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수 의원나이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관으로 일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 사후 정계에 입문해 두 차례에 걸친 선거 패배를 딛고 2016년 20대 총선 때 경남 김해시 을 선거구에서 62.4%의 득표율로 당선돼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이 됐다. 그리고 2018년 6.13 지방선거 때 경남도지사 선거에 도전장을 내밀어 52.8%의 득표율로 당선돼 제37대 경남도지사가 되었다. 소속 정당은 더불어민주당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가장 대표적인 친문계 정치인으로 손꼽히며, 친문계의 새로운 차기 대권 주자가 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인물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로 들어가기 이전부터 누구보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수행하였고, 그의 대변인 격으로 활동해 왔다. 대통령 취임식 직전과 직후 김정숙 여사와 운전기사를 제외하고 문 대통령과 같은 차를 탄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과 매우 가까웠던 데다 친노계 - 친문계의 정신적 고향인 PK 태생이기에 친문 지지층 사이에서는 노무현-문재인의 가계를 이을 정치 지도자 감으로 평가받고 있다.


1994년 신계륜 의원의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해서 경험을 쌓고 2002년 노무현 대선 캠프에 스카웃되는 것을 계기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참여정부가 출범하고 청와대 제1부속실 행정관, 연설기획비서관, 공보비서관을 두루 걸치며 2006년 1년 동안 노 전 대통령의 수행 비서를 맡았다. 퇴임 이후에도 봉하마을로 내려가 수행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노무현의 마지막 비서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사실을 문재인에게 알린 사람도 김경수 비서관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사후에는 중앙 정치와 거리를 두고 봉하재단 사무국장, 노무현 재단 봉하사업본부장을 지냈다. 


그러다가 2011년 민주통합당에 입당해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남도 김해시 을 선거구에 국회의원 후보로 나섰으나, 현직 의원인 김태호에게 밀려 떨어지고,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도 경남도지사 후보로 출마했으나 새누리당 홍준표 현직 지사에게 밀려 또 다시 낙선했다. 하지만 연이은 낙선에도 포기하지 않고 밑바닥 민심을 다지면서 20대 총선에서 다시 한 번 김해시 을에 도전해 당시 더불어민주당 후보 중 가장 많은 득표율을 거두며 승리했다.


이후 친문계 의원으로서 의정 활동에 전념하며 문재인 정부를 뒷받침했다. 원내에 진입한 뒤 패권주의 논란으로 20대 총선에 불출마를 선언한 최재성, 노영민 전 의원 등을 대신해 친문의 대변인 격으로 활동해 왔다. 이를 증명하듯 유튜브 등지에서 문재인 당시 대표의 행보를 담은 동영상을 보면 문재인을 그림자처럼 수행하는 김경수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이후 단 한 번도 민주당 후보가 승리하지 못한 험지 중 험지인 경상남도 탈환을 위해 당 지도부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4년만에 다시 한번 경상남도지사에 도전, 드루킹 여론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난관을 맞았으나 해당 의혹을 정면 돌파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도리어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는 데 성공하고 7회 지방선거에서 과반 이상의 표를 얻으며 경상남도에 최초로 민주당 깃발을 꽂는 것을 성공했다.


김경수의 학창시절, 세차례 옥살이 그리고 동성동본의 결혼

1967년 12월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에서 말단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와 생활력 강한 어머니 사이에서 4남 1녀 중 장남이자 장손으로 태어났다. 교육열 강했던 어머니는 아들을 괜찮은 중학교에 보내기를 위해 초등학교 6학년인 김경수만 인근 대도시인 진주시로 전학시켰다. 김경수는 친척 집에서 기거하면서 진주천전국민학교, 진주남중학교, 진주동명고등학교를 졸업했고 1년 재수하여 87학번으로 서울대학교 인류학과에 입학하였다.


80년대 후반은 반독재 학생운동이 가장 극렬했던 때로, 먼저 대학생이 된 동창들과 만나면 가끔 시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재수 생활 동안에는 공부하기 바빠 사회 현실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한 이후 교정에 학생들이 던진 짱돌이 날고, 경찰이 쏜 최루탄이 난무하는 현실을 알게되면서 대한민국 정치에 강렬한 고민을 품게 되었다. 집안의 기대와 공무원인 아버지에 대한 걱정 등으로 많은 번민과 방황을 했지만 나만 출세하자고 조용히 공부만 하는 것은 시대에 죄를 짓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2학년에 올라가면서 본격적으로 학생 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대학교 3학년인 1989년 총학생회 학술부장 시절 가을 축제 때 ‘북한 바로알기 자료집’을 만들었다가 국가보안법상의 이적표현물 제작 반포 혐의로 구속되는 등 모두 세 차례 옥살이를 했다. 6월 항쟁이 끝난 뒤에는 그해 여름 방학에는 ‘공장활동’(공활)에 참가했다. 수원의 와우공단에 있는 자동차 부품회사를 택했는데 일이 익숙지 않은 그는 입사한 지 며칠 안 돼 쇠로 된 부품의 구멍을 다듬는 작업을 하다가 왼손 검지 손가락을 크게 다치는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나중에 군 면제를 받았다고 한다. 한겨레


1996년 대학교 후배이자 동성동본인 부인과 결혼하여 슬하에 2남을 두었다. 사귀던 시절 결혼을 생각할 때 여자친구와는 동성동본인데다 본인은 영남, 여자친구는 호남(전남 신안) 출신이라 집안 어른들께 어떻게 허락을 받아야 할지 한참 고민했다는데, 막상 부모님은 여자친구를 만나 본 뒤 흔쾌히 허락하셨다고 한다. 아내와 결혼할 때 조건이 정치 일은 해도 절대 출마는 안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20년 뒤에 남편이 민주당 국회의원에 경상남도지사까지 될 줄은 아마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단기 아르바이트로 정치 입문

대학 졸업 후 지금은 사라진 30~40대 직장인을 대상으로 하는 월간지(<리더스 비젼>) 편집부 기자 생활을 했으나 별 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94년 신계륜 의원실에 일하던 학교 선배의 국정감사 기간에만 도와달라는 부탁으로 여의도에 발을 디뎠다. 어떻게 보면 단기 아르바이트로 정치에 입문한 셈이다. 이후 국정감사 기간 동안 업무 능력을 인정 받아 신계륜 의원이 정책비서로 같이 일해보자는 권유했고, 국정감사 동안 보람을 느낀 김경수는 이를 승낙하면서 본격적인 보좌관 생활이 시작하게 되었다.


15대 총선에서 신 의원이 낙선하자 일종의 프리랜서가 되었고, 15대 국회에서는 유선호 의원실에서, 16대 국회에서는 임채정 의원실에서 근무했다. 이후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자 2001년 말 청와대 정무수석에 임명된 유선호 의원의 요청에 따라 임채정 방을 그만두고 청와대 보좌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태어나기도 전에 휴전선에서 장교로 근무하다가 월북했던 외삼촌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 3개월만에 청와대에서 보따리를 싸고 나갔다.


하지만 새옹지마라고 청와대의 해고는 그를 새로운 만남으로 이끌었다. 김 의원이 쉬고 있다는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광재 전 도지사의 권유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전략기획팀 부국장으로 노무현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전략기획팀에서 뛰어난 업무 능력을 보여준 김경수 보좌관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거쳐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국정상황실 행정관, 청와대 연설기획비서관, 대통령 공보비서관 등을 지냈다. 청와대 입성 때까지만 해도 노 전 대통령과 안면도 트지 못했지만 참여정부 집권 중반기에는 어느새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한 명이 되어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퇴임 이후 가족들과 함께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 정착해 노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보좌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저서인 운명은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던 그날 새벽, 자고 있었던 문재인 당시 변호사가 김경수 당시 비서관에게 노 전 대통령이 등산을 떠났다가 부엉이바위로 떨어져 상태가 엄중하다는 연락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김 지사는 노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봉하를 떠나지 않고 봉하재단 사무국장, 노무현재단 봉하사업본부장을 지냈다.


노 전 대통령의 비서이자 봉하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로 살면서 시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간 노무현과 함께 공부하는 시간은 큰 행복이었다고 김 의원은 회고했다. 오랫동안 보좌관 생활을 해왔지만 자신이 직접 정치에 뛰어들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결혼 전에 아내에게 약속까지 했지만 2009년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그는 '바보' 노무현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직접 정치에 뛰어들게 되었다.


두 번의 낙선, 그리고 20대 총선

2011년 야권 통합을 추진한 시민운동모임 ‘혁신과 통합’ 때부터 문재인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기 시작했다. 이후 민주통합당에 입당했다. 당시 주변에서 2011년 4·27 경남 김해시 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나가서 노 전 대통령의 고향을 지켜야 한다는 주변의 압박이 강했지만 고심 끝에 “꽃이 되기보다는 단결과 연대의 거름이 되고 싶다”며 불출마를 선언했다. 하지만 야권 단일 후보로 출마한 국민참여당 이봉수 후보는 한나라당 김태호 후보에게 패배했다. 김태호 의원과의 인연, 혹은 악역의 시작이었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본인이 직접 경상남도 김해시 을 선거구에 국회의원 후보로 나서 새누리당 김태호 후보와 맞붙어 47.88%의 적지 않은 득표율을 얻었으나 아깝게 떨어졌다. 


이후 18대 대선에서 당시 문재인 후보의 대선 후보 수행팀을 전두지휘했다. 참여정부 청와대에서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일했던 사이지만 사실 당시까지만 해도 문재인 대통령과 김경수 의원의 사이가 딱히 가깝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혁신과 통합'을 시작으로 18대 대선에 이르러서 문 대통령이 김 의원에게 대선 후보 수행팀장을 맡을 정도로 둘은 가까워졌다. 


첫 대선 실패 이후 문 대통령은 어딜가나 김 의원과 함께 움직였다.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경남도지사 후보로 출마해 새누리당 홍준표 후보와 경쟁했지만 이번에는 꽤 큰 표차이로 낙선했다. 하지만 당시까지 보수세가 강했던 경남이었고 보수계 중견 정치인인 김태호와 홍준표의 전국적인 지명도 등의 차이를 감안하면 선출직 정치인으로서는 신인에 가까운 김경수 입장에서는 선전한 편이었고, 김해시와 창원시 성산구에서는 오히려 홍준표를 앞섰다. 


또 이 선거가 이후 김경수에게는 커다란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도지사 선거 전부터 "미소천사"라는 전국적 팬클럽이 조직되었는데, 선출직 경험이 없는 정치인으로서는 거의 유일한 사례였다. 노사모가 있지 않냐고 할 수도 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시 16대 총선에서 낙선하긴 했지만 이미 재선 국회의원 경력이 있었다.


그후 절치부심 끝에 밑바닥부터 김해시 을 지역구에서 활동을 했고 민심을 얻어가는 데 성공했다. 2012년 선거 때는 사실상 본인도 김해를 잘 알지 못했을 때 출마했다면 2016년 선거에서는 차원이 다른 상황에서 선거에 임했다고 할 수 있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이만기 후보를 꺾고 무려 62.4%의 득표율을 기록하여, 민주당 후보들 중 전국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며 당선되었다. 김해시 갑에서도 더불어민주당의 현역 의원 민홍철 후보가 재선에 성공하고, 함께 실시된 김해시장 재보궐선거 및 시의원 보궐 선거에서도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당선되면서 더불어민주당이 김해시에서 완승하기도 했다.


당선되고 난 뒤 민홍철 김해 갑 국회의원 당선자, 허성곤 김해시장 재선거 당선자, 김종근 김해시의원 보궐선거 당선자, 동시에 낙동강 벨트에서 살아남은 양산시 을의 서형수 당선자와 함께 봉하마을로 가서 노무현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했다. 봉하마을은 20대 국회부터 김해 갑에 속해있지만 원래 김해 을 지역구였고, 김경수 의원의 뿌리 깊은 연고 때문에 아직도 다양한 행사 때 김경수 의원이 주최측의 역할을 맡는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 하고 인수위원회를 대신할 국정자문위원회에서 기획분과를 맡았다.


분명히 경고합니다. 사람 잘못 봤습니다. 저는 제 모든 것을 걸고 싸우겠습니다. 반드시 이기겠습니다.

- 경남도지사 후보 캠프 개소식 中


6.13 지방선거의 진 주인공/ 친노계의 막내, 노무현의 숙원을 이뤄내다.


여당 최강의 지지율로 당선된 대통령계 초선 의원이 배지를 버리고 험지로 가서 전임 경남도지사와 정치 생명을 건 한 판 승부를 벌이는 일은 정말 찾기 힘들 뿐더러, 야권과 보수 언론이 드루킹 사건을 과도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도리어 김경수의 이름을 전국구로 알리는 이득(?)만 가져다 줬다. 


결국 대세론을 끝까지 유지해 경남 선거에서 패배해본 적이 없었던 김태호 후보를 물리치고 처음으로 민주당 소속으로 선거에서 당선돼 취임한 경남도지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로써 명실상부한 20대 대선의 잠룡이자 문재인의 진짜후계자로 불리게 되었다.


2018년 4월 2일, 결국 더불어민주당의 경남도지사 단일 후보로 추대되었다. 자유한국당에서는 2012년 총선 때 김해시 을에서 맞붙었던 김태호 전 지사가 출마하는 것이 사실상 확정되면서 6년 만에 리턴 매치가 성사되었다.


4월 19일 공식 출마 선언을 했는데, 원래는 오전에 경남 진주에서 출마 선언을 하기로 예정되었지만 드루킹 의혹으로 오후로 미룬 뒤 4시 30분 국회 정론관에서 출마 선언을 하였다. 


현역 의원이라 의원직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5월 3일 부로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고 14일 본회의에서 처리되었다. 참고로 본인도 본회의에 참석해 사퇴서를 가결시켰다.


5월 17일 캠프 개소식을 열었다. 이후 더불어민주당 경상남도 기초단체장 후보들의 개소식에도 참석하였다. 드루킹 특검이 빨라도 6월 25일 이후에 시작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 전에 완료되는 선거 운동 기간 중에는 큰 영향이 없을 걸로 보인다. 본격적인 선거 운동은 5월 31일부터 시작했다.


유세 기간 동안 상당한 인파를 몰고 다니면서 당선이 확실해 보였으나 정작 6월 14일 오전 12시 32분이 되서야 '유력'으로 경남도지사 당선을 바라볼 수 있었다. 출구조사에서는 김경수 후보가 16%나 앞서는 것으로 나왔음에도 개표 초중반에는 김태호 후보가 50%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앞서면서 이변이 연출되나 싶었지만, 김경수 후보의 득표율이 치고 올라 밤 11시를 기점으로 따라잡기 시작하면서 개표율이 20% 넘긴 시점에서 결국 역전에 성공했다. 개표 초반 김태호 후보가 앞섰던 것은 경남에서도 특히나 보수세가 강한 서부 지역을 먼저 개표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민주당계로서는 최초로 배출한 경남도지사이며, 친문계 핵심 인사로서 당원들의 지지도도 압도적이기 때문에 드루킹 사건이나 경남도정에서 이렇다 할 하자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앞으로 민주당의 차기 대권 주자로 계속 언급될 걸로 전망된다. 김경수 본인은 JTBC와의 인터뷰에서 더 큰 정치에 도전할 뜻이 있냐는 질문에 "더 큰 정치 부분은 제가 져야 할 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경남도민들께서 저한테 주신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라고 답했다. 


드루킹 사태부터 시작된 과정에서의 주목도, 박빙으로 비쳐진 드라마틱한 개표 과정 등으로 실시간 검색어 1~2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이로써 실로 전국구 정치인으로 도약하였음이 명백해졌고, 친문계 지지층을 이어받을 차기 대선 주자로 명백히 떠오르기까지 했다. 


무소속의 깃발을 들고 경남도지사에 도전해 성공한 후보가 있었고, 그것 만으로도 엄청난 주목을 받은 바가 있었지만, 김경수는 아예 민주당 깃발을 들고 지역 기반 하나 제대로 없는 사지에 나가서 한국당이 경남에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후보를 상대로 예전의 패배를 설욕하면서 승리하였다. 실로 무시무시한 성과를 낸 것.이로 인해 그도 유력한 대권 주자로 부상한 것이다.


당선 다음 날인 15일, 여의도에서 열리는 민주당 광역단체장 당선 행사에 참석하지 않고 거제, 통영, 고성, 사천, 남해, 하동, 진주, 의령, 함안 9개 시군을 돌며 민생 현안을 재점검하였다. 법률상 공식 임기가 시작하는 2018년 7월 1일에 재난안전대책회의를 열었다. 본래 7월 2일 공식 취임식을 행할 예정이었으나, 태풍 쁘라삐룬이 한반도에 접근하자 취임식을 취소하고 국립 3·15민주묘지와 창원 충혼탑을 참배하고 경남도청에서 취임 선서를 하며 약식으로 취임 행사를 진행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