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에 육군 장교 무아마르 카다피는 국왕 이드리스 1세가 해외순방 겸 해외치료(당시 나이 80세였다.)를 나간 틈을 노려 쿠데타를 일으켜(이 당시 카다피의 계급은 일개 대위였다.) 왕정을 폐지하고 나세르주의에 입각한 아랍 사회주의 국가를 세웠다, 카다피는 집권후에 석유국유화를 전면적으로 단행하여 거대 석유회사와 소수계층에서 쏠렸던 부를 재분배시켰고 1973년에 전격적인 유가인상을 주도하여 리비아에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다. 


그 결과 당대 리비아는 아프리카에서는 물론이고 세계적인 수준으로 잘사는 그야말로 부자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카다피는 반미-반서방-반이스라엘 노선을 대대적으로 내세우며 여러 테러활동에도 지원을 내보내서 카다피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간에 주목받는 지도자가 되었다.


한편 이드리스 1세는 이집트로 가서 살다가 1983년 93세로 죽었다.


1988년 크리스마스 날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일어난 팬암 103편 폭파 사건을 포함하여 베를린 나이트클럽 폭탄 테러등 여러 테러 사건에 연루되어 미국의 공습을 받았다. IRA등 타국의 테러조직을 지원하기도 했다.


무아마르 카다피는 아프리카에서 오랫동안 군림 중이었던 독재자 중 하나로, 그의 패션 센스를 포함한 각종 기행으로 악명을 떨쳤다. 


해외에 방문할 때는 항상 유목민처럼 커다란 텐트를 치고 숙소로 삼는데, 뉴욕에 방문해서도 똑같이 하려다가 미국시민들의 주거지 침해로 무산되었고, 2009년 UN 총회에서 96분간 장시간 연설로 지루함과 짜증남 때문에 참석자들은 하나 둘 회의장을 떠났고, 결국 다음 연설자인 이명박 전 대통령이 텅빈 회의장에서 마이크를 잡아야 했다. 


카다피의 통역은 중간에 실신해서 새로운 통역으로 교체되었다. CNN의 보도에 따르면 UN직원들도 60년 역사상 가장 정신나간 사건으로 뽑는다고 한다.


카다피는 자신의 이념을 포함해 여성의 생리부터 바나나까지 온갖 얘기를 담은 "녹색책"이라는 이름의 소책자를 배포하고 그에 따라 사회주의 정책을 실시했다. 일례로 모든 주택은 공공주택이었는데 자물쇠가 없어서 모든 집에 맘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외교 정책에서는 처음에는 아랍국가들과 동맹을 맺고자 했으나 사이가 틀어지자 아프리카 국가들로 급선회했다. 스스로를 아프리카의 영웅으로 띄우면서 아프리카를 제2의 USA 즉 United States Of Africa로 만들려고했다. 이를 위해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고 다른 독재 국가에 돈을 뿌렸다.


팬암기 사건 이후 서방 세계의 경제 제재 조치로 경제는 피폐해졌으나 그럼에도 인구가 적어서 쌓아 놓았던건 많았던지라 알제리나 베네수엘라, 멕시코 등의 산유국들이 빈곤층의 급증이나 실업난, 정치 불안으로 격변기를 맞고 있을 순간에도 경제 파탄은 피했다. 


2000년대 들어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하고 과거 테러 보상을 논의하기 시작하면서 상당 부분 경제 제재가 풀리고 다시 고유가 시대를 맞이하면서 다시 호황을 누렸다. 


2011년 아랍의 봄을 타고 1차 리비아 내전이 일어나면서 카다피의 권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리비아 내전으로 리비아 공화국이 정권을 잡기 전의 지배자인 카다피의 쿠데타 때문에 전복됐었던 리비아 왕국의 국기를 다시 내건 것이다. 하지만 굳이 '왕국'의 국기라서 내건 것(왕정복고)은 아니고 카다피가 집권한 42년을 부정하는 의미이다.



2011년 2월 말에서 10월 23일까지 리비아 내전이 발발했고, 반군과 서방의 공격으로 카다피는 결국 사망하면서 혁명이 성공하긴 했다. 


하지만 내전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었고 2011년 이전처럼 치안이 회복되지는 못했고, 결국 카다피 정권을 몰아내고 새로 들어선 임시정부가 이슬람주의파와 세속주의파간 갈등으로 정부가 트리폴리 정부와 토브룩 정부로 갈라지면서 2014년 내전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2015년과 2016년 사이에 내전을 벌이던 각 두 정부가 유엔의 중재로 통합 정부 수립에 합의했다. 그러나 통합 정부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토브룩 정부가 유엔 중재하에 성립된 통합 정부와의 합류를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으면서 완전한 정부통합을 이루지는 못 했고, 결국 토브룩 정부를 끌어들이지 못한 불완전한 상태에서 트리폴리 정부만이 권력을 통합 정부에게 이양하여 2016년 리비아 통합 정부가 수립되었다.


2016년 리비아 정부군이 IS가 장악하고 있던 시르테와 벵가지를 공격해 각각 도시 여러 곳을 함락시켜 IS를 섬멸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IS와 전쟁 중인 아랍 국가들 중에서 IS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첫 번째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IS가 토벌되었지만 불완전한 상태에서 성립된 통합정부와 통합정부를 인정하지 않으려던 토브룩 정부와 일부 트리폴리 정부 세력들의 저항과 반발로 정국 혼란은 가시지 않은 상태였고 유엔 중재로 성립된 리비아 통합정부를 인정하지 않던 토브룩 정부도 국제사회의 중재 아래 리비아 통합정부와의 협상에 나섰다.


그리고 2017년 7월 리비아 통합정부의 사라지 총리와 토브룩 정부 소속 리비아 국민군 칼리파 하프타르 사령관이 25일 프랑스 파리에서 회동을 하여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휴전과 선거를 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선거의 시기를 놓고 양대 정파 간의 갈등이 벌어져 제대로 시행되지 못 하다가 결국 12월 10일 프랑스의 중재 하에 총선과 대선을 치르기로 합의안이 나오면서 이러한 리비아 양대 정파들의 평화 행보에 희망적인 견해가 나오고 있다. 


[출처 : https://namu.wiki/w/%EB%A6%AC%EB%B9%84%EC%9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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