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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7일 김사랑 강제납치 감금사건 진상규명위원회(이하 김사랑 진상규명위)는 성남시의회 세미나실에서 '이재명 성남시장과 성남시 무차별 고소·고발 및 성남경찰 납치, 정신병원 감금 진상규명 촉구 기자회견'을 가졌다. 


김사랑 강제납치 감금사건 진상규명위원회(이하 김사랑 진상규명위)는 2018년 2월 7일 오후 성남시의회 세미나실에서 '이재명 성남시장과 성남시 무차별 고소·고발 및 성남경찰 납치, 정신병원 감금 진상규명 촉구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가한 단체들은 ‘정부 기관은 강제 납치한 경찰과 강제 강금한 정신병원 배후 밝히라“면서”서울지방경찰청은 김사랑 사건에 대한 수사를 조속히 실행하라“고 촉구했다.



김사랑 진상규명위는 “2017년 11월 14일 성남에서 대낮에 일반 시민이 경찰 공권력에 의해 강제 납치되어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알 수 없는 주사를 맞고 실신하였으며 지인들과 어머니에 의해서 구출 되는 사건이 발생해다”면서“아직도 일부 공권력은 힘없는 시민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고 대한민국 인권의 현주소”라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2017년 8월 19일 경기도 성남시는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네티즌 B씨를 경찰에 형사 고발한 가운데 민사상 손해배상 소송을 추가로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이재명 시장은 19일 오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성남시정에 대한 허위사실을 상습적으로 유포한 B씨를 형사고발했다”며 “앞서 허위사실 유포로 벌금 300만원을 선고 받고도 계속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있다. 민사 손해배상 소송을 추가로 제기 한다”며 이 같이 말했다.


시에 따르면 ‘개인에게 특혜를 줬다’는 내용의 허위사실이 담긴 동영상을 온라인상에 퍼뜨린 혐의(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상 명예훼손)로 네티즌 B씨에 대한 고발장을 지난 18일 성남분당경찰서에 접수시켰다.


B씨는 한 보수단체의 소셜미디어 방송에서 "성남시가 열악한 상권을 위해 지원받은 자금을 특정 개인이 소유한 건물에 지원해 특혜를 줬다"는 취지의 인터뷰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는 고발장에서 “시와 시장을 비방하는 내용의 인터뷰를 수차례 진행하고 해당 인터뷰 내용이 담겨 있는 동영상을 6차례에 걸쳐 유튜브 및 자신의 페이스북에 게재했다”고 주장했다. 



또 “허위사실이 담긴 동영상 조회수가 26만건에 달해 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형성 등 공무 수행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시장은 “악의를 가진 상습적 허위사실 유포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중범죄”라며 “세상이 거짓말에 놀아날 만큼 그렇게 어수룩하지 않다는 걸 가르쳐주기 위해서라도 엄중하게 책임을 묻겠다”고 강조했다.


2018년 8월 5일 이재명은 자신의 블로그에 또 다시 입장을 밝혔다.

○ 김사랑은 이재명 전)성남시장이 성남시 산하재단 등을 통해 A씨에게 일감 몰아주기를 했다는 주장을 인터넷과 SNS 등을 통해 유포하다가 A씨에게 고발되어 2018년 4월12일 대법원 2부(사건번호 2017도20076)에서 ‘허위사실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300만원 벌금형을 확정 받았습니다. 


○ 김사랑은 유죄 판결을 받고도 이재명 전)성남시장이 성남시 산하재단 등을 통해 A씨에게 일감 몰아주기를 했다는 주장을 인터넷과 SNS 등을 통해 지속해서 유포하다가 성남시와 이재명 시장에게도 명예훼손 협의로 2017년 8월 고발되었습니다.


17년 11월14일 OO경찰서에서는 김사랑에 대한 고소사건의 조사를 위해 출석할 것을 통지하였으나 김사랑은 본인 페이스북에 수차례(약 20건) 자살 암시글을 게재하며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담당 경찰은 OO경찰서에 김사랑 신병 확보 요청을 하였고 OO경찰서는 김사랑 신병확보 후 정신병원에 보호조치 되었습니다. 


OO경찰서는 경찰청장의 지휘계통에 있으며 지자체인 성남시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김사랑은 경찰에 의해 강제 입원이 된 것이 진실이며 이재명 지사와는 전혀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상에서 마치 이재명 지사가 김사랑을 강제 입원한 것처럼 허위사실을 유포하며 비방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악의적인 음해에 대해서 앞으로는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할 예정이오니 허위사실 유포를 중단해 주시길 바랍니다.


[출처 : 이재명(1964)/논란 및 사건사고]


검찰 출신의 법마(法魔) 


유신정권 때부터 박근혜정부까지 40년 넘게 권력의 핵심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유신헌법 설계, 공안사건 조작, 여론 공작, 지역감정 조장,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비롯한 온갖 정치적 비행을 저질렀으며, 위기 때마다 철저하게 기회주의적인 처신으로 난국을 돌파하였다...


1939년 11월 25일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통영군(거제도) 장목면에서 아버지 김석윤과 어머니 강신방 사이의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외포초등학교, 마산중학교를 거쳐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본인의 주장에 의하면 부친은 태평양 전쟁, 6.25 전쟁에서 활약한 군인이지만,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서민적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어린 시절을 가난했다고 묘사하듯이, 김기춘도 집안이 가난하여 가정교사 일을 하면서 고학했다고 한다.


가정환경이나 출신이 어떻든 아무튼 그는 학업성적이 매우 우수하여, 1958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한다. 그리고 대학교 3학년 재학 중이던 1960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서 출세길이 열리게 된다. 거기다 재학시절 5.16 군사정변에 공을 세운 부친 덕에 5.16 장학회의 장학금을 받아서 학업을 했고, 입대 전 합격했기 때문에 대한민국 해군 법무관으로 군복무를 마친다. 군복무 시절 대학원에 재학했고, 대위로 전역하였다.


이후 검사로 법조계에 입문하여, 광주지검 근무 시절 지금의 부인 박화자와 결혼했다. 이어 부산지검, 서울지검에서 검사로 근무했고 대구고검의 검사장을 지냈다.



초임 검사 시절부터 그는 출세지향주의적이고 정치적인 기질을 보였는데, 


심재륜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검사 때 법무부 장관 신직수의 눈에 띄려고 날마다 장관 집 앞 언덕을 오르는 노력을 했다고 한다. 남들 잠자는 시간에 일찍 일어나 출세를 위해 상관을 하염없이 기다렸던 것이다.


역사상 최악의 유신헌법 저작


체육관 선거로 국민의 참정권을 차단하는 새 헌법을 만들려고 했고, 신참 검사이던 김기춘에게 개헌을 맡겼다. 이미 김기춘이 만든 뼈대를 헌법학자들이 손도 대지 못하도록 했다고. 즉, 김기춘이 유신 헌법을 만든 셈이다. 


박정희는 김기춘을 김똘똘이라고 부르며 총애했다고 전해진다.


법률비서관 시절 박근혜-최태민 관계를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부터 최태민-박근혜와 김기춘이 밀착관계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즉 김기춘은 청와대 비서관으로 근무하면서 이런 부적절한 관계를 근절하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편승하여 출세를 도모한 것.


제5공화국 시절, 70년대에는 엄청 잘나갔지만, 80년대 들어서는 된통 깨졌다. 그것은 김기춘이 중정에서 근무하던 1970년대 후반, 대통령의 명령으로 보안사를 크게 손보았다가 보안사를 권력기반으로 하는 전두환 일당, 즉,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보복을 받기 때문이다.


그 발단은 1977년 20사단 예하 62연대 1대대장 월북 사건이었다. 보안대 관계자는 유운학에게 진급심사에 관련된 뇌물을 요구했으나, FM적인 성격의 유운학은 이를 거부헀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보안대 소속 장교들이 유운학을 지독하게 괴롭혔다. 보안대가 전방 대대장 유운학 중령을 과도하게 갈구는 바람에 유 중령이 참다못해 월북한 사건이다. 


6.25 전쟁 이후 최고 계급의 현역 군인이 월북한 사건이기도 하다. 이 사건의 진상을 듣고 격노한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의 대공수사국장으로 있던 김기춘에게 그 처리를 지시하였다.


김기춘은 보안사 조직 축소안을 마련했고, 관련된 보안사-보안대 간부들을 여럿 중정에 끌고와서 혼을 내주기도 했다. 이 사건은 명백하게 보안사의 잘못이었기 때문에 사실 김기춘이 잘못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독재국가에서 필연적인 정보기관 사이의 암투 때문에 김기춘은 보안사 간부들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


10.26 사건 이후 전두환이 사령관으로 있던 보안사가 중앙정보부를 접수했을 때, 중정에 들이닥친 보안사의 요원들이 가장 먼저 한 말이 "김기춘 어딨어!"였다. 하지만 김기춘은 몇 달 전 청와대 법률비서관으로 전직한 상태여서 보안사로 체포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김기춘이 만약 중앙정보부에 계속 있었다면 보복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정말 운빨은 기가 막히게 터진다.


그나마 검찰에서 연명할 수 있었던 것은 한때 검찰에서 부하로 두고 있었던 노태우의 처조카 박철언에게 줄을 댔고, 당시 보안사 비서실장이던 대령 허화평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편지를 써 보냈기 때문다.  



김기춘은 1980년 대검찰청 특수1과장·서울지검 공안부장을 역임했고, 1981년에는 출입국관리국장을 지내다가 12월 17일 검찰국장으로 임명된다. 이후 김기춘은 법무연수원 검찰연수부장으로 좌천된다. 그나마 법무연수원 좌천도, 박철언이 무마해줘서 옷을 벗지 않고 연명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때 찾아오는 손님이나 이전에는 여럿 거느렸던 부하들도 거의 없이 밥도 항상 혼자 먹는 등 갖은 수모를 당했다고 한다. 검찰의 고위직은 당시 안기부 요원들에 의해 근황이 일거수일투족 체크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밥을 혼자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친구나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기피인물이라는 뜻이다. 즉, 김기춘과 얽히면 5공 정권의 요주의 인물이 된다는 뜻이었다. 유신시절 무소불위를 저지르던 과거를 감안하면 몰락의 극치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한직에 있을 때도 육영재단 등, 최태민-박근혜의 전횡에 개입했다고 한다. 


최태민 게이트가 불거진 이후, 5공 시절의 1980년대 남매-자매간 갖은 분쟁때문에 바람잘날이 없던 육영재단 일에 현직 검사였던 김기춘이 최태민-박근혜를 위해서 자주 나타났다던 증언이 나왔다.


어쨌든, 공안검사들의 전성시대였던 제5공화국 때 1970년대까지 고시 선두주자였던 김기춘은 요직이 아니라 계속 한직으로 돌았다. 1982년부터 1985년 2월까지는 내내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근무했고, 1985년 3월부터 제6공화국 출범까지는 대구지검장·대구고검장·법무연수원장을 지냈다.


전두환이 물러나자 그는 다시 출세가도를 달린다. 박철언이 6공의 황태자 노릇을 하면서 자신과 친분이 있는 김기춘을 적극 밀었기 때문이다. 


5공 때 먹은 찬밥은 6공에서 전화위복이 되는데, 그는 5공 때 한직으로 돈 사실을 가지고 깨끗하고 강직한 검사로 연극했다. 1988년에 검찰총장이 되는데, 이는 박정희의 또 다른 가신이었던 신직수를 제외하면 지금까지 깨지지 않는 최연소 취임 기록이다. 이때 5공화국 세력을 개박살 내려고 5공비리 사범 50여 명을 구속시키는 등, 5공청산에 앞장선다. 정작 6공세력까지 얽힌 비리, 5.18을 비롯한 중요 사안은 냅둔다.


13대 국회 때 여소야대로 정권이 수세에 몰리자 적절한 시기에 굵직굵직한 공안사건을 터뜨려 정권의 위기를 해결해주는 구원자 역을 하게 된다. 


그중 하나가 서경원 의원 간첩사건 의혹인데, 이때 평화민주당 김대중 총재가 연루되어 있다는 언플을 하면서 김대중의 이미지에 흠집을 냈으나, 결과적으로 김대중은 결백한 것으로 드러났다.


1991년 5월 27일부터 이듬해 10월 8일까지 법무부 장관으로 재직하였다. 


이때 노태우 정부는 3당 합당을 통해 김영삼과 힘을 합친 후 6월 항쟁 이후 국민의 요구로 이루어졌던 많은 개혁조치를 되돌리는 반동정책을 행하면서 학생운동권의 분노가 폭발하게 된다. 여기에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전경의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자, 386세대 최후의 항쟁이라는 1991년 연쇄 분신 파동이 벌어져 정권은 위기에 몰리게 된다.



이때 매주 분신자가 나오면서 전국민 항쟁으로 확산될 기미가 보이자, 김지하는 5월 5일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때려치우라"라는 글을 기고해 운동권이 기획분신을 정치적 도구로 삼는다는 주장을 펼쳤고, 그와 동시에 서강대 총장이던 박홍 루카 신부가 "분신을 부추키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5월 27일 막 법무부 장관으로 등판한 김기춘은 주작 솜씨를 발휘, "김지하와 박홍 신부의 말이 근거 있다"며 검찰에 특별 수사를 지시하여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을 일으킨다.


즉, 재야단체 전민련에 소속되어 있던 운동권 강기훈이 운동권 동지였던 김기설씨의 분신자살(1991년 5월 8일)을 부추기고 유서를 대필해 줬다는 플롯을 짠 것이다. 정부가 이러한 내용을 대대적으로 발표하면서 분신정국은 급속히 공안정국으로 반전되었으며, 그 직후인 91년 6월 4일 국무총리로 지명된 정원식 한국외대 교수 퇴임식에서 운동권 학생들에게 계란세례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완전히 전세가 역전된다.


김기춘은 자신의 솜씨를 발휘해 정권의 위기를 찬스로 전환시켰고, 운동권은 치명타를 입었으며 이 사건기점으로 공안검사 출신들이 승승장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강기훈은 무려 24년 만에 2015년 재심절차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이를 지휘한 김기춘이나 관련 공안 검사들은 전혀 사과나 반성을 한 바가 없다.


강기훈 씨는 출소 후, 전민련 운동권 선배였던 정봉주 전 의원의 주선으로 정봉주가 운영하던 학원에 1990년대 잠시 전산담당으로 취직하지만, 정봉주가 정계로 입문하면서 학원 경영을 그만두자 이후 (전과자 전력 때문에) 변변한 직업을 갖지 못했다고 한다. 


여러 번 재심을 청구하였으나, 실제로 재심에 들어간 것은 2007년이었고, 재판과정에서 홧병으로 간암이 발병하였다고 한다. 결국 재심으로 무죄판결을 받았음에도 안정을 위해 언론접촉도 피했다. JTBC 정봉주는 자신이 진행하는 한 팟캐스트에서 2016년 말 현재 강씨의 병세가 위중하다고 밝힌 바 있다.


역사 바로세우기를 내세운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당연히 청산 대상이 되어야 정상이었는데, 여기서도 다시 한 번 운빨이 터진다. 어처구니없게도 김영삼과 동향 및 동문이라는 이유였다. 


5공, 6공 시절 김기춘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박철언은 김영삼과의 불화로 정치보복을 받아 소위 "슬롯머신 비리"사건으로 감방에 갔다. 이때 박철언과 같이 얽혀서 감옥에 간 사람이 김승연 한화 그룹 회장과 이건개 당시 대전고검장. 이건개는 사시 1회로서 김기춘보다 2살 어리고, 고시로는 1회 후배로서 여러모로 김기춘과 비교될 만 하지만 김기춘만한 운빨은 없었던지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에게 줄을 댔어도 이 사건으로 사법처리가 되어 관직으로는 끝나고 말았다. 


김영삼을 적극 지지하여 따낸 국회의원이라는 직위는 정치적 방탄복이 되었고, 그는 재심에서 무죄로 밝혀진 유신-5공시절의 여러 조작사건에서 검사나 수사관으로 활약했음에도 아무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2004년 국회 법사위원장으로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주된 역활을 하였다. 


과거 공안 조작사건 기획과 지역감정 유발, 공작정치의 전력으로 시민단체에 의해 총선 낙선 대상으로 지목되기도 했지만 3선 국회의원이 되었고 법제사법위원장으로 선출되어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당시 탄핵심판 청구인이 되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탄핵심판을 기각했다.


이 당시에 노무현 대통령을 싸이코라고 지칭하는 막말을 하기도 했다.


2007년 박근혜 한나라당 대선후보 캠프의 좌장노릇을 했으며, 원로 친박 정치인으로 구성된 7인회의 일원이었다. 



2008년에 공천권을 쥔 이명박 측이 친박 대숙청을 할 때 너무 고령이다라는 이유로 공천에서 윤영에 밀려 탈락해서 야인이 되었다.


이후 2009년부터 2013년 8월 박근혜정부 비서실장이 되기까지 한국에너지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이 당시 별다른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최순실 일당과 가까이 지낸 것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


박근혜 정부 시절 비서실장 재임하면서 왕실장, 기춘대원군이라고 불렸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부속실로 쏠리던 힘을 비서실로 당겨왔다고, 이재만 총무비서관을 포함해 5명으로 구성된 청와대 인사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고 있었으며, 평소 인사 문제에 있어서 뜻을 강력히 관철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김기춘이 청와대 비서실장시절에 저질렀거나 관련된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 2013년 9월 13일 채동욱 검찰총장이 혼외자 문제가 불거지며 사퇴를 결정하자, 이의 배후에 김기춘 실장이 거론되며 사퇴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당시 야권에서는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을 덮기위해 조선일보를 통해 채동욱의 개인정보를 흘려 수사 중이던 검찰총장을 찍어내려고 했다는 주장이 있었다.
  • 2013년 11월 5일에 시작된 통합진보당 위헌정당해산 사건을 황교안 총리와 함께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2013년 12월 31일에 외아들인 김성원(당시 47세) 씨가 교통사고로 인한 뇌출혈로 식물인간이 되었다. 자식의 사고에도 주변에 알리지 않고 평소처럼 업무를 처리하였다고 찬사를 보내는 언론이 있기도 했지만 천벌을 받은 것이라는 말도 많았다. 특히나 당시에 무슨 업무를 하고 있었겠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 2014년 4월 청와대 7시간 의혹 사건과 관련해서 대통령의 행방에 관해 모른다고 답변하면서 대정부질의 중이던 박영선 의원조차 어이를 상실해 몇번이나 추궁했고, 이로 인해 세월호 7시간이 급속도로 확대된 빌미를 제공했다. 
  • 2014년 7월 7일에는 박관천의 조사로 밝혀진 최태민 일가의 비선실세 국정개입 의혹과 관련해서, "맹세코 비선라인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 같은 해명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거짓말로 밝혀졌다.
  • 2016년 12월 6일 고 김영한 청와대 민정수석의 업무수첩이 공개되었는데, 이 중 세월호 유가족인 김영오씨의 단식을 두고 김기춘의 지시기록이 논란이 되었다. 김영오씨의 단식을 두고 언론지도를 지시한 기록이었는데 민주주의 국가에서 언론통제를 시도한 것 자체도 문제가 있는 것이었고, 이 자칭 언론지도를 통해 국민적 비난이 가해지게하는 대상이 누구인가를 두고 유가족 김영오씬지 단식을 부추기는 라고 김기춘이 생각하는 집단인지는 이 문장만으로는 확인은 불가능하지만 김기춘의 해당 언론지시가 있은 뒤 2014년 7~8월무렵 조중동 등 언론매체에서 주도적으로 세월호 유가족 김영오씨에 대한 인신공격성 보도 연달아 대서특필로 써갈긴 것과 9월 초 생긴 광화문 폭식농성 사건등으로 추정컨데 전자에 더 가까워 보인다.


[출처 : 김기춘/생애]


한국 현대사에 끼친 영향을 한마디로 함축하자면 가늘고 길게 한 획을 그은 인물...

그의 인생 행적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가히 영화나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어둠의 참모이다.


유신시절부터 2016년 박근혜게이트에 이르기까지, 반세기에 걸친 한국 정치사의 그늘진 이면에서 브레인으로 활동했다.


1975년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 

당시 중앙정보부 소속으로 있던 김기춘이, 납북 어부를 간첩으로 만들거나 재일동포 학생들을 간첩으로 만들었다는 의혹이 있다. 학원간첩단사건에 연루되었던 21명 중 2016년 현재까지 재심 신청자 12명 모두 무죄 판결이 났다.



국정원 간첩 조작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에서 잠시 출연한다. 이 영화에서 1970년대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을 취재하던 최승호 기자는 아주 우연히 김포공항에서 일본으로 가는 김기춘을 마주쳐서, 그 사건의 조작여부에 대해 추궁하는데, 김기춘은 아는 바 없다고 모르는 척 한다. 최승호 기자의 회고에 의하면 화장실로 도망쳤다가 한참 지난 후 나왔는데, 그때까지 최 기자가 대기하여 질문하자 난감해했다고.


1989년 우지 파동

1989년 우지 파동이 벌어지자, 검찰총장이던 김기춘의 특별지시를 받은 검찰이 삼양식품을 대대적으로 수사해서 거의 파산직전까지 몰아간 적이 있다. 가뜩이나 1988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농심그룹에게 업계 1위를 뺏겼던 삼양식품을 제대로 빅엿을 먹인 셈이다. 이후 삼양식품은 한때는 후발주자인 빙그레나 오뚜기에게도 위협당했다. 


이 사건은 1997년 삼양라면이 무죄를 받음으로써 결백이 밝혀졌다. 문제는 김기춘은 퇴임 후에 이 사건으로 엄청난 수혜를 입은 농심의 비상근 (출근 안 하는) 고문변호사를 맡으면서 매달 천만 원씩의 급여을 수년간 받아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무죄로 판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검찰이나 특별수사를 지시한 김기춘은 파산할 뻔한 삼양식품에 대한 사과를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노태우 정권 시절, 김기춘이 법무부 장관 재직시 일어난 국가적 차원의 조작 사건. 그 모든 지휘를 했다는 의혹이 있다.


1992년 초원복집 사건

일명 "우리가 남이가"사건 되시겠다.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법무부 장관에서 물러난 지 2달 된 김기춘이 주도하여 부산의 기관장들이 모여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며, 지역감정을 유발하고 돈과 권력을 이용하자고 불법 관권선거를 모의했다.


믿을 데라고는 부산 경남이 똘똘 뭉쳐 주는 것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데,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불러 일으켜야… (우리는 지역감정 좀 일어나야 됩니다.) 일어나야 된다. 야, 지금 이번에 뭐 제대로 부산놈들 뭐 본때를 못 보이면 다 죽어야 된다. 요새 부산놈들이 정주영 운운하는 놈들이 쓸개가 있는 놈이냐 어떤 놈이냐 이런 식으로 하면서 이번에 이거 제대로 못 하면 부산놈들은 창자 쓸개도 없는 놈들이다 라는 어떤 그런 식으로.. 이건 부산 운동본부에서도 아이디어 한 번 주세요.

-1992년 12월, 부산 초원즉석복국집에서 김기춘


본질은 분명히 지역감정을 유발하고 돈과 권력을 이용해 불법 관권선거를 모의했다는 것인데 이게 엉뚱하게 정주영 후보 측의 도청 문제로 번지면서 역풍이 불어버렸다. 



이 사건이 터지자 도리어 보수 층이 우리가 남이가 정신으로 결집하여 김기춘이 열심히 밀고 있던 김영삼 후보가 압도적으로 당선되는 계기가 되었다. 어쩌면 이 사건은 김기춘의 몰락을 앞당길 수 있었던 사건이었는데 프레임 전환의 귀재답게 김기춘은 이 상황에서도 사건의 본질을 불법 관권선거 모의가 아닌 도청으로 물타기 하는데 성공하여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데 성공한 것이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결의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당시 국회 법사위원장으로 탄핵소추위원장을 맡았다.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심판청구를 기각하자, 헌법재판소 재판관들 탄핵의 찬반 여부를 실명으로 공개하도록 "심판에 관여한 재판관은 결정서에 의견을 표시하여야 한다."(헌재법 제36조 제3항)고 헌법재판소법을 개정하였다.  


이후 2008년 서울대 법학과 제16회 동창회가 엮은 ‘낙산의 둥지 떠나 반백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 당시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으로서 탄핵소추위원으로 참여한 경험에 대해 글을 기고 하였는데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이 크게 이슈화 되면서 재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때 김기춘이 쓴 대통령 탄핵 소추의 의미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1. “제헌국회 속기록을 보면 대통령의 실정법 위반뿐 아니라 지휘·감독 관계에 있는 공직자에 대한 지휘·감독을 소홀히 한 것과 국정을 불성실하게 수행하는 경우 모두 헌법 위반으로 탄핵 사유가 된다 
  2. “탄핵 사유는 기소가 가능한 형사적 범죄일 필요는 없고 헌법이 부여한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경우, 부패 행위를 한 경우, 공중의 신뢰를 깨뜨리는 경우도 탄핵 사유가 된다 
  3. “직무를 태만히 하거나 성실히 수행하지 않은 경우에도 탄핵 사유가 된다 할 것이다. 
  4. “형사재판에서는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유죄 판결이 확정되기 전에는 공무원의 직권이 정지되지 않는 데 반해 탄핵심판에서는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되는 유죄 내지 유책 추정의 원칙을 적용한다” 이는 현재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반대 입장을 대리하는 변호인측의 주장과 상반되는 주장들이다. 출처: 허핑턴포스트코리아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8년 전 글로 쓴 ‘대통령 탄핵사유'는 매우 놀랍다"



2012년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

박근혜 정부는 이 사건으로 정권 초부터 그 정당성이 크게 위협받는다. 당시 이 사건을 수사한 검찰은 국가정보원이 조직적으로 박근혜 후보에게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고 야권후보를 비방한 사실, 김용판 서울지방경찰청장이 대선 직전 수사에 외압을 넣고 허위의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한 사실 등을 밝히고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기소한다.


하지만 당시 검찰을 이끌던 채동욱 검찰총장은 돌연 사퇴하게 된다. '혼외자녀' 의혹에 휩싸이며 여론이 반전된 것이다. 김기춘은 채동욱 총장을 비롯한 '검찰 길들이기'를 주도하고 대선개입사건의 법원 판결에 대한 검찰 항소를 무마하는 데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2014년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 사건

사실상 이 사건이 발생한 원인이자 흑막이다. 사건의 수습방식도 초원복집 사건과 굉장히 흡사하다. 초원복집 사건의 본질이 불법 관권선거 모의였는데 초점이 불법 도청으로 번지며 실체가 흐려졌듯이 이 사건 또한 핵심은 정윤회와 문고리 3인방이 국정에 개입해 국정농단을 저지르고 있다는 문건의 내용인데 엉뚱하게 사건의 초점이 문건의 내용이 아닌 문건이 어떤 경위로 유출되었는지에만 초점이 맞춰지며 사건의 실체인 정윤회가 아닌 정윤회가 비선 실세임을 폭로한 조응천과 박관천 등이 역풍을 맞아 청와대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문건 유출 책임자로 지목된 최경락 경위는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2015년 경남기업 회장 자살 사건

이명박 자원외교 비리 조사를 받던 성 전 회장은 이날 서울 청담동 자택을 나온 직후인 오전 6시부터 50분간 경향신문과 전화 인터뷰를 통해 “김 전 실장이 2006년 9월 VIP(박근혜 대통령) 모시고 독일 갈 때 10만달러를 바꿔서 롯데호텔 헬스클럽에서 전달했다”며 “당시 수행비서도 함께 왔었다.고 알려왔다.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은 자살하였고, 이후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애초에 수사선상에서 제외되서 그 어떠한 조사도 받지 않았다. 



2016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유진룡 전 문화체육부 장관의 증언에 의하면, 문화 예술계 인사와 단체의 탄압을 수차례 직접 종용했고, 블랙리스트 작성의 흑막이다. 또한, 김희범 전 문체부 차관에게 블랙리스트에 반대한 문체부 1급 공무원 6명의 사표를 받아오라고 지시를 한 의혹도 있다. 사실이면 직권남용죄에 해당한다.


세월호 참사 당시 정부를 비판한 영화 <다이빙 벨>을 상영했다는 이유로, 부산국제영화제 정부 지원 예산을 전액 삭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문체부 관계자의 진술이 나왔다.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과 직접 대면해서 블랙리스트 관련 지시를 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구속 중인 김종덕 전 장관이 특검 조사에서 "김기춘 전 실장에게 블랙리스트에 대해 대면보고를 했다"고 진술했다.


결국 구속되었다. 전직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을 역임한 사람으로써, 수갑을 차고 서울구치소로 이송되어, 수감되는 치욕을 맛보았다. 



2017년 7월 3일 김기춘은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작성과 실행을 지시한 혐의로 특검에서 징역 7년을 구형하였으나, 1심에서 직권남용은 인정되었으나 강요죄에 대해 인정되지 않아 겨우징역 3년형을 받았다. 그러나 위에서 상술했듯 이제 완벽하게 범죄자로 몰락한 상황이니 그의 길고 긴 추악한 정치경력도 종말을 맞이한거나 다름없어졌다.


2017년 12월 식물인간 상태의 아들을 언급하며 선처를 호소했다고 한다. 네티즌들의 반응은 당연히 감성팔이. 이 사람의 공작 정치로 억울하게 박해받거나 감옥살이로 인생이 망가진 사람을 생각하면 동정할 여지가 아예없다. 동정을 받으려고, 병원 신세를 지는 외아들까지 이용해서 더욱 저질이다.


2018년 8월 6일, 구속기간 만료로 석방되었다. 관련 기사 구속영장의 재청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대법원 판결은 불구속 상태에서 받게 될 예정이다.


[출처: 김기춘/관련 사건]


대한민국의 언론인, 정치인. 1953년 7월 27일 생으로 전라북도 순창군 출신이다. 

MBC 기자 및 앵커 출신으로서 정계에 입문하여, 15, 16, 18, 20대 국회의원, 통일부 장관,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 후보를 지냈다.


전라북도 도의원을 지낸 아버지(순창군)로부터 태어났다. 전주시에서 전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 재수로 입학해 졸업했다.


당시 운동권으로 지냈다가 구금된 적이 있었으며, 아버지를 여의고 대학시절에는 서울에서 옷을 팔며 힘든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강제징집 되고나서 제33보병사단(현 17사단) 사단 본부대 행정병으로 군 복무 후 육군 병장으로 전역했다. 우여곡절의 학업 끝에 1978년 문화방송(MBC)로 입사한 뒤 대학까지 졸업하여 언론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추억이 되어버린 정동영의 앵커 시절


문화방송에 입사한 뒤 기자를 거쳐 오른 뉴스 앵커는 그의 대표적인 커리어라고 할 수 있다.


기자 시절에는 5.18 민주화운동에 현장 특파원으로 취재한 적이 있었지만, 취재 내용은 보도되지 못했다. 


주미 특파원으로 지내는 동안 1984년 웨일스 대학교 언론학 대학원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걸프전과 독일 통일 등 굵직한 사건을 현장취재한 적도 있었다. 물론 전두환을 찬양하는 흑역사도 있었지만 어차피 이때는 위에서 까라고 하면 까야했기 때문에 전두환을 비판하는 기사를 내는 거 자체가 불가능했던 시절이었다(...) 참고로 1995년 12월 3일 전두환 구속 당시 MBC 뉴스데스크의 진행을 맡기도 했다.  


귀국 후에는 뉴스 앵커로 지내면서 억압받는 언론 상황에서도 소신있는 보도로 언론인으로서의 자세를 보여주며 명품 앵커라는 별칭이 생겨났다.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마감뉴스인 0시 뉴스 앵커로 재직했는데 언론인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는 정권에 반하는 보도를 하여 '여소야대' 정국이 되어버린 일은 유명한 일화.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다만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당시에 취재하던 도중에 좀 흑역사스러운 일도 있었기는 했다. 여하간 삼풍백화점 사건으로 본인이 느낀 바가 있어서 정계에 입문하기는 했지만.


1996년 김대중 당시 총재의 권유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한 뒤로는 정치인으로 완전히 전업하였다.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현역 국회의원 오탄 대신 전주시 덕진구 지역구로 출마하여 전국 최다 득표(97,858표)를 달성하며 국회에 입성했다.


2017년 7월 11일에는 기자회견을 열어 2017년 8월 27일에 열리는 국민의당 전당대회의 당대표 경선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8월 27일, 국민의당 전당대회 당대표 경선 내내 안철수 후보의 가장 강력한 당권 경쟁자로 거론되었으나 안철수 후보가 약 700여표 차이로 가까스로 결선투표 없이 당대표로 선출되면서 28.4%(2위)로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광주에 지역구를 둔 천정배 후보(16.6%, 3위)에게 거의 더블 스코어에 달하는 표차를 냈고, 국민의당의 지지 기반인 호남권, 특히 전북을 싹쓸이했다고 한다. 노선이 유사했던 천정배 후보의 득표율까지 합하면 45.0%에 달해 당내 非안철수 성향의 호남계의 새로운 얼굴이 될 가능성이 점쳐지는 중이다.


10월에는 안철수 대표가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합당이 어그러지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공개적으로 안 대표를 비판했다. 박지원 의원과 더불어 바른정당과의 합당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걸로 알려진 정동영 의원은 10월 26일 오전 가톨릭평화방송의 '열린세상 오늘! 김혜영입니다'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 안철수 대표가 바른정당과의 합당과 국민의당 소속 시도당 지역위원장들의 일괄 사퇴를 무리하게 추진했다는 지적에 대해서 "여기에 대해서는 (안철수 대표가) 일정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안철수 대표가 혹시 사퇴까지도 검토해야 한다고 보느냐는 질문에는 "일각에서는 이런 리더십으로 지방선거를 치르겠느냐. 대표직을 물러나고 비상대책위를 꾸리라는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했지만 애초부터 안 대표가 등장한 것이 무리한 등판이었다고 생각한다"며 안철수 대표의 사퇴를 우회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11월 3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하 경실련)이 뽑은 '2017 국정감사' 우수의원 20인에 선정됐다. 

경실련은 선정이유로 정동영 의원은 국토위 국정감사에서 후분양제 도입과 공공택지 매각 금지, 부영 특혜, 인천공항 헐값 매각 문제 등을 집중 제기했다"면서 "정책국감 속 빛난 우수의원 20인에 선정했다"고 설명했다. 국정감사기간 중 박근혜 정부와 이명박 정부 당시 문제를 밝히고, 적폐청산을 요구하는데 앞장서며 최근 부실시공으로 논란이 된 부영주택이 박근혜 정부 시절 주택도시기금을 독식한 것과 이명박 정부의 인천국제공항 헐값 매각 시도 등을 밝히며 언론과 국민의 큰 주목을 받았다.


2018년 2월 6일, 통합신당의 합류를 거부하며 국민의당을 탈당, 막무가내식 합당을 추진하는 안철수를 뒤로하고 국민의당 개혁파가 추진하는 민주평화당에 합류했다. 



이날 공식 출범한 민평당은 창당선언을 통해 최저임금 ·비정규직·청년실업과 노인빈곤 등 민생현안 해결에 집중, 햇볕정책 계승·발전을 통한 남북화해와 한반도 평화 실현, 다당제 민주주의 실현 및 분권형 개헌 추진, 철저한 적폐청산과 국가대개혁으로 촛불시민혁명 완성, 지역·세대·성별·인종 등 차별없는 평등 사회 구현 등을 약속했다. 


초대 지도부 전면에 나서지는 않지만 민주평화당의 대표급 간판인사로서 활약할 것으로 보인다.


2018년 2월 7일,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인터넷 댓글을 통한 여론조작에 국민이 분노하고 있는 가운데 정동영 의원이 정치적 희생양이 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 2012년 총선 때 ‘정동영 죽이기’ 댓글 공작. 가 권력으로부터 정동영 죽이기 작업은 18대 대통령 선거를 불과 6개월 앞둔 지난 2012년 총선 때 진행됐다. 


실제 정동영 의원은 8일 국회에서 전북기자 간담회에서 “MB 정부 당시 국군 기무사령부가 선거에 개입하고 노골적인 ‘정동영 죽이기’를 한 사실이 어제 한 언론을 통해 밝혀졌다”며 “국민 세금으로 국내 정치에 개입한 것은 참으로 경악할 일”이라고 말했다. 또 정 의원은 “2012년 기무사 요원이 사용한 것으로 확인된 계정에서 나를 비롯한 야권 정치인사들을 비난하는 댓글 3만 개가 확인됐다.”라며 아쉬움을 표시했다. 



2018년 6월 13일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는 정의당과 교섭단체를 유지해야 하는 당의 사정상 자신이 직접 출마하는 대신, 지원 유세에 나섰다. 그렇지만, 더불어민주당이 압승하면서 그의 명성에 흠집이 났다. 지원 유세와 직접 출마의 정도는 감안해야겠지만 전북 전주시 병 선거구에서만 4선을 지낸 '전북의 맹주'라는 소리를 들었던 인물이었던 데다, 한때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그가 지원 유세에 나섰음에도 돌아선 민심을 되돌리기엔 역부족인 게 증명됐기 때문. 


다만 지역구인 전주 덕진구에서의 민주평화당 광역비례득표율(10.11%)이 전주 완산구 광역비례득표율(8.93%), 전북 광역비례득표율(9.34%)를 모두 상회해 체면치례는 했다는 평이다.


민주평화당의 새 지도부를 선출하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평화당 당권에 도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대표적인 민주평화당 간판인사로 손꼽히는 현역 의원이고, 안철수 때문에 지난 국민의당 전당대회에서 당권도전에 실패했지만 건실한 2위 득표를 기록했으며, 제 17대 대선에서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 후보를 역임해 대중적 인지도와 영향력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이번에 선출되는 대표의 임기가 21대 총선에 걸쳐져 있고, 민주평화당의 인지도가 낮은 상태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정동영처럼 무게감 있고 대중 인지도가 높은 거물급 인사가 당 대표로 선출되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출처 : https://namu.wiki/w/%EC%A0%95%EB%8F%99%EC%98%81]

[2018년 8월 4일 공개된 음성] "이년이 그냥" 이재명 부인 김혜경씨 “친형 이재명 정신병원 강제입원” 발언 의심 통화 녹취파일


2014년 초, 이재명 성남시장이 셋째 형인 이재선 씨의 아내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설전을 벌인 통화 녹취록이 유출되면서 논란을 빚었다.형수에게 쌍욕논란 이재명 성남시장 '파문 확산'

이재명은 지난해 페이스북 등을 통해 형수에게 욕설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당시 친모에게 폭행과 폭언을 한 친형과 이를 편드는 형수에게 항의하는 과정이었다고 해명했다. 아울러 이재명은 자신의 가족사까지 구체적으로 공개하면서, 자신의 형 이재선이 성남시장인 자신의 공적 권한을 이용해 사적 이익을 취하려 해 이를 막으려다 형제 간 갈등이 커졌다고 언급했다. 

이재명이 성남시장 재선에 성공한 2014년 지방선거에 이어 지난해(2017년) 유력 대선주자로 떠오르면서 당시 욕설 녹음 파일이 다시 인터넷에 퍼졌고,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재명이 경기도지사 후보로 나오자 자유한국당의 남경필 경기도지사 후보가 욕설 녹음파일을 선거유세에서 사용하겠다며 네거티브 공세에 이용하자 욕설 논란이 또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재명 본인은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11월 12일자 해명문

성남시장 재선에 도전하는 중이었던 이재명 당시 후보의 선거대책위 측은 이재선 씨의 정신병에 대한 의사 소견서, 이재선 씨의 존속상해에 대한 공소장과, 이에 따른 법원의 임시조치결정, 이재선 & 성남일보 & 모동회 등에 대한 '녹음 파일 공개, 유포금지'에 대한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 2012카합478호, 2013카합341호 가처분결정 등의 자료를 제출하여 이에 대한 보도금지를 신청하였다. 


해당 사건에 대하여 이재선 씨의 딸이 주장한 글이 페이스북에 올라온 바 있다. 11월 3일 글  

11월 13일, 이재명 시장의 조카 이주영 씨는 이재명 시장의 해명글을 보고 반박글 을 올렸으며, 여기서 자신의 아버지 이재선 씨는 존속폭행과 존속협박은 무혐의 판결을 받았다고 반박했다. 또한 이 사건의 당사자이기도 한 이재명 시장의 형 이재선 씨는 2016년 11월 22일 해명글을 올렸다. 

위 사항 중 구약식(求略式)은 혐의는 인정되나 죄질이 경미하여 가벼운 벌금으로 끝내는 처분이므로 상해, 건물침입, 업무방해 등은 죄가 있다고 인정한 것이며 존속폭행과 협박에 대해서는 증거가 불충분해서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리고 있다.

다만 존속 상해와 같은 범죄는 대부분 가정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폭행 당하자마자 소송 의사를 가지고 병원에 달려가서 진단서를 내오지 않는 이상 입증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며 협박 또한 소송을 목적으로 미리 녹음기를 틀어놓지 않는 한 입증이 어렵다. 증거불충분이라는 결과는 증거가 미약해 법원이 판단할 수 없다고 한 것이지 해당 사항에 대해 '그런 일이 없었다'는 면죄부를 준 것은 아니다. 재판을 할 사안인지를 여부만 따지는 것일 뿐 벌금형이라고 무조건 죄가 약하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해당 처분이 내려졌을 때 항고했다는 기사는 찾아볼 수 없다.

2016년 12월 30일 조카 이주영 씨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재명 시장이 자신에게 민사소송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2016년 12월 18일 수구성향 방송인 '신의 한수'에 출현한 형 이재선 씨와 형수 박인복 씨가 당시의 정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당시 방송은 유투브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진행되었으며 현재 방송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2018년 6월 이재명의 형수 박인복 씨가 공개기자회견을 하여 이재명을 맹렬히 비난하며 김부선도 용기를 내서 나오라고 주장하였다.  
2018년 6월 8일 이재명은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당시 법원판결문과, 입원요청서, 치료요청서의 증거를 내며 다시 한 번 반박했다. 이재명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1. 자신의 형이 자신의 어머니의 신체부위를 칼로 쑤셔죽이고 싶다고 폭언하였고, 형수인 박인복 씨가 철학척 표현이였다며 두둔했으며, 동생인 자신이 욕해서 싸운 일이 있고, 후에 어머니를 때려서 다치게 하고, 두번째로 욕하며 싸웠는데 이 걸 둘 다 녹음해 성남일보에다가 공개했다는 것. 
2. 정신보건센터에 진단과 치료를 요청한 건 어머니였으며, 진단 치료권한은 시장에게 있으나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시행하기 못 하게 했다는 것. 
3. 형님인 이재선 씨를 정신병원에 강제입원시킨 건 형수인 박인복 씨와 조카딸 이주영 씨였다는 것.


이재명 시장은 형 이재선(2017년 11월 2일 폐암으로 사망) 과 상당히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앙숙관계가 개인적인 가족문제를 넘어 이재명 시장의 정치행보와도 얽혔다. 이재선이 가족 갈등을 넘어 아예 동생의 정치행보를 적극적으로 방해하겠다고 공식 선언 하기도 했기 때문.

구체적으로 보면 이재선은 동생이 유력 대선주자로 떠오른 후 박사모에 성남지부장으로 들어갔다. 뿐만 아니라, '이재명 시장이 대선에 출마하면 더불어민주당 앞에서 1인 시위를 하여 방해하겠다.'고 말하고, 왼쪽엔 욕쟁이, 오른쪽에는 거짓말쟁이라고 쓰고 공중파에 나가서 욕을 틀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래도 공천할 경우 성남시장, 경기도지사, 서울시장, 대선에 집사람(이 시장의 형수)을 출마시킬 것'이라는 글도 썼다. 일각에서는 관심을 얻고자 하는 행동이라는 설도 있다.
 
과거 형 이재선의 글을 찾아보면, 한명숙 총리를 박근혜의 대항마라고 하거나 노무현 대통령의 책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는 내용의 게시글을 게시한 적이 있다. 심지어 2010년 초반까지 진보신당 당원이었으며 민주당 후보의 선거운동원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한 과거도 보이는데, 해당 민주당 후보가 떨어진 이유 중에는 검사 사칭을 했던 이재명 변호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사이가 급격하게 나빠지게 된 계기는 이재선이 이재명 성남 시장의 인사 문제를 비판하면서부터인데, 이 부분에서 미키루크 이상호가 언급되기도 한다.  

또 2016년 12월 18일 보수성향 방송인 신의 한 수에서 형수 박인복 씨가 나와서 이야기 한 증언을 토대로 유추하면, 성남시 모라토리엄 비판도 이재선과 이 시장의 사이가 나빠지게 된 계기로 판단된다. 

이에 대해서 이재명 시장이 대선주자 국민면접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다른 형제자매들은 시정에 관심을 갖지 않고 혜택을 보지 않으려 하는데 유독 친형이 시정에 개입하려 했으며, "전통적 관념에 의하면 가족 간의 우애를 지키고 적당히 해서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이것이 공직생활 자체를 망가트릴 뿐만 아니라 친인척 비리로 오염될 것이 걱정됐습니다" 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재선측에서는 "이재명 시장에게 혜택을 요구한 적은 전혀 없으며, 이 시장의 시정 내용 중에 잘못된 부분을 지적했을 뿐인데 거기에 앙심을 품고 이 시장측에서 협박하고 괴롭힌 것"이라며 전혀 다른 주장을 하였다. 

이재선과 이재명 두 사람의 관계는 이후 결국 완전히 차단되었고, 형 이재선과 그 가족은 이재명 시장의 어머니를 폭행하거나하는 둥 압력을 행사하다 다른형제자매들도 모여서 싸움이 벌어졌다는 주장이 있다. 그것을 녹음해서 이재명 시장을 위협하였다고 밝혔다.





육군의 군인. 현재계급 중장, 현재보직 국군기무사령관


기간 1985년 ~ 현재

임관 학군 23기(동아대)

현재 계급 중장

현재 보직 국군기무사령관

주요 보직 제7공수특전여단장, 제3보병사단장, 육군 특수전사령관



남영신은 1981년 동아대학교 교육학과에 입학하였고, 이후 ROTC를 지원하여 23기로 학군사관후보생이 되었다. 1985년, 졸업과 함께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준장으로 진급한 남영신은 이후, 육군 특전사 제7공수특전여단장과 육군 제2작전사령부 동원전력참모처장, 학생중앙군사학교 교수부장을 지냈다. 계속해서 소장으로 진급하여 1차 직위인 육군 제3보병사단장을 역임하던 중, 소장 2차 직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중장으로 진급하여 육군 특수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남영신, 최초의 非육군사관학교 출신 특수전사령관이 되었다.



2018년, 이석구 중장이 기무사령관직에서 경질되면서 문재인 정부의 두번째 국군기무사령관이자 비육사출신으로선 세번째 국군기무사령관에 남영신이 임명되었다. 


그런데 정부에서 기무사를 해편, 즉 기무사 간판을 내리기로 결정하면서(...) 마지막 기무사령관이라는 타이틀도 얻게 되었다.


2017년 박찬주 부부의 갑질을 비롯한 국군 고위 장성의 사병에 대한 갑질논란으로 인해 비육사 출신의 참모총장 배출이 관심사 였는데, 여러 이유로 비육사 참모총장은 탄생하지 못했다. 그 대신 제1야전군사령관과 제2작전사령관 대장인사에서 비육사 출신이 나란히 진급하는 영예를 안았다. 


남영신이 육군 특수전사령관으로 영전한 것도 군내에서 놀라워하는 인사였는데, 이석구 중장이 기무사령관직에서 전격 경질되면서 신임 기무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는 기사가 나와 다시 한번 놀라움을 선사했다. 물론, 이남신 장군 이후로 기무사령관이 대장으로 진급하는 전례가 없었기에 대장진급은 다소 힘들어 보인다.


지휘관 시절 남영신의 평이 별로 좋지 못하여 진급이 힘들어보였으나, 군내 여러 문제로 인하여 중장으로의 진급 심지어 기무사령관으로 영전까지 하면서 관운이 좋다는 평을 받는다.


 


연대장, 사단장 시절의 지휘경향에 대한 증언으로 볼 때, 강한 체력훈련 위주의 엄격한 지휘방식을 택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하여 휘하 장병들로부터 좋지 못한 평가를 받는다. 당장 디시인사이드 백골부대 갤러리만 가도 전임인 김운용 대장과 남영신은 비교를 당하고 있다. 


특히 매달 3일마다 실시하는 백골데이라는 훈련을 만들어 겉으로 표출하진 않았지만 장병들이 크게 불만을 가졌었다. 사단장 재임시절 그 많은 사건사고에도 진급한걸 보면 관운이 좋은것은 맞다.


[출처 : 남영신(나무위키)]


먼저 보면 좋은 참고글 이석기는 누구인가? 


 

당초 이석기가 지하혁명조직인 소위 'RO(Revolutionary Organization)'을 만들어 무장투쟁을 일으키려했다는 점이 이 사건의 쟁점이었다.


내란음모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내란에 대한 확실한 계획을 세우고 조직을 구성하는 것에 더불어 실행을 위한 자금 등 현실적 준비를 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1심에서는 지하조직 RO가 실존한다고 판단하고 내란음모죄에 유죄를 선고하였으나, 2심에서 구체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이 판결은 뒤집혔다. 


다만 항소심 재판부는 '내란선동죄가 성립되려면 반드시 선동 목적인 내란 행위의 시기나 대상이 구체적으로 특정될 필요는 없다. 선동 상대방이 가까운 장래에 내란 범죄를 결의, 실행할 개연성이 있다면 충분히 내란선동죄를 인정할 수 있다.'고 밝히며 내란선동죄에 대해서는 유죄를 선고했다.


내란을 구체적으로 모의한 건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이 내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기는 발언을 했다는 것. 그리고 법원에서는 항소심 판결을 확정지었다. 



여기서 논란이 터진 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로 과연 이석기의 발언이 '내란선동'이 될만한 것이긴 한 것인가 하는 논란이고, 둘째로 애초에 증거도 부족한 내란음모죄를 적용한 것은 정치적인 이슈몰이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냐는 논란이다. 


첫 번째 논란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좀 더 다루도록 하고 두 번째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하자면, 이석기 사건이 터지기 이전, 정부는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논란으로 궁지에 몰려있었으며, 19대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이 국내 진보정당으로서는 처음이나 다름없는 성과를 거두었던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이석기 사건이 터지며 국정원 논란이 종심됨과 더불어 결국 통합진보당 위헌정당해산 사건까지 이어지는데, 통합진보당이 해산당한 이유가 결국 RO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위헌 집단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내란음모는 무죄, RO는 실체없는 조직으로 판단됨에 따라 통합진보당 해산은 그 근거가 상당히 미약해지게 되었다. 당시에도 이 해산명령 결정에 반대하던 야당들의 주된 근거는 '아직 대법원 판결도 안 나왔는데 좀 기다려보지?'였다.결국 내란음모 혐의가 법적 조치 자체가 아닌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혐의라는 주장이 나왔다.


어쨌든 위에서 말했듯 RO의 실체나 북한과의 연계성을 증명할만한 증거가 아무것도 없고, 그 와중에 다른 혐의인 내란선동과 국보법 위반에 대한 증거는 이성윤이라는 사람이 녹음한 내용을 바탕으로 검찰이 작성한 녹취록밖에 없다. 


이성윤은 통합진보당 당원이었으며 그 전부터 진보세력에서 활동해왔던 사람이다. 본인과 국정원의 주장에 따르면 2010년에 처음 국정원에 이석기와 RO에 대한 사실을 내부고발하기 시작하여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한다. 헌데 이 녹취록의 450여곳의 워딩이 실제 발언과 비교했을 때 심각하게 날조되어 있다고 변호인단이 주장하였다.


왜곡됐다고 주장하는 부분 중 몇 가지만 추리면 다음과 같다. 왼쪽이 검찰 녹취록, 오른쪽이 변호인단 주장.

전쟁에 관한 주제를 호소하고 → 전쟁 반대 투쟁을 호소하고

전쟁을 준비하자 → 구체적으로 준비하자

성전(星戰) → 선전(宣傳)

결전성지 → (천주교)절두산 성지



그 외에 기간시설 타격이나 총기 준비 등의 발언도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5월 12일의 강연은 전쟁이 임박한 상황에서 전쟁을 막기 위해 어떻게 활동해야 하나에 대한 정세 강연이었을 뿐 내란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


이에 대해 국정원 측은 녹취록을 왜곡하거나 날조한 사실이 없다고 밝혔다. 허나 녹취록 중 일부는 원본 녹음파일이 남아있지 않다고 밝혀 또 다른 논란을 낳았다. 


변호인단이 검증작성하고 재판부가 증거로 채택한 5월 12일 강연록이다. 판단은 알아서 하자. 읽어본 사람들의 평가를 보면 어휘와 표현, 사상이 시대착오적이라는 평가, NL 운동권의 단점이 그대로 드러나있다는 평가가 굉장히 많으나, 어찌 되었든 '내란'으로 엮는 건 무리라는 평가가 많다.


이것 외에도, 애초에 녹음 자체가 불법적으로 일어난 일이며, 이성윤이 2010년부터 사실상의 프락치 활동을 하며 모은 증거, 즉 위법수집증거이므로 애초에 증거로 채택될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문영심의 책 '이카로스의 감옥'에는 당시 이석기와 함께 RO조직 수뇌부로 지목된 9명의 수사 당시 국정원 수사관들이 불법적인 일들을 다수 수행했다는 가족들의 증언이 실려있다. 당시 국정원 수사관들이 영장이 있음에도 제대로 된 사유를 말하지 않고 뺑소니 사고 관련 조사 등을 핑계로 문을 열게하였고 압수수사 와중에 가족들에게도 자신들이 가족들의 신상을 잘 알고 있음을 암시하며 은근히 협박하는 듯한 말투를 사용했다고 한다.


또한 사건을 대하는 언론들의 태도가 문제가 되었는데, 



검찰이나 국정원의 피의사실공표죄 여부야 애초에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지켜지는 적이 전무하니 논외로 치더라도,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검찰이 제시하는 혐의 내용을 제대로 된 검증도 없이 받아쓰기 하듯 찍어냈는데 후에 결국 내란음모 무죄를 받고 RO나 북한과의 연계성 등도 없는 것으로 판결이 나오면서 대부분 거짓이었다는 게 밝혀졌다.


대표적인 것으로 이석기의 집에서 1억 4000만원 상당의 루블화와 달러가 나왔다는 보도가 뜨면서 북한 공작금이니 뭐니 모든 언론이 난리가 나서 퍼날랐는데, 알고 보니 1억 4000만원 중 100만원 만이 달러와 루블화가 섞인 외화인데 이는 국회 상임위원회(미방위) 소속 의원으로서 동료 의원들과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환전했다가 남은 돈이라고 한다. 나머지 금액은 재산신고에도 포함된 출처가 확실한 금액이라고. 


아무튼 이런 기사들은 이석기에 대한 여론을 풍비박산 냈다. 검찰로서는 저것들 덕분에 재판이 더욱 쉽게 굴러갔다.


국내 일부세력들의 구명 운동 지지


한중정치외교연구소장 이재봉, 인권운동가 박래군, 성공회대학교 교수 한홍구 등은 재판 과정에서 직접 증인으로 참석해 각자의 전공 분야의 지식을 동원해 이석기의 사상이 '북한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사상이 아니며 이석기에 대한 처벌은 표현/사상의 자유 침해라고 주장했다. 한홍구는 그 후로도 이석기 내란 음모 사건은 국가정보원 당국의 정치에 관계된 위기를 덮어 감추려는 조작이라면서 이석기를 향한 지지를 여러 강연/글에서 계속 표현하고 있다.


2015년 6월 24일에는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사건’ 피해자 한국구명위원회(이하 구명위)가출범했다. 

고문으로는 권오헌, 김상근, 박순경, 이창복, 정동익, 조영건, 함세웅

공동대표로는 강병기, 김성근, 김한성, 박래군, 유시경, 정진우, 조순덕, 최재철, 퇴휴, 한충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2016년 이석기 내란 음모 사건을 본격으로 다룬 작가 문영심의 『이카로스의 감옥』이 출간된 후, 이석기를 지지하는 지식인들의 의견이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민주화 운동의 거목인 신부 함세웅과 복사 김상근은 이카로스의 감옥에 추천사를 썼으며, 장정일과 박노자를 위시해 진보계 저명한 인사들이 책의 내용을 지지하고 나섰다.


2015년 2월, 국제 인권 단체 국제엠네스티는 박근혜 정부 2년 간 한국 인권이 심각하게 후퇴하고 있다고 우려를 표명하며, 예시 중 하나로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과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을 들었다. 



국가보안법을 포함한 법 조항의 자의적 해석으로 한국의 표현의 자유가 심각하게 침해받고 있다고 이에 대한 개선을 촉구했다.


세계적 석학 노엄 촘스키를 비롯한 미국 지식인 57명이 2013년 당시 이석기에 대한 의혹의 증거가 불충분함을 지적하며 그를 석방하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당시 한 일베 회원이 촘스키에게 보낸 메일에 대한 답신을 근거로 이 성명서의 내용이 조작이라는 주장 있었으나 이후 촘스키가 다시 본인이 성명에 참여한 것이 맞다고 인정했다. 


올해 6월에는 빈곤의세계화 의 저자 미셸 초서도브스키 캐나다 오타와대 명예교수가 방한하여 양심수석방 추진위에 참석하기도 했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이석기 전 의원과 통합진보당에 대하여 박근혜 정권이 어떤 행위를 하였는가를 잊어선 안 된다”며 “문재인 정부의 광범위한 개혁의 일환으로서 양심수 석방이 단행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2016년 이카로스의 감옥이 출판되었다. 녹취록 조작 의혹을 비롯,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의 쟁점을 다루며 결과적으로 이석기가 부당하게 처벌되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함세웅, 장정일, 박노자를 비롯한 저명 인사들이 이 책의 내용을 지지하고 나서며, 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탄핵 정국을 둘러싸고 다시 한 번 이석기에 대한 논란이 점화되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자신이 박근혜 정부에 의해 부당한 판결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인물들을 석방하고자하는 움직임도 곳곳에 일어나고 있으며, 이석기도 그 중 하나로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보수는 물론 온건파에게 까지 이석기를 언급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할 정도로 그에 대한 여론이 워낙 나빠서, 일부 단체를 제외하곤 탄핵 정국에서 역풍을 맞을 우려때문에 대다수의 집회에서는 자중하고 있는 분위기. 



8차 촛불집회에서 민중연합당 소속 사람들이 앞면에는 '황교안은 퇴진하라' 와 뒷면에는 이석기, 한상균을 석방하라 라고 적힌 양산형 시위 종이를 대놓고 나눠주고 이석기 석방 서명운동을 벌이며 위의 이카로스의 감옥을 홍보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석기를 석방하라'라는 애드벌룬도 관찰되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열린 집회에서도 이러한 행보는 이어졌다. 


한편, 박사모는 이러한 움직임을 보고 촛불집회를 종북세력의 선동이라고 주장하였고,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은 '촛불집회의 순수성이 훼손되었다'는 논조의 기사를 내고 있다. 진보 세력 내에서는 이석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부와는 관계없이, 소수의 통진당 잔당을 명분으로 촛불집회에 또다시 낡은 순수성 프레임을 들이대는 보수언론에게는 거부감을 드러내는 중.

한국 염색연합회 이사, 창신섬유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52년 11월 10일 태어나 2012년 8월 2일 사망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구로 순수한 의미의 유일한 재정적 후원자로 알려져있다.


1952년 11월 10일, 전라북도 부안군에서 태어났다. 전주공고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섬유사업을 했는데, 지역차별 때문에 큰 고통을 겪었다. 그래도 1975년 설립한 창신섬유가 크게 성장하여, 부산에서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 


1998년 정치인 노무현이 서울 종로구 보궐선거에 출마할 당시 전화로 처음 만났다. 지역주의를 타파하려고 했던 노무현에 감명받아 2000년부터 노무현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노무현에게 “먹고사는 문제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고 소신껏 정치를 하라”고 말했으며 실제로 노무현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에는 '대통령에게 누가 될까봐' 한치의 사업도 확장하지 않았다.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고 난 후에도 공평무사한 정치를 하기 위해 자기 측근들을 요직에 거의 챙겨주지 못했는데, 강금원이 그러한 노무현을 대신해서 가난한 친노인사들에게 생활비를 대주었다.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썼건만,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영화를 맛보긴커녕 검찰 수사로 고통만 더 심하게 당했다. 


결국 2003년 12월 배임 및 조세 포탈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고,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았다. 그리고 노무현은 자신의 재임기간 중에 강금원을 사면복권하였다.  2006년에도 불법 대선 자금과 관련해 구속되었다. 


노무현 퇴임 후에는 검찰이 그와 노무현 주변에 대해 먼지털이식 수사를 실시하였다. 이 당시 검찰에게 최우선의 수사대상이었던 게 노무현과 강금원 사이의 비리였다. 


그러나 둘 사이의 비리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박연차 게이트’ 수사가 시작되면서 검찰의 올가미가 노무현과 강금원을 본격적으로 옥죄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봉하마을에는 친노인사들이 거의 발길을 끊다시피 하였고, 오직 강금원과 김경수 등 몇몇만이 노무현 곁을 지켰다.


2009년 4월에 검찰은 1999년∼2002년 주주임원에 대한 단기 대여금 형식으로 회사돈 50억원을 빼내서 회계장부상 비용과다 계상 등으로 허위변제 처리하고 같은 기간 법인세 13억5000만원을 포탈한 혐의. 특경가법상 배임 및 특가법상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 당시 노무현이 미안한 마음에 면회를 신청하려고 했으나, 마음은 알겠다면서 만류했다. 강금원이 수감되기 전까지 창신섬유는 직원이 400명에 이르는 등 부산의 대표적인 섬유업체였다. 그러나 검찰의 계속된 수사와 거래업체 압박으로 직원이 60명까지 줄어들었다. 


구속기간 내내 지병인 뇌종양이 악화되어 진단서까지 떼어 보석을 신청했으나 거부되어 수술 시기를 놓쳐 2012년 8월 2일에 사망했다. 그리고 MB는 수면무호흡과 당뇨질환으로 수감 4개월만에 서울대 병원에 입원했다.



강금원과 노무현


2018년 5월 1일, 봉하마을에 강금원 회장의 이름을 딴 강금원기념 봉하연수원이 개원된다.


수천억 원대의 재력가였음에도 집안 살림은 매우 검소하였다. 다섯 개의 계열사에서 월급만 5억 원 정도를 받았지만, 휴대전화도 최신 스마트폰을 쓰지 않고 구형 폰을 썼다고 한다.


노무현을 금전적으로만 후원한 것이 아니라, 외로운 노무현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갖고 있던 요트를 노무현에게 빌려주어, 부산에서 (전남) 보길도까지 노무현이 쾌속 요트를 타고 다녀온 적도 있었다.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청와대 뒤편에 있는 원두막에서 함께 담배를 피우기도 했고, 함께 돼지고기를 구워먹기도 했다. 노무현과 어깨동무를 하면서 청와대 경내를 둘러본 적도 있고, 대통령의 여름휴가 때는 경남 진해에서 함께 지내기도 했다. 그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 



노무현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민정수석 문재인이 안희정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다면서, 문재인과 불편하게 지냈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 임기말에 열린우리당 인사들이 여러 갈래로 쪼개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특히 유시민 전 의원 등이 국민참여당으로 독립해 나가는 것에 대해 강하게 만류하였으나, 결국 나가서 섭섭한 감정을 가졌다고 한다.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이병완과 사돈을 맺었다. 그때 퇴임 직후의 노무현이 주례를 섰다.



[출처 : https://namu.wiki/w/%EA%B0%95%EA%B8%88%EC%9B%90]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및 대학 총장이다. 호는 남송(南松)이다. 종교는 개신교이다.



1948년 전라북도 남원군에서 태어났다. 전주고등학교, 국민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였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7년 동안 복역하였다. 이후로도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무소속 손주항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95년 김대중이 정계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참여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8년 새정치국민회의 수석부총무,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국방위원장을 역임하였다. 


한편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치러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노무현을 지지하였다. 2003년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여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7년 초 해체되기 직전의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에 선출되었다. 성향만 놓고 보면 친노보다는 비노계열에 가까운 인물이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이무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자신을 고소한 사람에게 맞고소하여서 항소심에서 무고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모친의 고향에 출마, 지역감정 타파에 도전하겠다며 경남 의령/함안/합천 선거구에 출마준비를 하였으나 통합진보당과의 후보단일화로 출마하지 않았다.


여담으로 2005년부터 2008년까지 대한배구협회 회장을 지냈다. 


V리그가 한창 출범하는 김에 지원을 늘려볼려는 배구협회가 축구협회 부회장을 지낸 경력이 있고 배구에도 어느정도 관심이 있던 장영달을 회장으로 초대한 셈인데, 정작 장영달이 회장이 된 이후로는 법인화 문제로 집행부 내부의 갈등이 극단적으로 표출되는 상황이 펼쳐지는 가운데서 제대로 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고 법인화는 어찌어찌 이루워지기는 했지만 권위가 실추되어버리는 바람에 후의 대한배구협회 막장화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평이 많다. 


이런점을 보았을때 배구협회 회장으로 지냈을때 배구협회를 휘어잡는 수완은 확실히 부족했던듯 하다. 결국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프로구단과의 갈등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올림픽 선수차출이 이루워졌고 남녀 모두 예선탈락하는 일이 벌어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며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다만 후임인 임태희가 협회를 하우스 푸어로 만들고 선수들을 푸대접 하는 등 막장운영을 선사하면서 그래도 구관이 명관이지라는 평을 듣는 중.


뜬금없이 우석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2018년 2월 12일부로 업무시작.



[출처 : https://namu.wiki/w/%EC%9E%A5%EC%98%81%EB%8B%AC]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관으로 일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 사후 정계에 입문해 두 차례에 걸친 선거 패배를 딛고 2016년 20대 총선 때 경남 김해시 을 선거구에서 62.4%의 득표율로 당선돼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이 됐다. 그리고 2018년 6.13 지방선거 때 경남도지사 선거에 도전장을 내밀어 52.8%의 득표율로 당선돼 제37대 경남도지사가 되었다. 소속 정당은 더불어민주당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가장 대표적인 친문계 정치인으로 손꼽히며, 친문계의 새로운 차기 대권 주자가 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인물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로 들어가기 이전부터 누구보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수행하였고, 그의 대변인 격으로 활동해 왔다. 대통령 취임식 직전과 직후 김정숙 여사와 운전기사를 제외하고 문 대통령과 같은 차를 탄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과 매우 가까웠던 데다 친노계 - 친문계의 정신적 고향인 PK 태생이기에 친문 지지층 사이에서는 노무현-문재인의 가계를 이을 정치 지도자 감으로 평가받고 있다.


1994년 신계륜 의원의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해서 경험을 쌓고 2002년 노무현 대선 캠프에 스카웃되는 것을 계기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참여정부가 출범하고 청와대 제1부속실 행정관, 연설기획비서관, 공보비서관을 두루 걸치며 2006년 1년 동안 노 전 대통령의 수행 비서를 맡았다. 퇴임 이후에도 봉하마을로 내려가 수행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노무현의 마지막 비서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사실을 문재인에게 알린 사람도 김경수 비서관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사후에는 중앙 정치와 거리를 두고 봉하재단 사무국장, 노무현 재단 봉하사업본부장을 지냈다. 


그러다가 2011년 민주통합당에 입당해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남도 김해시 을 선거구에 국회의원 후보로 나섰으나, 현직 의원인 김태호에게 밀려 떨어지고,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도 경남도지사 후보로 출마했으나 새누리당 홍준표 현직 지사에게 밀려 또 다시 낙선했다. 하지만 연이은 낙선에도 포기하지 않고 밑바닥 민심을 다지면서 20대 총선에서 다시 한 번 김해시 을에 도전해 당시 더불어민주당 후보 중 가장 많은 득표율을 거두며 승리했다.


이후 친문계 의원으로서 의정 활동에 전념하며 문재인 정부를 뒷받침했다. 원내에 진입한 뒤 패권주의 논란으로 20대 총선에 불출마를 선언한 최재성, 노영민 전 의원 등을 대신해 친문의 대변인 격으로 활동해 왔다. 이를 증명하듯 유튜브 등지에서 문재인 당시 대표의 행보를 담은 동영상을 보면 문재인을 그림자처럼 수행하는 김경수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이후 단 한 번도 민주당 후보가 승리하지 못한 험지 중 험지인 경상남도 탈환을 위해 당 지도부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4년만에 다시 한번 경상남도지사에 도전, 드루킹 여론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난관을 맞았으나 해당 의혹을 정면 돌파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도리어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는 데 성공하고 7회 지방선거에서 과반 이상의 표를 얻으며 경상남도에 최초로 민주당 깃발을 꽂는 것을 성공했다.


김경수의 학창시절, 세차례 옥살이 그리고 동성동본의 결혼

1967년 12월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에서 말단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와 생활력 강한 어머니 사이에서 4남 1녀 중 장남이자 장손으로 태어났다. 교육열 강했던 어머니는 아들을 괜찮은 중학교에 보내기를 위해 초등학교 6학년인 김경수만 인근 대도시인 진주시로 전학시켰다. 김경수는 친척 집에서 기거하면서 진주천전국민학교, 진주남중학교, 진주동명고등학교를 졸업했고 1년 재수하여 87학번으로 서울대학교 인류학과에 입학하였다.


80년대 후반은 반독재 학생운동이 가장 극렬했던 때로, 먼저 대학생이 된 동창들과 만나면 가끔 시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재수 생활 동안에는 공부하기 바빠 사회 현실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한 이후 교정에 학생들이 던진 짱돌이 날고, 경찰이 쏜 최루탄이 난무하는 현실을 알게되면서 대한민국 정치에 강렬한 고민을 품게 되었다. 집안의 기대와 공무원인 아버지에 대한 걱정 등으로 많은 번민과 방황을 했지만 나만 출세하자고 조용히 공부만 하는 것은 시대에 죄를 짓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2학년에 올라가면서 본격적으로 학생 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대학교 3학년인 1989년 총학생회 학술부장 시절 가을 축제 때 ‘북한 바로알기 자료집’을 만들었다가 국가보안법상의 이적표현물 제작 반포 혐의로 구속되는 등 모두 세 차례 옥살이를 했다. 6월 항쟁이 끝난 뒤에는 그해 여름 방학에는 ‘공장활동’(공활)에 참가했다. 수원의 와우공단에 있는 자동차 부품회사를 택했는데 일이 익숙지 않은 그는 입사한 지 며칠 안 돼 쇠로 된 부품의 구멍을 다듬는 작업을 하다가 왼손 검지 손가락을 크게 다치는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나중에 군 면제를 받았다고 한다. 한겨레


1996년 대학교 후배이자 동성동본인 부인과 결혼하여 슬하에 2남을 두었다. 사귀던 시절 결혼을 생각할 때 여자친구와는 동성동본인데다 본인은 영남, 여자친구는 호남(전남 신안) 출신이라 집안 어른들께 어떻게 허락을 받아야 할지 한참 고민했다는데, 막상 부모님은 여자친구를 만나 본 뒤 흔쾌히 허락하셨다고 한다. 아내와 결혼할 때 조건이 정치 일은 해도 절대 출마는 안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20년 뒤에 남편이 민주당 국회의원에 경상남도지사까지 될 줄은 아마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단기 아르바이트로 정치 입문

대학 졸업 후 지금은 사라진 30~40대 직장인을 대상으로 하는 월간지(<리더스 비젼>) 편집부 기자 생활을 했으나 별 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94년 신계륜 의원실에 일하던 학교 선배의 국정감사 기간에만 도와달라는 부탁으로 여의도에 발을 디뎠다. 어떻게 보면 단기 아르바이트로 정치에 입문한 셈이다. 이후 국정감사 기간 동안 업무 능력을 인정 받아 신계륜 의원이 정책비서로 같이 일해보자는 권유했고, 국정감사 동안 보람을 느낀 김경수는 이를 승낙하면서 본격적인 보좌관 생활이 시작하게 되었다.


15대 총선에서 신 의원이 낙선하자 일종의 프리랜서가 되었고, 15대 국회에서는 유선호 의원실에서, 16대 국회에서는 임채정 의원실에서 근무했다. 이후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자 2001년 말 청와대 정무수석에 임명된 유선호 의원의 요청에 따라 임채정 방을 그만두고 청와대 보좌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태어나기도 전에 휴전선에서 장교로 근무하다가 월북했던 외삼촌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 3개월만에 청와대에서 보따리를 싸고 나갔다.


하지만 새옹지마라고 청와대의 해고는 그를 새로운 만남으로 이끌었다. 김 의원이 쉬고 있다는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광재 전 도지사의 권유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전략기획팀 부국장으로 노무현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전략기획팀에서 뛰어난 업무 능력을 보여준 김경수 보좌관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거쳐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국정상황실 행정관, 청와대 연설기획비서관, 대통령 공보비서관 등을 지냈다. 청와대 입성 때까지만 해도 노 전 대통령과 안면도 트지 못했지만 참여정부 집권 중반기에는 어느새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한 명이 되어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퇴임 이후 가족들과 함께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 정착해 노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보좌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저서인 운명은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던 그날 새벽, 자고 있었던 문재인 당시 변호사가 김경수 당시 비서관에게 노 전 대통령이 등산을 떠났다가 부엉이바위로 떨어져 상태가 엄중하다는 연락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김 지사는 노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봉하를 떠나지 않고 봉하재단 사무국장, 노무현재단 봉하사업본부장을 지냈다.


노 전 대통령의 비서이자 봉하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로 살면서 시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간 노무현과 함께 공부하는 시간은 큰 행복이었다고 김 의원은 회고했다. 오랫동안 보좌관 생활을 해왔지만 자신이 직접 정치에 뛰어들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결혼 전에 아내에게 약속까지 했지만 2009년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그는 '바보' 노무현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직접 정치에 뛰어들게 되었다.


두 번의 낙선, 그리고 20대 총선

2011년 야권 통합을 추진한 시민운동모임 ‘혁신과 통합’ 때부터 문재인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기 시작했다. 이후 민주통합당에 입당했다. 당시 주변에서 2011년 4·27 경남 김해시 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나가서 노 전 대통령의 고향을 지켜야 한다는 주변의 압박이 강했지만 고심 끝에 “꽃이 되기보다는 단결과 연대의 거름이 되고 싶다”며 불출마를 선언했다. 하지만 야권 단일 후보로 출마한 국민참여당 이봉수 후보는 한나라당 김태호 후보에게 패배했다. 김태호 의원과의 인연, 혹은 악역의 시작이었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본인이 직접 경상남도 김해시 을 선거구에 국회의원 후보로 나서 새누리당 김태호 후보와 맞붙어 47.88%의 적지 않은 득표율을 얻었으나 아깝게 떨어졌다. 


이후 18대 대선에서 당시 문재인 후보의 대선 후보 수행팀을 전두지휘했다. 참여정부 청와대에서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일했던 사이지만 사실 당시까지만 해도 문재인 대통령과 김경수 의원의 사이가 딱히 가깝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혁신과 통합'을 시작으로 18대 대선에 이르러서 문 대통령이 김 의원에게 대선 후보 수행팀장을 맡을 정도로 둘은 가까워졌다. 


첫 대선 실패 이후 문 대통령은 어딜가나 김 의원과 함께 움직였다.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경남도지사 후보로 출마해 새누리당 홍준표 후보와 경쟁했지만 이번에는 꽤 큰 표차이로 낙선했다. 하지만 당시까지 보수세가 강했던 경남이었고 보수계 중견 정치인인 김태호와 홍준표의 전국적인 지명도 등의 차이를 감안하면 선출직 정치인으로서는 신인에 가까운 김경수 입장에서는 선전한 편이었고, 김해시와 창원시 성산구에서는 오히려 홍준표를 앞섰다. 


또 이 선거가 이후 김경수에게는 커다란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도지사 선거 전부터 "미소천사"라는 전국적 팬클럽이 조직되었는데, 선출직 경험이 없는 정치인으로서는 거의 유일한 사례였다. 노사모가 있지 않냐고 할 수도 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시 16대 총선에서 낙선하긴 했지만 이미 재선 국회의원 경력이 있었다.


그후 절치부심 끝에 밑바닥부터 김해시 을 지역구에서 활동을 했고 민심을 얻어가는 데 성공했다. 2012년 선거 때는 사실상 본인도 김해를 잘 알지 못했을 때 출마했다면 2016년 선거에서는 차원이 다른 상황에서 선거에 임했다고 할 수 있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이만기 후보를 꺾고 무려 62.4%의 득표율을 기록하여, 민주당 후보들 중 전국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며 당선되었다. 김해시 갑에서도 더불어민주당의 현역 의원 민홍철 후보가 재선에 성공하고, 함께 실시된 김해시장 재보궐선거 및 시의원 보궐 선거에서도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당선되면서 더불어민주당이 김해시에서 완승하기도 했다.


당선되고 난 뒤 민홍철 김해 갑 국회의원 당선자, 허성곤 김해시장 재선거 당선자, 김종근 김해시의원 보궐선거 당선자, 동시에 낙동강 벨트에서 살아남은 양산시 을의 서형수 당선자와 함께 봉하마을로 가서 노무현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했다. 봉하마을은 20대 국회부터 김해 갑에 속해있지만 원래 김해 을 지역구였고, 김경수 의원의 뿌리 깊은 연고 때문에 아직도 다양한 행사 때 김경수 의원이 주최측의 역할을 맡는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 하고 인수위원회를 대신할 국정자문위원회에서 기획분과를 맡았다.


분명히 경고합니다. 사람 잘못 봤습니다. 저는 제 모든 것을 걸고 싸우겠습니다. 반드시 이기겠습니다.

- 경남도지사 후보 캠프 개소식 中


6.13 지방선거의 진 주인공/ 친노계의 막내, 노무현의 숙원을 이뤄내다.


여당 최강의 지지율로 당선된 대통령계 초선 의원이 배지를 버리고 험지로 가서 전임 경남도지사와 정치 생명을 건 한 판 승부를 벌이는 일은 정말 찾기 힘들 뿐더러, 야권과 보수 언론이 드루킹 사건을 과도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도리어 김경수의 이름을 전국구로 알리는 이득(?)만 가져다 줬다. 


결국 대세론을 끝까지 유지해 경남 선거에서 패배해본 적이 없었던 김태호 후보를 물리치고 처음으로 민주당 소속으로 선거에서 당선돼 취임한 경남도지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로써 명실상부한 20대 대선의 잠룡이자 문재인의 진짜후계자로 불리게 되었다.


2018년 4월 2일, 결국 더불어민주당의 경남도지사 단일 후보로 추대되었다. 자유한국당에서는 2012년 총선 때 김해시 을에서 맞붙었던 김태호 전 지사가 출마하는 것이 사실상 확정되면서 6년 만에 리턴 매치가 성사되었다.


4월 19일 공식 출마 선언을 했는데, 원래는 오전에 경남 진주에서 출마 선언을 하기로 예정되었지만 드루킹 의혹으로 오후로 미룬 뒤 4시 30분 국회 정론관에서 출마 선언을 하였다. 


현역 의원이라 의원직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5월 3일 부로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고 14일 본회의에서 처리되었다. 참고로 본인도 본회의에 참석해 사퇴서를 가결시켰다.


5월 17일 캠프 개소식을 열었다. 이후 더불어민주당 경상남도 기초단체장 후보들의 개소식에도 참석하였다. 드루킹 특검이 빨라도 6월 25일 이후에 시작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 전에 완료되는 선거 운동 기간 중에는 큰 영향이 없을 걸로 보인다. 본격적인 선거 운동은 5월 31일부터 시작했다.


유세 기간 동안 상당한 인파를 몰고 다니면서 당선이 확실해 보였으나 정작 6월 14일 오전 12시 32분이 되서야 '유력'으로 경남도지사 당선을 바라볼 수 있었다. 출구조사에서는 김경수 후보가 16%나 앞서는 것으로 나왔음에도 개표 초중반에는 김태호 후보가 50%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앞서면서 이변이 연출되나 싶었지만, 김경수 후보의 득표율이 치고 올라 밤 11시를 기점으로 따라잡기 시작하면서 개표율이 20% 넘긴 시점에서 결국 역전에 성공했다. 개표 초반 김태호 후보가 앞섰던 것은 경남에서도 특히나 보수세가 강한 서부 지역을 먼저 개표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민주당계로서는 최초로 배출한 경남도지사이며, 친문계 핵심 인사로서 당원들의 지지도도 압도적이기 때문에 드루킹 사건이나 경남도정에서 이렇다 할 하자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앞으로 민주당의 차기 대권 주자로 계속 언급될 걸로 전망된다. 김경수 본인은 JTBC와의 인터뷰에서 더 큰 정치에 도전할 뜻이 있냐는 질문에 "더 큰 정치 부분은 제가 져야 할 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경남도민들께서 저한테 주신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라고 답했다. 


드루킹 사태부터 시작된 과정에서의 주목도, 박빙으로 비쳐진 드라마틱한 개표 과정 등으로 실시간 검색어 1~2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이로써 실로 전국구 정치인으로 도약하였음이 명백해졌고, 친문계 지지층을 이어받을 차기 대선 주자로 명백히 떠오르기까지 했다. 


무소속의 깃발을 들고 경남도지사에 도전해 성공한 후보가 있었고, 그것 만으로도 엄청난 주목을 받은 바가 있었지만, 김경수는 아예 민주당 깃발을 들고 지역 기반 하나 제대로 없는 사지에 나가서 한국당이 경남에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후보를 상대로 예전의 패배를 설욕하면서 승리하였다. 실로 무시무시한 성과를 낸 것.이로 인해 그도 유력한 대권 주자로 부상한 것이다.


당선 다음 날인 15일, 여의도에서 열리는 민주당 광역단체장 당선 행사에 참석하지 않고 거제, 통영, 고성, 사천, 남해, 하동, 진주, 의령, 함안 9개 시군을 돌며 민생 현안을 재점검하였다. 법률상 공식 임기가 시작하는 2018년 7월 1일에 재난안전대책회의를 열었다. 본래 7월 2일 공식 취임식을 행할 예정이었으나, 태풍 쁘라삐룬이 한반도에 접근하자 취임식을 취소하고 국립 3·15민주묘지와 창원 충혼탑을 참배하고 경남도청에서 취임 선서를 하며 약식으로 취임 행사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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