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발의 달인, 대한민국의 전 축구선수, 전 축구감독. 별명은 왼발의 달인.
...한국 월드컵 사상 첫 선취골의 주인공. 그러나... 3분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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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대학교를 졸업했고 1990년 K리그 드래프트에서 대우에 지명되었다. 데뷔시즌부터 주전으로 뛰며 4골 3도움을 기록하며 활약. 비록 신인왕은 현대의 송주석에게 넘겨줬지만 1991 시즌에도 소포모어 징크스 따위 씹어먹는 활약으로 34경기에서 7골 5도움을 기록.  팀의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이 해에 처음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도 승선하여 A매치 데뷔전을 치른다.




1993~94 시즌 동안에는 국가대표팀 차출 관계로 클럽에서 많은 경기를 뛰지는 못 했지만 국가대표팀에서의 활약으로 전국구급 유명세를 얻는다. 특히 1994 월드컵 1차예선 여덟 경기에서 여섯 골을 넣으며 대중들에게 하석주 이름 석 자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하석주 하면 왼쪽 윙백이 떠오르지만 월드컵 예선전만 해도 본업은 공격수였다. 데뷔한 대회인 대통령배국제대회에서 MVP와 득점왕도 차지할 정도였으며 이땐 등번호도 9번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전통적으로 황선홍이나 최용수처럼 키 크고 떡대 좋은 대형 스트라이커를 선호했기에, 하석주의 포지션은 자연스럽게 왼쪽 윙/윙백으로 전환되었다. 



카타르 도하에서 열렸던 최종예선에서도 이란, 북한을 상대로 각각 골을 넣었다.

그러나 1994 미국 월드컵 본선에서는 두 경기 교체출전에 만족해야 했다. 특히 볼리비아 전에 교체로 투입되어 후반 추가시간에 황선홍의 멋진 힐패스를 이어받아 1:1 결정적인 찬스를 맞이하였으나 키퍼 선방으로 골을 넣지 못하였다. 비록 황선홍에 비난이 집중되어 묻힌 감이 있으나(...) 하석주도 만만찮게 개발이라는 욕을 먹었다. 그때 비난과 부담감을 못이겨 김호 감독에게 다음 경기인 독일전은 도저히 못 뛰겠다고 하소연했고, 결국 독일전은 결장했다.




그러나 그때 찬스를 놓친 왼발슛이 한이 되어서 왼발킥을 매일 미친 듯이 연습했다고...그렇게 그는 왼발의 달인이 되었다. 이후 하석주의 기량은 만개하여 국가대표에서도 왼쪽 미드필더 자리를 꿰찼고, K리그에서는 1996 시즌 두자릿수 득점(...)까지 기록한다. 이런 활약을 바탕으로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축구선수단에 감독인 아나톨리 비쇼베츠의 강력한 요청으로 와일드카드로 선발되었다. 당시 소속팀인 대우에서는 보내기 싫어서 기브스까지 하면서 선발을 물러주길 바랐으나 비쇼베츠가 지정병원에 보내서 재검사까지 시전하며(...) 끝끝내 올림픽에 데려갔다. 그정도로 큰 기대와 비중을 가지고 있었단 얘기. 





1997년을 맞아 기량이 절정기에 달해 97년에만 A매치 3골-8도움을 기록했고 대통령배의 후신인 코리아컵에 출전하여 도움 4개로 대회 MVP가 되었으며  소속팀 대우 로얄즈의 3관왕, 즉 트레블을 이끌었다. 개인적으로도 20-20 클럽을 달성했으며 프리킥으로만 4골을 넣었을 정도로 리그에서도 맹활약했다. 1998 프랑스 월드컵 최종예선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했고 UAE전에서 특유의 공격가담으로 선제골을 넣기도 한다. 이렇게 하석주는 차범근호 체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선수였고 월드컵 본선에서도 활약이 기대되었는데...




멕시코전 초간단 요약





프랑스 월드컵 조별예선 첫번째 경기인 멕시코전 전반 27분, 하석주의 왼발 프리킥이 수비벽에 맞고 방향이 꺾이면서 절묘하게 반대편 골대로 들어갔다. 대한민국의 월드컵 출전 사상 최초로 넣은 선제골이었다. 즉 한국은 월드컵 사상 처음으로 '이기고' 있었다! 당시 조 편성상 한국은 첫 경기 멕시코를 반드시 이겨야 16강 진출을 노려볼 수 있었기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골이었다.



그러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인 전반전 30분, 그러니까 골을 넣고 3분여 지났을 무렵에 상대의 라몬 라미레스 선수에 백태클을 걸었다는 이유로 레드 카드를 받고 퇴장당했다! 결국 하석주의 퇴장 이후 한국은 급격한 체력저하로 후반전에만 3연속 실점하며 1-3 역전패했다. 「하나 넣고 석점이나 주다니!」 라는 삼행시를 만든 바로 그 경기. 

MBC보도 1분경 이 MBC뉴스 화면을 보면 확실히 고의적인, 그러나 당시까지는 많이들 하던 백태클이었다. 하석주 자신도 퇴장은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가 레드카드를 보고 어이없어하고, 옆에 있던 고종수도 판정에 놀라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국내에선 한국이 약소국이라서 판정에서 피해를 봤다는 흔한 레퍼토리가 반복되었다. 





정몽준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FIFA 회장 선거에서 제프 블라터의 반대파로서 렌나르트 요한손 당시 UEFA 회장을 지지한 데 대한 보복이라는 음모론도 나돌았고 여튼 이래저래 설들이 많았다. 일각에서는 차범근 당시 감독이 선제득점으로 고양된 선수들을 잘 컨트롤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하석주도 나중에 인터뷰하기를 골을 넣고 너무 기쁘고 흥분되서 뭘 어째야 할지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다분히 의도적으로 위험하지 않은 지역에서 파울을 하고 맘을 좀 다스리려고 했다고 한다. 스스로 옐로카드까지는 각오했다고 했는데, 정작 심판이 빨간 카드를 꺼내자 처음엔 잘못 꺼낸 거 아닌가 의심했다고 한다. 백태클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고, 설명도 잠깐 들었을 뿐이라 그걸로 퇴장까지 당할 줄은 몰랐다고(...) 참고로 하석주 개인적으로도 축구를 시작한 이래 공식경기에서 퇴장 당한 것은 이 경기가 처음이자 유일한 경기였다. 





아무튼 누구나 동의하는 것은 하석주가 시범케이스로 재수없게 걸렸다는 것이다. 당시 FIFA에서는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비신사적인 백태클에 대한 제재에 중점을 두었고, 바로 퇴장까지 줄 수도 있다고 공언한 바 있다. 그런데 말은 뱉어놨지만 막상 1라운드가 절반이 지나도록 퇴장 사례가 하나도 없으니 엄포가 머쓱해질 수 있던 상황에서 하석주가 재수 없게도 그 엄격한 판정의 시범케이스에 걸려 퇴장당한 것이라 볼 수 있는 것. 


그 증거(?)로 옐로카드 없이 바로 퇴장당한 경우에는 보통 2경기 출장정지인데 하석주는 고의성이 없었고 심판의 미숙함도 있다고 판단되어 1경기 출장 정지로 완화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여하튼 하석주는 프랑스 월드컵 1호 퇴장 선수로 기록되었고, 한국 축구팬들은 이후 같은 대회에서 다른 나라 선수들이 하석주보다 더 거친 백태클을 하고도 옐로카드나 구두경고 정도로 넘어가는 걸 보며 아쉬운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하석주에게 퇴장 명령을 내린 오스트리아의 귄터 벤쾨 주심은 2년 뒤 유로 2000의 프랑스와 포르투갈의 4강전 연장전에서 고의라고 보기엔 애매한 포르투갈 수비수 아벨 사비에르의 핸들링을 보고 프랑스의 결승골이 된 페널티킥을 지시해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원칙대로 판정하는 심판이었다는 얘기.



최근 김어준의 블랙하우스에 나와서 밝힌 바로는 98년 프랑스 월드컵 백태클 사건 이후 미안한 마음에 차범근감독을 20년째 피해다녔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아직도 그 후유증이 가시질 않아서 항상 죄인같은 기분으로 살고있다고 한다. 당시 백태클 퇴장 당한 이후 너무 충격이 커서 벨기에 전까지 훈련이 없으면 인근 낙시터에서 낚시를 하며 맘을 달랬다고 한다 한번은 큰 잉어가 잡혀서 기뻐해야 하는데 잉어의 맑은 눈을 보고 잉어를 안고 펑펑 울었다고...하석주의 고백은 이날 방송의 백미로 주위사람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김어준 총수는 하석주같은 케이스가 있으니 함부로 국가대표에게 비난과 욕을 하면 안된다고 강조하기도. 후에 제작진이 차범근 감독과 만남을 주선한다고..차 감독님...축구가..하고 싶어요.



그래도 1경기 출장정지로 완화된 덕분에 벨기에전에 다시 선발로 출전할 수 있었고 전매특허인 기가막힌 왼발 프리킥으로 유상철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하며 약간의 명예를 회복했다. 왼발로만 1골 1도움, 한국이 기록한 두 골에 모두 관여하며 사실상의 팀의 에이스 의 면모를 보여줬지만, 그걸 모두 덮을만한 한 번의 실수로 비난을 받아야 했던 불운의 선수. 2번의 월드컵에서 이래저래 욕만 먹었다(...) 하석주는 퇴장 이후 팀이 지고 차범근까지 경질당하는 걸 보면서 이번 월드컵을 끝으로 국대은퇴까지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벨기에전에서 1어시도 하고 팀이 투혼을 보이면서 어느정도 마음의 위안을 삼았다고...





이후로 2000년 아시안컵까지 계속 부동의 왼쪽 윙백으로 국대에서 맹활약했으며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 무대를 마지막으로 대표팀에서는 완전히 물러났다. 이후 그 자리는 이영표가 물려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이 하석주도 히딩크 사단에서 제법 오래, 많은 경기를 뛰었다. 물론 하석주가 경쟁을 이겨서 02월드컵에 나간다는 보장은 없었으나,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에 출장해 명예를 회복하길 바라는 팬들도 있었고 무엇보다 A매치 100경기 출장 기록이 눈 앞에 다가온 상황이었다. 하지만 98월드컵 퇴장이 끝끝내 트라우마로 남아서 본인이 스스로 그만둘 때가 됐다고 생각해 센츄리클럽 가입을 얼마 안 남겨두고 국대은퇴를 결정했다고 한다. 퇴장이 얼마나 큰 트라우마가 되었는지 아직도 퇴장당하는 선수를 보면 자기일 같고 '나와 같은 상처를 입으면 안되는데'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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