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일본 교토시 출생으로 1946년 부모의 고향인 경상북도 대구시에 정착하였다. 대구 성광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독립 교회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성경학교를 마치고 신앙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이때 권신찬(權信燦)이 담임하는 교회에 출석하면서 그에게 신임을 얻고 이후 권신찬의 딸인 권윤자와 결혼하였다. 


초창기엔 대구 지역에 위치한 자신의 집 '칠성예배당'을 본거지로 삼아 활동했다. 이후 서울, 인천, 안양 등지로 영역을 넓혔다. 그러다 1971년 서울 약수동 성동 교회에서 구원파에 동조하던 미국인 선교사 3명에게 목사 안수를 받은 뒤 평신도 복음 선교회 목사가 되었다.


이 직후 유병언은 사업가로 변신하여 1974년 교인들의 헌금으로 부도 직전의 부실 무역 기업인 삼우트레이딩을 인수한다. 그리고 1976년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이제부터 나를 목사라 부르지 말고 사장으로 부르라"고 지시하여 교인들 사이에는 '유 사장'으로 통했다. 이후 1979년 세모그룹으로 상호를 바꾸었다. 


세모라는 이름은 삼각형의 순 우리말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세월호 참사 이후에 언론에 성경에 나오는 인물인 모세를 거꾸로 했다는 내용의 오보가 사실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1981년 12월 기독교복음침례회가 설립되었으나 유병언은 교단 설립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했다고 전해진다. 


1986년에는 선박 사업 경험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강 유람선 사업권을 취득하여 주목을 받았으나,1990년 선착장에 정박 중이던 세모 유람선 2척이 태풍으로 떠내려온 경쟁업체 유람선과 충돌, 표류하다가 마포대교 교각을 들이받고 침몰하여 유람선을 정박하던 세모 직원 14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기도 하였다. 


순탄하던 그의 삶은 1987년 발생한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에 연루되어 1992년 징역 4년을 선고받으며 잠시 흐트러지게 된다. 1997년에는 무리한 투자로 세모가 부도가 났다. 부도 이후 세모의 해운 사업은 1998년 온바다해운(2006년 경영난으로 폐업)을 거쳐 1999년 3월 그의 아들들에 의해 설립된 청해진해운으로 승계되었으며, 한강 유람선 사업은 2004년 세양선박에 매각되었고 이후 이랜드그룹으로 넘어갔다. 




이후 유병언은 대외적으로 기업 활동을 중단하였고, 한동안 대한민국에서 행방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신앙과 사업의 연계성을 강조하며 자신이 주도하는 삼우트레이딩과 주식회사 세모 등을 이끌었다. 


유병언은 청해진해운의 실세이자 세모그룹의 회장으로서 세월호의 소유자라 알려졌고, 세월호 선내에 '개인 사진 전시관'을 만들기 위해 세월호를 개조한 것과 승객과 짐을 지나치게 많이 실은 것이 세월호 참사의 원인으로 지목되었으나 현재 까지도 뾰족하게 세월호 침몰 사고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또한 공소를 당하기 전에 숨진 채 발견됨으로서 사건 속에 숨겨진 진실을 조사하기 힘들게 되었다. 


단,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100% 유병언에게만 전가하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세월호 사건의 1차적인 원인과 전적 책임은 분명 유병언과 그의 휘하인 청해진해운 직원들에게 있지만 2차적인 책임은 침몰 후 구조 과정에서 정부, 언론, 해경 등에 고루 걸친 시스템적 문제에도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문제는 유병언이 데스 실드를 치는 바람에 2차적인 책임을 가진 기관들과 시스템을 지적하기가 어려워진 것. 


유병언 일가는 부정부패가 가득하였고, 이에 검찰은 유병언 체포 영장을 발부하지만 유병언과 그 가족들은 경찰을 피해 도망간다. 


경찰은 도주한 유병언을 체포하기 위해 대대적인 수색 작전까지 벌였으나 구원파 신도들의 방해로 순탄치 못했으며 검찰 역시 처음에는 유병언에게 5천만 원, 그의 장남 유대균에게는 천만 원의 현상금을 걸었으나 며칠 뒤 그 10배인 5억 원, 1억 원으로 각각 인상해야 했는데 이는 한국 역대 최고 현상금이었다. 


하지만 대대적인 수색과 고액의 현상금을 걸었음에도 유병언은 체포되지 않았고, 결국 그는 시체로 발견되고 만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소유의 공원과 베르사유 미술관에서 '아해 사진전'을 개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전문가/평론가들에 의하면 그의 사진은 예술적 가치가 전혀 없는 것으로 평가되는데, 작품들 대부분이 일종의 뒷돈을 위해 겉으로는 사고 파는 것처럼 위장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전시회를 개최할 수 있었던 것은 돈의 힘이었다. 박물관 측에 거액의 기부금을 냈던 것. 이 때문에 루브르 박물관은 프랑스 언론의 비판을 받았다. 세월호 사고가 터진 뒤 프랑스 측에선 유병언 전시회를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나온 유병언의 배임, 과실치사 혐의는 모두 수사기관에서 발표한 자료에 근거한다. 편향된 자료를 바탕으로 죄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특히 살인이나 강도와 같이 인과관계가 분명한 범죄라면 모를까, 배임/횡령 행위와 승객 사망 사이에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유병언은 그냥 주주도 아니었으며 사실상 대주주의 위치였다. 대주주는 실질적인 경영자이며, 동시에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자기 입맛대로 회사를 요리할 수 있다.


유병언 및 유병언 일가는 회사 자금 등을 횡령/배임했고 유령 회사를 세워 '자문료', '상표 사용료' 등의 명목으로 터무니 없는 금액을 책정해 청해진해운(주)의 돈을 챙겼다. 그에 비해 청해진해운 직원의 급여 수준은 다른 선사에 비해 열악했고 직원 안전 교육에 쓰인 돈은 1년에 1인당 4천원이라는 참담한 수준이었다. 


그러한 행위는 그가 청해진해운(주)의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주주의 위치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그런 막장 경영으로 청해진해운의 재무 상태는 악화되었고, 선박의 안전/보수 등을 할 수 없는 상황이였다.


또한 세월호 침몰의 핵심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고 있는 증개축(에 따른 배 안전성의 저하)을 지시할 만한 사람이 유병언밖에 없다. 사실상 '바지사장' 내지, '월급 사장' 정도의 위치에 불과했던 청해진해운 주식회사의 김한식 대표가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국내 최대 규모급 대형 여객선의 증개축을 독단적으로 기획하고 실행을 집행했을 가능성은 거의 제로다.


증개축은 안전 문제는 전혀 고려 없이 진행되었다. 화물과 사람을 더 많이 싣기 위한 탐욕과 자신의 자랑을 위한 사진 전시 갤러리 등 전부 자신의 이기심과 허영을 채울 목적으로 증축되었다. 



유병언은 세월호의 실질적 소유주이자 청해진해운의 실질경영자로서 지위계통상 최고경영자로서의 도의적 책임, 회사 경영을 부실하게 한 간접책임 뿐 아니라 사고의 핵심 원인을 제공한 자로서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하다. 


다른 사업 부분의 예를 들어 책임을 묻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하는 반대 의견도 있을 수 있겠지만, 해운업은 다른 사업 부분과 다르게 운행부터 상당한 위험부담을 가지는 업종이다. 때문에 현재의 과학 기술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위험 부분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도록 경영상 노력을 했다면 책임이 없다.


청해진해운이 경영상 사전 예방 의무를 충분히 이행했는가? 비상 탈출용 보트가 모두 불량이었다는 사실과, 승무원들의 안전교육 예산이 사실상 0원이나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그리고 승무원들은 가장 먼저 배에서 승객들을 내팽개치고 도망갔다. 


즉 경영상 면책 특권은 예방과 주의 의무를 충분히 이행했을 경우 보장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애초에 책임이 없고 스스로 떳떳했다면 왜 사건이 터지고 나서 잠적하고 도주를 했는가? 이를 두고서 구원파 측에서는 대통령이 처음부터 유병언 책임이라고 해서 그랬다라고 변명을 하는데, 대한민국은 3권이 분리되어 있는 국가이기 때문에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유병언 정도면 비싼 변호사를 사서 승소하면 그만이다. 


법정 다툼을 생각도 하지 않고 처음부터 도망갔다는 것부터가 문제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청해진 해운의 문제일지.. 아니면 또 다른 문제일지..


다만 이 부분은 유회장이 과거 오대양 사건 당시 검찰에서 일단 와서 조사만 받으라는 말에 그냥 쫄래쫄래 따라갔다가 바로 구속크리를 맞고 교도소 직행 루트를 탔던 경험에 일단 튀고 보자는 결심을 하게 한 것 같다는 의견이 있다. 


세월호의 선사(船社) 청해진해운의 '인원 현황'에는 분명히 유병언이 '회장 유병언'으로 등재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청해진해운의 회장이자 1호 사원이 유병언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최고 문제는 유병언이 지옥으로 도피해버리는 바람에 세월호 침몰 사고의 사후 처리 과정이 난해해졌다는 것이다.



유병언의 죽음으로 인해 세월호 침몰 사고의 책임 소재가 이슈몰이에 묻어지고, 마치 책임을 지우고 처벌해야 할 대상이 사라진 듯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출처 : https://namu.wiki/w/%EC%9C%A0%EB%B3%91%EC%96%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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