의 정책을 입안하고 심의하는 국회 상임위원회인 정무위원회의 더불어민주당 간사로 선임되었다.


2016년 8월에 더불어민주당 경기도당 위원장 선거에 출마하여 압도적인 격차로 당선되었다. 권리당원 ARS 투표와 대의원 현장 투표를 합산한 결과, 63.3%의 득표율을 기록하여 경쟁자였던 이언주 의원을 상대로 압승했다. 이언주 의원이 20대 총선 공천 과정에서 더불어민주당 코어 지지층에서 인심을 잃고 전해철 의원이 노무현재단 운영위원을 맡은 경력으로 반사 이익을 톡톡히 본 결과물이라는 평가다.



더불어민주당이 최고위원 제도를 당의 각 시도당 위원장들이 호선하는 권역별 대표위원제로 바꾸면서 전해철 의원은 경기도 & 인천 권역 대표위원으로서 당 최고위원이 됐다. 전해철 의원이 1년, 더민주 인천시당위원장인 박남춘 의원이 나머지 1년을 맡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민주당 최대 주주라고 할 수 있는 문재인 대통령 지지층에서는 김경수, 조국, 임종석, 조응천과 함께 전해철 의원에 대한 평가가 좋은 편이다. 오히려 보수 야당에서 삼철이라고 공격 했던 것이 이득이 된 셈. 보수 야당에서 대통령 측근이라고 공언한 셈이니. 


민주당이 6.13 지방선거 - 6.13 재보선에서 압승을 거두자, 정치권의 관심은 추미애 지도부의 뒤를 이을 민주당 제3기 지도부가 어떻게 구성될 것이냐로 모아졌다. 특히 제3기 지도부는 2020년 4월에 치러질 21대 총선 공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도부가 될 것이므로, 이번 경기도지사 후보 경선을 통해 개인적인 인지도와 더불어 자타공인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이란 사실을 나름 크게 알린 전 의원이 출마할 것이냐에 대해 관심이 쏠렸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당내 친문계 핵심 인사로 분류돼 왔던 최재성 의원과, 친노계의 좌장이라고 불리어왔던 이해찬 의원도 출마 여부를 저울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당내 친문 표가 분산되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그래서 최재성 의원과는 동반 출마하지 않기로 일단 의견을 모았다는 소식이 알려졌고, 그럼 둘 중 최재성이 양보할 것이냐, 전해철이 양보할 것이냐는 쪽으로 관심이 기울여졌는데, 7월 15일 전해철 의원이 전당대회에 불출마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 정치 성향 

문재인 대통령의 사람들 중에서도 최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문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불리는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함께 이른바 '3철'로 불렸다. 이 세 사람 모두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재직 중이었던 문 대통령의 휘하에 있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 정치권 일선에서 활동하는 3철은 전해철 의원 한 명 뿐이다. 양정철 전 비서관은 19대 대선이 끝난 뒤 해외로 아예 떠났고, 이호철 전 민정수석은 정치권을 떠나 여행사를 운영하는 걸로 알려져 있던 중, 2018년 6.13 지방선거에 가까워 와서는 부산시장 선거 출마설이 나왔지만,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이 세 사람은 나중에 전해철 의원이 경기도지사 선거에 나서기로 한 뒤에 열었던 북 콘서트에서 오랜만에 다시 모이게 된다.


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명박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으러 왔을 때의 사진을 보면 당시 노 전 대통령의 변호를 맡고 있었던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하여 김경수 의원 등과 함께 노 전 대통령을 수행하고 있는 전해철 의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각별한 인연에도 불구하고 18대 대선 때 3철 논란이 잠깐 불거진 적 빼고는 상대적으로 언론의 주목을 덜 받았다. 특히 친노계를 시종일관 저격해 왔던 박근혜 정부 시절의 보수 언론들조차도 전 의원에 대해서는 거의 보도한 적이 없었다. 조중동 등 주류 보수 언론이 연일 '친노 패권주의'를 외치며 부지런히 친노 & 친문 인사들을 저격하던 2015년 즈음을 돌이켜보면 문재인 당시 대표의 최측근 인사였는데도 언론의 주목을 상대적으로 덜 받았다는 특이점이 있다. 


본인 스스로도 혹여나 보수 언론에게 빌미를 줄 일이 생길까봐 침묵을 지켰던 듯하다. 그래서인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고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한 뒤부터야 전해철 의원이 문재인 대통령의 오래된 최측근이었다는 점을 알게 된 사람들이 많다.


위에 상당히 길게 서술되어 있듯이 본인이 사법시험에 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법시험에 대단히 비판적이다. 그래서인지 적극적인 로스쿨 도입론자였다고 하며, 실제 청와대 민정수석 시절 로스쿨 도입에 가장 앞장섰다고 한다. 지난 제19대 국회 시절에는 법사위에서 야당 간사로서 사법시험 존치 법안이 심의되지 않도록 최대한 시간 끌기를 하였다. 그 때문에 전직 서울변협회장이던 나승철이 그의 지역구 사무실 앞에서 항의시위를 하기도 하였다.

타임지와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150대 영향력 있는 정치인물 중 93위에 들기도 했다.(2013) 이해찬, 전해철과 같이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후보로 유력한 인물 중 한 명이다.  


  • 성장과정 

1957년 서울특별시에서 우당 이회영의 손자이자 이회영과 한산 이씨 이은숙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아버지 이규동과 어머니 변봉섭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전 국회의원이자 국가정보원장 이종찬의 사촌 동생이다. 그리고 성재 이시영의 조카손자이다.


국민학교 시절 경기도 시흥군 안양읍(현 안양시)으로 이사하여 성장 했다. 예원학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노동자 야학운동을 하다가 대한민국 육군 병으로 복무하였다. 이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다시 학사편입으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공법학과 3학년에 편입하였다. 1988년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당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 가입하였다.


  • 정치 활동 요약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자유민주연합 김일주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노무현을 지지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2013년까지 대한농구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열린우리당 원내부대표를 역임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10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8년 국정감사에서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에게 "MB의 졸개"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유인촌 장관이 "찍지 마 X발"이라는 표현을 하게 만들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5년부터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를 역임하고 있다.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를 주도했으며 3월 2일 마지막 주자로 나와 대한민국 국회의원 단독 연설론 가장 오래 발언한(12시간 32분) 인물이 되었다. 그동안 문재인 대표체제에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파업을 벌인 행위는 잘못된 것이지만 필리버스터를 통해서 다시 보게 되었다는 의견이 많고, 새삼스레 선친들의 독립운동 행적이 재조명 되기도 했다.


다만, 지역구인 만안구의 여론 자체로는 새누리당 후보와 기껏해야 박빙 우위인 데다, 당 내에서는 강득구 후보 에게 밀리는 지라 20대 국회에서 그를 보게 될지는 미지수였다. 평촌신도시를 업은 동안구가 만안구를 앞지른 상황 에서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딱히 발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현실에 유권자들이 피로감을 느낀 탓이다. 안양 지역구 3구를 전부 양당의 원로 의원이 차지 하고 있는데, 이러한 점 때문에 안양 내 타 지역구 의원들에 비하면 컷오프 유력 후보 쇄신 대상으로 더 부각되는 처지.


이종걸 프로필]


그런데, 경쟁력 높은 같은 당의 강득구 후보를 제치고 경선도 아니고 단수공천 됐다. 공천위원장의 말로는 딱히, 이종걸 후보가 경쟁력이 있어서 단수 공천한 것이 아니라 원내대표로서 고생했기 때문에 단수공천을 했다고 밝혔는데, 이는 민주주의 원칙에도 어긋나며, 공정하지 않은 선정 방식. 즉, 계파 배분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정청래의원이 같은 당내 인물에게 날린 막말을 이유로 공천배제를 당한 반면, 밑에 나와 있듯이 현 대통령에게 막말을 날린 적이 있는 인물이 막말 논란 없이 단수공천을 받았다는 것 때문에 공천의 불공정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거론되고 있으며 필리버스터로 얻은 인기를 다시 날려먹고 있다. 


단수 공천 확정 이후로는, TV조선을 비롯한 종편에 출연하면서, 이해찬 전 총리에게 "자진해서 출마를 포기하라"고 압박하는 등, 역시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걸 보여주며, 친노 진영 네티즌들에게 필리버스터로 쇄신된 이미지를 다 날려먹었다. 


본선에서는 만안구에서 시, 도의원을 지낸 새누리당 장경순 후보 와 맞붙었다. 투표전 여론조사에서는 별로 상황이 좋지 못했으나 문재인 전 대표의 응원영상 효과 덕인지 개표결과, 45.4%를 득표해 8762표차로 이기고 5선에 성공했다. 


그리고 2016년 4월 15일 비상대책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와 함께 비주류로 분류되는 김종인, 박영선 의원 등의 만류에도 7월 29일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로 출마하였고, 8월 5일 당 대표 예비경선을 통과했다. 그러나 8월 27일 본 전당대회에서 추미애에 밀려 패하였다.


그후 19대 대선 경선에서는 이재명 후보 지지선언을 했다. 그렇지만 문재인이 후보로 선출되자 문캠에 합류했다. 합류 후에는 정력적으로 대선에서 활동했으며, 특히 대선토론 당시 유승민에게서 "북한이 우리의 주적이냐?" 라는 까다로운 색깔론공세에 대해서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반박해 대선정국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특히, 보수언론 및 보수정파에서 시동 걸려고 했던 색깔론 공세에 완벽한 반박의 논리가 된 데다가, 글 쓴 사람도 문재인과 사이가 아주 나쁜 걸로 여겨지던 이종걸이라는 점이 큰 화제가 되어 뉴스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등, 문재인 후보에 대한 색깔론 확산을 틀어막은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종걸 페북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에는 존재감이 많이 떨어진 편. 소속위인 국방위원회 와 지역구에서의 활동은 여전히 활발하지만 중앙당에서의 활동은 상대적으로 조용하다. 추미애 대표의 '머리 자르기' 발언에 대해 국민의당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비판한 사례 외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2018년 6월 21일 새 당대표를 뽑는 8.25 전당대회 출마를 당내에서 가장 먼저 공식화했다.


  • "문재인 대표는 부산 마이너리티" 발언 논란 

2016년 1월 8일에는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기자들과 식사를 하며 당시 당 대표였던 문재인 의원에게 "문재인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의 힘을 이어받은 부산개혁파"라며 "부산 마이너리티라 그런지 화법이 안 맞는다. 어제 문 대표와 만났는데 생각이 자꾸 멀어지는 것 같다" 는 발언을 했다. 이어 "여의도 야당이 부산개혁파 손에 바뀔 수 있느냐는 말도 나온다"는 발언까지 하며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려는 일부 의원들과 궤를 같이 하려는 취지를 내 비쳤는데...


2015년 12월 중순부터 최고위원회에 불참하는 등 원내대표로써 당무를 거부하고 있는 중이었기에 더불어민주당의 핵심 지지층들로부터 원내대표가 당무거부로도 모자라 당 대표를 잡아 흔들고 분열까지 조장하고 있다며 맹비난을 받았다. 


이 후 19대 총선이 끝난 5월 5 MBC 라디오 [신동호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는 "두 사람의 스타일의 차이로 서로 부딫히는 경우가 많았었다. 문재인 전 대표를 곁에서 모시면서 인간적으로 그렇게 한 것에 대해서 정말 후회도 된다"고 말했었으며, 8월초 8.27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 대표 출마를 선언하며 오마이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분당 사태의 절반 이상은 문재인 당시 대표의 책임이다"고 말하면서 "부산 마이너리티 발언은 '그들이 어떤 현상을 주도하고, 그야말로 안정된 주체세력으로 추진해나가는 데는 부족한 측면이 있다'고 얘기한 것이었는데, 이번 총선을 보니 아니었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1월에 있었던 인터뷰에서의 발언을 계기로 '부산 마이너리티'란 용어는 친노, 친문 지지층들이 이종걸 의원을 비난할 때 수시로 언급되는 중.


이종걸 문재인

민주화 이후 최초로 민주당계 정당 깃발을 들고 대구에서 당선된, 지역주의 타파의 상징이 된 정치인 


문재인 정부의 첫 행정안전부 장관이자, 16~18대, 20대 국회의원이다. 소속 정당은 더불어민주당이며, 지역구는 대구광역시 수성구 갑 지역이다. 그리고 한 줄 요약에서 보듯이 민주당이 창당된 이래 처음으로 대구광역시에서 당선된 국회의원이기도 하다.


이해찬, 전해철, 이종걸과 같이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후보군으로 꼽히는 유력한 인물 중 한 명이다. 실제로 당대표 후보군 중 지지율이 1위로 올라갔다.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아버지 김영룡과 어머니 차숙희 사이의 1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 경북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였고,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젊은 시절에는 강경파 운동권이었고,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등 여러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대학 제적과 수감을 반복했다. 신림동에서 서점을 열기도 하고 6월 항쟁 당시 명동성당 농성장에도 있었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젊은 시절을 겪은 사람답게, 정치권에 입문한 뒤에도 과거 3당 합당 등, 정계의 휘몰아치는 소용돌이 속에서 당적이 몇 차례 바뀔 수밖에 없었다. 


열린우리당 창당 전까지는 보수 정당이었던 한나라당에 몸담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이 창당되자 민주당계 정당으로 둥지를 옮겼고, 그 후에도 쭉 이쪽에서 활동해 왔으며 2018년 기준으로 여전히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다. 


TK 출신임에도 더불어민주당 소속인 점, 선거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어 내어 노무현 전 대통령, 이정현 , 조경태 , 정운천, 홍의락 의원과 함께 지역주의 타파의 아이콘으로 회자되곤 한다.


한겨레민주당에 입당하여 정치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후 민주당에서 당직자를 역임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통합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의왕·과천에 출마했지만 신한국당 안상수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그리고 이듬해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3김 타파를 명분으로 신한국당과의 합당으로 말미암아 한나라당 소속이 되었으나, 대학교 선배이자, 멘토였던 제정구 의원이 사망하자 그의 지역구를 물려 받아 경기도 군포시로 지역구를 옮겼고,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처음으로 국회 입성에 성공하였다.


분명히 한나라당 의원이지만, 출신이 출신이다보니 여러 현안에 대해 당시 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보다 더 진보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통합민주당 시절의 동지였던 노무현이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후인 2003년 8월, 전격적으로 한나라당을 탈당해 이부영, 이우재, 김영춘, 안영근 등과 열린우리당 창당에 합류했다.


이후에도 군포시에서 연속으로 당선되어 3선 기록을 달성하였다. 따지고 보면 나름 군포시를 중심으로 하던 중진 의원이던 셈.



그러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는 지역주의 타파라는 기치를 내걸고 새누리당의 본거지인 대구로 내려가 수성구 갑으로 지역구를 옮기는 패기파격적인 행보를 벌였다. 비록 선거에서는 이한구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지만, 40.4%라는 고무적인 득표율을 받았다. 


가능성을 확인한 김부겸은 일찌감치 2016년 20대 총선에서 수성구 갑에 재도전할 것임을 밝히고 지역구 표밭 일구기에 돌입했다. 


대구광역시는 우리나라에서 새누리당 지지세가 제일 강력한 지역 이라 승리를 낙관할 수는 없었지만, 김부겸은 선거 시즌 내내 가상 대결에서 위협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2014년 7.30 재보선에서 전남 순천·곡성에서 출마해 당선된 이정현 의원에 이어 이변을 연출할 기대주로 관심을 받았다. 


그리고 19대 총선 때 민주통합당의 비례대표로 선출된 후 그 당시 더불어민주당의 현역 의원들 중에서 유일하게 대구광역시 출마를 준비하던 홍의락 의원이 컷오프를 당한 후 탈당하자, 홍 의원의 컷오프 철회와 당 복귀를 요구하며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중대한 결심까지 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하는 등 대구광역시에 도전장을 내민 민주당 정치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여론조사에서는 전부 김문수 후보에게 10%p 내외의 차이로 앞서는 것으로 나왔으며 특히 투표 8일 전인 4월 5일자 문화일보 - 포커스컴퍼니의 조사에서는 62.3%대를 얻어 김문수 후보를 무려 30%p 차이로 제쳤다.


대구광역시의 정치적 성향을 감안하면 실제 결과가 어떻게 될 지 모르지만 이 정도라면 김부겸의 당선 가능성이 조금 더 높아진 셈이라고 볼 수 있었다. 투표 당일 출구조사에서도 이 기세를 계속해서 이어가 62%라는 유력한 결과로 별다른 이변 없이 당선이 될 것으로 확실시되었다.



20대 총선 당일날 새누리당 후보군에 좌절한 대구광역시의 투표율이 54.8%로 전국 최저인 가운데 찍을 놈이 생긴 수성 갑 선거구는 전국 평균(58%)을 넘어선 68.2%의 투표율을 기록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새누리당의 김문수 후보의 51,374표(37.7%)를 크게 웃도는 84,911표(62.3%) 를 얻으면서 8년 만에 국회로 돌아오게 됐다.


지역주의 타파의 아이콘이자 대구광역시에서 당선된 유일한 더불어민주당 의원으로서.


김부겸이 당선된 요인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지역 기반을 조용히 다졌기 때문이다. 2번의 낙선 뿐만 아니라, 원외 활동에서 권영진 대구시장과도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자신은 순천의 서갑원처럼 대구광역시 발전에 발목을 잡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공약에도 민주당을 발목만 잡는 야당에서 협력하는 야당으로 바꾸겠다고 천명하기도 했기 때문에 민주당의 반감이 희석된 것도 영향이 컸다.


대구광역시에서 야당 후보가 당선된 것은 1988년 4월 26일 치뤄진 13대 총선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여담으로 이 20대 총선에서는 2003년 그와 함께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의 창당 멤버로 활약했던 김영춘이 부산에서 당선되는 쾌거를 얻기도 했다. 김영춘 또한 비슷하게 19대 총선을 1년 앞두고 자신의 출생지로 낙향해서 지역 기반을 조용히 다져 왔다. 


독수리 5형제 중 자신과 김영춘만 당선되서 아쉽다고 했다고.



이후 영남권 신공항 문제가 크게 불거졌을 때는 민주당의 유일한 대구 지역구 의원으로서 밀양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공교롭게도 김부겸을 제외한 민주당의 영남권 지역구 의원들은 모두 부산 및 낙동강 벨트 지역이어서 자연스럽게 가덕도를 지지하였고 이 때문에 민주당 내에 김부겸 vs 낙동강 벨트 지역구 의원이란 대립 구도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신공항 문제는 당 전체가 쪼개질 위기에 처할 정도로 심각한 내분이 발생한 새누리당에게 여론의 포커스가 맞춰졌고, 또 민주당의 지지층이 대부분 부산 가덕도 쪽이 낫지 않겠냐는 방향으로 심리가 쏠려 김부겸은 상대적으로 이 문제에서 관심을 많이 못 받았다. 


김부겸 본인도 활발하게 밀양 지지 활동을 벌이긴 했지만 가덕도 지지 인사 및 민주당 전체에 대해 심한 비난을 가하지는 않아 자극적인 뉴스를 만들지도 않았고. 그래서일까, 경우에 따라서는 "그때 김부겸은 밀양을 지지했을 거 같은데 왜 뉴스가 없지?"라며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다고(...)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에는 여당의 대구 국회의원이 되었고, 나중에는 행안부 장관으로 발탁되면서 지역구에 있는 그의 사무소에는 대구광역시 각지의 민원이 쇄도하고 있다고 한다. 사무소 직원 말로는 "여기는 수성구 민원만 받으니까 다른 지역구 민원은 그 지역구 의원의 사무소에 문의하라"는 말이 입에 맴돌 정도로 민원이 몰린다고.


송영길 / 1963년 3월 21일 / 전라남도 고흥군
학력 : 연세대학교 경영학 학사, 조선대학교 정치학 명예
배우자 남영신, 슬하 1남 1녀
더불어민주당 / 인천 계양구 을

전라남도 고흥군 출신의 더불어민주당 소속 정치인.

광주대동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과와 일본학과를 졸업했으며, 36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정계에 뛰어들기 전에는 1984년 연세대 총학생회장이 되는 등 학생운동계에서 활동했고, 이어 인천 지역에서 택시 노조 운동을 하면서 노동 운동에도 참여했던 경험이 있다.

사법시험 합격 후에는 주로 인권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이어 1990년대 후반부의 이른바 젊은 정치인 수혈에 따른 386 정치인들의 등장 무렵에 첫 주자로 나서게 되었다.

바로 1999년 재보궐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의 공천을 받아 인천 강화-계양 갑 지역에 출마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정계에 데뷔한 송영길이었으나 당시 김대중 정부의 옷로비 의혹 등으로 인해 불리하게 선거 과정이 전개되면서 안상수에게 석패했다.

하지만, 16대 총선 이후 강화군이 서구와 합구되면서 이번에는 계양구 지역구로 다시 재도전하여 재보궐선거에서 만났던 안상수 상대로 설욕에 성공하며 국회입성에 성공했고 그 뒤로 17대와 18대 선거에서 모두 승리하면서 3선 의원을 기록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러시아 특사로 파견되었고, 이후 러시아와의 인연을 감안하여 문재인 정부의 북방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북방경제협력위원회는 북방경제 및 한중관계 및 한러관계에 기반한 북방경제에 집중한다. 북방경제는 중국,러시아와의 협력을 뜻하는 것이며, 문재인 정부의 외교정책 중 하나인 신북방정책의 일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남북한관계가 호전되고 있는 가운데 2018년 7월 11일 통일부의 방북 허가를 받고 북방경제협력위원회 인사들과 함께 북한 라선특별시를 13일부터 14일날 동안 방문할 계획이다. 이는 러시아가 주최하는 남북러 국제 세미나 참석 및 라선항 방문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한편...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에서 정치적 공식 발언 이외의 발언을 통해서도 주목받은 흔치 않은 정치인인데, 바로 "박근혜 변기 사건"의 주인공이자 시발점이다.

송영길이 인천시장이던 2013년, 인천에 방문한 박근혜에게 쉬라며 인천시장실을 빌려주었는데, 박근혜가 남이 쓴 변기를 쓸 수 없어서 송영길이 쓰던 사무실 화장실 변기를 없애버리고, 새 변기를 가져와 설치했다고 한다... 하루종일 있는 게 아니라 고작 한두 시간 있기로 한 건데, 그렇게까지 한 것이다.



시장실의 침대 담요 같은 것도 새 것으로 다 바꿔버렸다고 한다. 이 발언은 민주당이 탄핵 가결 직전까지 기획한 논스톱 팟캐스트 방송에서, 송영길이 박근혜에게 겪었던 경험을 지나가는 이야기로 했던 것인데, 인터넷을 통해 이것이 퍼져나가 큰 화제가 되면서 인터넷에 박근혜의 다른 화장실 집착 기벽에 대한 발언이 나오고, 주요 방송과 언론에서도 수차례 언급이 되는 등 후폭풍이 상당히 컸다.

당시 송영길은 그것보다는 대통령과 인천 재정 상황 같은 것을 진지하게 이야기하며 의견을 교환하길 원했단다. 특히 러시아와 인천의 교류에 대해 협조를 요청하고 싶은 게 있었다고 한다.

송영길은 그전에 러시아 방문 후 푸틴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거 했어도 별 도움 안 됐겠지만 그런데 변기 공사가 끝나자 박근혜가 시장실에 혼자 들어간 뒤에 다른 사람들 절대 못 들어가게 경호원들로 문앞을 완전히 막아버려서 서운했다고 한다.

박근혜가 돌아갈 때가 되자 송영길이 '이거 도로 다시 뜯어가면 어떡하지?'하고 생각했는데 그러지 않고 그냥 다 가 버려서, 시장 임기 끝날 때까지 대통령이 남겨놓은 그 변기와 담요를 썼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더 지나고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박근혜의 특이한 습관 및 행적에 대해 의심스러운 정황들이 쏟아지자 그 기억이 떠올라 '그 일은 진짜 좀 정상이 아니고 이상했던 거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럴 기회가 와서 말했던 것이라고 한다.

이 변기 이야기는 대중적 충격을 추며 대히트를 쳐서 신문과 뉴스에까지 나와 회자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박근혜가 탄핵 가결 후 파면이 되고, 감옥에 구속까지 된 이후에도 계속 대중에 회자되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심지어 몇몇 종편 뉴스에서는 박근혜가 검찰 내 어떤 조사실에서 조사받는다는 정보뿐만 아니라, 검찰 건물 내에서 그녀가 사용할 것으로 예측되는 화장실의 위치정보까지 취재하여 보도했다.

그것도 역시 이 변기폭로 사건의 영향을 받은 일이라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역대급 임팩트넷상에서 '검찰 조사 받을 때는 어떤 변기를 쓰냐', '구치소 변기는 뜯고 정든 청와대 변기로 바꿀 수 있겠냐?', '나중에 교도소로 옮기게 되면 구치소에서 쓰던 변기 가져갈 수 있냐?' 등 수많은 변기 드립의 원조가 되었다.



[출처 : https://namu.wiki/w/%EC%86%A1%EC%98%81%EA%B8%B8(%EC%A0%95%EC%B9%98%EC%9D%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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