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수

대한민국의 별정직공무원. 영남에서 참여정부 인사 출신이 강세를 보이는 낙동강 벨트의 한 축이다. 5연속 낙선하였다.

 

1968년 12월 3일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으나, 학교는 부산에서 다녔다. 부산내성중학교, 사직고등학교, 부산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91년 부산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역임하였다.

 

1998년 국회의원 노무현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2000년에 노무현 해양수산부 장관의 사무관, 2002년 새천년민주당 양산시 지구당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양산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1위 김양수 당선자와 불과 1,102표 차이, 1.29% 차이로 2위가 되어 낙선하였다.


낙선 이후 참여정부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실 행정관, 혁신추진팀 행정관, 사회조정2비서관을 역임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4위로 낙선하였다. 당시 통합민주당을 탈당하며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전국정당을 만드는 것이 정치적 꿈이었지만, 다시 옛 민주당으로 돌아간 현재의 당에서는 이 꿈을 실현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밝혔었다.




2009년 민주당으로 복당하여 하반기 재보궐선거 에서 같은 선거구 출마 하였으나 한나라당 박희태 후보에게 4.08% 차이로 밀려 2위로 낙선하였다. 당시 한나라당 후보들이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표 분산으로 인해, 승리 가능성이 점쳐졌지만 아깝게 낙선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 하였으나 윤영석 후보에게 5천여 표차, 4.61% 차이로 아깝게 낙선하였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였다. 양산시의 인구수가 늘어나 분구된 갑 지역에 출마하였으나, 현역 윤영석 후보에게 또 밀리면서 낙선하였다. 대체 몇 번째로 아깝게 석패하는 거냐...  


주요 표밭이었던 양산신도시 지역이 갑과 을에 나뉘어 분배된 것 뿐만아니라 국민의당 후보와 표를 갈라먹은 게 원인으로 보인다. 다만, 1위와의 득표율차가 4.80%에 불과하고, 양산신도시의 인구가 계속해서 늘어나 다음 총선을 기대해볼 만하다는 평이 있다. 한편, 양산시 을에 출마한 같은 당의 서형수는 당선되었다.


2016년 6월 1일, 더불어민주당 조직강화특별위원회의 '당선자를 내지 못한 지역구에 대한 면밀한 심사' 방침에 반발해 양산 갑 지역위원장직을 사퇴하였다. 그렇게 평당원으로 남나 싶더니....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의 일정총괄팀장을 맡았다.


이후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자, 최측근으로 청와대에 함께 들어갔고, 대통령비서실 제1부속비서관으로 임명되었다. 현재 청와대에서, 대통령의 모든 일정과 청와대 보고·회의 자료를 책임지는 참모를 맡고 있다.


2018년 6월 26일 대통령비서실 정무비서관으로 임명되었다.


드루킹-김경수-그리고 송인배?



김경수 경남지사에게 드루킹을 소개한 송인배 청와대 정무비서관이 참고인 신분으로 특검에 출석해, 드루킹의 댓글조작 범행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조사받고 있다. 

 

그는 20대 총선에서 낙마한 뒤 2016년 6월 자신의 선거캠프에서 일한 경제적공진화모임(경공모) 회원 A씨로부터 ‘드루킹’ 김동원씨를 소개 받았으며, 같은 달 김씨와 함께 당시 국회의원이던 김 지사의 의원회관 사무실을 방문해 양측을 이어준 뒤 드루킹 측으로부터 ‘간담회 참석’ 명목으로 100만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대선전인 2017년 2월까지 드루킹을 집 근처 호프 등에서 총 4차례 만나고 100만원을 더 수수한 혐의를 받는다.  


특검은 그가 문재인 대통령 대선캠프에서 수행총괄팀장을 지내며 드루킹과 추가로 연락을 주고받거나 드루킹이 최측근 윤모·도모 변호사를 대선캠프에 넣어달라고 그에게 요구한 정황을 추가로 파악해 이날 진위를 확인할 방침이다.  


[ 출처 : 송인배]



대한민국의 제19대~20대 국회의원으로, 소속 정당은 더불어민주당이며 지역구는 안산시 상록구 갑 지역이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인 참여정부 시절에는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적이 있다. 2016년 8월 22일에는 민주당의 경기도당 위원장으로 선출돼 민주당의 인천시당 위원장으로 선출된 박남춘 의원과 함께 추미애 지도부의 경기도 & 인천광역시 권역 대표 최고위원을 맡았다. 현재 이해찬, 이종걸과 같이 차기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후보로 유력한 인물 중 한 명이다.


대표적인 친문 핵심 정치인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 생애 정치입문 전 

1962년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범학교 출신으로 6.25. 때 평양에서 월남하여 목포에 정착하였다. 목포에서 대성초등학교와 영흥중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때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 마산에서 직장생활하던 형에게 맡겨졌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경상남도 마산[3]에서 자랐다. 한 학년에 600여명이었던 고등학교에 호남 출신 학생은 그를 포함해 단 2명이었다. 원래 혼자인줄만 알았는데 2학년에 올라가보니 한명이 더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고 놀림을 받았던 그는 그때부터 지역감정이 정말 근거가 없으며 폐해가 심하다고 생각했다.


1981년 마산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1985년에 고대법대를 졸업하였고 1987년 제29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육군 법무관으로 임관해 병역을 마친 뒤 1993년부터 변호사로 개업했다. 이때부터 안산에서 법무법인 해마루 소속의 변호사로 생활하며 안산에서 터를 닦았다. 법무법인 해마루는 노무현과 천정배가 1993년에 함께 설립했던 법무법인. 


1996년부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대외협력위원장, 노동위원회 대외협력부장, 언론위원회 위원장 등을 하며 민변의 대표 변호사로 떠올랐다. 민변에서 맡은 사건의 70~80%는 노동법이나 국가보안법 관련 사건이었다. 


변협인권위원으로 재직 중이던 2000년 봄,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의 형사고소를 대리하여, 살인죄 공소시효 완성 직전 주범에 대한 검찰의 구속기소를 이끌어냈다. 이때 유가족에 대한 법원의 42억 원 배상판결이 나오자, 형식적으로 소멸시효가 완성된 사건일지라도 기관에 귀책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배상청구가 가능하다는 새로운 소멸시효이론이 정립되었다. 이로써 법조계에 '전해철'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 정치 입문

2002년 노무현이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뒤, 지방선거에서 패배하며 위기를 맞이하자, 전해철은 법조계 내에서 노무현 지지선언을 주도하였다. 이때 법률지원단을 만들고 이후 대선 캠프 법률지원단의 간사를 하면서 대선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2003년 노무현이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국회에서 탄핵을 당했을 때에는 문재인과 함께 노무현 변호 준비를 실질적으로 다 하다시피 했다. 그래서 결국 2004년 3월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기각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2004년부터 청와대에 들어가 일하기 시작하였다. 2006년에는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되어 1년 7개월 가량 민정수석을 지냈다. 당시 44세의 나이로, 전현직 통틀어 최연소 민정수석이다. 이렇게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있으면서 인사청문회 등의 준비를 아주 철저하게 해, 참여정부 역대 민정수석들 가운데 전해철 시절에 청문회 통과가 가장 잘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7년에 로스쿨 제도가 도입된 과정에서도 실무작업은 전해철이 총괄했다고 한다. 그때 유능한 전해철이 빈틈없이 추진하지 않았다면, 로스쿨 도입은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후문이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안산 상록구 갑 선거구에 출마했다. 그런데 김영환이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표를 갈라먹는 바람에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 후 법무법인 해마루의 대표 변호사가 되었고, 민주통합당 안산 상록구갑 지역위원장직도 계속 수행하였다. 


2009년 이명박 정부 하에서 검찰이 박연차 게이트 수사를 할 때에는 노무현의 많은 측근들이 무서워서 도망간 와중에도 문재인과 둘이서 실질적으로 변호 준비를 다 했다.




  • 제19대 국회의원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60.76%의 득표율을 기록, 새누리당 박선희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 후 문재인 대선 캠프에 들어가 열심히 일했다. 당내에 잡음이 끊이지 않고 내부 분란이 끊이지 않아 캠프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와중에서도 그 많은 정책 다 정리하고 정책발표서 발간까지 완료했다. 당시 문재인의 공약 가운데 상당부분이 전해철의 손길을 거쳤다고 한다. 그러나 그로 인해 당내에서 친노 비선 실세 논란에 휘말려, 논란이 커지자 양정철, 이호철 등과 함께 대선 캠프에서 일괄 사퇴하였다. 겨우 대선을 두 달 남짓 남긴 시점이었다. 


이렇듯 '비선 실세'로 욕을 먹었지만 권력을 휘두르긴커녕 국회에서 고생을 많이 한 편이었다. '면이 서는' 당직보다는 일하는 위원직을 주로 많이 맡았다. 2012년 민주통합당 BBK 진상조사위원회 위원, 정봉주 구명위원회 위원, 국회 민간인 불법사찰 국정조사특위 위원 등을 지냈다.


이후 국회 국가정보원 댓글의혹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위 위원, 민주당 대통령 기록물 열람위원, 국정원법 개혁추진위원회 위원(이상 2013년), 새정치연합 야당탄압저지대책위원회 위원, 국회 서민주거복지특위 위원, 박상옥 대법관 인사청문특위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2014년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가 일어났을 때에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위원(2014~2015년)으로 활약하며 세월호 관련 입법을 모두 주도하였고, 결국 2014년 10월 세월호 관련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특별법, 2015년 1월 세월호 배보상 특별법 등을 통과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외에 법사위에서는 야당 간사로서 여당의 공격에 맞서는 수문장 역할을 하였다. 야당 간사에게는 관행상 마지막에 발언 기회가 주어지는데, 이때마다 동료 야당 의원들이 제기한 문제점을 정리하면서 핵심을 한 번 더 찌르는 마지막 공격수의 역할을 해냈다.


그가 법사위 야당 간사 시절 효과적으로 막아낸 법안이 바로 사시존치 법안이다. 2015년 19대 정기 국회 당시 총 6개의 사시존치 법안이 발의되어 있었으나(이 중 5개는 새누리당의 함진규, 노철래, 김용남, 김학용, 오신환 의원이, 나머지 1개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조경태 의원이 발의한 것으로서, 이후 조경태 의원 역시 자유한국당으로 옮겼다.) 


이들 법안이 법사위 회의 안건으로조차 상정되지 못하도록 막아내는 데 전해철 의원은 중심적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측이 가능한 것은 상임위 간사들에게 법안 심의 순서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기 때문인데, 당시 여당 간사였던 이한성 의원은 사법시험 존치 법안을 지지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바 있으므로, 양당 간사 중 사시존치 법안 심의 순서를 뒤쪽으로 두기를 주장한 측은 전해철 의원으로 보는 게 보다 타당할 듯하다.  


사법시험 폐지문제와는 별도로, 선거 때의 공약이었던 반월 시화공단 스마트허브 조성을 꾸준히 추진해가고 있다. 그 외에도 수인선 완전지하화 계획에 성공하였고, 늘푸른아파트 소송 등 여러 소송 문제도 잘 해결하여, 사법시험 준비생들이 상당히 비토하는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지역구 내에서의 평판은 좋은 편이다. 


머니투데이가 평가한 제19대 국회의원 의정활동에서 새정치민주연합 내 9위를 마크했다. 



  •  제20대 국회의원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도 상록 갑에 출마해 1여 다야의 환경 속에서도 35,481표, 38.8%를 득표하며 새누리당 이화수 후보를 9,000표 차이로 따돌리며 비교적 무난히 재선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공정거래위원회, 금융감독원, 금융위원회, 국무조정실, 국무총리 비서실, 국가보훈처, 국민권익위원회 등을 소관 기관으로 하고 금융정책수립 및 집행, 공정거래질서 유지, 국정 조정 및 규제 개혁, 국가유공자관련 보훈사업, 국민권익지키기, 경제 인문 사회분야에 관한 연구 등 다양한 분야의 정책을 입안하고 심의하는 국회 상임위원회인 정무위원회의 더불어민주당 간사로 선임되었다.


2016년 8월에 더불어민주당 경기도당 위원장 선거에 출마하여 압도적인 격차로 당선되었다. 권리당원 ARS 투표와 대의원 현장 투표를 합산한 결과, 63.3%의 득표율을 기록하여 경쟁자였던 이언주 의원을 상대로 압승했다. 이언주 의원이 20대 총선 공천 과정에서 더불어민주당 코어 지지층에서 인심을 잃고 전해철 의원이 노무현재단 운영위원을 맡은 경력으로 반사 이익을 톡톡히 본 결과물이라는 평가다.



더불어민주당이 최고위원 제도를 당의 각 시도당 위원장들이 호선하는 권역별 대표위원제로 바꾸면서 전해철 의원은 경기도 & 인천 권역 대표위원으로서 당 최고위원이 됐다. 전해철 의원이 1년, 더민주 인천시당위원장인 박남춘 의원이 나머지 1년을 맡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민주당 최대 주주라고 할 수 있는 문재인 대통령 지지층에서는 김경수, 조국, 임종석, 조응천과 함께 전해철 의원에 대한 평가가 좋은 편이다. 오히려 보수 야당에서 삼철이라고 공격 했던 것이 이득이 된 셈. 보수 야당에서 대통령 측근이라고 공언한 셈이니. 


민주당이 6.13 지방선거 - 6.13 재보선에서 압승을 거두자, 정치권의 관심은 추미애 지도부의 뒤를 이을 민주당 제3기 지도부가 어떻게 구성될 것이냐로 모아졌다. 특히 제3기 지도부는 2020년 4월에 치러질 21대 총선 공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도부가 될 것이므로, 이번 경기도지사 후보 경선을 통해 개인적인 인지도와 더불어 자타공인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이란 사실을 나름 크게 알린 전 의원이 출마할 것이냐에 대해 관심이 쏠렸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당내 친문계 핵심 인사로 분류돼 왔던 최재성 의원과, 친노계의 좌장이라고 불리어왔던 이해찬 의원도 출마 여부를 저울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당내 친문 표가 분산되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그래서 최재성 의원과는 동반 출마하지 않기로 일단 의견을 모았다는 소식이 알려졌고, 그럼 둘 중 최재성이 양보할 것이냐, 전해철이 양보할 것이냐는 쪽으로 관심이 기울여졌는데, 7월 15일 전해철 의원이 전당대회에 불출마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 정치 성향 

문재인 대통령의 사람들 중에서도 최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문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불리는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함께 이른바 '3철'로 불렸다. 이 세 사람 모두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재직 중이었던 문 대통령의 휘하에 있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 정치권 일선에서 활동하는 3철은 전해철 의원 한 명 뿐이다. 양정철 전 비서관은 19대 대선이 끝난 뒤 해외로 아예 떠났고, 이호철 전 민정수석은 정치권을 떠나 여행사를 운영하는 걸로 알려져 있던 중, 2018년 6.13 지방선거에 가까워 와서는 부산시장 선거 출마설이 나왔지만,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이 세 사람은 나중에 전해철 의원이 경기도지사 선거에 나서기로 한 뒤에 열었던 북 콘서트에서 오랜만에 다시 모이게 된다.


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명박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으러 왔을 때의 사진을 보면 당시 노 전 대통령의 변호를 맡고 있었던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하여 김경수 의원 등과 함께 노 전 대통령을 수행하고 있는 전해철 의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각별한 인연에도 불구하고 18대 대선 때 3철 논란이 잠깐 불거진 적 빼고는 상대적으로 언론의 주목을 덜 받았다. 특히 친노계를 시종일관 저격해 왔던 박근혜 정부 시절의 보수 언론들조차도 전 의원에 대해서는 거의 보도한 적이 없었다. 조중동 등 주류 보수 언론이 연일 '친노 패권주의'를 외치며 부지런히 친노 & 친문 인사들을 저격하던 2015년 즈음을 돌이켜보면 문재인 당시 대표의 최측근 인사였는데도 언론의 주목을 상대적으로 덜 받았다는 특이점이 있다. 


본인 스스로도 혹여나 보수 언론에게 빌미를 줄 일이 생길까봐 침묵을 지켰던 듯하다. 그래서인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고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한 뒤부터야 전해철 의원이 문재인 대통령의 오래된 최측근이었다는 점을 알게 된 사람들이 많다.


위에 상당히 길게 서술되어 있듯이 본인이 사법시험에 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법시험에 대단히 비판적이다. 그래서인지 적극적인 로스쿨 도입론자였다고 하며, 실제 청와대 민정수석 시절 로스쿨 도입에 가장 앞장섰다고 한다. 지난 제19대 국회 시절에는 법사위에서 야당 간사로서 사법시험 존치 법안이 심의되지 않도록 최대한 시간 끌기를 하였다. 그 때문에 전직 서울변협회장이던 나승철이 그의 지역구 사무실 앞에서 항의시위를 하기도 하였다.


1969년 서울특별시 출생 남성으로, 명지대를 졸업하고 대기업 건설사에서 근무하며 2000년대 초중반 친노 커뮤니티 서프라이즈에서 쁘띠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한 친여권성향 논객인 동시에 정치자영업자이다. 참고로 그 유명한 변희재도 여기 출신이다. 여기에서 탈퇴해서 지금의 극우 성향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본명은 김동원이다. 페이스 북에서는 Sj KIM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대학(명지대학교) 졸업 후, 대기업(대림 고려개발)에서 근무.


2018년, 문재인 정권을 공격하는 여론 조작을 하다가 구속되었다. 경찰에 따르면 문 정부를 공격하는 댓글 공작을 통해 역으로 보수 세력의 댓글 부대에 대한 수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행동했다고 추정된다고 한다. 네이버 블로그에 국내 정치 동향, 국제 정세를 분석한 글들을 주로 올리고 2009년부터 닉네임을 드루킹, 블로그 이름을 드루킹의 자료창고로 바꾸고 활동했다.


드루킹 심상정 유시민


  • 드루킹 초기 활동

2009, 2010년 2년 연속 네이버에서 파워 블로거로 선정되었으며 2010년부터 2018년 2월까지 유령 회사이지만 경기도 파주시 문발동 507-7에 위치한 유령 회사 느릅나무 출판사의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그는 블로그 프로필에서 자신을 "불교 철학과 자미두수(紫微斗數)를 취미로 삼고 원칙과 상식을 좋아하고 이승만과 친일파를 싫어한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경제적 공진화 모임이라는 사이비 종교 수준의 단체를 운영하고 있으며, 드루킹 본인이 직접 강연을 하거나 국내외 인사(노회찬, 유시민, 다마키 타다시 등)들을 초청하여 정기적으로 강연을 개최하였다. 또한 파주시 출판단지 인근에 '산채'라고 하는 사무실이 존재한다고 한다. 


시사·인문·경제 부문에서 2009년, 2010년 2년 연속 네이버 파워 블로그를 달성하면서 유명 파워 블로거로 인지도가 상승했고, 2016년 이후로 SNS 등지에서 블로그에 쓴 글들이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블로그에 방문하게 되었다. 2016년 하반기 들어서 트위터를 다시 하기 시작했고 종종 사용하고 있다. 또한 2017년부터는 페이스북 계정이 생성되었으며, 팟캐스트와 유튜브로 2017년 7월부터 매주 월, 수, 금요일에 정치, 시사 내용에 대한 의견을 업로드하고 있다.


'경인선','경공모','세이맘'등의 조직을 통해 민주당 경선 대선 그리고 현정부 초기까지 때부터 특정 정당 혹은 정치인과 연관되어 네이버 댓글 및 기사순위조작과 대형커뮤니티에 여론조작 그리고 인사청탁을 한것인지 아닌지 논란이 되고있다. 


드루킹은 일본 침몰을 예언하였는데, 이를 대비하여 일본 침몰 후 일본의 이재민들을 개성으로 피난 시켜서 자신이 운영하는 특별지구를 만들 목적으로 김경수 의원에게 오사카 총영사직을 요구하였다. 김경수 의원이 청와대에 추천했지만 청와대에서 이를 거절하자 문재인 정부를 프리메이슨과 연관된 제수이트 같은 비밀결사 조직이라고 주장하며 공격하였다. 


는 음모론이나 예언들을 섞어 황당한 주장을 경공모 회원들에게 주입하고 문재인 정부를 공격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던 것이다.


드루킹을 잘 안다고 주장한 사람이 드루킹의 실체라며 드루킹에 관한 글을 페이스 북에 올려서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었다.

해당 글 "드루킹의 실체" 보기



  • 블로그 · 인터넷 카페 · 팟캐스트 운영

드루킹 조직도http://news.donga.com/3/all/20180420/89699810/1

[사진출처 : http://news.donga.com/3/all/20180420/89699810/1]



드루킹은 정치 경제 파워블로거로 활동하여 네티즌들에게 인지도가 있었고, 특히 그 중에서도 국내 정치에 관한 예측과 관련해선 파격적이면서도 일반인이 접하기 어려운 정보의 제공과 함께 사람들의 이목을 끈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글을 보면 역사, 인물 및 철학에 관한 인용을 많이 볼 수 있으며 일관된 경향이 있다. 오랜 과거의 것들을 다소 난해하고 현학적으로 다루는 이들과 다르게, 아주 간단한 언어로 자신의 방식대로 풀어서 전달하고 있다. 


미디어펜에 따르면 드루킹은 육아정보 카페 '세이맘'(세상을 이끄는 맘들) 등에서 회원들에게 더불어민주당 당원으로 가입하라고 권유하는가 하면, 가입 방법을 자세히 공지하기도 했다. 세이맘은 주부들이 육아와 요리 정보 등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는 온라인 카페이지만 정치 색이 뚜렷한 게시 글로 가득하며 현재 폐쇄 절차를 밟고 있다. 


이 밖에도 드루킹은 김경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팬 카페인 '우경수'(우윳빛깔 김경수), 블로그 '경인선'(경제도 사람이 먼저다) 등의 가입과 접속을 권유하는 등 홍보 활동을 펼쳐온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일보 기사를 통해 드루킹 일당이 조직적으로 댓글 조작을 관리한 기사의 종류가 일부 드러났다.


드루킹 체포


같은 날 한겨레의 보도에 따르면 드루킹의 매크로 구입 시기는 2018년 1월 15일이고 첫 사용 날은 이틀 뒤인 17일이다. 


공용 아이디로 추정되는 활동을 보면 2017년 12월 안철수 후보를 비난하고 안희정 후보를 지지하는 여론 조작을 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제19대 대통령 선거 당시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를 가장 곤경에 처하게 했던 네거티브 선거 전인 MB 아바타 공격은 드루킹과 그 지지자 세력들의 댓글 조작으로 인한 프레임이라고  2018년 4월 19일 중앙일보에서 보도하였다. 


또한 드루킹이 자신의 조직을 활용해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의 당내 경선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고 2018년 4월 19일 문화일보에서 보도하였다.


드루킹은 구속되기 직전까지 실시간으로 댓글 조작을 지시했다고 하며, 2018년 4월 19일 중앙일보 보도를 통해 드루킹이 김경수와 어떻게 접촉하고 댓글을 썼는지 일부 공개되었다. 


드루킹 구속





[출처 : https://namu.wiki/w/%EB%93%9C%EB%A3%A8%ED%82%B9#s-4.4]


드루킹 정의당 당원 의혹


‘댓글 조작’ 의혹 사건의 주인공인 드루킹과 정의당 간의 연관 의혹이 제기되었다. 


정의당 홈페이지 내 파주시위원회의 ‘당원광장’에는 “국방전문가인 김종대 국회의원 당선자의 파주 강연회를 준비했습니다”라는 글이 올라와 있다.


이 글에 따르면 김종대 의원(당시는 당선자신분)은 지난 2016년 5월 26일 저녁 7시 30분 경기도 파주출판단지 내 카페 ‘느릅나무에서 ‘진보 정치가 펼쳐 나갈 진짜 안보’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개최했다. 또 강연회 후에는 다시 “많은 분들의 관심 덕분에 ‘정의당 파주 당원 모임’이 주최한 김종대 당선자 파주 초청 강연회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라는 글과 현장 사진들이 당원광장에 올라왔다. 


유튜브에 올라온 느릅나무 출판사 강연 영상


이에 대해 정의당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최석 정의당 대변인은 2018년 4월 20일 “드루킹 1969년생 김씨는 정의당 당원인 적이 없다”며 “두루킹의 출판사 건물 내 카페 느릅나무에서 정의당 행사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드루킹이 정의당 당원이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 크다”고 반박했다. 


드루킹 강연장


이어 “느릅나무 카페는 파주시 시민, 정당단체가 대관이 용이해 자주 사용하던 강연장”이라고 덧붙였다. 기사 이정미 정의당 대표 역시 2018년 4월 17일 기자회견에서 드루킹이 정의당 당원이었다는 사실은 거짓이라고 부인하면서 경찰에 수사를 촉구했다.


한편 드루킹은 2017년 5월 중순 자신의 SNS에 "정의당과 심상정 패거리들. 너희들 민주노총 움직여서 문재인 정부 길들이려고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며 "내가 미리 경고한다. 지난 총선 심상정, 김종대 커넥션 그리고 노회찬까지 한 방에 날려버리겠다"고 했다. 


노회찬 국회의원은 드루킹과 만남이 있었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중요한 관계는 없었다고 했다.


  • 노회찬 선거캠프에 불법 정치자금 제공

드루킹 김모씨는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노회찬 캠프 소속 선거운동원(운전기사)의 계좌로 100만원씩 2회인 200만원을 송금한 바 있다. 


이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의해 적발되어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기소, 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에 의해 선거권, 피선거권 상실형인 벌금 600만원 형을 선고받았다. 20대 총선 당시에는 '이미' 더불어민주당 소속인 드루킹이 정의당 선거캠프에 금품을 제공하다가 적발된 것이다. 


드루킹 노회찬





[출처 : https://namu.wiki/w/%EB%93%9C%EB%A3%A8%ED%82%B9%20%EC%97%AC%EB%A1%A0%EC%A1%B0%EC%9E%91%20%EC%82%AC%EA%B1%B4/%EA%B4%80%EB%A0%A8%20%EC%9D%98%ED%98%B9%20%EB%B0%8F%20%EB%85%BC%EB%9E%80#s-3.4.2]

민주화 이후 최초로 민주당계 정당 깃발을 들고 대구에서 당선된, 지역주의 타파의 상징이 된 정치인 


문재인 정부의 첫 행정안전부 장관이자, 16~18대, 20대 국회의원이다. 소속 정당은 더불어민주당이며, 지역구는 대구광역시 수성구 갑 지역이다. 그리고 한 줄 요약에서 보듯이 민주당이 창당된 이래 처음으로 대구광역시에서 당선된 국회의원이기도 하다.


이해찬, 전해철, 이종걸과 같이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후보군으로 꼽히는 유력한 인물 중 한 명이다. 실제로 당대표 후보군 중 지지율이 1위로 올라갔다.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아버지 김영룡과 어머니 차숙희 사이의 1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 경북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였고,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젊은 시절에는 강경파 운동권이었고,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등 여러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대학 제적과 수감을 반복했다. 신림동에서 서점을 열기도 하고 6월 항쟁 당시 명동성당 농성장에도 있었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젊은 시절을 겪은 사람답게, 정치권에 입문한 뒤에도 과거 3당 합당 등, 정계의 휘몰아치는 소용돌이 속에서 당적이 몇 차례 바뀔 수밖에 없었다. 


열린우리당 창당 전까지는 보수 정당이었던 한나라당에 몸담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이 창당되자 민주당계 정당으로 둥지를 옮겼고, 그 후에도 쭉 이쪽에서 활동해 왔으며 2018년 기준으로 여전히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다. 


TK 출신임에도 더불어민주당 소속인 점, 선거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어 내어 노무현 전 대통령, 이정현 , 조경태 , 정운천, 홍의락 의원과 함께 지역주의 타파의 아이콘으로 회자되곤 한다.


한겨레민주당에 입당하여 정치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후 민주당에서 당직자를 역임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통합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의왕·과천에 출마했지만 신한국당 안상수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그리고 이듬해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3김 타파를 명분으로 신한국당과의 합당으로 말미암아 한나라당 소속이 되었으나, 대학교 선배이자, 멘토였던 제정구 의원이 사망하자 그의 지역구를 물려 받아 경기도 군포시로 지역구를 옮겼고,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처음으로 국회 입성에 성공하였다.


분명히 한나라당 의원이지만, 출신이 출신이다보니 여러 현안에 대해 당시 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보다 더 진보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통합민주당 시절의 동지였던 노무현이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후인 2003년 8월, 전격적으로 한나라당을 탈당해 이부영, 이우재, 김영춘, 안영근 등과 열린우리당 창당에 합류했다.


이후에도 군포시에서 연속으로 당선되어 3선 기록을 달성하였다. 따지고 보면 나름 군포시를 중심으로 하던 중진 의원이던 셈.



그러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는 지역주의 타파라는 기치를 내걸고 새누리당의 본거지인 대구로 내려가 수성구 갑으로 지역구를 옮기는 패기파격적인 행보를 벌였다. 비록 선거에서는 이한구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지만, 40.4%라는 고무적인 득표율을 받았다. 


가능성을 확인한 김부겸은 일찌감치 2016년 20대 총선에서 수성구 갑에 재도전할 것임을 밝히고 지역구 표밭 일구기에 돌입했다. 


대구광역시는 우리나라에서 새누리당 지지세가 제일 강력한 지역 이라 승리를 낙관할 수는 없었지만, 김부겸은 선거 시즌 내내 가상 대결에서 위협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2014년 7.30 재보선에서 전남 순천·곡성에서 출마해 당선된 이정현 의원에 이어 이변을 연출할 기대주로 관심을 받았다. 


그리고 19대 총선 때 민주통합당의 비례대표로 선출된 후 그 당시 더불어민주당의 현역 의원들 중에서 유일하게 대구광역시 출마를 준비하던 홍의락 의원이 컷오프를 당한 후 탈당하자, 홍 의원의 컷오프 철회와 당 복귀를 요구하며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중대한 결심까지 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하는 등 대구광역시에 도전장을 내민 민주당 정치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여론조사에서는 전부 김문수 후보에게 10%p 내외의 차이로 앞서는 것으로 나왔으며 특히 투표 8일 전인 4월 5일자 문화일보 - 포커스컴퍼니의 조사에서는 62.3%대를 얻어 김문수 후보를 무려 30%p 차이로 제쳤다.


대구광역시의 정치적 성향을 감안하면 실제 결과가 어떻게 될 지 모르지만 이 정도라면 김부겸의 당선 가능성이 조금 더 높아진 셈이라고 볼 수 있었다. 투표 당일 출구조사에서도 이 기세를 계속해서 이어가 62%라는 유력한 결과로 별다른 이변 없이 당선이 될 것으로 확실시되었다.



20대 총선 당일날 새누리당 후보군에 좌절한 대구광역시의 투표율이 54.8%로 전국 최저인 가운데 찍을 놈이 생긴 수성 갑 선거구는 전국 평균(58%)을 넘어선 68.2%의 투표율을 기록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새누리당의 김문수 후보의 51,374표(37.7%)를 크게 웃도는 84,911표(62.3%) 를 얻으면서 8년 만에 국회로 돌아오게 됐다.


지역주의 타파의 아이콘이자 대구광역시에서 당선된 유일한 더불어민주당 의원으로서.


김부겸이 당선된 요인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지역 기반을 조용히 다졌기 때문이다. 2번의 낙선 뿐만 아니라, 원외 활동에서 권영진 대구시장과도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자신은 순천의 서갑원처럼 대구광역시 발전에 발목을 잡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공약에도 민주당을 발목만 잡는 야당에서 협력하는 야당으로 바꾸겠다고 천명하기도 했기 때문에 민주당의 반감이 희석된 것도 영향이 컸다.


대구광역시에서 야당 후보가 당선된 것은 1988년 4월 26일 치뤄진 13대 총선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여담으로 이 20대 총선에서는 2003년 그와 함께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의 창당 멤버로 활약했던 김영춘이 부산에서 당선되는 쾌거를 얻기도 했다. 김영춘 또한 비슷하게 19대 총선을 1년 앞두고 자신의 출생지로 낙향해서 지역 기반을 조용히 다져 왔다. 


독수리 5형제 중 자신과 김영춘만 당선되서 아쉽다고 했다고.



이후 영남권 신공항 문제가 크게 불거졌을 때는 민주당의 유일한 대구 지역구 의원으로서 밀양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공교롭게도 김부겸을 제외한 민주당의 영남권 지역구 의원들은 모두 부산 및 낙동강 벨트 지역이어서 자연스럽게 가덕도를 지지하였고 이 때문에 민주당 내에 김부겸 vs 낙동강 벨트 지역구 의원이란 대립 구도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신공항 문제는 당 전체가 쪼개질 위기에 처할 정도로 심각한 내분이 발생한 새누리당에게 여론의 포커스가 맞춰졌고, 또 민주당의 지지층이 대부분 부산 가덕도 쪽이 낫지 않겠냐는 방향으로 심리가 쏠려 김부겸은 상대적으로 이 문제에서 관심을 많이 못 받았다. 


김부겸 본인도 활발하게 밀양 지지 활동을 벌이긴 했지만 가덕도 지지 인사 및 민주당 전체에 대해 심한 비난을 가하지는 않아 자극적인 뉴스를 만들지도 않았고. 그래서일까, 경우에 따라서는 "그때 김부겸은 밀양을 지지했을 거 같은데 왜 뉴스가 없지?"라며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다고(...)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에는 여당의 대구 국회의원이 되었고, 나중에는 행안부 장관으로 발탁되면서 지역구에 있는 그의 사무소에는 대구광역시 각지의 민원이 쇄도하고 있다고 한다. 사무소 직원 말로는 "여기는 수성구 민원만 받으니까 다른 지역구 민원은 그 지역구 의원의 사무소에 문의하라"는 말이 입에 맴돌 정도로 민원이 몰린다고.


이장에서 시작해 군수를 거쳐 행정자치부 장관 & 경남지사라는 자리에까지 오른 극적인 경력의 소유자로, 참여정부 시절 초대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임명돼 친노 정치인으로 분류되는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며,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는 무소속 신분으로 경남지사 선거에 출마해 53.5%의 득표율로 당선되는 기염을 토해 예전에는 민주당의 대선 주자감으로 거론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2012년 18대 대선에 출마하려고 경남지사직을 내던지는 정치적 자살 행위를 저지른 데다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문재인 당시 후보와 경쟁하면서 보인 그의 행보가 두 사람 간의 아름다운 경쟁을 기대했던 친노 성향 지지자들로부터 큰 실망을 사면서 정치적 고난기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지난 2014년 7.30 재보선에서 도전했다가 떨어졌던 곳인 경기도 김포시에서 20대 총선때 재도전해 당선되면서 가까스로 재기의 기회를 잡았다. 그 덕에 대한민국의 제20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지역구는 경기도 김포시 갑 지역이며 소속 정당은 민주통합당의 후신인 더불어민주당이다. 친노성향의 정치인인데도 불구하고 2012년 대선 후보 경선 때 생긴 앙금으로 인하여 문재인 대통령과는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2017년 19대 대선 때 문재인 대선 캠프의 공동 선대위원장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가난한 어부의 5남 1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해외로 돈벌이를 나간 형들을 대신해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하는 등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남해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국민대학교 어문계열에 합격했으나 등록금 문제 때문에 진학을 포기했고, 이 후 경북전문대학교 행정과를 거쳐 동아대학교 정치외교학과로 편입해 졸업한다. 대학 시절 동생 김두수와 함께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고향 남해로 낙향해 민중의당 후보로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경남 남해군-하동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5%도 채 되지 않는 득표율로 민주정의당 박희태 후보에 밀려 낙선하기도 했다.




이 후 고향 이어리의 이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여러가지 활동을 통해 기반을 쌓아나갔고, 1995년 치러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남해군수로 당선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당시 만 36세로 전국 최연소 지방자치단체장이었으며, 지금까지도 선거로 선출된 지방자치단체장으로는 최연소 기록이 깨지지 않는 중이다. 이어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당선에 성공하여 재선 남해군수를 지냈다.





남해군수 재임 시절인 1998년 MBC 다큐멘터리 <성공시대>에서 무소속에 젊은 나이라는 핸디캡을 딛고 군수로 당선된 그의 이력이 소개된 적이 있다. 당시 방송으로 그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민선 2기 남해군수 임기가 끝나갈 무렵인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경상남도지사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노무현을 만난 후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했다. 새천년민주당 소속이었던 상태에서 지역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났고 결국 17%의 저조한 득표율로 낙선했다. 상대 후보였던 한나라당의 김혁규가 넘사벽이기 때문이기도 했는데, 당시 김혁규는 무려 74% 이상의 득표율로 김두관을 개박살냈다.

이후 참여정부가 들어서자 참여정부 초대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취임했다. 



문재인 당대표의 저서인 '문재인의 운명'에 따르면 당시 장관직 수행평가에서 1위를 여러차례 차지할 만큼 장관직 수행을 잘 했다고. 그러나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그의 장관직 수행에 대해 크게 부정적이었으며, 한총련이 미군기지에 침투하여 불법시위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국회에서 해임건의안을 제출했고, 결국 해임건의안이 통과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해임건의안을 거부하고 그의 장관직을 지킬 것이라고 했으나, 계속 논란이 되자 그는 스스로 사의를 제출하면서 결국 장관직에서 퇴임하였다. 


사실, 그동안 국회에서 해임건의안이 통과된 경우는 여야를 불문하고 스스로 사임해야되는 것이 관례다. 승복하지 않으면 역풍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불명예스럽게 퇴임한 셈이 되었으나, 민주당계에서는 그는 한나라당의 딴지로 인해 피해를 본 것이라는 시각이 강해지면서 차츰 민주당계에서는 떠오르는 정치인으로 올라섰고, 열린우리당이 생기자 바로 합류했다. 


그리고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의 공천을 받아 남해군-하동군 지역구로 출마하였고, 당시 탄핵 논란으로 열린우리당에 상당히 유리하다는 평이 있어 어느때보다 당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선거운동 초반 여론조사에서도 20% 가까운 우위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한나라당의 박희태후보가 워낙 막강하다보니 박희태에게 7000표 차이로 석패했다. 2년 뒤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경남지사에 다시 도전했으나, 한나라당의 김태호도지사에게 압도적으로 밀리며 낙선. 2년 뒤에는 지역주의를 의식했는지 무소속으로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같은 지역구로 출마했지만 마찬가지로 한나라당의 여상규 후보에게 밀리며 40%의 득표율로 낙선하였다.




이로서 2년 주기로 걸친 4번의 선거에서 연속으로 2위로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러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마찬가지로 경상남도지사에 도전했고, 무소속 신분이었던 그는 민주당,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후보와 단일화되어 대통합 야권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53% 득표율을 얻으며 당선에 이달곤후보를 꺾고 성공했다. 본인으로선 도지사 선거만 3번의 도전 끝에 당선되었다. 



중앙에서 활동하던 이달곤에 비해 오랫동안 PK에 몸담아온 김두관이었기에 지역밀착형 후보라는 태그가 승리의 큰 요인이라는 분석이다. 더욱이 2006년을 기점으로 세를 보이기 시작한 PK의 진보층도 큰 활약을 하기도 했다. 이로서 지역주의 타파의 아이콘이 되면서 거물급 정치인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4대강 사업을 공개적으로 반대해 경남내 공사를 일시 중지 시켰는데, 이에 따라 중장정부가 사업권을 회수해 완전 중단시키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에 대해 본인은 경남이 불의에 대해 저항했음을 남기는 것이라고 했다.


도지사 취임 후 다시 민주당에 입당하여 무난히 도정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재임 2년차인 2012년 경남지사직을 돌연 사퇴하고 제18대 대통령 선거 경선에 출마하였다. 이로 인해 경상남도 진보층 사이에서는 배신감(?)이 쌓이게 되었다.

경선 결과, 손학규에게도 밀리며 14%의 득표율로 3위라는 초라한 성적을 받아야 했다. 


자세한 경선 과정은 이곳을 참조. 같은 PK를 기반으로 하는 문재인 후보가 월등히 지지율이 높은 상태라 후보로 선출될 가능성이 애초에 높지 않았는데, 도지사직을 뛰쳐나와 무리하게 경선에 참여하여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꼴이 되어버렸다는 비난을 받았고, 결국 대선과 병행하여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의 홍준표가 당선되면서 어렵게 얻은 경남지사 자리를 다시 새누리당쪽에 헌납한 꼴이 되어버려, 야권 지지자들에서까지 평생까임권을 얻게 되었다.



그의 이름을 거꾸로 발음한 '관두김' 이라는 불명예스런 별명까지 생긴 것은 덤이다. 경선에 참여하는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 치고 왜 경남지사직을 사퇴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사실 안철수의 국회의원 사퇴도 그렇고 대선후보 또는 경선후보 역할과 국회의원, 도지사직을 동시에 수행하면 한쪽에 소홀하게 된다는 나름의 명분이 있기는 하다. 실제로 안희정, 남경필 등이 대권도전으로 인한 도정소홀 문제로 약간 논란이 있기도 했다.


문제는 그러한 명분보다 도지사를 다시 뽑는데 드는 시간과 비용, 그리고 자신을 뽑아준 도민들에 대한 신의 문제가 더 크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두관 이후로는 경선출마를 이유로 지사직을 사퇴하는 사례는 없다.


졸지에 다시 재야가 되어버린 그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초청으로 독일에서 1년 간 연수를 받은 뒤, 경남지사 사퇴에 대해서 사과하고 나서 2014년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하지만, 지역구는 당초 활동했던 PK가 아닌 경기도 김포시로 정해졌다. 무런 연고도 없는 지역으로 나서자 낙하산이나 뜨내기라는 비판이 생겨났지만, 본인으로선 대권 도전을 위해서는 수도권에 힘을 뻗어야 한다는 정치적 계산이 들어간 수였다.




거주지도 김포로 완전히 옮기고 본인은 분투를 했지만, 지역 토박이들은 PK 그 자체라 볼 수 있는 그를 좋게 볼 리가 없었고 그나마 지역 정체성이 덜한 신도시 지역에 승부수를 둬야 했는데, 그것마저도 승리여부에 의문을 둬야 했다. 결국 경쟁상대인 새누리당의 홍철호후보에게 밀리며 4년만에 낙선의 쓴맛을 맛봐야 했다. 예상대로 농촌지역에선 홍철호에게 몰표가 쏟아졌고, 신도시에서도 패배하여40% 득표율로 선거를 마감했다. 


경남지사 당선 배경에는 PK 지역밀착형 후보였던 점이 상당히 먹혔던 것에 비해 이번 선거에서는 오히려 그 점이 낙선의 큰 요인이 되어버리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이후로도 경남으로 주소를 옮기지 않고 계속 김포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다. 마침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김포시 선거구가 갑/을로 분리되면서 자리가 하나 더 늘었고, 김포시 갑 선거구 공천을 받아 출마하게 되었다. 새누리당측의 상대는 김동식 전 김포시장. 더불어민주당에서는 PK 출마를 기대했지만, 본인은 대권도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김두관 본인 말로는 경남지사 자리에서 중도 하차해 다시 보수정당의 홍준표에게 헌납한 그 원죄 때문에 못 내려가고 있다고 하지만 믿거나 말거나다. 




현재까지 나온 관련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새누리당의 김동식 후보보다 5~10% 안팎의 우위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포시(갑)이 도시 인구가 많아 야권세가 상대적으로 강하다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하는 듯. 결과를 두고볼 일이지만, 일단 2014년 재보궐 선거때보다는 해볼만한 승부로 여겨진다. 


김동식 후보는 김두관에 비해 무게감이 떨어지는데다김포시장 시절 권력형 비리(!)로 처벌받은 전과가 있다.

여담으로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도 지역 출마자 중 91년 이후 역대 공직선거 출마횟수가 8회로 가장 많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포함하면 9회이며,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마치면 10회가 된다. 승률이 3할대라는 게 함정

결국 제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려 59.3%를 받아 前 김포시장인 김동식 후보를 완전히 KO 시킴으로써 국회의원직을 처음으로 가지게 되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 선거운동기간에 경남에 내려가서 똑같은 내용으로 고해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대충의 내용은 '죄송하다 내 잘못이다'로 시작해서 '중도사퇴는 잘못됐다' → '내가 관둬서 홍이 됐다' → '나는 준비가 미흡했다' 이 순으로 간 다음 그 다음 문재인 후보를 지지해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마무리 하며 여기에 홍준표를 벌해달라는 말은 덤.

한때 유력한 여당 차기 대권주자였으나, 성범죄 혐의로 몰락한 인물.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전 선출직 공무원인 충청남도지사를 역임하며 민주당의 차세대 대권주자로 주목받았으나 2018년 성폭행 논란으로 제37대(민선 6기) 충청남도지사를 사퇴하고 정치 활동을 중단했다. 도지사가 겸임하는 충남도립대학교 이사장직도 내려놓는다.


2018년 3월 6일 더불어민주당 윤리위원회에서 전원 일치로 제명 및 출당 조치되었다. 소명 기회를 주었으나 안 전 지사가 스스로 거부했다고 한다. 참고 


대표적인 친노라고 주장하는 인사이다. 절친이었던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와 더불어 '좌희정-우광재'로 불렸을 정도이며 노 대통령의 사망 직후엔 유시민과 함께 장례식장을 지키며 조문객들을 맞이하기도 했다. 임기 말 여러 실책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잃어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한나라당 측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면서 정권이 교체 되자 이러한 상황을 함축해서 친노 진영을 '폐족'이라고 지칭한 바 있었다. 친노의 대표 인사로 분류되는 인물의 발언이었던 만큼 당시에는 진보 진영의 패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로 받아 들여졌다.



대통령의 측근이나 징역살이로 그럴듯한 정치적 커리어도 없고 친노 진영이 '폐족' 되면서 안희정이라는 한 명의 정치인으로서 생명이 끝났다는 평가가 많았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에 사분오열 되는 와중에도 항상 민주당을 지켰고 노 전 대통령의 비극적인 최후로 뭉쳐진 추모 여론, 이명박 정부의 정책실패 연속에 따른 국민적 실망과 이로 인한 참여 정부에 대한 재평가 등의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면서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진실함 마음을 보이며 다소 보수색 강한 충남의 지사로 당선되어서 수감 생활로 마땅한 정치적 커리어 없던 상황에서 충남지사 안희정으로 화려하게 거듭났다. 


이명박 대통령이 이때의 참패 때 왜 여권에는 이광재, 안희정 같은 사람이 없냐며 아쉬워했을 정도로 친노인사치고 보수진영 인사들에게도 호평받는 편. 아무래도 친노 중엔 가장 온건파인 것도 원인이다. 이러한 온건함을 통해 조선일보 등의 언론을 통해 보수 진영에 손을 뻗는 등 중도층에게도 호감을 얻는 중이며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의 충남도지사 재선을 계기로 더 이상 '친노'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고서도, 스스로의 능력을 바탕으로 정치세력화를 추구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일부 민주당 강경 지지자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온건파적인 면모 때문에 강한 비토 정서를 보이고 하지만 적어도 안 지사의 행정능력은 탁월하다고 인정할 정도.



중도적이고 새정치를 강조하는 인물인 만큼 안철수 대표와 간혹 비교되기도 하는데 안 지사는 자신은 진보 진영의 정치인이라고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있다. 자신은 김대중-노무현을 잇는 장자 가 되고 싶다고 말할 정도. 자신이 말하는 새 정치는 새로운 진보와 보수의 틀을 만들자는 소리지 안 대표처럼 그 중간에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소리가 아니라며 자신과 안 대표는 다르다고 선을 긋고 있다. 


출중한 행정 능력과 대한민국 정치계의 메인 스트림으로 부활한 친노의 적통이고, 여야 동년배 정치인들 중에서 돋보이는 수려한 외모[10], 준수한 화술과 논리력, 인생역정은 연설이나 토론, 방송, 유세 등에서 대중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플러스적 요소를 갖추고 있지만, 19대 대선에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날리기 전에는 대중적 인지도를 갖추지 못해 본인이 말하는 것 처럼 '지방 사또'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중적 인지도를 얻기 전부터 전국적으로도 상당히 주목받던 차세대 정치인으로 주목 받았고,충청 대망론의 대표주자로 지역민들 사이에선 이미 인식되고 있었다. 실제 충청지역에서는 도지사로서 보여준 행정능력과 인품에 대해 세대를 막론하고 안희정 지사를 대단히 높게 평가하는 여론이 조성되어 있다.


이러한 충청 민심을 증명하듯 2015년 9월에 충청인이 선호하는 '충청 출신' 정치인에 차기 대권주자로 꼽혔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2위 - 11.4%)을 제치고 1위 - 26.6%를 기록했다. 도지사로 재임하고 있는 충남지역(39.6%)에선 무려 10명중 4명이나 안희정 지사를 선호 정치인으로 꼽았다. 그 외에 대전(23.8%), 세종(34.8%)로 각각 지역에서 1위이다. 한편으로 충북에선 충청의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세였는데 10.8%로 충북이 고향인 반기문 현 유엔 사무총장, 도지사로 재임 중인 이시종 현 충북지사에 이어 3위에 올랐다.  고무적인 것은 야권의 취약세대인 55세 이상에서도 22.9%로 1위를 차지했다는 것과, 선거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30~54세의 선호도가 30.3%를 기록했다는 사실이다. 19~29세에선 18.4%의 선호도를 보였고 전체적으로 남녀간 지지차이(남성 26.4%, 여성 27.0%)는 미미했다. 이 여론조사를 통해 안희정 지사가 '충청대망론'의 선두주자임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권 단일화 실패에도 불구하고 더불어민주당이 대전광역시-충청남도-세종특별자치시 지역에서 집권 새누리당과 무승부[11]를 기록했고, 아울러 그를 최측근에서 보좌했던 김종민 전 정무부지사(충남 논산-계룡-금산), 조승래 전 비서실장(대전 유성 갑), 정재호 전 정책특보(경기 고양 을)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안희정 마케팅'이 더민주 지지층에게 상당한 호소력이 있다는 점까지 입증했다. 이 중에서 김종민 후보는 그 피닉제의 독주를 꺾으면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는 그 특유의 안정감으로 반기문 전 사무총장의 불출마 선언과 사분오열된 보수 정당으로 길 잃은 중도 ~ 중도 보수 지지층들이 안 지사에게 몰려 중도 - 보수 외연 확장성을 보여주며 대선 후보 선호도 2위 까지 치고 올라갔었다. 


상당히 젊은 만큼 지금처럼 계속해서 순탄한 행보와 결정적인 성과 몇 가지를 내준다면 충분히 2022년 유력한 대권주자로 떠오를 것으로 보였다. 


신년 여론조사 결과 여권 지지자들이 차기 대통령으로 적합한 인물로 안희정 충남지사를 꼽았다.


그러나....


앞서 말했다시피 비서 성폭행 논란으로 그가 바라던 대통령의 꿈과 정치 인생이 한 줌의 먼지가 되고 말았다.



JTBC 뉴스룸에서의 김지은 비서의 주장 직후 네이버 및 다음의 실시간 검색어는 모두 안희정과 관련된 단어로 그랜드슬램을 이루고 말았다. 안희정이라는 거물 인사의 사회적 파급력이 얼마나 컸던 상황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018년 3월 5일 방송된 JTBC 뉴스룸에서 정무비서 김지은은안희정이 자신의 수행 비서를 8개월 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성폭행 및 성추행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보도됐다. 최초 보도(JTBC) 해당 보도에 따르면, 안희정의 수행 비서를 했던 김지은은 "안 지사에게 8개월 동안 4번에 걸쳐 성폭행과 수시로 성추행을 당했다"고 한다.


김지은은 3월 5일 방송된 JTBC 뉴스룸에 직접 출연하여 손석희 앵커와 인터뷰를 하였다. 김지은의 말에 따르면 안 지사가 '자신(김지은)은 안 지사의 거울이고 투명하게 비추며 그림자같이 행동하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안 지사가 자신의 우위와 권력의 우위에 있었기에 반박이나 저항은 불가능하였다고 한다. 게다가 2018년 2월 25일에는 안 지사가 "잊어라, 스위스와 러시아에서 본 풍경을 생각하라"고 하며 미투 운동을 의식한 듯한 발언을 하며 김 씨에게 지속적으로 미안하다며 사죄하였음에도, 이후에도 계속 자신을 성폭행하였다고 했다. 


김지은은 "안 지사의 미투 운동 언급은 "'미투 운동을 자신의 앞에 언급하지 마라.'라는 뜻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안 지사는 이 사실에 대하여서 깊이 반성한다는 뉘앙스의 말들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 씨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안 지사라고 한다. 국민이 자신을 지켜주었으면 하고 진실이 밝혀졌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추가로 안 지사에 의한 다수의 피해자가 있는 거로 안다고 하여, 김지은에 이어 추가로 피해자가 나올지 주목되었는데 또 다른 피해자가 나왔다.



여성변호인협회가 중심이 되어 김지은을 위한 변호인단까지 꾸렸으며#, 김지은은 2018년 3월 6일 안희정을 피고소인으로 하는 고소장을 서울서부지검에 제출했다. 그에 앞서 2018년 3월 6일 충남지방경찰청 관계자는 "언론을 통해 공개된 안 지사의 성폭행 혐의에 대해 충남지방경찰청이 인지수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향후 수사는 충남지방경찰청 2부장(경무관)이 직접 관여하는 체제로 진행된다.그리고 같은 날 JTBC 뉴스룸에는 피해자가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 선배 신용우가 출연하여 취재진에게 당시 김 씨의 SOS를 받은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밝혔다. 김 씨의 인터뷰를 보고 안 전 지사와의 문제를 알면서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인터뷰에 나섰다는 신용우는 검찰 조사도 받겠다고 말했다.


JTBC 취재진은 안희정 비서실 측에 입장을 물었고, 비서실 측은 부적절한 성관계는 인정하였지만 합의에 의한 관계라고 주장 하였다. 그리고 김지은 씨가 자신 외에 안희정에게 당한 또 다른 피해자가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추가 피해자가 있다는 것은 명백한 오보”라며 부인했다. 그런데 이 해명이 무색하게 안희정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또 한 명의 피해자가 등장했다. 


2018년 3월 7일 방송된 JTBC 뉴스룸에서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또 다른 피해자의 주장이 전파를 탔다. 해당 피해자는 안희정이 설립한 싱크탱크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직원으로, 안희정 지사에게 수 차례 성폭행과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2015년 행사 뒤풀이에서 성추행이 시작됐고, 이후 2016년 7월 논산 종교 시설에서 성폭행 시도를 당했으며, 8월과 12월 또한 성폭행을 당했다고 설명했다. 안 전 지사가 유력한 대선후보로 떠오른 2017년 1월에도 서울 여의도의 한 호텔에서 성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이 피해자도 안희정을 검찰에 고소할 예정이라고 한다.


사건이 알려진 후, KBS 취재진이 김 씨의 폭로에 관한 안희정 본인의 입장을 듣고자, 충남도청까지 직접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했다. 안희정은 관사에도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2018년 3월 6일 오전 12시 50분경 안희정 본인이 직접 사과문을 올렸다. 


 




사과문에 따르면 '합의에 따른 관계였다는 비서실의 입장은 잘못입니다' 라며 김지은의 주장이 맞는다고 시인, 즉 성폭력을 자행했음을 스스로 시인했으며, 도지사직 사퇴를 포함하여 모든 정치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그리고 2018년 3월 6일 10시 35분, 안희정은 충청남도의회 앞으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도지사직을 사임하였다. # 안희정 지사가 임명한 정무부지사까지 사퇴하여 남궁영 행정부지사(국가직 공무원 파견직)가 권한을 대행하게 되었다.


주장 후 만 하루가 지난 현재 안희정의 소재파악이 되지 않고 있다. 즉 잠적해 버렸다. 권한 대행을 맡은 인물인 남궁영 행정부지사[9]조차도 당사자와 전혀 연락이 닿지 않는 상황이어서 이에 대한 비판이 나오고 있었다.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안희정 전 충남지사와 측근들



잠적하고 있던 안희정은 2018년 3월 8일 오후 3시 충청남도청에서 공식입장을 발표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이번 논란에 대해 변호사를 선임해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검찰에 출석하기 전에 국민 여러분, 충남도민 여러분 앞에서 머리숙여 사죄드리고자 하였습니다. 모든 분들이 신속한 검찰수사를 촉구하는 상황에서,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검찰에 출석하여 수사에 성실하게 협조하는 것이 국민 앞에 속죄드리는 우선적 의무라는 판단에 따라 기자회견을 취소하기로 하였습니다. 거듭 사죄드립니다. 그리고 검찰은 한시라도 빨리 저를 소환해주십시오. 성실하게 임하겠습니다.


그러나 3월 8일 검찰 출석이 우선이라며 예정된 기자회견을 취소하였다. 안희정, 8일 오후 3시 기자회견 취소.."검찰 출석이 우선" 기자회견을 일방적으로 취소한 것에 대해 상당한 비판이 있었다.



안희정, 2018년 3월 9일 오후 5시 서울서부지검 자진 출석

검찰이 출석을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2018년 3월 9일 오후 5시 서울서부지검에 자진 출석했다. 그 후 서부지검 앞에서 입장 표명을 했는데 국민과 가족, 충남도민들에게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 성실히 검찰 조사에 응하겠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오늘...

[연합뉴스] 안희정 첫 재판 공방…"덫 놓은 사냥꾼" vs "법적책임 없어"(종합)

검찰 "충남도청 다른 성추행도 해결 안돼"…安측 "김씨, 피해자로 볼 수 없다"

첫 공판 김지은씨 방청·다음번 증인신문 …安, 안경 벗고 눈 감은 채 듣기만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8/07/02/0200000000AKR20180702083751004.HTML?input=1179m



노동 전문가이며 더불어민주당 소속 19대 국회의원이었다. 이후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 여성가족비서관으로 재임하였다.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의 비례대표 3번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초선 의원이다. 


2012년 6월부터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는 '쌍용자동차 문제 해결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을 비롯해 박원순 시장 희망서울 정책자문, '청년유니온' 자문 등 노동문제에 관한 다양한 자문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는 더불어민주당 내의 노동분야 전문가로서 활약하고 있다. 


7월 20일, 전날에 있었던 국정원 직원 공동성명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본인의 페이스북에 남겼다. 


이 글을 통해 20여 년 전에 안기부로부터 매우 심한 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고문 후유증으로 심장 판막 이탈증, 폐렴, 폐결핵, 종양, 장염, 후두염 및 밀실공포증과 고소공포증에 시달렸으며, 이후 결핵이 장결핵으로 악화되어 교도소에서 장을 50cm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이후 인터뷰에서 체포되는 과정에서 허리를 심하게 걷어 차여 그 후유증으로 만성척추 통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감옥에 복역하는 중에도 여러 번 구타 당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후유증 때문인지 유산도 했다고 한다.



체포 되었을 때 국제엠네스티에서 양심수로 지정하였고, 건강이 악화되자 적절히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1995년 7월 엠네스티에서 법무부 장관에게 탄원서를 보내는 한편 전 세계 회원들에게 긴급 행동(Urgent Action)을 발행하여 국제적 문제가 된 바 있다. 



해병대 중령 출신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 어릴 때부터 꽤 유복하게 자라왔다고 한다. 동네가 서울특별시 관악구여서 자신과 달리 친구들 상당수는 판자촌에서 자랐다.


그로 인해 인상적인 사건을 2번 겪었다고 한다. 


하나는 초등학교 때 친구 집에서 놀다가 친구를 장난 삼아 밀었더니 벽을 뚫고 옆집으로 나간 일이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세게 민 거야 벽이 뚫린다는 것 자체에서 놀랐고, 그 점에서 자신의 집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중학교 때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집을 찾아 갔더니 흙집에서 세를 살고 있었다고 한다. 본인은 부유하게 자랐었기에 당시 그런 생활수준의 격차를 잘 이해하지 못했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성공회 교회를 다니던 기독교인이다. 한때는 수녀가 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기도 했다고... 부모님의 만류로 수녀의 길을 포기하고 서울대 사회학과로 진학했으며, 이후 줄곧 노동과 사회 문제에 관심을 쏟았다고 한다.


1992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의 핵심 인물로 분류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간 복역하였다. 은수미는 본명이 아닌 조명혜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사노맹의 정책 실장 겸 중앙 위원으로 활동했다.  1992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되었고, 약 6년간 복역하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시기 사면 및 복권되어 출소했다. 


사노맹에서 함께 활동하고 비슷한 기간 옥살이를 했던 백태웅은 미국유학을 갔지만, 은수미는 1998년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학과에 복학하여 졸업한다. 이후 서울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친다.



2005년 2월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여의도에 있는 한국노동연구원에 재직하게 된다. 그가 처음 입사할 당시, 운동권 경력으로 기관에서 부담스러워하는 시각도 있었으나, 워커홀릭 기질과 노동 이슈에 대한 열정적인 관심으로 엄청난 연구 프로젝트를 소화하고, 여러 편의 연구 보고서와 연구 논문을 냈다. 


주로 노동 문제, 노동 시장의 비정규직, 여성 노동, 노동유연화와 노사 관계 등의 전문가로 활약하였으며, 이때에만 해도 신문 기고 글 쓰는 것 외에 언론 노출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대중적 유명세는 전혀 없었지만, 업계에서는 노동 부문 전문가로서 상당히 인지도가 높았다. 그에 힘입어 민주통합당의 상위 번호 공천을 받게 된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3번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민주통합당에서는 은수미가 노동 문제 비정규직 분야 전문가이며 관련 정책 입안 능력도 탁월하다고 밝혔다. 인기 시사 팟캐스트 방송인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에서 비정규직 탄생을 합법화시켰던 신한국당(지금의 새누리당)의 노동법 날치기를 다뤘던 편에 출연해 당시 상황에 대한 부연 설명과 일하는 사람들이 겪는 부당 대우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다.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 개막의 듀오가 된 강철 나비. 이 별명은 평소 겉으로는 한없이 여려 보이고 눈물이 많지만 누구보다 심지 굵고 강단 있다는 의미이다. 은 의원의 후원 회장이자 사노맹 시절의 동지였던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은수미 의원에게 붙여준 별명이다.


2016년 2월 24일, 테러방지법 본회의 통과를 막기 위한 필리버스터에 참여할 것으로 의견을 밝혀 많은 관심이 주목되고 있다. 그것도 이종걸 원내대표가 계획들 중에서 밀었던 필리버스터에 대해 김광진 의원이 총대를 매고 나서겠다고 자청하자 이에 "아마 우리가 질 겁니다. 하지만, 우리부터 지는 게 낫지 어떻게 국민더러 지라고 합니까?"라고 말하며 김광진 의원에게 힘을 보태 필리버스터를 가능케 했다.


김광진 의원이 약 5시간 동안 필리버스터를 하며 버텨주는 동안 충분한 자료를 모은 다음, 2월 24일 오전 2시 30분 필리버스터 3번째 발언자로 발언을 시작했다. 故 박한상 의원의 10시간 15분의 기록을 넘기고, 12시 48분에 필리버스터를 끝냈다. 마무리 발언이 특히 큰 반향을 일으킨 탓인지, 다음 날 오전까지도 실시간 검색어 순위권에 등재되어 있었다. 


종전 기록은 전날에 첫 번째 발언자로 나선 같은 당의 김광진 의원이 세운 5시간 34분. 이 최장 기록 이후 은수미 의원의 고문 후유증이 여러 언론에서 재조명되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